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가 빛나지 않는 그곳이 나의 거주처이다
방문자 :
심장의 매듭은 눈썹 사이에 있다고 합니다.
마하리쉬 :
어떤 사람들은 '눈썹사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미저골'이라 하는 식이지요.
이런 것은 모두
몸의 견지에서 한 이야기들입니다.
몸은 '나'라는 생각이
있고 난 뒤 옵니다.
방문자 :
그러나 몸을 벗어 버릴 수가 없습니다.
마하리쉬 :
그러니까 그대는
몸이 아니라는 것을 시인하는군요.
방문자 :
이 몸에 고통이 있으면
제가 그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남의 몸이 다치면
그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저는 이몸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마하리쉬 :
이 동일성이 그런 느낌의 원인입니다.
그것이 바로 심장의 매듭입니다.
방문자 :
어떻게 하면 이 매듭이 사라집니까?
마하리쉬 :
그 매듭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그것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입니까?
그것이 묻습니까?
그대가 묻습니까?
방문자 :
그것은 물을 수 없습니다.
제가 묻습니다.
마하리쉬 :
그 '나'가 누구입니까?
그것을 발견하면
그 매듭은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방문자 :
그 매듭은 몸과 공존합니다.
몸은 탄생에서 비롯됩니다.
어떻게 해야 환생이 그칩니까?
마하리쉬 :
누가 태어납니까?
진아가 태어납니까?
아니면 몸이 태어 납니까?
방문자 :
몸입니다.
마하리쉬 :
그러면 그 몸더러
어떻게 하면
자신의 탄생이 그치겠는지
물으라 하십시오.
방문자 :
그것은 묻지 않겠지요.
그래서 제가 여쭈는 것입니다.
마하리쉬 :
그 몸은 누구의 것입니까?
깊히 잠들었을 때
그대는 몸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나'라는 생각이 일어난 뒤에
몸이 일어났습니다.
최초의 탄생은
'나'라는 생각의 탄생입니다.
몸은 '나'라는 생각에 이어서 탄생합니다.
따라서 그 몸의 탄생은 2차적입니다.
1차적인 원인을 제거하십시오.
그러면
2차적 원인은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방문자 :
어떻게 하면
저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까?
마하리쉬 :
자기탐구를 하면 됩니다.
방문자 :
이해하려고 애씁니다만
성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염송의 방편을 쓰면
제가 진아를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하는 요령을 부디 알려 주십시오.
마하리쉬 :
어떤 염송 말입니까?
왜 인위적인 염송을 해야 합니까?
영원하고 본래적인 염송이
항상 그대의 내면에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방문자 :
어떤 가르침을 주시면
분명히 저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하리쉬 :
그대처럼 책들을
애써 열심히 읽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제가 "라마, 라마를 하십시오" 하면,
그 사람은 그것을 붙들고 늘어지겠지요.
그러나
그대처럼 책을 많이 읽고
사물을 탐색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면
그것을
오래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대는
'내가 이걸 왜 하지?
무엇보다도
이 진언을 염송하는
나는 누구인가?
이걸 더 계속하기 전에
먼저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겠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래서 염송을 그만두고
탐구를 시작할 테니까 말입니다.
방문자 :
"감관들은 밖으로 나가니,
안으로 돌린 눈으로"
(바가바드 기타의 한구절)라고 합니다.
'안으로 돌린 눈'이 무엇입니까?
마하리쉬 :
그것은 안구를 반대 방향으로
돌려 놓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짝슈'가 무엇입니까?
방문자 :
눈입니다.
마하리쉬 :
눈이 봅니까,
아니면
보는 것은 눈 이면의 누구입니까?
만약 눈이 볼 수 있다고 하면
시체도 봅니까?
'눈 이면에 있는 자'가
눈을 통해서 보는 것입니다.
짝슈란 말은
그 '보는 자'를 뜻합니다.
방문자 :
신의 찬란한 모습을 보려면
신안(神眼)이 있어야 합니다.
이 육안은 평범한 눈입니다.
마하리쉬 :
오 ! 알았습니다.
그대는 백만개의 해와 같은 찬란함이나
뭐 그런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군요.
방문자 :
우리는 백만 개의 해와 같은
찬란함을 볼 수 없습니까?
마라히쉬 :
하나인 해는 (제대로) 볼수 있습니까?
왜 백만개의 해를 보여 달라고 합니까?
방문자 :
신안에 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해가 빛나지 않는곳 - - -
그곳이 내 지고의 거소이다"
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 해가
아무 힘이 없는 상태가 있습니다.
그 상태는 신의 상태입니다.
마하리쉬 :
좋습니다.
끄리슈나를 발견하십시오,
그러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방문자 :
끄리슈나는 살아 있지 않습니다.
마하리쉬 :
그대가 <기타>에서
배웠다는 것이 그것입니까?
끄리슈나는 자신이
영원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끄리슈나라고 할때)
그대는 무엇을 생각합니까?
그의 육신인가요?
방문자 :
그는 살아있는 동안에
남들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깨달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저도 그와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스승을 찾습니다.
마하리쉬 :
그러면 그가
육신을 거두어들이고 난 뒤에는
<기타>가 아무 쓸모 없습니까?
그가 자신의 육신을
끄리슈나라고 했습니까?
"내가 존재하지 않은 적이 일찍이 없었고 - - --"
방문자 :
그러나 저는
저에게 직접 진리를 말해 줄 수 있는
살아 있는 스승을 원합니다.
마하리쉬 :
그 스승의 운명은
끄리슈나의 운명과 비슷하겠지요.
질문자 는 물러났다.
나중에 스리 바가반이 말씀하셨다. :
신적인 시각이란
자기비춤(反照)를 뜻합니다.
'신적'이란 단어가 그것을 보여 줍니다.
그 완전한 단어는 진아를 뜻합니다.
신적인 눈은 누가 줍니까?
그리고 누가 봅니까?
또 사람들은 책에서
"청문, 성찰, 일념집중이 필요하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유상삼매와 무상삼매를 통과하고 나서야 깨달음을 얻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온갖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 미로에서 헤멥니까?
결국 그들이 무엇을 얻습니까?
추구의 수고로움이 그치는 것 뿐입니다.
결국 그들은
진아가 영원하고도 자명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왜 그런 안식(安息)을
바로 이 순간에 얻지 않습니까?
배우지 않은 단순한 사람은
염송이나 숭배로도 만족합니다.
진인은 물론 만족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책벌레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요 그래, 그들도 얻겠지요.
ㅡ 라마나 마하리쉬 대담록 ㅡ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