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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부자가 세상을 바꾼다”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하루의 아침이 밝아오는 건, 새로운 기회와 기쁨을 누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사람답게 사는 것인지, 그것을 알고자 애쓰는 사람은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희로애락이 담긴 한 권의 책으로 설명한다면, 혹자에게는 감성이 가득한 시집이 될 것이고, 혹자에게는 잔잔한 수필집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이에게는 삶의 애환이 담긴 긴 장편소설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순간순간이 모이고 하루가 모여서 한 페이지를 이루는 가운데, 파지가 되어 버려지기도 하지만, 소중한 것은 인생의 한 페이지로 장식됩니다. 그리고, 삶이 되고 인생이 되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고 읽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만든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지 않아도, 소수에게는 그들이 찾던 간절한 내용이 되어, 머리맡에 놓고 자주 펼쳐보며, 미소를 머금을 수 있는 소중한 한 권의 책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경쟁이 자신과의 경쟁입니다. 자신을 절제하고, 본연의 길을 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힘듭니다. 그러기에, 자신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은 우리가 바라고 계획한 대로 정확하고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지 않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들이 불규칙적으로 다가오며, 나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경험하는 가운데,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인생이 흘러가기도 합니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희비가 교차하고, 우리 삶 속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일들이 우리의 인생계획을 변경시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숱한 사연들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내 인생이 이렇게도 힘든가가 아니라, 내 인생이 하나님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 밖에서 겉돌고 있는가 입니다. 인생은 선택입니다. 최악의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하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어려우면 대개 근시안이 되어, 어려움에서 빠져나가는 것에만 몰두합니다. 그러기에, 당장 쉬운 길을 찾습니다. 이렇게,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에는 언제나 생명을 건 선택과 결단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 삶의 중요한 변화는 생명을 건 선택이 있는 쪽에서 일어납니다. 그런 의지적인 선택이, 우리의 인생길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그러기에, 인생의 선택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가는 행동이 되어야 합니다. 룻이 나오미를 선택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단순히 인간적인 애정으로서의 “효”일까요? 룻 1: 16를 보시면, 룻은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고 합니다. 이를 보면, 룻의 선택이 신앙적 동기에서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나도 선택하고 따르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룻이 붙든 것은 “하나님”입니다. 그녀는 칠흑같이 어두운 인생의 순간 속에서, 빛줄기가 있는 곳을 향해,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으로 결정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인생의 위대한 전환은, 위대한 선택에서 옵니다. 여러분, 삶은 언제든지 역전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전화위복의 하나님, 묶인 것을 푸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의 선택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가득한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0절을 보시면,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본문의 시작을 보시면,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라고 합니다. 무릎을 꿇고 땅에 이마를 대고 엎드린 자세는, 신분이 낮은 사람이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경외와 충성을 표하거나 인사나 감사한 마음을 전할 때, 취하는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룻은 감사의 표시로 보아스에게 행한 겁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한 말이나 행동은, 룻이 기대하는 그 이상이었고, 예상치 못한 과분한 호의였습니다. 그래서, 룻은 당황하기도 했고, 너무나 감사하고 황송하기도 했기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보아스에게 절을 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한 겁니다. 룻은 이스라엘 사람인 보아스에게 은혜받을만한 자격이 하나도 없는 이방사람인 모압 여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보아스”를 통해, 룻과 나오미의 삶에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여러분, 삶의 환경들이 때로는, 우리에게 익숙한 환경을 뛰어넘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튼튼하게 현실에 뿌리를 박고 서로 서로 관계를 유지하며 사랑의 수고를 다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를 돌보고 인도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본서인 “룻기”는 룻을 통해 사람의 의리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비록, 룻기 자체에는 에스더서와 같이,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배경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에게 모압은, 원수입니다. 그들의 조상이 싯딤에 있을 때, 모압 여인들로 말미암아 브올에서의 바알숭배 사건으로 24,000명이 죽었기에 모압을 극도로 미워했습니다. 그러기에, 룻은 전통적인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본다면 은혜 받지 못할 자였습니다. 은혜는커녕, 멸시와 천대를 받아야 할 자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보아스를 통해 룻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룻은 자신에게 과분한 은혜를 베푼 보아스에게, 자신은 “이방 여인”인데 어찌하여 이같은 은혜를 베푸느냐고 묻습니다. 룻은 이방 사람인인 자기에게 은혜를 베푸는 보아스의 행동이 의아했던 겁니다. 이처럼 은혜를 얻지 못할 자로서 은혜를 입은 것은 단지 룻만이 아닙니다. 룻 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결코 은혜 받지 못할 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우리도 룻과 같은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일 뿐만 아니라 죄와 허물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된 자요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히 타는 지옥에 던져 넣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 제물로 내어 주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지시는 놀라운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께 구원의 은혜를 입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고,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조엘 오스틴” 목사는 그의 저서 “긍정의 힘”에서, “위기에 봉착했을 때도 절대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라. 