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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경북 영주시 가흥1동(문정동 하한정) 일명 한정마을(경북전문대학 뒷편 서천 건너) 건립: 1938년건립, 1988년 重修
현 경북전문대학 현대아파트 뒷산을 넘으면 소백산에서 발원한 서천(西川) 건너편 마을이 반남박씨 판관공파의 삼락당과 소고대 유적이 있는 한정마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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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마을'이란 이름은 소고선생이 맏아들 녹을 시켜서 세운 하한정(夏寒亭) 정자의 이름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지금은 제방과 도로 확장 등으로 옛 모습이 많이 훼손되었지만 하얀 모래밭과 어우러진 맑게 흐르는 마을 앞의 강(서천)은 매우 아름다운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한정마을에서는 소고선생과 아들 녹, 소고선생의 손자 박종무에 관한 역사를 배울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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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큰 느티나무가 있는 뒷산에 위치한 소고대(嘯皐臺)는 1972년 후손들이 소고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신축된 것입니다. 이 자리는 소고선생이 맏아들 녹의 집에 있으면서 맏아들을 시켜서 하한정(夏寒亭)이라는 정자를 지어 풍광을 즐기던 장소였습니다. 하한정(夏寒亭)은 없어지고 지금은 현판만 전해오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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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락당(三樂堂)은 1938년 소고 박승임(朴承任 11세)선생의 손자이자 녹의 아들인 박종무(朴從茂)선조의 유덕을 추모하고자 후학들이 세운 건축물입니다. 삼락당 자서(自書)에서 “ 선(善)을 행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란 뜻으로 거처하는 방을 최락와(最樂窩)라 했고, 독서(牘書)만한 즐거움이 없다는 뜻으로 서재(書齋)를 지락재(至樂齋)라 했으며, 만족(滿足)함을 알면 빈천(貧賤)해도 즐겁다는 뜻으로 거처하는 대청을 역락헌(亦樂軒)이라 하여 통틀어 삼락(三樂)이라 이름하노라 ” 했습니다. 삼락당이란 당호는 바로 이러한 정신적 배경에서 태어났습니다. 士林(벼슬하지 않고 물러나 학문에 힘쓰는 선비)으로서 자신이 거처하는 집의 각각의 이름을 짓는데도 학자다운 각오를 밝혀서 현판을 걸고, 흐트러지지 않기를 다짐했던 정신을 볼 수 있습니다. |
지금은 삼락공이 살던 집이 전하지 않아 현판을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1938년에 후학들이 세운 건축물은 학문에 필요한 서적을 모아두는 서고, 책을 발간하기 위하여 만들어놓은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이 있습니다. 내부에 보관되고 있던 목판은 현재 안동시에 있는 국학진흥원에 위탁 보관되고 있습니다. (국학진흥원 홈페이지 www.koreastudy.or.k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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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락은 최락(最樂) 지락(至樂) 역락(亦樂)을 말한다.
최락(最樂) : 선(善)을 행함은 낙(樂)으로 한다
지락(至樂) : 평생(平生)의 제1락(第一樂)은 독서(讀書)하는 것이라
역락(亦樂) : 만족(滿足)을 아는자(者)는 빈천(貧賤)해도 또한 낙(樂)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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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자는 고장 선비 삼락 박종무 선생을 추모하여 지난 무인년(1938년)에 그 후손들이 세웠다. 그런데 이 정자가 하한정으로 잘못 알려진 것은 대략 다음과 같은 사연으로 해서였다. 일찍 소고선생께서 뒷새(두서)에 계시다가 아름다운 풍광과 조용하고 깨끗함을 취하여 만년에 여기 초곡에 옮겨 터전을 열고 그 아드님 취수공(醉睡公)을 시켜 지금 소고대 자리에 정자를 짓고 하한정(夏寒亭)이라 이름하셨는데 여러 해 뒤에 그 정자를 종택 옆에 옮겨 세웠더니 오랜 세월에 정자는 없어지고 그 현판과 기문만이 남아오던 바 그 현판과 기문을 이 정자(三樂堂)에 걸게 됨으로 하여 그로써 하한정(夏寒亭)으로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정자(夏寒亭)는 이룩된지 50년 바람 비에 매우 퇴락해저서 지난 여름(1988년 7월) 여러 자손들이 성력을 모아 보수의 결사를 일으켜 기둥을 바로잡고 지붕을 |
