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서 영 (수필)
축구를 가리켜 공을 가지고 하는 전투(ball battle)라고 한다. 골대는 성문(城門)이다. 감독이 전술을 짜고 선수들이 조직을 갖추어 골대에 골을 넣는다. 공성전(攻城戰)의 성문을 깨는 것과 유사하니 바로 전쟁이다. 사람들은 축구를 전쟁의 대용물로 여기고 있다. 전쟁을 하듯 축구를 하고 또 전쟁을 보듯 축구를 관전하고 자기편을 응원한다. 축구가 없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에 전쟁 그칠 날이 없으리라고 누가 말했다. 축구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스포츠는 사람의 열정을 소모시킨다. 스포츠가 이런 역할을 하지 못하면 인간의 남아도는 힘이 전쟁을 궁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스포츠가 없는 세계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다. 우리 지구상에는 매일매일 온갖 형태의 스포츠게임이 열리고 무수히 많은 멋진 승부가 펼쳐지고 있다. 필자는 딱히 잘하는 종목은 없어도 여러 가지 운동을 즐기고 TV에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경기를 자주 본다. 올 한해도 갖가지 영역의 스포츠에서 마치 전쟁처럼 펼쳐지는 수많은 명승부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는 중이다. 올해 본 경기 중에서도 특히 필자의 뇌리에 지울 수 없는 2개의 명승부가 있었으니 여기에 요약해 소개하고 독자 여러분과 그 감동을 함께 하려 한다.
한 경기는 지난 7월에 열린 윔블던 테니스대회 남자단식 준결승전이다. 테니스는 매우 재미있고 운동량도 많은데 비하여 경비부담은 적은 스포츠다. 필자도 20대에 테니스에 입문하여 줄곧 그 매력에 빠져 있었는데, 본인이 나서 ‘하는’즐거움도 크지만 어느 종목 못지않게 ‘보는’ 기쁨이 큰 스포츠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유형의 국제경기가 많지만 대표적인 것이 ‘그랜드슬램’이라 하여 미국, 프랑스, 호주오픈과 영국에서 열리는 윔블던대회를 손꼽는다. 그중 윔블던만 유독 오픈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고 경기 개최지 명칭을 그대로 쓰고 있다. 우승상금이 무려 27억 원에 이르는 매머드 대회다. 우승의 영예가 크고 상금이 많은 최상급 경기이고 선수들이 모두 백색의 유니폼만 입도록 하는 등 대회운영이 매우 엄격하기로도 유명하다.
오늘 경기의 두 주인공은 남아공화국의 캐빈 앤더슨(세계랭킹 8위)과 미국의 존 이스너(10위)이다. 이들은 지나온 4차례의 라운드에서 기라성 같은 상위권 랭커들을 줄줄이 격파하고 이 경기에 진출했다. 아울러 두 선수는 키가 2미터가 넘는 장신에다 플레이 스타일도 비슷하여 서로가 매우 껄끄러운 상대로 보인다. 우승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이기고 결승에 나가야 하니 혼신의 힘을 다할 수밖에 없다.
매서운 공격과 그림 같은 수비가 거듭되는 경기는 '용호상박'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초 접전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쪽이 먼저 한 포인트를 따면 금방 이쪽이 이길 것 같다가, 상대가 반격하여 한 점을 따면 금방 그 쪽으로 기울 것으로 보이니, 관전자들은 잠시도 경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1~4세트를 서로 주고받으며 2:2 타이를 이룬 두 맞수는 드디어 결승진출을 위한 마지막 세트에 접어들었다. 독자 제위께서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그랜드슬램 대회의 마지막 세트는 2게임의 차가 나야 그 세트를 이길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이 워낙 일진일퇴의 혈투를 벌이다 보니 경기는 끝나지 않을 것처럼 계속 이어졌다. 결과는 랭킹이 다소 앞선 앤더슨이 천신만고 끝에 26:24라는 경이로운 스코어로 승리를 따냈다. 보통 한 세트는 6게임 이내이거나 타이브레이크를 해도 약 한 시간 정도가 소요되는데, 이들의 마지막 세트는 보통 경기 4개 매치 이상의 시간이 걸린 대혈투였던 것이다.
두 사람의 경기는 물경 6시간 36분이 소요되었고 저녁에 시작한 것이 새벽이 훨씬 지나서야 끝이 났다. 두 선수는 쓰러질 듯 허우적거리는 모습으로 경기를 끝냈는데 전쟁도 보통 전쟁이 아니었다. 길고 긴 승부는 끝났지만 패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전사였고 영웅이었다, 끝까지 선수들을 응원하고 흐트러짐 없이 자리를 지킨 관중들도 선수들 못지않은 승자였다. 두 선수의 사력을 다한 투혼은 감동이었고 스포츠의 진수를 보여주는 명장면의 연속이었다. 세계의 시청자들이 숨죽이고 경기를 지켜보았듯이, 나 역시 밤을 새우며 끝까지 TV를 떠나지 않았다. 앤더슨은 큰 난관을 돌파하고 모두의 환호를 받으며 결승에 진출했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지나치게 체력을 소진한 탓인지 이튿날 진행된 결승전에서 세르비아 선수 노박 조코비치에게 1:3의 스코어로 맥없이 무너지고 말아 아쉬웠다. 그래도 그의 놀라운 투혼과 이스너 선수와의 명승부는 테니스 역사에 등재되고 팬들에게 인상적인 장면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한편 이 경기의 러닝 타임은 테니스 역사상 두 번째의 장시간으로 기록되었고, 이를 계기로 지나치게 길어지는 경기시간의 조정과 선수보호를 위하여 게임규칙 개정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또 하나의 명승부는 지난 9월에 있었던 타이거 우즈의 복귀전 우승 경기이다. 그는 무려 1876일(5년 1개월) 만에 80승 이라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2013년 까지 79승을 수확하였으나 그의 우승시계는 거기에서 멈추었다. 섹스스캔들, 결혼 6년차 부인과의 이혼과 자녀와의 이별, 약물중독에 의한 교통사고 등등 온갖 구설수 속에서 그의 추락은 끝이 없었고, 세계 랭킹은 1199위 까지 떨어졌다고 한다. 모든 이들이 ‘그는 이제 끝났다’고 말했다.
