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고등부, 대학부, 청년부 시절을 보냈던 서울 신길동 남서울교회 창립 50주년 기념 회보에 넣을 글을 하나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대략 40여년전의 기억을 살려 글 하나 써서 보냈습니다.
기타(Guitar) 전래기
1975년 초 여름,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일 때, 우리 가족은 신길동으로 이사 오게 되었다. 그 당시 이사를 하게 될 신길6동은 농경지를 주택부지로 변경했는지 듬성듬성 새로 지어진 몇 채의 주택 주위에 아직 논과 밭이 남아 있었고 집에서 조금만 걸어 나가면 오리가 둥둥 헤엄쳐 다니는 개천도 있었다. 그런데 새로 이사를 온 집 바로 앞에 길을 사이에 두고 신축이 막 끝난 남서울교회가 있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수원에서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을 서울로 하게 된 나는 임시로 상도동 고모님 댁에서 지내게 되어 주일날이면 고모님이 섬기시는 상도동의 어느 장로교회에 다니게 되었고, 그 교회에서 세례도 받았다. 수원에 살던 우리 가족이 다시 합치면서 신길동으로 이사 오고 난 후도 주일이면 상도동에 있는 교회에 계속 다녔다. 그런데 부모님들이 바로 집 앞에 교회를 두고 굳이 멀리 있는 교회를 갈 필요가 있느냐시며 남서울교회로 등록하기를 권면하셨다. 교회 학생성가대와 중창단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새 교회로 옮기면 모두 그만둬야 한다는 것 때문에 망설였다. 특히 함께 활동하던 중창단 멤버들의 실력이 고교 졸업 후 다들 음악대학에 진학을 할 정도로 막강했었다. 그들과 어울리면서 찬양하는 실력이 많이 는 것은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다 내려놓고 신길동 남서울교회로 옮겨 오기로 결정을 했다.
남서울교회 학생부 예배를 찾아 간 첫 장소는 지하 예배실이었다. 형광등으로 밝혀진 학교 교실만한 공간에 중 · 고등부 모두 합쳐서 대략 20명 남짓한 학생들이 풍금반주에 맞춰 앞에 걸린 괘도에 적힌 가사를 보며 찬송가를 불렀고, 오창원 장로님(그 당시는 집사님)이 열심히 전하는 성경말씀을 들으며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예배가 끝나고 고등부 학생들과 인사를 해보니 고3 선배는 한사람도 없었고, 같은 고2 동기로 오재호가 있었고, 1년 후배 고1에 박순철, 정창경, 최창익, 윤흥노, 장진숙, 박신애 등이 있었고, 중등부에 오재원, 박혜진, 정철진, 이상진,전용재 등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교회가 신길동으로 옮겨 오기 전의 교회부터 다닌 것 같았다. 첫 인상에서 듬직한 체구의 리더십이 있어 보이는 고2 오재호가 학생회장이었고, 후배들로부터 깍듯한 선배 대우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그와 같은 동급생인 덕에 새로운 후배들의 따뜻한 섬김을 받을 수 있었다.
