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모더니즘시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80년대 모더니즘 시를 살핀다는 것은 억압된 타자가 어떻게 그 억압의 틀을 뚫고 자기 목소리를 내게 되었는가를 살피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리얼리즘이 억압이 되는 시적 차원에서 본다면, 80년대는 이중의 부정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한편으로는 파시즘에 대한 억압에 대한 부정을 필요로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문학 내적인 억압으로부터의 자유가 요구되었다. 그러나 80년대 벽두부터의 상황은 시적 부정에 대한 의혹을 미리 만들어 놓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의혹을 떨쳐 버리기 위한 시적 변증법이 가정된다. 그 하나가 <새로운 서정>의 전략이다. 이것은 이미 신경림과 <반시> 동인들에 의해 형성된 시문법을 계승한 것으로 시적 동일성의 원리를 희망의 원리로 전화시킨다.
이 산 저 산이 새로 환하게 열리고 앞 냇가는 새로 태어난 듯 흐르며 느티나무는 푸르게 우거지고, 천지 사방 꽃들은 다투어 피어났습니다. 마을과 마을로 길이 열리고 막힌 곳들은 스스로 열렸습니다.
- 김용택, <피에 젖은 꽃잎> 부분 -
이러한 시에서 우리는 서정의 원리가 희망의 원리로 바뀌고 있음을 본다. 모든 것을 과거로 되돌려 놓음으로써 미래를 희망적인 것으로 변화시킨다. 본래 서정시의 물적 토대가 전근대성에 있다면, 이 시는 전통적 시정시 문법의 토대와 다르다. 이 시의 발상에는 전근대성이 아니라 반근대성이 놓여 있는 셈이다.
80년대에 이루어진 시적 변증법의 또 다른 하나는 해체의 서정이다. 이것은 기존의 시학을 해체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반서정이고, 반시학이다. 해체의 서정은 반서정을 통해 80년대적 억압에 대한 반응을 나타낸다. 이는 저항적인 모더니즘시의 한 모습이다. 이것이 보인 아방가르드적 전략은, 기존의 미학적 관습을 거부함으로써 억압적 시대에 저항하는 데 있다.
여기는 초토입니다.
그 우에서 무얼 하겠습니까
- 황지우, <에프킬라를 뿌리며> -
위의 시에서 보이는 의식 지평은 <여기는 아니다>라는 것이다. 위의 인용한 시는 환멸에 기초하고 있다. 소위 <해체시>는 환멸의 자식이다. 그런데 이들의 경험 유형에서 보이는 환멸은 무엇에 대한 것인가. 황지우는 이를 <끔찍한 근대성>이라고 답한 바 있다. 즉 근대성에 대한 환멸 또는 해체의 서정이다. 80년대 모더니즘시는 해체의 서정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80년대는 한편으로 초자아의 시대였다. 이것은 마르크스적인 문제틀에 문화적 헤게모니가 주어지게 된 데 기인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틀이 제 구실을 할 수 없게 된 시점에서 억압된 타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게 된다. 80년대 후기 모더니즘 시의 융성은 이러한 사정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80년대의 억압된 타자들이란 무엇인가. 우선 그것은 생활, 일상, 개인, 욕망, 여성, 성 등이 아닌가 한다.
바퀴 달린 기계들이 질주하는 아스팔트다
작은 차들이 큰 차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아스팔트다.
인간이 쥐처럼 벌벌 떤다
불어나고 우글쩍거리고
충돌하며 인간의 피를 먹는 기계들
전파상의 로큰롤, 자동차의 경적
귀는 먹먹해지고
소음이 땡삐처럼 들끓는 거리가 붕붕거린다.
붕붕거리는 소리를 쫓아 뒤질세라 떼지어 붕붕거리며
중고차시장으로 폐차장으로
고철을 향하여 질주하는 욕망의 바퀴들이다.
- 최승호, <붕붕거리는 풍경> -
이 시에서의 도시 일상은 그 일상의 구체성이 아니라 그것의 비인간화에 관심이 놓여 있다. 욕망과 죽음의 문제 제시는 최승호 시인이 견지한 반근대성이 근본적인 성찰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두 모티프는 그의 후기 시에서 수준 높은 존재론적 인간학을 이루는 배경이 된다. 이곳이 곧 죽음인 것을 근대인들은 삶이라고 우기고 있다는 점에서 죽음이라는 종말론적 주제는 불길한 근대적 삶의 핵심에 놓이는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