서원과 가람이 조화를 이룬 특이한 절, 강당사
강당사 연혁
강당사는 광덕산(해발 699m )북쪽 강당골에 위치한 유일한 조계종 사찰로서 본래 조선 영조 때 경연관(經筵官)을 지낸 외암 이간(李柬) 선생이 지기인 윤혼(尹混)선생과 학문을 강론하던 서원이었다.
1868년경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있자 이를 모면하고자 가까운 마곡사에서 불상 하나를 모셔다 봉안하므로서 사찰의 시원이 되었다. 그 후 140여년간 많은 수행자가 거쳐 갔으나 불사의 인연을 만나 지 못하여 법당은 퇴락할대로 퇴락하여 성상(聖像)을 모시기에 죄송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러던 차 전생의 숙연으로 1995년 조계종 바구니 월해(月海). 종민(宗旼) 두 스님이 강당사와 비로소 인연이 닿았다. 그래서 1999년에 대웅전을 중창하고 2002년에 고산대종사의 증언으로 삼존불과 후불탱화를 모시어 명실공히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강당사는 외암선생의 인물동성론과 부처님의 만물은 다 같이 깨달을 성품이 있다는 사상과 일맥상통하여 유교와 불교가 조화롭게 이루어진 특색있는 도량으로 종교분쟁에 허다한 현시대에 종교화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대표적인 사찰이다.
강단사는 현재 외암문집 판각이 지방문화재 333호로 지정되어 보관되어 있는데, 앞으로 이간선생과 윤곤선생의 학문정신과 불교 수행정신을 조화롭게 융합하여 정진과 포교의 도량으로서 모든이들이 마음을 위안 찾을 수 있는 천정가람으로 쇄신해 나갈 것이다.
불기 2546년 임오년 음 3월 11일
강당사 대중 일동
* 위 내용은 강당사 입구에 서 있는 안내판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임을 밝혀둔다.
용담교(龍潭橋)
충남 아산시 송악면에서 광덕산을 향해 오르다 보면 오른편에 강당사로 들어가는 용담교(龍潭橋)가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자 마자 관선재와 강당사가 나온다.
관선재(觀善齋) 안내석
용담교 왼쪽에는 커다란 관선재(觀善齋) 안내석이 서있다. 이 글을 읽고 난 후 관선재를 관람하면 이곳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측면에서 촬영한 용담교
두 그루의 향나무
관선재 앞에는 두 그루의 커다란 향나무가 사이 좋게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이외암선생과 윤천서선생이 의좋게 강학했던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관선재(觀善齋)
관선재는 조선 숙종 34년(1708년)에 외암(巍巖)과 천서(泉西) 두 선생이 학문 탐구와 인성도야를 위해서 건립한 강학원(講學院)으로서, 강호 사방에서 모여든 문하생들이 수학하고, 형설의 공으로 많은 고제(高弟)와 석학을 길러낸 사설학원이다.
관선재 안마당에서 찍은 사진이다. 아래 사진과 연결해서 보면 원래 관선재의 'ㄱ'자형 건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ㄱ'자형 관선재 건물 중 일부의 모습. 원래 이곳에는 단지 이건물 하나만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후에 세워진 건물이다.
관선재와 사이에 마당을 끼고 마주보고 있는 일자형 건물이다. 이 건물에는 왼쪽부터 1.외암집판장(巍巖集板藏) 2. 문천사(文泉祠) 3.인지헌(仁智軒)이란 간판이 나란히 붙어 있다.
외암집판장에는 지방문화재 333호로 지정된 외암문집 307판이 보존되어 있다.
잘 정리하여 보관 중인 외암 문집들
307판 목판각 중 1개
문천사(文泉祠)
문천사는 조선 영조 때 경연관(經筵官)을 지낸 외암 이간 선생과 같이 강론하
던 지기인 윤혼선생을 위해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문(文)은 이간의 익호인
문정(文正)에서 따온 글자이고 천(泉)은 윤혼 선생의 아호 천서(泉西)에서 따
서 붙인 것이다. 안에는 두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문정공 외암 이선생 신위
지평공 천서 윤선생 신위
관선재 왼편 뒤쪽에 건립된 강당사
대웅전은 월해(月海). 종민(宗旼) 스님이 와서 1999년에 중창하였다.