수원에서 유, 초등부와 중등부를 지낼 때는 침례교회에서 주일학교를 다녔다. 특히 중등부 학생 때부터 수원 Y.F.C.(십대선교회)에서 활동을 했었기 때문에 위로는 고등부 선배들로부터 아래로 중등부 신입생까지 다양한 남·녀회원들과의 모임에 참여해 보았기 때문에 학생회 예배 및 교회학생활동 프로그램에 잘 적응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 때 남서울교회 학생회의 분위기는 지금까지 여느 교회 학생모임 분위기하고 많이 달랐다. 그들은 모두 S.F.C.(Student for Christ)라고 해서 ‘전국학생신앙운동’이라고 번역되는 단체에 회원들이라고 했다. ‘하나님, 성경, 교회 중심의 생활원리를 지키자.’라고 외치며 끝나는 S.F.C. 강령이라는 것을 줄줄 외우고 있었다. 또한 순교자가 배출된 교단으로서 확실하게 보수적인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고신파’라며 교회가 소속된 교단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높았다. 온전한 주일 성수를 위해 주일날에는 물건을 사고팔지 않으며 교회의 예배 및 신앙 활동을 벗어난 다른 어떤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예배 분위기 또한 아주 많이 경건하였다. 정해진 예배순서에 따라 딱딱 예배가 진행되었고, 예배 중 박수를 함부로 치지 않았다. 특히 성찬예식은 매우 엄숙하고 더욱 경건하였다. 남서울 교회에 등록한 몇 주 뒤에 있은 성찬예식에서 떡과 잔을 받으러 앞 강대상 쪽으로 나갔더니 세례를 베푼 적이 없는 낯선 고등학생이 앞으로 나오는 것을 보신 당시의 박종수 담임 목사님이 “학생, 세례 받았어요?” 하고 회중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바로 물어서 확인하기도 하였다.
담임 목사님의 설교는 많은 기도와 말씀 묵상을 통해 성도들에게 대언되는 그대로의 하나님의 메시지였다. 담임 목사님의 성경강해 중심의 엄격하면서도 열정어린 설교는 성도들의 마음에 큰 감동을 주어 점점 많은 교인들이 모이고 교회가 부흥되어 가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나는 새 교회에 적응해갈 때 쯤, 몇 군데의 다른 교회를 다녀 본 경험으로 학생회 분위기는 좀 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소 조도가 떨어지는 지하실을 주 예배실로 쓰고 있어서 그런지 뭔가 침체되어 있는 것 같았다. 학생다운 활달한 활동과 친교 분위기가 살아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려면 무엇을 개선해야 될까 하고 생각해 보았더니 찬양이 좀 달라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학생회의 모든 예배나 모임 때에는 풍금반주에 맞춰 주로 찬송가를 불렀다. 내가 YFC에서 배웠던 템포가 좀 빠르고 약간 팝송 같기도 한 가스펠송이라는 것을 부르는 걸 도통 들어 보지 못했다. 학생들이 오히려 할머니 권사님들이 부르시는 예스런 음조의 복음성가를 즐겨 부르고 있었다. 마침 중3 때부터 기타를 배워 학교나 교회 모임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해 본적이 있는 지라 어느 여름날 오전 예배가 끝난 오후 시간에 집에 와서 기타를 챙겨 다시 교회로 가기로 맘을 먹었다. 아침 예배 후 집에 가지 않고 남아 있다가 저녁 예배까지 드린 후 집에 가는 학생 회원들이 있어 그들에게 내가 아는 가스펠송을 가르쳐 주고 함께 부르려는 계획에서였다. 교복을 사복으로 갈아입고 기타를 어깨에 메고 교회 현관문을 들어서는데 토박이 학생 교인들 몇몇과 마주쳤다. 그들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어! 우리는 고신인데.”
이 말을 들은 나도 좀 당황되었다.
“왜? 고신에서는 기타 못 치냐?” 라고 물어 보려는데 마침 담임 목사님의 큰 딸인 혜진이가 눈에 띄었다.
“혜진아, 아버지께 좀 여쭤보고 올래? 내가 이 기타를 치면서 가스펠송, 그래, 그 복음성가라는 걸 함께 부르려고 하는데 그래도 되는지 좀 알아봐줘.”
바로 교회 앞 단독주택에 있던 목사님 사택으로 혜진이 뛰어 갔다. 혜진이 다시 돌아 올 때까지 나는 토박이 학생 교인들과 교회 현관에서 기타를 들고 대치를 하고 있었다. 몇 분 지난 뒤 혜진이 달려 왔다. 숨차게 달려오는 걸음을 멈추기도 전에 외쳤다.
“오빠! 해도 된데요.”