고치고 칠을 입힘으로써 크게 수리하고 현판(三樂堂)과 기문을 새로 마련하니 실로 그 면모가 새로워졌다. 삼락공은 약관에 진사에 올랐으나 명리에 초연하여 여기 초곡에 숨어 학문과 행실(行實)에 힘쓰며 생애(生涯)를 자적(自適)한 독실(篤實)한 선비로서 그 형(兄) 육우당과 함께 사림(士林)에 길이 추앙(推仰)되었다. 공(公)은 삼락당 자서(自書)에서 “선(善)을 행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란 뜻으로 거처하는 방을 최락와(最樂窩)라 했고, 독서(牘書)만한 즐거움이 없다는 뜻으로 서재(書齋)를 지락재(至樂齋)라 했으며, 만족(滿足)함을 알면 빈천(貧賤)해도 즐겁다는 뜻으로 거처하는 대청을 역락헌(亦樂軒)이라 하여 통틀어 삼락(三樂)이라 이름하노라” 했다. 이번 보수가 필몰(畢沒:마치다)되자 새롭게 꾸며진 이 정자에 하루는 여러 자손들이 자리를 같이하여 서로 다짐하기를
한층 화목을 도타이 하면서 높으신 선조님의 유덕을 한결같이 지키고 추모(追慕)하여 길이 정자를 소중이 보호(保護)함과 함께 이 뜻을 대대로 무궁(無窮)히 이어지도록 모두 한 마음으로 힘쓰자
고 했으니 필시 그 다짐은 충심히 지켜질 것이며 또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다. -1988년 7월 후손 돈서(敦緖) 삼가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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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한정마을에 전해오는 이야기로
영주향토지 송지향 작 상(上)권 전설편
에 ‘족제비의 천국 영주시 서리골 어느 족제비의 보은(報恩)이 빚은 살아있는 실화'라는 제목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서릿골은 지금의 삼락당과 소고정이 있는 마을과 인접해 있습니다.
-이하
영주향토지
의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는 전설이기보다는 영주의 명족 반남박씨 동족 마을 영주시 문정리 반곡(서리골)에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실화이다. 연화산 북쪽 기슭 장수면과 경계에 자리한 서리골은 소고 박승임(朴承任)의 6대손 정구(鼎九)선비가 터전을 열어 영조(英祖)때 그 자손이 세거하던 동쪽마을이다. 대개 족제비란 쥐나 뱀을 잡아먹어 사람에게는 유익한 동물이지만 사람들이 탐내는 가죽이나 꼬리털을 가졌다는 것이 죄 아닌 죄여서 족제비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 눈에 뛸세라 조심조심 숨어살아야만 하게 생긴 족속이다. 그러나 여기 서리골 족제비만은 예외여서 대낮에 떼를 지어 골목길에 활개를 치고 다녀도 누구하나 건드리는 법이 없다. 옛날 이곳에서 어느 한 족제비에 얽힌 희한한 한 토막 사연이 계기가 되어 서리골 마을은 수백 년 내로 족제비의 천국을 이루고 있음이다.
정조(正祖) 무렵 진사 박문엽(朴文燁: 소고공의 손자, 삼락공 박종무의 아들)의 둘째아들 정구선비는 한정마을에서 서리골로 살림을 나 살면서 그 백씨(형님)에게 문안을 드리기 위해 매일같이 한정마을 큰댁에를 오르내렸다.
아직 겨울이 채 물러가지 않은 이른 봄 어느 날이었다. 정구선비가 그날도 문안 길로 동구 느티나무 아래를 지나는데 갑자기 커다란 족제비가 달려들어 선비의 도포자락을 물고 기를 쓰고 끌어당기는 것이 아닌가? 선비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음이리라 짐작되어 족제비가 끄는 대로 따라갔더니 과연 까닭이 있었다. 끌려가 보니 부근에 넓은 웅덩이가 있었는데 새끼 족제비들이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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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거니! 선비는 곧 옷을 걷고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새끼 족제비들을 모두 건져내어 옷자락으로 물기를 말끔히 닦아주고 돌아섰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난 뒤 어느 날 커다란 족제비 한 마리가 선비의 집 헌함마루에 와서 죽어 있었다. 족제비 털은 황모라 하여 본래 황모무심필이라면 문방에서는 귀물로 여기는 것이다. 전날 정구선비에게 구원을 받은 바로 그 족제비가 생명이 다하게 됨에 버려야 하게 된 몸으로 선비의 은혜를 갚으려 함이었던 것이다. |
정구 선비는 그 털로 붓을 만들었다. 그리고 얼마 뒤에 과거가 열림에 정조(正祖) 22년(1798)에 그 손자 시원(時源)이 그 붓을 가지고 응시하여 당당히 갑과에 급제하는 영광을 차지한바 되었으니 실로 희한한 인연이다. 이렇게 맺어진 서리골 반남박씨와 족제비와의 사이는 지금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서리골 수 십 가구는 거의 그 선비의 자손이어서 오늘도 한결같이 족제비를 보호한다니 진실로 훈훈함이 감도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 |
첫댓글 잘 봤습니다. 영주에 가면 한번 둘러 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