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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즈버그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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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북 전쟁의 일부 | |||||||
전투 3일째를 묘사한 그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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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북부 연방 | 아메리카 연합국 | ||||||
지휘관 | |||||||
조지 미드 | 로버트 리 | ||||||
병력 | |||||||
83,289명 | 75,054명 | ||||||
피해 규모 | |||||||
23,049명 전사 3,155명 부상 14,529명 포로 및 실종 5,365명 | 28,000명 전사 3,500명 부상 18,000명 포로 및 실종 6,500명 |
게티즈버그 전투는 1863년 7월 1일부터 1863년 7월 3일까지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 인근에서 게티즈버그 전역 중 가장 중요한 전투로 남북 전쟁에서 가장 참혹한 전투였으며, 흔히 남북 전쟁조지 미드 장군이 이끄는 포토맥군은 남부의 로버트 리 장군이 이끄는 북버지니아군
리는 챈슬러즈빌 전투(1863년 5월 1일 ~ 5월 3일빅스버그버지니아
원래 빅스버그에 대한 구원 계획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롱스트리트의 2개 사단을 빅스버그로 보내 빅스버그를 구원하는 안이 검토되었다. 그러나 리가 이 방안에 반대하고 대신 롱스트리트의 병력을 포함하여 동원할 수 있는 가용 병력을 모두 동원하여 필라델피아나 워싱턴 D.C.
롱스트리트의 2개 사단을 머나먼 빅스버그로 보내도 제때에 맞춰 빅스버그를 포위한 북군(이때 지휘관이 율리시스 그랜트였다)을 물리치고 빅스버그를 구원할 수 있을지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리의 7만 5천 병력은 펜실베이니아의 필라델피아, 메릴랜드의 볼티모어, 그리고 워싱턴 D.C.
리는 이 작전으로 북군에 치명타를 가해 링컨
6월 3일, 리의 군대는 버지니아주 프레더릭스버그제임스 롱스트리트토마스 "스톤월" 잭슨리처드 이월 소장이 맡았고, 3군단은 A. P. 힐게티즈버그의 남군 전투 서열은 북버지니아군
조지프 후커링컨 대통령은 후커를 곧 조지 미드챈슬러즈빌 전투조지프 맥클랠란게티즈버그의 북군 전투 서열
게티즈버그 전역의 첫 번째 대규모 교전은 6월 9일 버지니아의 쿨피퍼에서 가까운 브랜디 기차역에서 기병대 간에 벌어진 전투젭 스튜어트
6월 중순, 리의 북버지니아군은 포토맥 강을 건너 메릴랜드윈체스터와 마틴스버그에서 북군 수비대를 격퇴한 후, 이월의 2군단이 6월 15일6월 24일과 6월 25일6월 25일부터 6월 27일
그 사이에 논쟁 속에서 리는 젭 스튜어트에게 기병대를 맡아서 북군 주변을 견제하도록 했다. 어쨌거나 리의 명령은 상당한 재량권을 부여한 채 스튜어트에게 전달되었고, 두 장군은 스튜어트 기병대의 장기간 부재 및 본대에 남았을 경우 할 수 있던 역할을 할당하지 못해 벌어진 실패에 대한 책임이 있다. 스튜어트와 휘하의 여단장 3명은 첫째 날과 둘째 날 전투 및 게티즈버그로 접근하는 중요한 시기에 자리에 없었다. 그들은 6월 9일에 기습을 당해 망신을 당한 것에 대해 앙갚음을 하기 위해 너무 깊숙이 북군 후방에 침투하는 바람에, 포토맥군의 동향을 파악하고 그들의 활동을 견제하여 본대를 보호한다는 기병대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것이다.
