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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
긍휼히 여기는 사람의 복(마5장7)
성경본문|마태복음 5:7
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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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박조준목사
이미 말씀드린대로 산상보훈의 여덟가지 복은 서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먼저 마음이 가난한 자가 행복하고 애통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를 주리고 목마름같이 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행복의 다섯째 조건으로는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의인의 다음에 긍휼이 나오는데 뜻이 있습니다. 의만 부르짖고 긍휼이 없으면 냉정하고 무자비한 의가 되기 쉽습니다.
반면에 의가 없이 긍휼만 있으면 무분별해서 죄를 용납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의와 긍휼은 나눌 수 없는 행복의 조건입니다.
중병으로 앓던 사람이 병이 나으면 좋은 식물을 많이 섭취하여 힘을 얻고 그 후에는 나아가서 힘있게 일하는 것처럼 의에 배부른 사람은 나아가서 남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첫째에서 네째까지의 복은 자기 완성을 위한 노력이라고 하면 그릇에 물을 부어 물이 그릇에 차면 그 후에는 흘러 사방으로 넘치는 것처럼 은혜가 만족하게 차면 나를 넘어 다른이에게 흘러가는 법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의 긍휼은 자기를 희생시키는 사랑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기 완성에서 나오는 동정과는 다릅니다.
요한 1서 4 : 19에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함이라”
즉 긍휼을 행한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증거입니다.
예수님도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십니다. 긍휼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지속하는 방법입니다.
잠언 19 : 17절에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봉사주일에 붕사헌금을 내는데 이것도 사실은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긍휼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더 큰 긍휼을 받을 보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렇 게 하나님께 받고 그리고 남에게 주고 하는 것은 기독교 윤리의 대원칙이며 받고주는 일이 잘 되면 잘 될수록 우리 생활은 더욱 건전한 생활이 될 수 있습니다.
영국의 대 문호 섹스피어가 ‘긍휼은 억지로 하지 않고 하늘에서 오는 비처럼 이중의 복을 가지고 온다. 주는 자는 복을 주고 받는 자에게 복을 주어 최강자 중에도 최강자이며 보좌에 앉은 왕에게 있어서 긍휼은 왕관 이상 존귀하다’고 하였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이 나이팅게일 여사에게 준 기념 훈장에는 헬라의 유메씨아스의 말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긍휼을 행하는 길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돈으로써만 아니라 말로도 할 수 있다. 돈으로도 말로도 할 수 없을 때는 눈물로 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긍휼을 행하는 사람의 복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저녁 행복의 다섯째 조건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 심령에 은혜를 더하여 주시기바 랍니다.
이 긍휼이란 다른 말로 하면 자비, 인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반대의 뜻은 무자비, 잔인, 포악, 무정, 냉정, 무시, 천대 등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긍휼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특별히 불쌍한 환경에 있는 이들에 대하여 대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더우기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런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대할 때 이렇게 긍휼로 대해야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103 : 17에 보면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하였고 시편 108 : 4에도 “대저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광대하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 미치나이다.”
이와 같이 노래 불렀습니다.
구약 애가 3 : 22에도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도 이 진리를 깨닫고 디도서 3 : 5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이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처럼 긍휼을 강조해서 말하는 것은 우리 기독교에서만은 아닙니다.
가령 불교같은 데서는 자비를 말합니다.
유교에서도 맹자가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라 하여 자비를 말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러 성현이나 도덕가들이 자비와 긍휼을 강조해서 가르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이 진리는 하나의 자연계시에 의하는 것으로 사람의 양심을 통해서 이미 나타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에서 특수한 것은 하나님의 이 긍휼하신 성품을 단순히 가르쳐준 것만은 아닙니 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아들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말씀이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나타 나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어떠하시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생활 그 자체가 바로 긍휼의 생활이었습니다.
목자없는 양같은 무리들을 보실 때에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병난자, 약한자, 주린자, 손마른자, 눈먼자. 다리저는 자, 말 못하는 자, 문둥이, 심지어 죽은 자까지 살려주시는 역사를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나신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은 비난하였지만 삭개오의 집에 가셔서 그 심령을 긍휼히 여겨 구원해 주셨습니다.
눈물로 발을 씻는 죄인 여자의 죄를 예수님은 용서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간음하다가 현 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불쌍히 여겨서 용서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불쌍히 여겨서 용서해 주었습니다.
자비하신 성품을 그대로 나타내신 긍휼의 역사입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은 원수까지 위해서 기도하신 예수요, 하나님의 긍휼을 사람에게 그대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도 우리 믿는 사람을 향하여 이와 같은 긍휼한 마음을 가져야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친히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과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고 누가복음 6 : 36에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할 때 4 : 32에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 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긍휼을 나타낼 수 있습니까?
1 . 불쌍한 사람을 돌봐주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돌봐줌으로써 긍휼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굶주리고 헐벗은 세계입니다. 미국의 농무장관이 세계인구의 1/3은 뚱뚱해지는 것을 걱정하고 있지만 2/3는 다음 끼니를 걱정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나라의 경우를 보아도 얼마나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이 많습니까?
