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설날 앞두고 마음 채운 부모님 생각
2023년 계묘년 설날을 앞둔 오늘은 대한이다. 새벽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에 어선들이 고기 잡을 자리로 불을 켜고 달린다. 보고 있자니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차오른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아버님이 제대 후 고향 제주에 정착, 일가를 책임지기 위해 농사 지었다. 의형제와 수확한 마늘을 가지고 춘천에서 거래하려 했던 일이 상대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낭패를 당했다. 의형제에게 뒷수습해서 돌아가게 하고 아버님은 둘째 동생이 머물고 있던 속초를 찾았다. 당시 수복되었던 속초는 오징어 명태 활황으로 일거리가 많았다. 큰 덕장의 인부로 들어가 일해서 모은 돈 가지고 집에 가려 하셨다. 제주에서는 집 나선 아들이 어찌되었나 궁금해하고 걱정한 할머님이 수소문해 소식 듣고 속초에 다녀오기로 하셨다. 밑천을 마련하려 정신없이 일하고 있던 아버님과 동생이 사는 속초에 다섯 살 난 손자, 나를 데리고 할머니가 나타나셨다. 깜짝 놀란 아버님은 어쩌자고 이리 하셨냐며 할머니와 다투셨다. 심기가 불편해진 할머님은 나를 아버님께 두고 가면 빨리 정리하고 올줄 알고 혼자 고향에 돌아가셨다. 혼자도 버거운 삶에 눈을 뗄 수 없는 어린 아들이 혹처럼 붙었으니 얼마나 난감하셨을까? 일하는 덕장 주인집에 부탁하여 맡기고 일하면서 살길을 찾으셨다. 도저히 감당못할 지점에 돌아갈 생각보단 매일의 일거리로 밑천을 쌓을 수 있는 속초로 제주의 가족을 불러내셨다. 그렇게 해서 타지인 속초 청호동에 발딛은 1959년, 맨손으로 터잡으며 건강한 몸을 앞세워 희망을 일구셨다.
부지런한 부모님은 마당이 넓은 집을 장만하고 오징어 건조장, 명태 덕장을 세웠다. 어판장에 나가 오징어와 명태를 사서 말려 파는 건조업을 시작하면서 가정 형편이 좋아졌다. 3남1녀를 키우며 여유가 생긴 아버님은 마을공동체를 돌아보셨다. 반장, 통장, 청호동개발위원장, 새마을지도자, 마을 일로 어울리며 영향력을 키워가셨다. 국가가 혼란하고 어려운 때에 배우지 못한 한을 주경야독 동력삼아 현실의 문제를 돌파해 갔다. 아기가 태어나면 이름 지어달라 결혼하게 되면 택일해 달라 마을분들이 찾아오셨다. 날씨가 관건인 건조업을 하시면서 일본의 일기예보까지 들어가며 기록해 두고 판단 결정하여 승률을 높여 가셨다. 자연 동업 종사자들도 아버님을 많이 따랐다.
아버님은 초대 청호초등학교 운영위원장을 맡아 배움터를 돌보셨다. 청호동 청소년공부방을 만들어 저녁이면 찾아오는 학생들을 위해 뒷바라지하는 일을 즐겼다. 청호동노인회장으로 청호동노인회 경로회관을 짓고 운영하는데도 청호새마을금고 이사장 재직하며 받은 사례금을 적립, 기부하여 기반을 다지셨다. 제주도민 친목회를 위해서도 앞장서 일하셨다. 일본에 계신 고모할머니의 후원으로 3천여 평 야산을 구입 ‘탐라인의 꿈동산’을 조성하셨다.
어머님은 아버님의 바깥 활동에 순응하며 집안 틈을 메워 비바람 막고 가족을 먹여 살렸다. 지지고 볶는 일상의 자리는 어머님이 어르고 펼쳐 놓은 손끝따라 길이 나고 밖으로 뻗었다. 알아도 모른척 기다리며 참아주신 어머님, 낳으시고 길러주신 은혜로 자녀들은 이제 제 일가를 이루어 지역사회 일원으로 몫을 다하고 있다. 지난 일 돌아보며 예수님 믿고 살아갈 새 힘 더해주신 부모님 은혜에 감사 드린다. 샬롬^^
백성호(白成豪, 1928.8.16.) 아버님은 81년의 삶을 사셨다. 돌아가신지 14년, 지금 살아계셨으면 95세다.
강오생(姜午生, 1930.11.6.) 어머님은 71년의 삶을 사셨다. 돌아가신지 22년, 지금 살아계셨으면 93세다.
