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쇠퇴하는 이유(2) 당당뉴스 임종석 | seok9448@daum.net
1. 구복신앙이라고 하는 것
기복신앙(祈福信仰)이라고도 하는 구복신앙(求福信仰)은 교회에서도 교회 밖에서도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그것이 정말 그렇게 나쁜 것일까. 필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도 강조해서 말씀하신 것이 복인데, 그것을 구하는 것이 왜 나쁘다는 말인가. 나쁜 것은 복 아닌 것을 복으로 알고 구하는 것이지 복 자체가 아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유교에서 말하는 오복을 가리켜 복이라고 한다. 1)오래 사는 수, 2)부유하게 사는 부, 3)건강하게 사는 강녕, 4)덕을 좋아하고 베푸는 유호덕, 5)깨끗하게 죽음을 맞는 고종명이 그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1)심령이 가난한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 2)(죄로 인해) 애통하는 사람, 3)온유한 사람, 4)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5)긍휼히 여기는 사람, 6)마음이 청결한 사람, 7)화평케 하는 사람, 8)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의 여덟 가지 경우를 가리켜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른바 팔복이다.
물론 믿는 사람이라 해서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오복을 기피할 것은 없다. 아니 그것을 누군들 싫어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복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진짜 복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세상의 오복을 복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진정한 크리스천이라 할 수 없다. 가장 큰 복은 누가 뭐래도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은 것이다. 이것에 비하면 좀 조심스러운 말이긴 하지만, 잘 믿고 잘 못 믿는 것도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믿고 안 믿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는 말이다. 무엇이 멸망에서 구원으로 옮겨진 사실보다 더 큰 복이 되겠는가.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이 사람인 것은 사람이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크리스천은 사람 중의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니고, 교회에 다닌다고 다 크리스천도 아닐 터이다.
그렇다면 사람 중의 사람인 크리스천은 어찌해야 하는가.
오직 믿음 하나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 이보다 더 큰 감격, 이보다 더 큰 희열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 엄청난 축복을 받고도 어찌 그분 앞에 무릎이 꿇어지지 않겠는가. 어찌 그분께서 복되다 하신 그 복을 뒤로 하고 세상의 복을 복이라 할 수 있겠는가.
복을 구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나쁜 것은 복 아닌 것을 복으로 알고 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열심히 구해야 한다. 심령이 가난할 뿐 아니라 애통하는 가운데 온유한 사람이 되게 해 주시라고, 의를 사모하고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되게 해 주시라고 기도해야 한다. 피스메이커가 되어 어떠한 박해도 은혜로 알고 달게 받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런 것들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구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복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보라! 예수께서 말씀하신 팔복을 복으로 알아 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를. 그리고 그렇게 가르치는 교회는 또 얼마나 되는지를.어떻게 벌었든 돈이 많으면 축복받은 사람이고, 정직하여 돈을 덜 벌었어도 가난하면 복을 받지 못한 사람으로 여기는 일이 교회 안에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이렇게 말하면 현실을 알고나 하는 소리냐고 화를 낼 사람도 많을 줄 안다. 알지만 현실이 하도 답답하여 해본 말이다.'
돈이나 출세가 하나님보다 위에 있어 그것이 교회를 지배하고 믿는 사람들을 지배하는 일이 보편화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리 기독교의 현실은 참담하다. 그러기에 교회가 죽어야 한다는 말이, 내가 죽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실상이 이러한데도 부자가 되고 출세를 하는 것이 왜 복이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그런 사람들의 말이 맞는다면 예수와 그분을 따르던 제자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집이 있었는가. 남달리 좋은 옷을 입었는가. 산해진미를 먹었는가. 잠깐 불경스러운 말로 하자면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저주를 받은 사람들이 아닌가.
우리가 갈증을 면하지 못한 것은 바닷물을 생수로 알고 퍼마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주신 배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요7:38)이 있는데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요4:14)이 있는데도, 그것을 외면하고 바닷물을 생수로, 샘물로 알고 퍼마시기 때문에 마시면 마실수록 목은 더 타들어 가는 것이다.
물론 절대 빈곤 가운데에서는 평안도 행복도 누릴 수 없다. 그러니 예수께서 “일용할 양식”(마6:11)을 주시라고 기도하라 하신 것이다. 그러니 가난한 이웃과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주신 샘물을 마셔 갈증이 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 나눔은 자연스러운 현생이고, 그것은 다시 기쁨의 생수가 되어 행복의 길로 이끈다.
