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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 한마음한몸 자살예방센터 공동기획 ‘우리는 모두 하나’]
(6) 행복의 전제, 자기 중심의 꿈에서 깨어나는 것
내가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류학자인 르네 지라르(Rene Girard)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요소를 폭력으로 규정하고 상징화된 대리 희생물을 찾는 종교 역시 여기서 발생한 것이라고 해석한 바 있습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욕망을 품는데, 이 욕망의 원인은 본질적으로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가령 내가 무엇을 원하게 되는 것은, 나에 앞서 타인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에 나 역시 그것을 더 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논리대로라면 결국 타인과 나 사이에 있는 욕망의 유사성으로 인해 갈등과 다툼, 즉 폭력이 일어나게 됩니다.
폭력이 발생하는 가정 안에서도 욕망의 유사성으로 인한 갈등이 존재합니다. 갈등하는 부부들을 보면 남편과 아내 모두 행복한 가정을 지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결혼생활이 시작되면서 경험한 것은 감당하기 힘든 슬픔과 고통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상담을 통해 만나게 되는 부부들은 대개 건강한 감정표현이 불가능한 상태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울분과 비애, 그리고 절망감으로 상대방을 원망하는 마음밖에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부모의 모습은 어린 자녀에게도 큰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가정불화와 폭력, 방임으로 삶을 박탈당한 아이들은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통해 더는 자기 삶이 침해받지 않도록 행동합니다. 아울러 직접적으로 징벌을 가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해 극단의 자기 폭력인 자기 살해라는 형태로 징벌을 가하고자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내가 생각하는 행복이, 타인에게는 행복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수용해야 합니다.
나는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와서 새벽에 잠자는 아내와 아이들을 깨워 자신의 신세 한탄을 밤새도록 하는 게 행복이라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가족들에게는 행복이 아니라 엄청난 고통이자 불행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아내가 남편을 더 존중하고, 아이들이 아빠에게 더 예의를 지키라고 했던 격한 감정과 강한 언행이 가족의 행복을 위한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가족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남편과 아이들이 지금보다 더 완벽해지도록 끊임없이 지적하고 몰아세우는 것이 나의 의무이자 행복의 첩경이라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가족들에게는 행복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버림받는 상실의 고통과 불행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고통 속에는 항상 무언가 배울 수 있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방식, 내가 원하는 방식의 행복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현실의 행복은 상대방이 원하는 방식에 얼마만큼 내가 원하는 방식을 절충시키고 또 서로 절충한 방식에 얼마만큼 합의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자기 생각, 자기 연민, 자기 방식에서 멀어질수록 행복은 더 가까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 한마음한몸 자살예방센터 공동기획 ‘우리는 모두 하나’]
(8) 일자리, 설자리, 살자리
몇 해 전 중년 남성 자살시도자를 주제로 연구를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를 한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 70~80대 노인 자살률이 높긴 하지만 매년 자살사망자 수로 봤을 때 40~50대가 가장 많았고, 남성이 여성보다 2~3배 높은 자살률을 보이는 데도 실제 지역사회 자살 고위험군 관리에서 중년 남성들이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 중년 남성들은 최근 자주 이슈화되고 있는 취약한 1인 가구 문제, 고독사 문제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인구집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구를 통해 확인한 중년 남성 자살시도자들의 경험은 이러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했습니다. 부모의 이른 사망이나 가출로 인한 부모의 부재, 가정폭력을 동반한 부모의 불화와 이혼 등을 겪으면서 심리적 상처를 받았고 일부는 부모나 친척으로부터 심각한 학대 피해를 받았습니다.
성인이 돼서도 안정된 직업을 갖지 못한 경우, 당장 시급한 생계를 위해 불안정한 직장을 전전하게 됐고, 이후에도 경력 부재로 재취업 기회가 차단되는 현실을 겪었습니다. 또 안정된 직장에서 나와 사업을 시작한 경우, 사업이 계속 실패하거나 어렵사리 모은 돈을 친구나 가족에게 빌려주고 못 받거나 사기를 당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있었습니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결혼생활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균열이 생기고 갈등이 반복되면서 결국 파국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중년 남성들은 이혼으로 가족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심리적 외상을 입고 사회적 위상(체면)도 하락하면서 거의 모든 면에서 자신감을 상실하고 대외적으로도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중년 남성들은 대개 혼자만의 삶을 감당하지 못했고 생활 리듬을 상실하면서 일상 자체가 파괴되어 갔습니다.