그런 때일수록 오히려 은혜를 사모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우리가 은혜 받을 수 없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놀라운 은혜를 받았음을 알고, 하나님께 더욱더 충성하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1 - 12절을 보시면,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행한 데로 갚으십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자신이 돕는 이유는, 그녀가 남편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모인 나오미를 공경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시모를 따라 자신의 동족과 고국을 버리고 먼 타국으로 왔다는 사실을 자신이 분명히 들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실 룻은 이와 같은 보답을 받기 위해, 선행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시모인 나오미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이며 또, 나오미가 믿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자신도 그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기에, 시모를 따라 이스라엘로 온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룻의 이와 같은 선행을 잊지 않고, 보아스를 통해 은혜를 베푸신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선행에 대해 반드시 보답하십니다. 아무리 은밀하게 행한 작은 선행일지라도, 또 그 선을 행한 자가 전혀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냥 넘기지 않고 반드시 상급을 내리십니다. 그래서 잠 19: 17을 보시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고 하며 또, 마 6: 4에서 예수님은,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보아스가 룻의 선행과 믿음을 알고 호의를 베푼 것은, 룻의 선행과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요, 또한 상급인 것입니다. 따라서, 보아스가 룻에게 베푼 은혜는, 보아스 자신의 은혜가 아니라, 룻의 신앙과 선행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이며, 보아스는 단지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손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왕상 17: 9 - 16을 보시면, 사르밧 과부는 비록 자신과 아들이 한 끼 먹을 양식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것으로 엘리야를 공궤하였습니다. 즉,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도구가 되었던 겁니다. 그 결과 그녀의 집 안에는, 흉년이 끝날 때까지 양식 바닥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녀와 그녀의 아들은 흉년을 무사히 넘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시며,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자들에게도 반드시 큰 은혜와 축복으로 보응하십니다. 그래서, 마 10: 41 - 42을 보시면,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하며 또, 마 18: 5을 보시면,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은혜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며,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기뻐하시며, 우리의 수고를 기억하시어, 더욱더 크신 은혜와 축복으로 채워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3절을 보시면,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적극적으로 구하는 자에게 임합니다.
룻은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는 이유를 설명한 보아스에게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합니다. 이는, 보아스가 베푸는 은혜를 받아들이겠다는 수락의 의미를 넘어, 그 은혜를 반드시 베풀어 달라는 간청입니다. 즉, 룻은 보아스가 베푸는 은혜를 수동적으로만 받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 은혜를 구한 겁니다. 이처럼, 룻이 보아스에게 은혜 입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기거나 혹은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 은혜 입기를 간절히 원하고, 적극적으로 구했기에, 보아스는 룻에게 마음껏 호의를 베풀 수 있었고, 룻 또한 보아스가 베푸는 호의로 인해 큰 기쁨을 누릴 수가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적극적으로 구하는 자에게 임합니다.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 아들 얻기를 간절히 원하였기에 결국 사무엘을 얻을 수 있었고, 엘리사는 스승인 엘리야가 가지고 있었던 영감의 갑절이나 되는 영감 얻기를 간절히 원하였기에, 엘리야의 영감에 갑절이 되는 영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히스기야 왕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살아나기를 간절히 원함으로, 생명을 15년 동안이나 연장받는 놀라운 은혜를 입을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에 있어서 수동적이 되지 말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주경학자인 “프란시스 베이컨”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삶의 결과는 심판과 패망일 뿐이며,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는 인간의 고귀함을 파괴하는 자이다.”라고 했으며, “기독교세계관 운동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임스 사이어”는, “성도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고난을 통과해 십자가 그늘 아래로 나아가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교만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는 믿음 없음을 나타내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하며, 하나님께 은혜 입기를 간절히 소망해야 합니다. 이것이, 날마다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비결입니다. 선물을 받은 자가 그것을 준 자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면, 선물을 준 자는 매우 기뻐할 것이며, 더 큰 선물을 그에게 주고 싶어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그로 인해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며, 더욱 은혜와 축복으로 우리에게 더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남들은 “우연”이라고 하겠지만 또는, “그럴 수도 있겠지”라겠지만, 우리를 그들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더욱 더 간절한 마음으로 은혜를 구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기쁨으로 더 크신 은혜와 축복으로 우리에게 채워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