교회가 성장을 멈추고 작아져 가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졌기 때문도 헌금 때문도 아니다. 그런 면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 데에 있다. 바닷물이 아닌 예수께서 주신 생수를 마셔 갈증을 가셔 내고 행복 속에 들어가 보라. 그리하면 나눔의 기쁨을 알게 될 것이고, 그것은 더 큰 행복을 부를 것이다. 그러면 교회를 떠나라고, 예수를 버리라고 등을 떠밀어도 발버둥이라도 쳐서 교회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려 할 것이고, 포근하기만 한 주님의 품안으로 파고 들 것이다.
2. 헌금이란 무엇인가?
오복 중 현대인들은 ‘부(富)’ 즉 물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다시 말해 물질만능사상 쪽으로 심하게 경도되어 있는데, 기독교조차도 그런 가치관으로 오염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 있어,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물질이라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 헌금이다.
헌금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십일조헌금에다 감사헌금, 맥추헌금, 추수감사헌금, 주일헌금 등 다양하다. 거기에다 설교를 헌금강조의 도구로 전락시키는가 하면, 교회를 헌금 모으는 집단으로까지 추락시키는 목사도 있다. 헌금의 개인 실적 그래프를 벽에 붙여 놓은 교회까지 있다.
이에 회의와 염증을 느껴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는데,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른다. 이를 보고도 처음으로 교회에 발을 들여놓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오히려 이상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헌금이 나쁜 것이냐고 반문하지 마라. 헌금은 물질이 아니라 마음을 드리는 것이다.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데 따르는 감격, 그 고마움의 마음을 물질로라도 드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어 드리는 것이다. 물론 헌금을 드릴 때마다 항상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마음의 여운만은 세월이 흐른다 해도 다는 지워지지 않는다. 설혹 지워진다 해도 그 감격, 그 고마움은 말씀의 숲을 거닐다 보면, 기도의 깊은 골방에 들어가 그분과 은밀하게 만나다 보면 또다시 솟아나게 된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그래서 기도를 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고 튼튼하게 해 주고, 말씀은 그 관계가 어긋나지 않고 바르게 되도록 붙잡아 준다. 그러니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하나님과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나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얼마나 뜨겁게 느끼느냐에 있다. 대상이 정말로 사랑하는 연인이라면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고 주고 또 주어도 더 주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고 헌금을 많이 할수록 좋다는 말은 아니다. 무엇이든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함과도 같은 것이다(過猶不及). 헌금에도 절제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인생길에 굴곡이 있듯이 신앙도 고조될 때가 있고 침체될 때도 있다. 신앙이 한창 고조된 기분에 따라 형편을 벗어난 헌금을 했다가 낭패를 보는 예가 있는가 하면, 많이 드릴수록 믿음이 좋다는 식의 잘못된 생각으로 과하게 헌금을 하여 어려움을 겪는 예도 적지 않다.
헌금은 많이 드린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형편에 맞게 드리는 것이 제일 좋은 헌금이다. 그리고 헌금은 누구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교육시키거나 권면한다는 미명으로 아닌 척 강요하는 경우도 없지 않은데, 안 될 일이다.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없거나 아까운 마음이 들거든 안 하는 것이 좋다. 남의 눈치 같은 것은 조금도 볼 것이 없다. 사람의 눈을 의식하고 하는 일은 선행이 됐건 헌금이 됐건 불신앙이다. 단 헌금이 필요하다는 건 알지만 자신의 신앙이 약해 기쁘게는 아닐지라도 신앙의 성장을 위해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거든 그리하는 것이 좋다.
헌금은 하나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드리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지으신 천지가 다 당신 것인 그분께서 무엇이 모자라 우리에게 헌금을 요구하시겠는가.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마음이다.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6:21)
“각각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후9:7)
임종석 -
임종석은 전주대학교 일본어교육학과를 졸업했으며, 일본 도호쿠(東北)대학의 석‧박사 과정을 통해 일본근대문학을 공부했다(문학박사). 재일 센다이한국교육원장, 충남대학교 교수, 한국일본문화학회 회장, 한국일본기독교문학회 회장, 우리집교회 협동목사 등의 일을 했다.
정년퇴임 후로는 저술과 칼럼 쓰는 일 등으로 자기 나름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여 기도하며 노력하고 있으나 실패뿐이어서 악취만을 풍기고 있는 은퇴목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