6월 29일, 남군은 챔버스버그로부터 반원형으로 서스퀘하나 강과 해리스버그와 라이츠빌
한편 하퍼스페리 수비대 병력 사용 문제에 대한 논쟁 때문에 링컨에 반발한 후커는 사표를 제출했고, 후커를 해임할 명분을 찾고 있던 링컨과 북부연방군 총사령관 헨리 할렉6월 27일에서 6월 28일 사이에 당시 5군단 군단장이던 조지 고든 미드
6월 29일, 리가 포토맥군이 포토맥 강캐시타운존 뷰퍼드
양군을 통틀어 제일 먼저 게티즈버그로 온 뷰퍼드는 한눈에 게티즈버그와 주변 지형이 고지를 먼저 장악한 쪽에 유리하다는 것을 간파했다. 뷰퍼드는 즉각 휘하 기병대를 말에서 내리게 하여 전투 준비에 돌입했고, 한편으로는 1군단장 레이놀즈 장군에게 현재 상황을 알리고 오래 버틸 수 없으므로 즉시 휘하 군단과 함께 와줄 것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6월 29일의 일이었다. 남군은 이러한 사정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고, 기껏 소규모 정찰대 수준으로만 생각했다. 남군의 스튜어트 기병대가 자리를 비운 결과였다.
6월 30일 힐 군단의 일부가 캐쉬타운에 주둔하는 동안, 힐의 여단 중 하나인 존스턴 페티그루헨리 히스[1]
페티그류 부대가 게티즈버그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북군의 존 뷰퍼드7월 1일
뷰퍼드 장군은 남군이 고지의 통제권을 장악할 경우 게티즈버그 남쪽의 고지대가 갖는 전술적 중요성을 바로 깨달았다. 게다가 게티즈버그는 사방으로 뚫린 도로 덕분에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다. 미드의 본대는 이동에 많은 시간이 걸릴 예정이었다. 뷰퍼드는 게티즈버그 서쪽의 3개 능선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3개 능선은 신사 능선(Herr Ridge), 맥퍼슨 능선(McPherson Ridge), 그리고 마을을 향해 서쪽에서 동쪽으로 뻗어있는 신학교 능선묘지 언덕, 묘지 능선, 그리고 컬프스힐
히스 사단은 제임스 아처 준장과 조지프 R. 데이비스윌리엄 갬블북군 1군단(존 F. 레이놀즈
파이크 북쪽에서 데이비스(히스 사단의 여단장)가 린샌더 커틀러솔로몬 메레디쓰 준장이 지휘하는 북군의 강철여단
전투 초기, 레이놀즈 장군은 숲 동쪽에서 직접 병력 및 포병들을 지휘하던 중에 저격을 당해 말에서 떨어져 쓰러졌다. 지휘권은 애브너 더블데이존 M. 브로큰브로
페티그루의 사우스캐톨라이나 여단은 19 인디애나 연대를 측면에서 공격하여 철의 여단을 왔던 길로 되돌려 보냈다. 26 노스캐롤라이나 연대(약 900명으로 이루어진 가장 큰 연대였다)가 심각한 피해를 입어 대략 212구의 시체를 남겨놓고 철수했다. 그들은 남북을 통틀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연대였고, 3일째 전투가 마무리되던 시점에서는 겨우 60명만이 서 있을 수 있었다. "강철 여단"은 묘지 능선을 향해 천천히 밀려났다. 힐은 윌리엄 펜더
서쪽 전투가 진행돼 감에 따라, 근처에서 집결 중이던 부대에 내린 리의 명령에 따라 케쉬타운을 향해 서쪽에서 행군해오던 이월의 2군단 소속 2개 사단은 게티즈버그로 향하는 Carlisele와 해리스버그 가도를 따라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사이 북군 11군단 (올리버 하워드
불행히도 북군은 충분한 병력이 없었다. 챔버스버그 파이크의 북쪽에 전개한 커틀러는 그의 우익이 텅 비어 있었다. 11군단 소속 극좌익의 사단은 방어선을 강화할 시간을 가질 수 없었고, 더블데이는 그의 예비여단을 방어선에 투입시켜야 했다.
