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리스트 김구']
- 역시의 죄인 김구 신화
를 벗기는 정안기 박사
* 정안기박사/서울대학교
경제연구소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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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스트 김구'를 읽었
다. 북콘서트에도 다녀왔
다. 책을 읽는 시간 내내
필자는 분노의 시간을 보
냈다.
북콘서트에 다녀온 이후
약간의 허무한 생각도 든
은. 왜 그럴까? 과연 인간
은 선과 악으로 구분할 수 있는 존재인가?
현실에서 선한 행위와 악
한 행위는 분명히 존재한
다. 그러나 오랜 시간을 두
고 원인과 결과를 탐구하는
역사도 그럴까?
2024년 현재 대한민국에
서 김구는 그 실체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 입장에서
볼 때 정신분열에 가까울 정도로 너무나 과대포장
되고 평가되어 있었다.
김구는 특정세력이 정치
적 의도를 갖고 부풀린
역사의 허상이었다.
1948년 7월 20일, 제헌국
회에서 선출된 대통령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 130
표, 김구는 13표에 불과했
다.
당시 재적의원 198명 가
운데 196명이 투표에 참
가했다.
이승만은 무려 90%가 넘
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대한민국의 제1대 대통령
에 선출되었다. 이것이 당
시 이승만과 김구를 평가
하는 객관적인 잣대였다.
그리고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
탄에 쓰러진다. 이후 김구 신
화는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
기 시작한다. 북콘서트에서 필자는 '테러리스트 김구'의 저자에게 질문했다.
책 내용에 보면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김구가
대표로 있던 한독당(한국
독립당) 사무실이 인민위
원회 사무실로 둔갑하는 것
을 목격한 한독당원의 얘기
가 나온다.
이것을 토대로 역사를 가정
해 볼 때 김구가 암살되지 않았더라면 우리 역사는, 그
리고 김구는 어떻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
었다.
저자 정안기 박사는 김구가 안두희에 의해 제거되지 안
았더라면 대한민국은 재앙
에 빠져들었을 것이라고 단
전했다.
당시 김구와 한독당은 1949
년 8월 15일 건국절 행사에
서 이승만과 정부 요인을 한
거 번에 몰살시켜 버릴 엄청
난 테러를 준비하고 있었다
고 한다. 그들은 충분히 그
럴만한 능력이 있었다. 왜냐
면 김구와 한독당은 군부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정도 군대는 한독당과 김구, 경찰은 이승만 계열이 장악하고 있다고 보고 있었
다. 1949년 5월 4일과 5일 이틀에 걸쳐 춘천에 주둔하
고 있던 강태무 소령과 표모
원 소령이 대대급 부대원을 이끌고 집단 월북한 사건은 당시 군에 대한 김구와 한독
당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
지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북한에서 환영받는 강태무, 표무원 소령
한국군의 집단 월북 당시 미국은 한국에 군사원조를 위한 조사단을 파견하고 있
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대 단위로 수백 명이 두 차례에 걸쳐 월북한 사건은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군을 의심하게 했다. 결국 미국의 한국군
에 대한 군사원조를 대폭 축소되고 말았다.
이 사건이 중대한 이유는 강태무와 표무원 소령을 월북시키기 위한 공작이 김구의 한독당에 의해 저
질러졌기 때문이다. 당시 김일성과 김구는 긴밀한
게 서로 협조하고 있었다. 여순반란 사건에도 김구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이 같은 상황에서 김일성과 내통하고 있던 김구와 한독
당이 이미 장악하고 있던 대한민국 군부의 지원까지 받아 이승만과 정부 인사를 한꺼번에 몰살시켜 버렸다
면 이후 대한민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곧바로 터진 전쟁에서 이승
만 만큼 미국과 유엔을 움직
여 북한과 소련, 중공을 상대
할 수 있는 인물이 있었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실제로 김구는 중국에서 환
국 이후 이승만의 목숨을 노
렸다. 이승만이 미국에 있던 자신의 변호사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김구가 자
신을 노리고 있다고 수차례 언급했다.
그러나 김구와 한독당의 이
승만 폭살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해 6월 안두희가 김구를 제거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안두희 얘기까지 하
지는 않겠다. 다만 안두희는 육군 소위 신분에 서북청년
단에도 관여했지만 한독당
의 비밀당원이었다는 정도
만 밝힌다.