대웅전에 봉안된 삼존불과 후불탱화 모습
-속히 해결해야 할 문제점-
강당사의 주위 경관은 빼어나게 아름답다. 이 계곡에는 봄. 여름. 가을 불문하고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 온다. 강당사 부근에는 4개의 노래방 업소가 있어 요란하다. 특히 이 강당골은 주말이 되면 입추
의 여지없이 사람들이 몰려와 아수라장이 된다.
팬티만 입고 물에들어가 목욕을 하는 사람도 많고, 그늘에서 자리를 펴 놓고 고스톱을 치는 행락객들도 많다. 최소한 역사 깊은 관선재와 강당사 같은 곳은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관리를 해 주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노래방 등 업소를 즉시 철거토록 하고 일정거리 내에서는 소란을 피우는 행동이나 환경을 오염시키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관련 자료
http://blog.daum.net/koreasan/11220768
강당사와 관선제
답사코스
아산 공세리 성당 - 광덕산 산행 - 관선제, 강당사 - 맹씨행단
[2007. 4. 8일. 일요일 날씨 안개, 흐림 한국의산천 ]
▲ 관선제 안내비 ⓒ 2007. 한국의산천 우관동
외암리 민속마을에서 광덕산 등산로 입구쪽 계곡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강당골 유원지가 나온다.
유원지 양편으로는 숲이 우거지고 계곡물은 매우 맑다. 이곳이 외암선생이 '외암기에서 말하는 석문용추(石門龍湫)이다.
▲ 강당사 관선제 ⓒ 2007. 한국의산천 우관동
외암선생은 이곳을 후학을 가르키는 터로 삼았다.지금도 관선재(觀善齋)의 외관은 그대로 전해내려온다. 고종때 서원철폐의 사태를 피하고자 사찰의 면모를 가장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대웅전을 새로 지었으며 사찰으로서의 역활을 하고 있다.
외암마을의 큰 학자 외암 이간
조선 숙종 3년(1677년) 부호군 이태형(李泰亨)의 아들로 태어나 영조 3년(1737년) 51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조선후기 대학자였던 권상하(權尙夏)를 스승으로 모신 8명의 학사(八學士)중 한 사람이다.
▲ 이곳에 외암문집 목판각 310매가 보관되어있다.ⓒ2006 한국의산천
외암 이간
조선 숙종 3년(1677년) 부호군 이태형(李泰亨)의 아들로 태어나 영조 3년(1737년) 51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조선후기 대학자였던 권상하(權尙夏)를 스승으로 모신 8명의 학사(八學士)중 한 사람이다. 숙종 36년(1710)순무사 이만성(李晩成)에 의하여 장릉참봉(葬綾參奉)으로 천거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6년뒤인 숙종 42년(1716)에 다시 천거되어 세자시강원자의가 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가 젊은데도 벼슬이 뛰어오름을 논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숙종 43년(1717)종부시정을 제수받고, 영조 1년(1725)회덕 현감ㆍ경영관을 거쳐 충청도도사 겸 해운관ㆍ익위사익위를 제수받았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외암 이간 선생은 관직생활보다 학문과 글씨로 그 이름이 더 유명하다. 그는 조선후기의 인물성동이논쟁에서 인물성동론을 주장하였다.조선조 성리학은 중기를 고비로 사단칠정에 대한 이황의 이기호발설과 이의의 기발이승일도설의 대립으로 치열한 논변이 벌어졌는데, 후기에 접어들면서 한동안 잠잠하였던 사단칠정에 대한 이황의 이기호발설과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의 대립으로 치열한 논변이 벌어졌는데, 후기에 접어들면서 한동안 잠잠하였던 사단칠정논변이 주기적인 이이계통의 기호학파안에서 주리와 주기의 논변으로 이행됨으로써 성리학의 불꽃이 재연되었으니, 이것이 인물성동이논쟁이다. 본격적인 논쟁은 수암 권상하 문하의 8학사 중에서 인물성동론을 주장한 외암 이간과 인물성이론을 주장한 남당 한원진 사이에서 야기되었다.
