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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썹목사
이해할 수 없네요, 이해할 순 없지만 (왕하 3:26-27)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면서부터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편의상 북쪽 지역을 북이스라엘이라고 하고 남쪽 지역을 남유다라고 한다. 비록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분단되었지만, 민족적으로는 여전히 한 민족이었기 때문에 역사서-열왕기상하, 역대상하에서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을 함께 다룬다.
특히 어느 한쪽의 왕권이 교체될 경우, 그 시기를 나타낼 때 상대 쪽 왕의 통치 연차를 기점으로 설명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김영삼 정부 2년 차에 김일성이 죽고 김정일이 위원장에 올랐다, 김정은 위원장 2년 차에 문재인 정부가 시작됐다고 설명한다는 것이다.
열왕기하 3장 역시 이렇게 시작된다. 여호사밧 왕이 남유다를 다스린지 열여덟째 되던 해에 북이스라엘에서는 여호람이 왕위에 올랐다.
(왕하 3:1) 유다의 여호사밧 왕 열여덟째 해에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을 열두 해 동안 다스리니라
왕정시대에 왕권 교체가 이루어지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선왕이 죽고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경우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반란이 일어나서 왕위를 찬탈 당하는 경우이다. 여호람은 첫 번째 경우였다. 아버지 아합이 죽고, 그 뒤를 이어서 왕위에 올랐다.
아들에게 왕권을 물려 줄때는 대체로 여러 아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아들에게 물려줬다. 당연한 일이다. 물론 여기서 “뛰어나다”고 하는게 반드시 객관적인 평가는 아닐 수 있다. 그냥 왕이 보기에 마음에 들면 그게 곧 “뛰어난” 것이었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객관적인 평가가 어떻든 간에 왕이 마음에 든다는데 누가 말리겠는가? 아합 왕도 마찬가지였다. 아합은 자기가 보기에 가장 뛰어난 아들에게 왕권을 물려주었다. 그게 누구냐면 아하시야였다.
(왕상 22:51) 유다의 여호사밧 왕 제십칠년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아합이 죽은 후에 왕위를 이어 받은 사람은 원래 아하시야였다. 뒤집어 말하면 아하시야는 아합이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아들이었다. 아합은 아하시야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을까? 간단하게 말해서 자기랑 하는 짓이 똑같았다. 특히 신앙적인 면에서 완전히 빼다 박았다.
(왕상 22:52-53) 그가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의 길과 그의 어머니의 길과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바알을 섬겨 그에게 예배하여... 그의 아버지의 온갖 행위 같이 하였더라
아합은 철저한 우상숭배자였다. 그에게 하나님은 없었다. 아하시야도 마찬가지였다. 일생동안, 죽는 그 순간까지 우상숭배자로 살았다. 이렇게 꿍짝이 맞았으니 아하시야에게 왕권을 물려 주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번에는 반대로 한번 접근해보자. 그렇다면 여호람은 왜 아합 왕의 마음에 들지 못했을까? 어쩌다가 왕세자에서 밀려났을까? 간단하다. 아하시야만 못했기 때문이다. 여호람도 우상숭배를 일삼긴 했지만 그래도 아합큼은 아니었다. 여호람은 아버지와는 좀 달랐다.
(왕하 3:2)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의 부모와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그의 아버지가 만든 바알의 주상을 없이하였음이라
아합이나 아하시야는 아예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다. 일례로 아하시야는 중병에 걸렸을 때 하나님은 제쳐 놓고 오로지 바알세붑만을 의지했다.
(왕하 1:2)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반면에 여호람은 위기에 빠졌을 때 그래도 하나님을 찾았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선지자를 찾아 나서기까지 했다.
(왕하 3:10) 이스라엘 왕이 이르되 슬프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는도다 하니
(왕하 3:11-12) ...신하들 중의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이에 이스라엘 왕과 여호사밧과 에돔 왕이 그에게로 내려가니라
아합은 하나님을 전혀 의지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적대시했다. 아하시야도 똑같았다. 하지만 여호람은 조금 달랐다. 아합 입장에서 본다면 자기를 쏙 빼닮은 아하시야와, 그럭저럭 비슷한 면이 있는 여호람. 이 둘 중에서 아무래도 아하시야가 더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하시야에게 왕권을 물려 준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여호람이 왕이 될 수 있었을까?(왕하3:1) 반역이라도 일으킨 것일까? 아니다. 안타깝게도 아하시야는 중병에 걸려서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에게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어부지리로 여호람이 왕이 된 것이다.