만약 안두희가 김구를 사살
하지 않았더라면 김구의 말
로는 어찌 되었을까? 대단히 중요한 역사의 가정이다. 왜
냐면 논리적인 정황에 따라 퍼즐을 맞춰보면 김구의 정
체성이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남침에 서울이 무
격하게 인민군에게 넘어갔
을 때 김구는 서울을 탈출
해 피란민 대열에 합류했을
까?
대답은 명확하다. 당시 한독
당 계열의 인사들은 피란을 가지 않았다. 이후 그들은 자발적, 비자발적으로 월북
했다. 김구 역시 그들의 운
명과 동일했을 것이다.
김일성에게 임시정부의 옥
새를 바쳤던 김구는 전쟁 전
부터 구체적으로 김일성과 접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
인다. 남북협상 때 그의 수행
비서였던 안중근의 조카 한우
생이 북에 잔류했다.
당시 김구와 함께 북에 갔던 인사들 가운데 홍명희를 비
롯한 상당수가 북에 남았다. 김일성은 그들을 활용해 김
구와 한독당을 상대로 대남 공작을 펼쳤다. 김구는 전쟁
이 터졌을 때 피란을 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인민군 서울 점령 하에서 김구는 김일성과 인민군에 협조하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여타의 한독
당 동지들과 함께 월북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합리
적인 판단이다.
그것으로 김구는 대한민국
의 역사에서 지워지거나 희
미한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구는 안두희의 총
탄에 쓰려졌고, 김구는 신화 속에서 실재와 다른 허상의 김구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왜 그랬을까?.
김구를 띄워야 이승만이 죽
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죽어
야,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흐
펴져야 이득을 보는 세력이 국내외에 있다.
국가적 위기를 수습하고 4.
19 정신을 완성하겠다며 정치의 전면에 나선 세력이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이었다. 그들에게 김구
는 4.19에 의해 퇴출된 이
승만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
였을 것이다.
군부통치에 저항하며 대한
민국을 부정하는 세력에게
도 김구는 이승만을 폄훼해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흠집
을 내기에 딱 맞는 인물이
었다. 이렇게 김구는 과대 포장되고 분칠 되었다. 그런
데 너무 부풀어버렸다. 그의 어두운 면을 보여줄 자료는 도처에 있다. 이제 '인간백정' 김구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
나고 있다.
신화가 창조한 성스러움이 무참히 깨진 후 그의 맨얼
굴을 직시하기란 참으로 당
혹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이
다. 감춰진 진실은 참으로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테러리스트 김구'는 각주가 1,500개가 넘는다. 색인만 170쪽에 달한다. 저자가 이
를 갈고, 뼈를 갈아 넣어 쓴 글이라는 것을 직감하게 한
철저한 고증과 사실에 기초
한 글이다.
시비 걸려면 걸어라. 얼마든
지 상대해 주겠다는 자신감
의 발로이기도하다. 이다지
도 김구에 대한 자료가 산적
해 있고, 축적된 연구가 많음
에도 어떻게 김구 신화가 날
로 기승을 부리는지 이해할
수 없다.
역사가들의 태만과 비겁에 몸서리가 친다. 전문가, 지
식인들이 입을 닫고 있는 사
이에 개그맨이 헌법을 강의
하고, 미술 공부한 사람이 수백 만부가 팔려나가는
역사책의 저자가 되어 역사
를 오락으로 만들고 있다.
'테러리스트 김구'를 읽는 내내 통쾌했다. 시원했다. 신화가 벗겨지고 그 추악
한 알몸이 드러나는 현장
에 있음에 전율했다. 마치 프랑스혁명 시기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잘린 목을 쳐들며 열광했던 군중의 잔인함에 필자도 동참하는 기분이었다.
김구에 대한 미움과 증오가 분출했다. 특히 장덕수 암살 부분에서 그랬다. 장덕수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우리는 그의 재목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만큼 우리의 역사교육이
라는 것이 부실하고 왜곡된
었다. 당시 장덕수는 이승
만과 비견되는 국제감각과 지적능력, 정치감각을 가진 뛰어난 인물이었다.
또 역사의 가정이긴 하지만 만약 장덕수가 김구와 한독
당에 의해 죽지 않았다면 이
승만은 그토록 무리해 가면
서 정권을 연장하려는 시도
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4.19도 없었을 것
이다. 이승만은 현재 대한 민
국의 국부로서 미국의 워싱
턴 같은 사후평가를 받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