외암이간이 충청도의 온양 외암리에서 태어났듯이, 남당 한원진은 대하축제로 유명한 지금의 홍성군 결성면 남당리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후에 남당의 지지자는 호서지방에 많았으므로 인물성이론을 '호론(浩論)'이라 하고, 외암의 지지자들은 서울에 많았으므로 인물성동론을 '낙론(洛論)'이라고 부른다.
숙종실록에서도 '호서사인(濠西士人)이간'이라는 표현이 보이듯이 온양 향리에서 주로 지낸 이간은 31세 되던 숙종 33년에는 권선재를 건립하여 후학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영조 3년 51세로 일생을 마감했는데 정조는 이조참판과 성균관 좨주를 증직하였으며 순조는 이조판서를 추증하였다. 시호는 문정공이고,저서로는 '외암유고'가 있다.
▲ 관선제 앞의 계곡 ⓒ 2007. 한국의산천 우관동
마을에는 외암 이간의 뜻과 학문적 유업을 기리는 사당이 있고 이곳에서는 매년 외암 이간 선생이 사망한 음력 3월 14일 불천위제사를 지낸다. 학문이 뛰어나거나 국가에 공헌이 큰 인물은 나라에서 영원히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도록 지정한 것을 불천위라고 한다. 외암 선생의 묘소는 외암리 오른쪽 산기슭에 있으며 마을 입구에 신도비가 남아있다.
▲ 관선재 앞을 흐르는 물 맑은 계곡 ⓒ 2007 한국의산천
▲ 강당사 입구에 서있는 표석 ⓒ 2007. 한국의산천
▲ 용추석문과 느티나무 ⓒ 2007. 한국의산천
▲ 강당사 연혁 ⓒ 2007. 한국의산천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위기에 놓인 관선제에 이를 모면키 위해 가까운 마곡사에서 불상 한분을 모셔와 객실에 안치하고 승려를 두어 불사를 행함에 따라 사찰의 시원이 되고 "강당사"라 불렀다.
1995년 조계종 비구니 월해, 종민 두스님과 인연이 닿아 1999년 대웅전을 중창하고 2002년 고산 대종사의 증명으로 삼존불과 후불탱화를 모시어 명실공히 사찰의 면모를 갗추게 되었다.
근년 보수시에 "숭정후세삼을유삼 월이십일일 묘시 중수상량(崇楨後歲三乙酉三 月二十一日 卯時 重修上樑)"이라는 명문이 발견되어 1765년(정조8) 중수사실이 밝혀졌고 "관선제"라는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이라고 전한다.
"외암집판장"이란 현판이 있으며 장판고 안에는 "외암문집" 목판각 307매가 보관 되어 있다. 후일에 증축된 문간채까지 합쳐 전체건물은 내정을 갖춘 "ㅁ자형" 배치를 보이고 있다.
▲ 강당사 요사체 창문 ⓒ 2007. 한국의산천
▲ 강당사 현관 ⓒ 2007. 한국의산천
▲ 강당사 ⓒ 2007. 한국의산천
▲ 강당사 대웅전 ⓒ 2007. 한국의산천
▲ 봄 아지랭이가 피어오르는 강당사의 아름다운 울타리 ⓒ 2007. 한국의산천
광덕산 산행은 강당사(관선제) 20m 아래에서 출렁다리를 건너서 올라간다. 광덕산 정상까지 4km 약 1시간 40분 소요)
▲ 아산 관광 안내도 ⓒ 2007 한국의산천 www.korea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