(왕하 1:17) 왕이 엘리야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죽고 그가 아들이 없으므로 여호람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니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둘째 해였더라
이 당시 북이스라엘은 모압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아합 왕이 통치하던 시기에는 모압이 조공을 바치면서 우호관계를 유지했었는데, 아합이 죽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배반해 버린 것이다.
(왕하 3:4-5) 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 왕이 이스라엘 왕을 배반한지라
사실 이 문제는 아하시야가 해결했어야 했다. 하지만 아하시야는 모압을 손쓸 틈도 없이 너무나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결국 모압의 배반은 여호람이 떠맡아야할 문제로 남게 되었다. 여호람은 모압을 손보기 위해 동맹군을 모았다. 남유다 왕 여호사밧과 에돔 왕에게 같이 손잡고 모압을 치자고 도움을 요청했다.
(왕하 3:7) ...유다의 왕 여호사밧에게 사신을 보내 이르되 모압 왕이 나를 배반하였으니 당신은 나와 함께 가서 모압을 치시겠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올라가리이다...
(왕하 3:9)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과 에돔 왕이 가더니...
이렇게 해서 여호람은 여호사밧, 에돔 왕과 함께 모압을 정벌하기 위해 출정했다. 세 나라가 동맹을 맺었으니 얼마나 기세등등했겠는가? 만약 모압 왕이 이 소식을 들었다면 벌써부터 오금이 저렸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오금이 저리기 시작한 것은 여호람 동맹군 쪽이었다. 대군을 이끌고 기세 좋게 출정 길에 올랐는데 일주일 만에 식수가 바닥나 버린 것이다.
(왕하 3:9)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과 에돔 왕이 가더니 길을 둘러 간 지 칠 일에 군사와 따라가는 가축을 먹일 물이 없는지라
이건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다. 물을 마시지 못하면 군사들의 건강이나 체력에 문제가 생긴다. 군사들의 건강 상태가 좋지 못하면 그만큼 사기가 떨어진다. 싸움은 기세가 반이라고 하는데, 사기가 떨어진 상태에서 전투를 치르면 승산이 없다. 그러니까 식수가 떨어진 건 단순히 ‘목이 좀 마른’ 문제가 아니라 이번 전쟁의 성패가 달린 문제였다. 여차하면 힘 한번 못 써보고 허망하게 패배할 수도 있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전쟁을 치르기도 전에 객사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여호람 입장에서는 얼마나 애가 탔겠는가? 그렇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처럼 수도시설이 발달 되어 있는 시대도 아닌데, 어디서 물을 확보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여호람은 다급한 마음에 하나님을 찾았다. 정확히 말하면 괜히 하나님을 원망했다.
(왕하 3:10) 이스라엘 왕이 이르되 슬프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는도다 하니
여호람은 “아무래도 하나님이 우리를 모압 손에 죽이시려고 여기로 끌고 오셨나 보다”라고 한탄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 아닌가? 모세가 가나안에 정탐꾼들을 보냈을 때, 정탐꾼들의 부정적인 보고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했던 말투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민 14:2-3)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만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 때문에 다 망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려고 작정하신 모양이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했다. 누가 이스라엘 민족 아니랄까봐 여호람도 똑같은 소릴 했다. 하나님께 한 번 물어 보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군사를 일으키고, 자기 멋대로 동맹을 맺고, 자기가 가고 싶은 길로 행군해 놓고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이제 와서 마치 이 모든게 하나님 때문인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르다가 어려움을 겪게 된 것처럼 하나님을 원망했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짓인가?
아무튼 여호람이 하나님을 입에 올리니까 여호사밧이 슬쩍 제안을 했다. “그러면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하나님께 한번 여쭤 보는게 어떻겠는가?” 그러자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여호람의 신하 중 하나가 얼른 엘리사를 추천했다.