오후 2시경, 로버트 E. 로즈와 쥬벌 앤더슨 얼리에드워드 A. 오닐과 알프레드 아이버슨의 여단들은 참나무 언덕 남쪽 존 C. 로빈슨프랜시스 C. 바로우
마을의 북쪽과 서쪽 양쪽에서 북군의 방어선이 붕괴되자, 하워드 장군은 마을 남쪽의 고지대인 묘지 언덕으로 후퇴를 명령했고, 그곳에서 그는 아돌프 폰 쉬타인웨어
리 장군은 북군이 고지대를 장악하고 있을 경우, 방어면에서 잠재력을 이해했다. 그는 이월에게 "가능하다면" 묘지 언덕을 점령하라는 명령서를 보냈다. 많은 역사가들이 이것을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한 큰 실수였다고 평가하는데, 이때 이월은 공격을 선택하지 않았다. 혹자는 이때 리가 "반드시 점령하라(must take)"라고 명령해야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7월 1일 저녁 및 7월 2일 아침 내내 북군의 2군단, 3군단, 5군단, 6군단 및 12군단을 포함하여 양측의 보병들은 계속 전투 지역으로 집결했다. 롱스트리트의 3번째 사단인 조지 피켓 사단은 챔버스버그
북군 방어선은 마을 남동쪽 컬프스 힐에서 시작하여 북서쪽으로 마을에서 남쪽인 묘지 언덕으로, 다시 묘지 능선을 따라 대략 3km 떨어진 남쪽의 리틀 라운드 탑루터 신학교 능선
리의 7월 2일 전투 계획은 롱스트리트의 1군단에게 북동쪽으로 바라보며 에미츠버그 도로에 방어태세를 갖춘 북군 좌익을 공격할 위치를 은밀하게 장악하고 북군 방어선을 압박할 것을 요구했다. 공격 순서는 존 벨 후드와 라파예트 맥로우 사단이 시작하고, 힐의 3군단 소속 리처드 H. 앤더슨에드워드 존슨
그렇지만, 리의 계획은 불완전한 정보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는 스튜어트가 계속 게티즈버그 현지에 없어서 리가 적군의 동태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북군 후방에서 계속 노략질을 하던 스튜어트는 7월 2일 오후 늦게나 게티즈버그로 돌아왔던 것이다. 북군의 좌익을 우회하여 공격하는 대신에 맥로우가 지휘하는 롱스트리트의 좌익 사단은 다니엘 시클스의 북군 3 군단앤드루 험프리 준장의 사단(에미츠버그 도로 주변 배치)과 데이비드 B. 버니
롱스트리트는 가능한 한 일찍 공격했어야 했다. 그러나 롱스트리트는 리에게서 아직 도착하지 않은 1개 여단을 기다리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청했고, 그 동안 할당된 위치에 병력을 배치하는 동안 그의 부하들은 리틀 라운드 탑의 북군 신호 중계소의 감시권 안까지 도달했다. 게다가 시클스의 방어선 이동으로 그들을 찾느라 보낸 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발각되는 것을 피하고자 위해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행군한 끝에, 후드 사단과 맥로우 사단은 오후 4시~5시까지 공격을 시작하지 못했다. 그들이 이렇게 시간을 허비한 것은 시클스가 3군단을 멋대로 전진 배치하는 바람에 목표를 찾을 수 없어 헤맸던 것도 한 원인이 되었다.
롱스트리트 휘하의 사단들이 북군 3군단을 맹렬히 공격하자, 미드는 5군단 전체와 2군단 소속 콜드웰 사단, 12군단의 대부분과 새로 막 도착한 6군단의 일부를 증원군으로 보내야 했다. 공격에 참가한 롱스트리트의 사단은 조지 피켓복숭아 숲, 리틀 라운드 탑, 악마의 소굴, 밀밭지대
한편, 5군단 소속 스트롱 빈센트(Strong Vincent) 대령의 소규모 여단 병력이 북군 위치에서 가장 중요한 리틀 라운드 탑거버너 워렌메인 20 연대
저녁 7시 경, 컬프스힐을 목표로 한 남군 2군단 소속 존슨 사단의 공격은 늦게 시작되었다. 그곳을 지키던 북군의 12군단 대부분은 롱스트리트의 공격에 대비하여 좌익으로 이동하고 없었고, 오직 언덕에 남은 병력이라곤 조지 그린
어둠이 깔릴 무렵, 얼리의 2개 여단은 동쪽 묘지 언덕에 포진한 북군 11군단을 공격했다. 묘지 언덕은 앤드루 L. 해리스로버트 E. 로즈
젭 스튜어트와 그의 4개 기병여단은 오후 늦게 게티즈버그에 도착했지만, 2일째 전투에서도 여전히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웨이드 햄프턴 여단이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가 이끄는 미시간 기병대와 게티즈버그의 북동쪽 헌터스타운에서 소규모 전투를
리 장군은 7월 3일 금요일에 전날과 똑같은 기본 계획을 가지고 새로 공격하고자 했다. 롱스트리트 장군은 북부의 좌측을 공격하자고 했지만, 이월은 컬프스힐을 공격했다. 그러나, 롱스트리트가 채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북군 12군단이 남군이 장악한 컬프스힐에 기습 포격을 가한 후 맹렬한 공격을 가해왔다. 그들은 전날 자신들이 잃은 진지를 되찾으려고 했다. 이월의 남군은 컬프스힐