제민일보 2006.8.17 기사 중
[아버님의 “제주떠나 속초정착기”에서]
나는 일본국 대판시에서 형님(성부) 사망으로 1948년 7월 대판을 떠나 대마도를 경유, 부산에 도착하였다. 다시 부산에서 여수를 거쳐 진도에 도착하였다. 태풍주의보로 5일만에 제주가는 연락선을 타고 9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귀국한 뒤 제주 4.3사건 발생으로 제주도가 온통 혼란상태에 있었다. 남로당조직원이 활보하고 빨치산 대원들이 야간에 경찰지서와 민간인을 습격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참으로 대동아전쟁의 무서운 것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애궂은 농민들만 매일같이 불안과 공포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부모님께 자세히 형님의 사망에 대해 말씀 올리고 제주를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어떤 방법이건 부산에만 간다면 일본으로 떠나는 것은 모두 준비가 되고 있었다.
며칠이 지난 후 부모님께 부산으로 떠날 것을 말씀 올렸다. 부모님은 할아버님과 백부님께 사유를 말씀드리니 드디어 가족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할아버님께서 말씀하시길 “너의 형 성부도 얼마전 귀국 시 혼사까지 정해놓고 떠나더니 너마저 왔다가 훌쩍 떠나버리면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하고 혼인이나 하고 떠나라는 것이다. 백부님이며 부모님까지 손목잡고 타일렀다. 이날이 나의 한평생 비운으로 향하는 불운의 날이었다. 나는 의지가 강하지 못하여 부모님의 요구에 응하고 말았다.
얼마없어 빨치산 공산당들의 습격으로 부락에 정유문 부친댁과 김원택 부친댁 등 많은 사람이 사망하고 가산이 불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하루 고생하는 것이 지옥같았다. 그런 와중에 혼사를 정하게 되었다. 중매는 무릉리 백무숙 삼촌님이 소개하였는데 진주강씨 집안인 강유문의 3녀 강오생이었다.
때는 1948년 7월에 귀국하고 당년 음력 12월 2일 결혼식을 올렸다. 일기가 불순하여 결혼식날 많이 고생들 하였다. 결혼 후 나는 일본으로 떠날 것에만 신경을 쓰다보니 부부의 정이란 별로 없었다. 그럭저럭 세월을 보냈다. 다음 해 1949년 3월에 고향을 떠나 목포에 도착하였다.
목포에는 백안숙 삼촌님의 부친인 할아버님이 살고 계셨다. 할아버님을 찾아가니 반갑게 맞아주셨다. 나는 일본에서 고향에 온 사정과 결혼, 일본으로 갈 계획을 말씀드렸더니 지금 육지도 좌우파가 자주 충돌하여 세상이 어수선하니 매사에 조심히 행동할 것이며 부산을 가려면 어떻게 해서 부산행 열차를 타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날 떠나기로 했는데 마침 뜻밖에도 양군백 형님을 상봉하게 되었다. 군백형님은 나보다 2년 선배로 자라면서 다정하게 지낸 사이다. 참으로 반가웠다. 둘이서 하루를 목포에서 지내고 다음날 떠나기로 하였다. 군백이 형님은 군산시에 거주한다고 하여 함께 떠나기로 했다. 군백 형님 말씀이 올라가는 길에 군산에 들려 구경도 하고 며칠 같이 있다가 떠나라는 것이다. 그리하기로 하고 다음날 군산에 도착하였다.
군산에 와보니 지규할아버님의 둘째부인, 안숙 삼촌과 그의 모친을 만나게 되었다. 기뻤다. 군백 형님은 옆집에 살고 있었다. 다음날 군백형님과 같이 공장에 가보게 되었다. 가정에서 쓰는 가위를 만드는 공장인데 군백형님은 주물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위 조립용 나사와 보드가 없어서 조립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품을 못만들어 놀고 있었다.
다음날 내가 가서 도구를 만들어 주고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 소식을 사장인 제주 명월 양씨가 듣고 직접 찾아와 통사정을 하는 것이었다. 기술자가 올 때까지만 해달라고 애걸복걸하는 바람에 몇일동안 일을 해주다 보니 정도 들고 해서 잘 대접받아 가면서 세월을 지내다 보니 일본으로 갈 생각을 잊어버렸다.
