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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가치관(약 1:9-11)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말씀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야고보사도는 예루살렘교회 목회자로 교회를 떠나 먼 지역으로 흩어진 성도들에게 신앙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신앙적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 시험의 문제였습니다. 인생은 그야말로 시험의 연속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출애굽처럼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너면 가나안땅이 아닙니다. 광야를 지나야 합니다. 광야는 시험받는 땅이요 훈련받는 땅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끊임없이 다가옵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시험이 없었던 때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광야는 시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광야를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광야는 삭막한 곳같지만 오아시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지켜주십니다. 또 있습니다. 하나님이 목자가 되셔서 끊임없이 인도하십니다. 지켜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신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1)너를 낮추시며- 내가 주인이 아닌 것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앞에 주권을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2)하나님의 명령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왕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어있습니다. 3)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사는 것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만족만을 취할 것이 아니라 영적인 갈급함을 채워야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 신8: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너무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은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함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우리가 환난을 만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환난이 환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시련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련이라는 단어가 용광로라는 뜻입니다. 제련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 속의 불순한 것을 가려내는 제련의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정금같은 믿음,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롬 5:3,4,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을 소망일 이루는 줄 앎이라" 그래서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때는 이렇게 흔들리고 저런 때는 저렇게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계속해서 힘쓰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힘을 쓸 때 성숙해지고 온전한 것입니다.
이처럼 두번째는 기도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영혼의 호흡과 같은 것이라 기도하지 않고 신앙생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기도가 필요합니다. (약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기도의 대상은 꾸짖지아니하시고 후히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기도의 내용은 지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시험을 당할 때 무엇보다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기도의 방법은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때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도를 쉬지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번째는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본문을 다시한번 읽겠습니다. 9-11절,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같이 쇠잔하리라"
예수 믿는다는 증거는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가치관이 변화되지 않으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다시말하면 성경적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하늘나라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세속적 가치관을 벗어버리고 성경적 가치관을 가져야 성경이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세상의 풍파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시험이 다가와도 흔들리지 않고 견고히 설 수 있는 근본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또 믿음이 성숙하여 풍성한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엇이 중요한가?" 관점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옛날에 좋아하던 것이 지금도 똑같이 좋다고 한다면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은 아닙니다. 예전에는 술을 좋아하고 낚시를 좋아하고 세상의 쾌락을 좋아하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그것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저 돈, 돈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돈을 벌면 나를 위해 어떻게 하겠다는 꿈이 있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마음껏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은 돈을 버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다 쓰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돈을 벌면 먼저 십일조를 떼어놓고 나머지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떼어서 선교를 위해 구제를 위해 아낌없이 쓰는 분들이 있습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으니 주님영광을 위해서 쓰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들은 공휴일이라고 쉬고 취미생활을 하고 여가를 보내고 있을 시간에 이 자리에 참석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배는 나의 왕이신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나의 왕이시고 나의 주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요 찬양을 드리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것보다 예배가 우선입니다. 내가 영적으로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교회에 나가야 되니까 다른 일은 못한다, 무슨 무슨 볼일도 제쳐놓아야 한다, 무슨 무슨 모임에도 나가지 못한다, 이런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이라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오늘은 그 친구를 만나야 돼, 오늘은 결혼식이 있으니, 오늘은 무슨 모임이 있으니, 거기 나가봐야 돼, 이런 식으로 곁눈팔다가 예배에 빠지는 사람이라면 예수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 할 일이 없는 날이라야 '오늘은 교회나 가볼까' 하면서, 교회를 할 일 없을 때에나 찾는 종교집회소 쯤으로 생각하고 나옵니다. 결코 예수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직도 가치관에 변화가 오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성경적인 가치관이 무엇인가를 몇 가지 원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구원자이십니다. 또한 역사의 주권자이십니다. 이것을 마음속에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시지 않으면 가진 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많은 돈을 가졌다 해도 먹지도 못하고 맘껏 써보지도 못하고 죽고 만다면 그 돈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예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낯선 남의 땅에서 고생고생하다 경제적인 기반을 잡게 되자 뉴욕 교외의 한적한 산기슭에 땅을 사서 집을 한 채 지었다고 합니다. 남은 생은 보란듯이 살아보겠다는 생각으로 무려 백만불을 들여 잘 지은 집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집에서 산 지 불과 한 달만에 부인이 자동차 사고로 숨진 것입니다. 그후 마음이 평안치 않고 마음이 아파서 끝내 그 집을 팔고 말았다고 합니다.
제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서 잘 지은 집이면 무엇합니까? 오래도록 행복하게 잘 살아보려고 했지만 한 달도 못살고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만두라 하시면 그 즉시로 끝난 것입니다. 세상 것이 아무 소용이 없어집니다. 내가 가졌다고 그것이 내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든 가치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신앙고백이 바로 주일성수와 십일조생활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릴 때 몇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수입의 십일조를 정확히 구별해야 합니다. 둘째, 십일조는 하나님의 집에 드려야 합니다. 십일조는 반드시 본인이 섬기는 교회에 드려야 합니다. 셋째, 겸손한 마음과 기쁨으로 드려야 합니다.