(왕하 3:11) 여호사밧이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하는지라 이스라엘 왕의 신하들 중의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여호람은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방향을 바꿔서 엘리사를 찾아갔다. 하지만 왕의 행차에도 불구하고 엘리사는 여호람을 반기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와서 무슨 염치로 하나님을 찾느냐?”고 크게 꾸짖었다.
(왕하 3:13)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의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로 가소서 하니...
엘리야는 따끔하게 일침을 가하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 주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내용은 여호람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반가운 소식이었다. 동맹군은 식수를 얻을 뿐만 아니라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왕하 3:17-18)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너희가 바람도 보지 못하고 비도 보지 못하되 이 골짜기에 물이 가득하여 너희와 너희 가축과 짐승이 마시리라 하셨나이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작은 일이라 여호와께서 모압 사람도 당신의 손에 넘기시리니
중간 과정은 생략하기로 하고, 아니나 다를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호람은 식수를 얻었고, 모압과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았다.
(왕하 3:20) 아침이 되어 소제 드릴 때에 물이 에돔 쪽에서부터 흘러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
(왕하 3:24) ...이스라엘 사람이 일어나 모압 사람을 쳐서 그들 앞에서 도망하게 하고 그 지경에 들어가며 모압 사람을 치고
(왕하 3:26) 모압 왕이 전세가 극렬하여 당하기 어려움을 보고 칼찬 군사 칠백 명을 거느리고 돌파하여 지나서 에돔 왕에게로 가고자 하되 가지 못하고
모압의 군사들은 제대로 된 전투 한번 치르지 못하고 혼비백산 달아나기 바빴고, 모압 왕 조차도 자기 살 길 찾기에 급급했다. 여호람 동맹군의 대승이었다. 불과 하루 이틀 전까지만 해도 물이 없어서 “다 죽게 생겼다”고 하나님을 원망했었는데, 하루아침에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하나님 덕분에 갈망하던 물도 얻고, 대망하던 승리도 거두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요, 능력이요, 기적이었다. 얼마나 좋은 일인가? 아마 여호람은 입이 귀에 까지 걸렸을 것이다.
그런데 혹시 “갑분싸”라는 말을 아는가? “갑자기 분위기 싸해진다”의 줄임말이다. 한참 분위기가 좋았었는데 누군가의 부적절한 말이나 행동 때문에 분위기가 급격하게 냉랭해 질 때 쓰는 말이다. 3장 마지막 절을 보면 말 그대로 “갑분싸”다. 아니, 이건 분위기가 싸해지는 수준이 아니라, 혼란과 충격 그 자체다.
(왕하 3:27) 이에 자기 왕위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데려와 성 위에서 번제를 드린지라 이스라엘에게 크게 격노함이 임하매 그들이 떠나 각기 고국으로 돌아갔더라
이게 무슨 말이냐면 궁지에 몰린 모압 왕이 자기 맏아들(왕세자)을 제물로 바쳐서 그 효과로 이스라엘을 물리쳤다는 얘기다. 여기서 말하는 제사의 효과라고 하는게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킨 것이든, 종교적인 효험을 발휘한 것이든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건 결과다. 여호람 입장에서 보면 다 이긴 전쟁이었는데 모압 왕의 인신공양 한 방에 나가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이게 왜 그렇게 충격적이고 혼란스러운 일일까? 전쟁을 하다보면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고, 이기고 있다가도 역전 당할 수 있고, 지고 있다가도 역전 시킬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승패병가지상사”라는 말처럼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건 늘 상 있는 일이다. 물론 다 이긴 전쟁에서 마지막에 물러서야 한다는 게 썩 유쾌한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충격적이고 혼란스러울 것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번 전쟁을 복기해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누가 누구를 배반했는가? 이방민족 모압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배반했다. 누가 누구에게 승리를 약속했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 승리를 약속하셨다. 그러면 누가 승리 하는게 마땅한가? 이스라엘이 승리하는게 당연한 전쟁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모압이 이겼다. 심지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동맹군을 상대로 이겼다. 이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아들이기에 하나님이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이 전쟁에서 졌다. 승리를 안겨주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것보다 더 충격적이고 혼란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뿐만 아니라 본문을 읽는 우리에게도 충격적이고 혼란스러운 일이다.