이제 자신들에게 남은 것은, 술과 24시간 틀어놓는 TV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가장 지치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홀로 지내는 고립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내면에 누적된 것(이혼, 실업, 경제 실패, 빚, 소외, 건강 문제)들이 죽음을 향한 행동으로 변이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예민하고 경직된 성격, 도움 청하지 못하는 자존심, 자신을 검열하고 괴롭히는 자기 처벌 행동 등은 자살 충동을 더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삶을 영위하기 위한 인간의 조건을 ‘일’, ‘작업’, ‘행위’라고 했습니다. 생계를 위한 일, 자신이 좋아서 하는 작업, 그리고 자신을 타인에게 표현할 수 있는 행위(활동)가 있어야 인간은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40~50대 남성 자살시도자들 역시 일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아울러 대화를 나눌 누군가가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중년 남성 자살시도자 연구 결과를 검토하면서, 여러 전문가들이 제공한 결론은 하나의 라임(rhyme)으로 정리되었습니다. “‘일’ 자리가 없으면 ‘설’ 자리가 없고, ‘설’ 자리가 없으면 ‘살’ 자리가 없고, ‘살’ 자리가 없으면 삶의 ‘끝’ 자리에 놓이게 됩니다.”
[가톨릭신문 - 한마음한몸 자살예방센터 공동기획 ‘우리는 모두 하나’]
(9) 누구도 원하지 않는 존재, 누구도 애석해하지 않는 죽음
빈곤 · 질병 · 고독에 시달리는 노인들
몇 년 전 위기상담 전화를 받던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한 70대 어르신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제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시고, 제가 살아야 하는지 죽어야 하는지 말씀해주세요.” 그 순간 뭔가 심각하다는 느낌이 들어 최대한 침착하게 “어르신, 무슨 일이 있으신지, 찬찬히 한번 말씀해주세요. 무슨 이야기든 제가 잘 들어볼게요”하고 응대했습니다. 어르신은 잠시 머뭇거리시다가 차근차근 자신의 상황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제가 들은 이야기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어르신은 혼자 사시면서 기초생활수급비로 매월 40만 원가량을 받으셨는데, 집세 20만 원과 각종 공과금을 내고 나머지 돈으로 생필품, 라면 등을 사서 생활하시는데, 하루 한 끼 이상 먹기가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치아도 온전치 않아 음식도 제대로 먹기가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일주일 내내 전화 한 통 오는 데가 없고, 한 달 가까이 다른 사람과 교류가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어르신과는 그 이후로도 몇 번 더 통화를 나눴고 어르신께 필요한 지역 내 복지자원을 연결해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또 한번은 80대 어르신이 병원 앞에서 자살 시도를 하신다는 연락을 받고 긴급출동 나간 적이 있습니다. 이른 봄이라 제법 날씨가 쌀쌀했습니다. 얇은 옷차림의 어르신께서 진한 갈색 액체가 든 약수통을 들고, “나는 이거 다 마시고 죽을 테니까, 병원에서 학생들 실험용으로 써 줘!” 이렇게 외치고 계셨습니다. 그 갈색 액체는 일종의 사약(賜藥)으로 비상이 혼합된 부자탕(附子湯)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됐습니다. 제가 다가가자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하셨나, “우선 날씨가 추우니까 차 안으로 들어오셔서, 어르신 하시고 싶은 말씀 다 해주세요. 무슨 일이 있으신지 다 말씀해주세요.”하고 달랬다.
재차 부모님 대하는 듯한 목소리와 태도로 다가가자 어르신은 마음이 조금 풀리셨는지, 차 안으로 들어오셨고 왜 이곳까지 이렇게 와서 죽으려고 하셨는지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을 디데이로 잡고 오랫동안 결심하셨던 터라, 자살 실행을 포기하시기까지 근 6시간 이상의 설득과정이 있었습니다. 어르신 역시 오랫동안 빈곤과 병마에 시달리며 살아오셨으나 주변에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고 혼자 모든 걸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셨습니다. 자신이 죽더라도 시신이 방치될 게 뻔한 상황이어서 이렇게 병원 앞에서 죽고 시신을 기증해야 그나마 마음 편히 갈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멀리서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까지 찾아온 거라 하셨습니다.