2. 반드시 영적인 것을 우선순위에 둘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거의 물질적인 것, 세상적인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마땅히 영적인 것, 신령한 것이 먼저이어야 합니다. 언제나 영적인 것에 가치의 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물질과 마음, 물론 마음이 중요합니다. 일과 사람, 물론 사람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과 신령한 것, '마음적인 것' 이렇게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둡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이 이러해야 합니다.
3. 미래지향적이어야 합니다.
현재보다 미래, 순간적인 것보다 영원한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이 좀 고생스러우면 어떻습니까? 영원한 것을 위한 고생이라면 괜찮습니다. 천국 가기 위한 것이라면 오늘의 고생이 그렇게 문제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이 행하실 약속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과거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앞에 있습니다. 지금 당장 어렵다고 할지라도 결코 오늘에 타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지금 당장은 정말 힘들고 어려워도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유혹과 타협하지도 않습니다. 미련한 것같지만 십자가의 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놓치않는 믿음을 지키고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가길을 마칠 때까지 힘있게 나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4. 자기중심적이 아니라 이타적이요 이웃을 섬기는 것에 가치를 둡니다.
어느 목사님이 이런 글을 보내왔습니다. “우리앞에 두 길이 놓였을 때 주저없이 어렵고 힘든 길을 가요”라는 글이었습니다. 참 마음에 남는 글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앞에 두 길이 있다면 어느 길을 선택하겠습니까? 당연히 편하고 유익한 길이겠죠. 그러나 영적으로 조금만 생각하면, 하나님의 뜻을 물으면 좁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 진리편에 서는 것이요. 생명의 길입니다. 넓고 편한 길이 있지만 믿음의 사람은 언제나 좁고 험하지만 십자가의 길을 선택합니다.
내게 이로운 것보다 다른 사람에게 이로운 것, 나아가 공동체에게 이로운 것이라면 나 한 사람의 손해쯤은 문제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로울 수 있다면 내가 피해 좀 입어도 괜찮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우리에게 이타주의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인 것입니다. 섬김을 받는 것보다 섬기는 것입니다.
가치관 자체가 거듭나야 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거듭나야 알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나 중심의 가치관에서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육체중심의 가치관에서 영혼중심의 가치관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과거지향적인 가치관에서 미래지향적인 가치관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자기중심의 가치관에서 이웃중심의 가치관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엡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항상 제자리 걸음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심령이 새롭게 되어 변화하지 않으면 참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는 무엇이든 달라야 합니다. 목적이 다르고 중심이 달라야 합니다.
돌아가신 강영우박사는 시각장애인으로서 전 백악관 차관보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는 국민일보에 마지막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그 편지는 이런 내용입니다.
강영우박사의 마지막 편지
하나님의 축복으로 저는 참으로 복되고 감사한 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저의 실명을 통해 하나님은 제가 상상조차 할 수도 없는 역사들을 이루어 내셨습니다.
전쟁이 휩쓸고 가 폐허가 된 나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두 눈도, 부모도, 누나도 잃은 고아가 지금의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덕분입니다.
실명으로 인하여 당시 중학생이라면 꿈도 못꿨을 예쁜 누나의 팔짱을 끼고 걸을 수 있었고,
실명으로 인하여 열심히 공부해서 하나님의 도구로 살아보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실명으로 인하여 책도 쓸 수 있었고, 세상 방방곡곡을 다니며 수많은 아름다운 인연들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아름다운 인연들로부터 받은게 너무 많아 봉사를 결심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하는 강연들도 하게 되었습니다.
두 눈을 잃고, 저는 한 평생을 살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늘 여러분의 곁에서 함께 하며, 이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싶은 마음은 무엇보다 간절하나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최근 여러번 병원에서 검사와 수술,치료를 받았으나 앞으로 저에게 허락된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이 의료진들의 의견입니다. 여러분들이 저로 인해 슬퍼하시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것이 저의 작은 바램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누구보다 행복하고 축복받은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끝까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렇게 하나, 둘 주변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할 시간도 허락받았습니다.
한분 한분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하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점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으로 인해 저의 삶이 더욱 사랑으로 충만하였고, 은혜로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얼마나 멋있는 마지막입니까?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아내의 부축을 받으며 전에 당신에게 장학금을 주어서 미국유학을 할 수 있게 해 준 국제로타리재단에 두 아들 폴 강 안과전문의와 크리스토퍼 강 백악관 선임법률고문과 함께 평화장학금으로 25만달러(3억원)를 기부하는데 참여하였습니다. 한 평생을 불행하게 절망하며 고통 속에 살수도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안에서 많은 은혜를 누리며 살았던 그가 마지막에 자기에게 베푼 은혜를 잊지 않고 이웃을 위해 장학금을 기부했다는 것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시각은 이렇게 차이가 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소원도 다릅니다. 안믿는 사람의 소원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달라야 합니다. 취미도 다릅니다. 보다 은혜스럽고 고상한 데에 있어야 합니다. 보다 신령한 데에 있어야 합니다. 일상적인 감정 표현도 다릅니다. 울고 웃고 하는 것도 예수 믿는 사람은 달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안믿는 사람이 슬퍼하는 것을 같이 슬퍼하고, 안믿는 사람이 기뻐하는 것을 같이 기뻐하면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제, 나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안믿는 사람과 다른 가치관을 갖고 있습니까? 비슷비슷합니까? 아니면 분간도 할 수 없을 만큼 똑같습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안믿는 사람들과 다른 가치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과 비슷한 말씀이 전도서 1장 29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전1:29). 베드로전서 1장 24,25절 말씀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그렇습니다.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은 것입니다. 인생은 풀과 같은 것입니다.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습니다. 이것이 성경적 가치관입니다.