세월은 흘러 5월이 되었다.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성은이 형님이 해녀를 인솔하고 00형님을 데리고 고군산 장자도에 왔는데 전복이 많이 생산되어 서울 인천항에 전복을 갖다놓고 매일 서울에 가서 판매를 해야하는데 동생이 올라가서 일을 해주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마음 약한 나는 형님을 따라 인천항으로 갔다. 인천항에는 큰 목선을 정박시켜 전복 상자를 매달아 놓고 매일 30상자씩 부두에서 삼륜차로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판매를 하였다. 형님의 사업은 잘되어 1년의 작업을 마치고 해녀를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나는 부산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가겠다고 형님에게 말씀드리고 군산으로 갔다. 우선 안숙삼춘님댁에서 임시로 머물면서 부산으로 갈까 해서였다. 군산에서 다시 군백형님을 만나 고향에서 왔던 성은이 형님 이야기며 인천에서 전복 팔던 이야기도 하며 하루를 같이 지냈다. 그런데 또다시 공장사장 양씨가 찾아온 것이다. 하도 식사나 함께 하자고 해서 군백이 형님과 3인이 식당에 가서 많은 대접을 받고나니 너무나 고마웠다. 그런데 양사장이 통사정을 하면서 몇 달만 일을 좀 해달라는 것이다. 나는 마음이 모질지 못해서 또다시 승낙하고 말았다. 나는 이 시점부터 불운이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대마도 춘봉이 누님은 얼마나 기다리겠는가. 내가 제주로 들어갈 때 춘봉이 누님에게 일화 2만원과 외국인등록증을 보관하면서 고향에 가면 곧 오겠다고 말해놓고…, 나같이 어리석은 놈은 어디있는가. 닥쳐올 6.25전쟁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리하여 매일 양사장의 사랑을 입으면서 일을 하노라니 때는 1950년이 되었다.그러던 중 5월에 성은이 형님이 또 찾아왔다. 또 한해만 형의 일을 봐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거절하였다. 부산으로 가기 위하여 사장에게 빨리 기술자를 데려오면 나는 떠나기로 약속되어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다.
드디어 운명의 날이 왔다. 아침에 공장에 나가니 6.25전쟁이 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매일 뉴스 때마다 국방군은 적을 물리치고 북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크게 염려는 안하고 공장일을 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군인이 보이고 경찰들이 차를 타고 왔다갔다 하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느꼈지만 그리 염려는 안했다.
다음날 아침 온 동네가 난리가 났다. 여러사람이 말하기를 인민군이 충남 00시를 점령하였는데 오늘 강을 건너 군산에 온다는 것이다. 나는 급히 생각한 것이 고군산에 가면 성은이 형님이 있으니 같이 고향으로 가면 될 것으로 여기고 급히 부둣가로 갔다. 가보니 목선 하나가 고군산으로 간다는 것이다. 도와달라고 하여 배에 탔다. 안숙이 삼촌님이나 군백이 형에게는 고군산에 간다는 말을 못하고 떠났다.
고군산 장자도에 피난을 가고 보니 성은이 형님은 해녀들을 싣고 고향으로 갔다는 것이다. 나는 군산 안숙이 삼촌님댁에 옷가지나 짐은 그대로 두고 떠났으니 피난생활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굶어 죽지 않았으니 천운이 아니겠는가. 2개월여 고생을 하다보니 군산이 다시 수복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군산으로 나왔다.
안숙이 삼촌님은 중학교 2학년생 때였다. 할머님에게 와보니 모두들 무사하였다. 군백이 형님은 행불이었다. 다음날 밖에 나가있는데 경찰관이 지나가다 말을 건넨다. 인민군이 군산에 왔을 때 무얼 했느냐는 것이다. 나는 고군산에 피난 다녀왔다고 하니 경찰서로 같이 가자며 연행하는 것이다. 군산경찰서에 가니 인민군 봉사를 얼마나 했느냐며 고문을 당했다. 나는 극구 고군산 피난을 주장했다. 경찰에서는 다시 대한청년단으로 인도되었다. 참으로 무법천지다.
대한청년단에서는 강제로 방위군에 입영시켜 군산국민학교에서 일본군식으로 훈련시켰다. 참으로 고된 훈련으로 극복하기 힘들었다. 하루는 소변을 보려고 나와보니 사방이 조용하고 적막감이 감돌았다. 순간적으로 도망갈 마음이 발동하였다. 학교울타리를 넘어 도주하기 시작했다. 야밤에 옥구군 미면이라는 농촌까지 뛰어갔다. 거기는 용수리 제인이 누님이 인천에서 피난와 있으면서 군산에서 일용품을 사와서 농촌에 다니면서 팔고 이익금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야밤에 누님 있는 데를 찾은 것이다. (다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