제가 만난 죽음 앞에 선 어르신들은 대부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이 없는 분들이었습니다. 사회적 지지나 관계의 질을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혼자 생활하며 고립되어 있었고, 현재의 자살 예방 정책(정신의학 패러다임)이 도움을 제공할 수도, 도움이 될 수도 없는 차원에 계셨습니다. 아울러 우리 사회가 혼자 생활하며 빈곤과 질병, 고독 속에 신음하는 노인이 진정으로 존재하기를 원하는지도 의문이 들었습니다. 만약 그러한 노인이 계속 생존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아니 그러한 노인들의 죽음을 진정으로 애석해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지금과 같이 노인자살률이 OECD 평균보다 3배 가까이 높은 그런 나라는 되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가톨릭신문 - 한마음한몸 자살예방센터 공동기획 ‘우리는 모두 하나’]
(12) 삶과 죽음의 해리
죽음으로 치우치게 만드는 극도의 절망
인간실존을 최대한 단순하게 조망하면 삶과 죽음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철학에서는 실존을 복잡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저는 실존을 ‘다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는, 인간 본질에 대한 자기규정’ 정도로 소박하게 이해하고자 합니다.
삶과 죽음 외에도 인간실존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수많은 상호 모순된 개념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생리적인 것에서부터 시간, 의식작용, 관계, 가치, 영성 등 모든 측면에서 상반된 것이 공생 공존합니다. 인간실존에는 투입과 배출, 과거와 미래, 창조와 파괴, 사랑과 미움, 이해와 오해, 자유와 구속, 현실과 비현실(환상), 성(聖)과 속(俗), 한계와 초월 등 다종다양한 모순들이 서로 연결되고 덧대어져 있습니다.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 인간은 앞서 열거한 모순들로 구성된 완제품이기에 자신도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실존적 의미에서 인간은 세상의 부조리뿐 아니라 자신의 부조리한 내면들로 인해 의문을 제기하지만, 대부분 생이 다할 때까지 처음 만들어진 형태 그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내적 균열이 생길 정도로 외부로부터 반복해서 충격을 받게 되면 전혀 다른 양상이 일어납니다. 자신이 왜 이렇게 기획되었는지 본격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내부의 모순을 심각하게 따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자기 추궁이 심해지면, 실존은 자체적으로 분해를 시작합니다. 또한 분해 과정에서 실존은 상호 모순된 어느 한쪽을 과도하게 지향하고 또 다른 한쪽을 과잉 부정하면서, 완성된 자기구조(완제품)를 더 악착같이 분해하려고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한번 분해된 인간실존의 조각들은 다시 맞추려고 해도 원래의 상태(완제품)로 되돌아가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심리학 용어인 ‘해리’(dissociation)라는 단어에도 ‘분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무언가 구성된 요소들을 낱낱이 나눈다는 의미입니다. 자기 정체성이 송두리째 흔들릴 만큼 심리적 외상을 입은 사람에게 종종 해리 현상이 나타납니다. 현재의 자신을 감당할 수 없기에 고통받는 사람은 자기 내면에서 자신도 마주한 적 없는 낯선 나를 끌어냅니다. 그 과정은 자기를 분해하고 재배치해서 전과 다른 속성의 나를 드러내는 일종의 자기 교체 작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해리 상태가 진행되면 자신도 본래의 나를 잊고 새로운 정체성을 진짜 나로 인식합니다. 또 기간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아예 과거의 기억을 잃고 나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삶과 죽음은 구별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대개 인간 삶 속에 죽음이 내재해 있고 그러한 죽음의 편린들이 인간의 삶을 더 본래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은 삶과 죽음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을 모순되지만 통합된 차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양립 불가능한 차원으로 인식합니다. 자살 행동을 실행하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삶과 죽음을 동일선상에서 수용하는 정체성을 유지하지만 고통이 누적되고 극도의 절망 상태에 이르게 되면, 삶과 죽음이 분해, 유리(遊離)되면서 죽음에 치우치게 되는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해리 현상과 유사하게 본래의 나를 잃고 자살행동이 가능한 낯선 나가 자기 내면에서부터 올라온 것입니다. 이렇게 죽음이 가능해진 사람에게 남은 마지막 안전장치는 이제 죽음의 공포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 죽음의 공포가 어쩌면 자살시도자들이 몰입해있는 해리 상태를 깨우는 마지막 자연치유력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 한마음한몸 자살예방센터 공동기획 ‘우리는 모두 하나’]