이러한 가난한 사람들을 볼때 어떻게 할 것인가? 아 그거야 옛날부터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한다고 했는데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나? 이렇게 생각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여 줍니다.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잠언 21 : 13).
“주라 !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누가복음 6 : 38).
비단 많은 물질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언제나 할 수 있는 사서한 친절이 얼마나 요구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에 말씀한 예수님의 비유를 기억합니다.
오른편에 있는 양은 어린 소자 하나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 세계의 돈많은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긍휼로 대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공산주의가 성하지 않았을 줄 압니다.
우리는 내게 도움을 요구하는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자들을 도와줍시다 !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손에는 못자국이 있었습니다.
이 못자국은 모든 사람의 죄를 속량해 주시기 위해 친히 못박히신 못자국입니다.
우리가 다 이와 같은 일을 할 수가 없지만 타인을 어떻게 도와주기 위해서 죄중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어려운 환경 중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우리의 손에 못자국이 있어야 될 줄 생각합니다.
알버트 슈바이쳐의 손을 찍은 사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의 설명이 ‘이 손은 신학자요, 철학자요, 음악가요, 의사의 손이다. 그는 젊어서 신학과 철학을 연구하여 학위를 받았고 바하 음악을 연구하여 음악 박사가 되었으며 파이프 오르간을 제작하면서 훌륭한 연주를 하는 손이다. 그리고 이 손은 많은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는 긍휼의 손이다‘ 고 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 게는 이런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손이 요구됩니다. 그 손 위에 행복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2 . 우리의 편견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긍휼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편견이란 심리를 하지 않고 판단을 내린다든가 사실을 모르면서 다른 사람을 평가한다든가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편견이란 힘의 표시가 아니라 약점의 표시입니다.
그것은 철부지의 말은 될지언정 진정한 기독교인의 수단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리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이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알 매스 에드워드라는 분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 편견이 없는 사람은 없다. 우리들은 모두 환경의 노예다’고.
우리는 누구나 선입견과 편견이 있습니다.
챨스 라마이라는 분은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편견덩어리로서 어떤 것에 대하여 사랑하든지 미워하는 어느 한쪽 감정에 지배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사람의 이 약점을 아시고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와 같은 편견을 어거하는 방법으로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이 사회에 일어나는 여러가지 비극이 편견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면 이와 같은 우리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편견을 무엇으로 어떻게 버릴 수 있을까요?
교육을 가지고 해결할 수 있었다면 벌써 다 되었을 것입니다.
원자를 부수어버리는 힘을 가지고도 사람의 영혼의 쓴 뿌리와 같은 편견을 뽑아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편견이 강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던 사울이 어떻게 그와 같은 긍휼과 자비의 사람이 되었습니 까?
다메섹 노상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할 때 이때까지 가지고 있던 편견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이 설교의 주제가 되고 생활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긍휼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이것이 바울의 설교의 정신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받고 나서부터 바울은 긍휼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긍휼하심이 풍성하신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으면서도 뻔뻔스럽게 이웃에게 편견을 가지고 대하지는 않습니까?
3 .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긍휼을 나타낼 수 있는 길입니다.
사실 영혼이 빈곤한 것은 물질적으로 빈곤한 것보다 더 불행한 일입니다.
그리스도가 나신지 2천년이 되는 오늘날 아직도 세계의 반수 이상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긍휼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죽음에 직면하고 있는 셰계에 그리스도의 긍휼을 알리기 위해 우리가 헌신할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잔파하라”고(마태복음 16 : 15)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니며’라고 하는 이 짧은 말 속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에 예수 앞에 모여 들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니라’고 명령하십니다.
역사 이래에 오늘날과 같이 인간 문명이 발달한 때가 일찌기 없었지만 오늘날만큼 인간의 정신이 야만화 되어가는 예도 일찌기 없었습니다.
지식이 최고도로 발달했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요?
솔로몬만큼 지식과 지혜에 풍성한 사람이 어디 있었습니까?
그러나 그의 지식이 그를 죄에서 건지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인류를 참 행복하게 하는 길은 인간의 심령속에 복음을 넣어주는 일입니다.
이것이 없이 교육을 시킨다고 하면 마치 늑대를 깨끗이 목욕시켜서 그 위에 양털을 입혀 어린양이 되게 하려는 생각과 같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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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능력이 아니고는 이 세 상을 행복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은 인간에게 인간의 상처를 가르쳐주고 나서 사랑을 줍니다.
인간의 매인 것을 깨닫게 하고 나서 깨끗한 의복을 줍니다.
인간이 가난한 것을 알게 하고서 하늘의 재물을 인간의 생명에 부어넣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죄 많음을 깨닫게 하고서 구주를 가르쳐줍니다.
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나타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여러분의 바로 가까운 곳에 복음이 필요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이름을 써서 하나님 앞에 내놓고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새로 남으로 행복한 사람되게 해달라고 기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그들을 정복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가르침을 청하세요.
거저받은 이 복음을 거저 나누어 줍시다 !
우리 주님이 우리 위해 하신 일을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위해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웃에게 긍휼을 나타내는 길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또한 넘치는 행복을 얻는 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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