이렇게 해서 나의 기타는 당회장 목사님의 직접 승인을 얻어 남서울교회 안으로 반입이 허용되었다. 기타를 든 내 주변에 모여 앉은 소녀 소년 팬들에게 제일 먼저 들려주고 가르쳐서 함께 부른 가스펠송이 G코드를 잡고 시작하는 ‘I've got peace like river.(내게 강같은 평화)’였다. 이 새로운 상황에 모두를 좋아하는 표정들이 역력했다. 그 후 몇 주간동안 그 때까지 내가 알고 있던 모든 가스펠송을 함께 배우며 찬양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기타를 구입해서 배우고 모임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후배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곧 순차적으로 중 · 고등부, 대학부, 청년부에서 기타로 반주하며 찬양하는 고정시간이 생겨났고 더불어 전자키보드, 드럼 등도 가세하여 연주하며 찬양하기 시작했다.
기타 반입 사건 이후로 내 개인적으로는 교회 안의 문화활동, 좀 더 거창하게 이야기하자면 기독교 문화사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고신이라는 보수교단의 분위기와 대치되는 듯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성경에 입각한 정통성을 가진 바람직한 교회문화를 찾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다음해 고3 뺏지를 달고 대학예비고사를 코 앞에 두고서도 나는 문학의 밤 행사인 ‘익두스의 밤’을 기획 연출했다. 시 낭송과 음악 순서를 잘 엮어 1시간 30분 프로그램이었는데 교회 주변의 많은 학생들이 구경을 왔다. 행사 후 담임 목사님이 “생각지도 못한 많은 학생들이 우리 교회에 들어와서 교회 건물 무너지는 줄 알았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결국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예술대학 연극과에 진학하여 연극연출을 전공하게 되었다. 입학식 때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는 연극을 잘 만드는 연출가가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었다.
그 후 남서울 교회 안에서는 학생회 성가대 지휘를 했었고, 어린이 여름성경학교의 어린이 성극 공연, 성탄절의 대학부, 청년회 연극 제작 작업, 그리고 어느 부활절 때 뮤지컬 형식의 찬양예배 등을 도맡아 연출했었다. 이런 교회에서의 연습과 훈련 덕분에 교회 밖에서는 KBS-TV, 극동방송 드라마 등의 방송제작 일과, 국내 외 극단에서의 스탭으로서의 작업을 할 수 있었다. 특히 연예인교회에서 전국 순회 공연했던 ‘타 오르게 하소서’에서의 조명감독, 직장기독선교회가 주최해서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올렸던 총체극 ‘어린 나귀’의 연출, 극단 교극의 뮤지컬 ‘가스펠’의 연출, 미국 뉴욕 라마마 극단 ‘트로이의 여인’에서의 스탭 작업 등이 기억에 남는데 모두 하나님께서 훈련시키시면서 주신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된다.
교회 안에서의 ‘문화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는 그릇이다.’ 라고 하신 어느 목사님의 말씀을 가끔 되새겨 본다. 그릇의 모양은 제각각일지라도 그 안에 담기는 진리의 말씀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모든 연출 작업에서의 가장 우선하여 마음에 새기는 연출의도가 되었다.
내 나이 40대에 들어서면서 또 새로운 기독문화사역의 지평을 넓혀 보고자 교회를 옮겼다. 수원에서 함께 자란 친구 목사님의 교회에서 열린 예배에 대한 요구가 높아 그동안 내가 작업해 온 여러 방법들을 교회에서 활용해주기를 바랬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한 자매와 결혼을 하고 두 아들을 낳았다. 그렇게 세월이 지났다.
작년 우리 가족이 남서울교회 창립 50주년 기념예배 홈커밍데이에 초청을 받아 참석하게 되었을 때 한껏 들뜨게 되었다. 14년 만에 남서울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역사들을 보면서 감사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교회가 건강하게 부흥 발전 된 모습이 너무도 감격스러웠다. 다채로운 예배 순서를 보면서 “어! 우리는 고신인데.” 하며 정색하던 어린 시절 후배의 목소리와 표정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쿡 웃었다. (이정래/연극연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