(13) 사람 없는 사람들의 세상
인공지능에게 위로 받는 날이 올까요
요즈음 여기저기서 인공지능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과거 ‘알파고’(바둑), ‘왓슨’(암 진단 보조) 같이 특정 분야에 능력을 보였던 인공지능을 넘어 최근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물을 인지(multi modal)하고 스스로 결과물을 생성(generative)하는 ‘챗지피티’(ChatGPT, 대화형 인공지능)까지 나오면서 세상이 떠들썩합니다. 이뿐 아니라 실제와 흡사하게 3차원 가상 세계(meta-verse)를 구현하는데도, 자율주행 자동차의 핵심인 인지, 판단, 제어 기능에도 인공지능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한편 인공지능 발달로 초래될 미래에 대한 걱정(대량 실직, 기계에 의한 인간의 지배 등)을 많이 듣습니다. 여기에는 인공지능이 사람을 앞서게 되는 특이점(singularity) 상태가 도래하고, 그 결과 인공지능이 역으로 사람을 소외시키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전제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인공지능은 인공신경망(기계 학습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학습합니다. 즉 수많은 데이터 속에서 패턴을 발견한 뒤 인간의 정보처리 방식을 모방해 컴퓨터가 사물을 분별하고 학습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이러한 인간 모방이 단순한 시늉, 흉내에 불과하지만, 데이터의 양이 축적되고 일종의 반복훈련인 시뮬레이션(모의실험)이 거듭되면서 소위 ‘딥 러닝’(deep learning)과 시행착오를 통해 최적의 행동을 선택하는 ‘강화학습’(reinforcement learning)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인공지능은 인격으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사람의 능력을 복사하여 현재로서는 한계를 알 수 없는 ‘학습 능력’ 또는 ‘선택 능력’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현재의 발달 속도라면 머지않은 미래에 인공지능이 인간성을 학습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대상을 만나면 대상과 전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는 인공지능은 인간성을 강화해가면서 인간을 돌볼 가능성이 생기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관심, 수용, 공감, 격려, 신뢰, 고뇌, 열정, 사랑 같은 너무나 인간적인 정서(pathos)에 대한 빅데이터를 스스로 분석하고 시공간적인 한계를 넘어 이해를 확대하고 돌봄 역량을 키울 수도 있습니다.
제가 미래에 우려하는 것은, 인공지능이 점차 인간 이해를 확대하면서 인간성을 닮아가는 한편, 사람들은 더 이상 인간을 돌보는 일을 하지 않고 타인과 상호작용하는 것을 시간 낭비로 생각하면서 오직 자신의 이익과 편리만 추구할 경우입니다. 그러한 생활방식은 쉽게 하나의 아비투스(자신도 모르게 몸에 배어버린 습속), 전형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더 이상 배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배우는 것은 인공지능의 몫이기 때문에 인간은 엷고 얕은 ‘피상적 학습’(shallow learning)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점차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타인을 염려하거나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한 것들은 다 인공지능의 몫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정말 걱정되는 것은 더 이상 인간과는 인간성을 논할 수 없는 상황(기계화된 인간, 인간화된 기계 사이에서)이 초래되고 인간적인 것을 느끼는 것은 오직 인공지능과의 소통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되는 상황입니다. 그렇게 되면 현실에서 인간은 자신이 인간임을 확인시켜 주는 인간(타인)을 발견하지 못하고 인간의 감성을 가진 인공지능에게 하소연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상담도 “나를 판단하지 않고 수용해주고, 이해해주고, 헤아려주는” 따뜻한 감성을 기반으로 한 인공지능에게 받게 될지 모릅니다. 그리고 인공지능과의 상담을 통해 많은 사람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혼자가 아니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인간의 온기를 느꼈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