우리에게 젊음이 항상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 안가 늙고 병들고 힘이 없어집니다. 여러분, 알고보면 사람 사는 것에 공통적인 것이 많습니다. 잘 입고 못 입은들 안에 육체는 비슷합니다. 속은 더러운 욕심과 죄악으로 가득차 있는데 새옷 입는다고 새사람이 됩니까? 우리는 모두 같습니다. 다같이 걱정거리를 안고 살아갑니다.
세월이 가면 다같이 기력이 쇠하고 다같이 늙어갑니다. 종국에는 다같이 죽음을 맞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똑같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다. 설령 다른 것이 있다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별 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내가 갖고있는 그 무엇으로 자랑하며 교만하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좀 가지고 있다고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정말 이 모든 것이 내게 맡겨진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어떻게 보면 허무주의적인 것도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 중심적인 세계관을 말함입니다. 잠언서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잠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범사에 그분이 역사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솔로몬은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잠16:3)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 범사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리고 어떠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달라지면 그리스도 안에서 엄청난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교만을 버리게 됩니다. 교만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부자가 되어도 부를 교만의 이유로 삼지 않습니다. 물질이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요, 나는 단지 청지기적 사명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물질은 없으면서도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질은 많은데 마음이 거지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라고. 부하고 가난하고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부란 물질만의 부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남들보다 많이 공부했다고 교만해서도 안됩니다. 심지어 건강을 자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그것도 자랑거리가 못됩니다. 모든 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본문에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스스로 맨 밑바닥까지 내려앉는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의 뿌리로 돌아갑니다. 물질이나 지식은 생각지 않고 근본적인 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내가 죄인으로 있다가 구원받았기 때문이요, 죄인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 말고는 자랑거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10]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같이 쇠잔하리라" 그렇습니다.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화는 풀의 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다 떨어져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솔로몬의 영광도 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같이 쇠잔하리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입니다. 다윗을 보십시다. 세상의 부귀영화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였습니다. 그는 지혜도 누구못지 않았습니다. 그가 쓴 시편을 보면 지금도 시인들이 탄성을 지릅니다. 그는 세상의 영광이 최고에 달했던 사람, 그보다 더 지혜가 풍성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말은 내가 일국의 왕이므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돈을 가져서도 아닙니다.
똑똑한 솔로몬 같은 아들 때문도 아니고 예쁜 아내 때문도 아니며 천재적인 예술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는 이렇게 찬송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내가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는 다윗의 이 넘치는 풍성한 삶에 대해 생각해보셨습니까? 그는 부자였지만 재물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공한 왕이었지만 자기의 권세를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여호와를 의뢰할 때, 그분이 목자일 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내 잔은 넘칩니다. 그런가 하면 가난속에 있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박국이라는 선지자는 온 나라가 바벨론제국이 쳐들어온다는 흉융한 소식앞에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찬양을 부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환경에 영향을 받지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풍부를 이기지 못해서 타락합니다. 어떤 사람은 빈궁을 이기지 못해서 타락합니다. 하나님을 떠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빈궁으로 인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의 부요를 더 사모했으며 풍부할 때는 눈을 돌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어떠한 일이 닥칠지 모르는 상황하에서도 눈에 보이는 환경이 전부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 소망이고 기쁨이며 감사입니다.
무엇이든지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주님께로부터 받는 그높음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위해서 만들어 놓으신 그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십시다. 부한 형제는 인생의 약함을 보십시다. 이렇게 깨달음이 있을 때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은 넉넉합니다. 안달하지 않습니다. 아주 초연하게 살아갑니다. 대수롭지 않은 일로 죽네 사네 하지 않습니다.
뭐 조금 좋은 일이 생겼다고 하늘에 올라갈 듯 좋아하고, 안좋은 일이 생겼다고 자살할 듯 절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럴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먼 훗날이 되어야 과연 어느 쪽이 잘되었는지 알게 됩니다. 한마디로 두고 봐야 압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 가치관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다시말하면 성경적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가치관이 변화되지 않는 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반드시 영적인 것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미래지향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것보다 이타적이요 봉사적인 것에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이 모든 역사의 주인은 창조자, 구속자이신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삶을 주관하십니다. 그러므로 지혜자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하나님 중심을 갖고 먹으나 마시나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