평소에 우상숭배를 일삼던 여호람이 급할 때 하나님을 찾은 것 까지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잘했다는게 아니라 납득할 만한 일이라는 뜻이다. 이런 여호람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위기에서 건져 주시고, 승리를 약속하신 것도 납득이 된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 아닌가? 여기까지는 다 이해가 되고, 납득이 간다. 그런데 3장의 마지막 한 구절이 우리를 혼란에 빠트린다. 이걸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도대체 왜! 하나님은 여호람이 패하게 하셨는가? 반대로 왜 모압 왕을 위기에서 건져 주셨는가? 여호람이 하나님을 멀리하던 자였다면, 모압 왕은 아예 하나님 없이 살던 자였다. 도긴개긴 이긴 하지만 그래도 우열을 가리자면 모압 왕 보다는 여호람이 더 나았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더 나쁜 사람이 이기게 하시고, 더 나은 사람에게 패배를 안겨 주시는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 한번 찬찬히 생각해보자.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 문제를 냉정하게 접근해 보자. 어떤 사안을 이해하고 납득할 때는 일정한 기준이 있다. 이 기준에 부합하면 이해가 되고 납득이 가지만, 기준에서 벗어나면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된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예배 시간에 모자를 쓰고 있으면 난리가 났다. 당시 기준에는 무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자를 쓰고 벗는 것을 ‘예의’ 문제가 아니라 ‘패션’ 문제로 여기기 때문이다. 똑같은 일인데도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납득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기준”이 영원 불변한게 아니라 시시때때로 변한다는 사실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순간 내 마음에 드는게 곧 기준”이다. 순전히 엿장수 마음이다.
그렇다. 우리는 기준을 “나 자신”에게 두고 있다. 그래서 내 생각, 내 마음, 내 경험에 부합하면 기꺼이 납득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늘 본문이 왜 이해가 안 되는가? 내 기준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 내가 기대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는데, 여기서 벗어나니까 마음 문이 쾅 닫히면서 이해 불가, 납득 불가가 되는 것이다.
이게 단순히 성경 내용에만 해당 되는게 아니다. 우리 삶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 가운데 행하시는 여러 일 가운데 납득 되는게 있고, 안 되는게 있다. 그 차이가 뭘까? 내 마음에 들면 납득 되는 일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납득 안 되는 일이다. 솔직히 이것 말고는 딱히 다른 이유도 없다. 이러한 신앙생활의 가장 큰 문제점이 뭐냐면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라고 하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 보면 결국 내가 주인이고 하나님은 그저 내 뜻을 이뤄 주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여러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여호람을 위기에서 건져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도 만나게 되고, 엘리사를 통해 말씀하시는 약속의 하나님도 만나게 되고, 약속한 대로 이루시는 능력의 하나님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모압 왕 같은 죄인조차도 살려 주시는 자비의 하나님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이 모든 것 보다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은 “위대하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크고 위대한 분이시다. 감히 우리 깜냥으로 재단 할 수 없고 담을 수 없고, 다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위대하신 하나님께 우리가 보여야할 합당한 반응은 찬양과 경배와 영광이다.
우리는 자꾸만 내 수준에서, 내 기준대로 하나님을 판단한다. 내 기준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의 일하심은 너무나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이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그거 아는가? 하나님의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인 일하심의 가장 큰 수혜자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나를 구원해 주셨는가? 왜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시고, 내 삶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가? 여기에서 어떤 합리성을 찾을 수 있는가? 철저하게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불합리한 일이다. 왜냐하면 나한테 그렇게 잘해줘 봤자 하나님께는 남는게 없기 때문이다. 남는게 없는 일을 하는 것보다 더 비합리적이고 불합리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렇게 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상식 수준을 뛰어 넘는 위대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은 우리의 상식을 초과한다.
말씀을 맺겠다. 하나님은 내 뜻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는 성도님들 되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 행하시는 일들이 비록 다 이해할 수 없고, 납득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능력을 신뢰하길 바란다. 감히 하나님께 “이해할 수 없네요. 정말!”하면서 따지는게 아니라, “이해할 순 없지만, 주를 찬양합니다” 겸손히 무릎 꿇고 나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길 간절히 소망한다.
출처: https://ssub2.tistory.com/1852 [썹목사 함께 자라는 기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