그러나 재기를 위한 그의 눈물겨운 노력은 수년간 지속되었고, 마침내 기라성 같은 세계 최상위 선수들이 치열하게 경합하는 PGA 페덱스컵 최종전에서 모든 강자들을 제치고 승리하는 결실을 맺은 것이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과 위기와 반전이 있었지만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비교적 여유롭게 2타 차의 멋진 승리를 쟁취했다. 밤새워 중계하는 생방송으로 다이내믹한 현장을 지켜보았다. 엄청난 수의 관중과 우렁찬 환호성은 지금까지의 어떤 게임에서도 볼 수 없었던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그들과 함께 마음 깊이 우즈를 응원했고, 그가 눈에 눈물이 가득한 모습으로 우승트로피를 들어 올릴 때는 그의 불굴의 의지를 확인하며 깊은 감동을 느끼기도 했다.
그는 이번 승리로 세계랭킹 13위가 되었고 다시금 톱10 진입을 바라보고 있다. 이제 그는 새로운 기록에 나선다고 한다. 샘 스니드라는 왕년의 골퍼가 가지고 있는 82승이라는 대기록의 경신이 그것이다. 또 살아있는 전설 잭 니클라우스가 가지고 있는 그랜드슬램 18승에도 4승 차이로 근접하고 있어 그 또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미국 JP모건의 한 전문가는 이번 타이거 우즈의 우승으로 골프 붐이 일어나 골프의 인기가 치솟고 골프시장이 활기를 찾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아울러 골프 관련 주(株)에도 호재가 되었고, 골프채와 골프공 등 관련 산업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무척 아쉬운 것은 그런 역사적인 우승을 한 후 일주일 만에 참석한 미국과 유럽 남자선수의 대결인 라이더컵 대회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4전 전패로 미국패배의 결정적 요인을 제공했다는 명예스럽지 못한 평가를 받으며 고개를 떨궜다. 그것이 바로 스포츠의 속성이 아닐까. 쉴 때는 지친 심신을 모두 내려놓고 편안하게 휴식해야 한다. 큰 경기에 전력을 쏟고 매우 피로한 상태에서 많은 부담이 되는 대륙간 대회에 바로 참석하였으니 잘 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는지도 모르겠다. 아울러 내 생각으로는 80승의 큰 기록을 오랜만에 달성하여 맘속에 일말의 자만심이 생긴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골프는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나가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아는 선수가 생명력이 길다. 스포츠 선수가 겸손하지 못하면 금방 기량이 떨어져 내리막 길을 걸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하지만 그의 미래는 아직도 매우 희망적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우리에게 더 훌륭한 기량과 골퍼로서의 참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라며 계속 응원하고 지켜 볼 것이다. 빨간 티셔츠를 입고 마술을 부리는 듯 우승을 향해 거침없이 나가는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의 모습을 더 오랫동안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모든 스포츠경기는 전쟁 이상으로 인간의 열정과 의지를 바탕으로 치러진다. 그것은 삶의 한 부분이며 또 그 결과물이다. 처음부터 주어지는 손쉬운 승리는 어디에도 없다. 무한한 투지와 인내심으로 갈고 닦고 끊임없이 도전하여 쟁취하는 것이다. 챔피언이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땀을 흘리고, 하위 랭커가 상위 랭커를 쫓아가기 위해 사력을 다하며, 왕년의 스타가 오랜 방황 끝에 부활하는 명승부를 보면서, 삶의 의욕을 고취하고 깊은 감동을 선사하는 스포츠의 끝없는 매력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스포츠에는 사계절이 없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한 두 종목 정도의 스포츠는 즐길 수 있다. 또 그 분야의 일정한 기초 소양을 갖추고 있으면 꼭 현장에 가지 않더라도 집에서 TV로 다양한 경기를 관전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이 훨씬 더 풍부하고 보람되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는 온갖 종목의 명승부가 열리고 있다. 그들의 경기를 보면서 배우고 따라하며 자신의 건강을 지킬 수 있다면 누구라도 스포츠맨의 한 사람으로 손색이 없다고 하겠다. 지금이라도 내 적성에 맞는 한 가지 운동을 선택해 땀 흘리며 삶의 질을 높여 가기를 독자 여러분께 권하는 바이다. 겨울철 건강관리에 늘 소극적이던 필자도 오늘을 계기로 좀 더 왕성한 동계 체육활동을 하리라 다짐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계간<화백문학>74호(2018.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