리는 그의 작전 계획을 변경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지금 롱스트리트는 묘지 능선의 북군 방어선 우측 중앙에 위치한 북군 2군단에 대한 공격에서 힐 군단 소속 6개 여단과 자신의 1군단 예하 피켓의 버지니아 사단을 지휘하게 될 것이었다. 공격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모든 남군 포병대가 보병대가 도착할 때까지 적 방어선을 두들겨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오후 1시경, 170문의 남군 대포가 아마도 전쟁 중에 가장 대규모로 포격을 퍼부었다. 북군 포병대는 남군 보병의 공격에 대비하여 탄약을 아끼기 위해 처음에는 반격을 하지 않았다. 15분 가량 기다린 후, 80문 또는 그 이상의 북군 대포가 반격을 시작했다. 북버지니아군은 결정적으로 포탄이 부족했고, 북군 거점에 충분한 포격을 할 수 없었다. 오후 약 3시경, 포격이 잠잠해졌고, 12,500명의 남군 병사들이 산등선으로부터 나와 묘지능선을 향해 4/3 마일(1200미터)을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피켓의 돌격
남군이 공격 지점으로 전진할 때 북군 2군단의 소총 집중 사격과 묘지 언덕 및 리틀 라운드 탑에서 쏴대는 격렬한 포격 때문에, 공격대의 거의 절반이 공격개시선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오른쪽의 개요도에서 보듯, 남군은 엄폐물이 없는 탁 트인 평원에서 3면에서 포격을 당한 것이다. 비록 "꼭짓점"으로 불린 낮은 돌담 울타리에서 북군 방어선이 일시적으로나마 무너지기는 했지만, 잡목 숲으로 불린 북쪽 방향에 있던 지원부대가 틈새를 메우며 달려들었고, 남군의 공격은 격퇴되었다.
7월 3일에는 중요한 2번의 기병 전투가 있었다. 스튜어트는 남군 좌익을 보호하고 묘지 언덕 공격에서 보병대가 북군 우익을 강타하여 북군의 보급선과 통신선을 차단하는 데 성공을 거두면, 그 성공을 이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게티즈버그 동쪽 5킬로미터 지점에서 지금은 "East Cavalry Field"(첨부 지도에는 보이지 않으나 요크와 하노버 도로 사이에 있다)라고 불리는 곳에서 스튜어트 부대는 북군 기병대와 충돌했다. 북군 기병대는 데이비드 맥그레그 준장과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세이버 검웨이드 햄프턴저드슨 킬패트릭엘런 파른스워스
양측 군대가 피에 젖은 들판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던 7월 4일, 빅스버그가 율리시스 그랜트
게티즈버그 전투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리 장군은 그의 부하들이 무적이라는 믿음을 계속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리의 군복무 경력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난 5월 초 챈슬러즈빌 전투
각 군대는 이동했지만, 게티즈버그에는 청소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두 군대는 전사, 부상, 실종 및 포로 등으로 도합 51,0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7천 명 이상의 병사들이 즉사했고, 빨리 매장해야 할 이 시체들은 뜨거운 여름 햇볕 아래 버려졌다(설리번의 사진에 나와 있는 그대로다). 5천여 마리의 말 시체는 마을 남쪽에서 소각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불쾌한 악취에 시달렸다. 전쟁의 피해는 국립 군인묘지가 헌정된 11월 19일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게티즈버그 연설
오늘날, 게티즈버그 국립 묘지와 게티즈버그 전장은 미국 국립공원게티즈버그 군사공원
https://youtu.be/P7m5x9b5TxA
피켓의 돌격이 실패한 뒤 패전하자 리는 "아...잭슨이 살아있었더라면..."이라 말했다고 한다. 리의 오른팔이자 명장인 잭슨이 만약 살아있었더라면 게티즈버즈 전투는 판도가 바뀔수도 있었을 것이다. 3일간 계속된 게티즈버그 전투는 전쟁 중 가장 큰 희생자를 낸 전투였다.
접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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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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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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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 부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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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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