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이 돌아간 다음 날이었다. 육군참모총장 이종찬 장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곧 휴전회담이 열릴 예정인데, 한국 대표로 백 장군을 선정했다”는 통보였다. 이 총장은 이어서 “유엔군 측 요청으로 당신을 뽑은 것이니까, 당장 부산으로 가서 이승만 대통령께 보고를 하라”는 것이었다.
유엔군 요청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밴플리트 장군이 나를 추천한 것이었다. 국군 1군단 사령부로 나를 찾아와 해수욕을 즐기다가, 느닷없이 “당신 중국말 할 줄 아느냐”고 물었던 밴플리트 장군이었다. 그는 중공군 대표가 참석하는 휴전회담이므로 아군 측에서 중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총장은 휴전회담으로 내가 나가 있는 동안, 국군 1군단 지휘는 부군단장인 장창국 준장에게 맡기라는 지시도 했다. 나는 ‘휴전회담을 시작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일단은 서둘렀다.
간단한 준비를 마친 뒤 나는 1951년 7월 8일 부산으로 날아갔다. 임시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다. 대통령은 아주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최근 발행된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서울셀렉션)에 실린 1951년 7월 휴전회담
시작 당시의 모습이다. 유엔 측 대표로 참석한 백선엽 장군, 이수영 통역장교,
알레이 버크 제독, 행크 호디스 소장(오른쪽부터)이 회담장인 내봉장 옆에 마련된
장소에서 잠시 쉬고 있다.
“중공군 100만 명 이상이 들어와 있는 마당에 무슨 휴전협상이라는 말인가. 우리는 통일을 해야 해. 지금 휴전한다면 우리 스스로 국토를 분단하는 것이야. 나는 절대 반대다.”
실제 이승만 대통령은 협정이 이뤄진 53년까지 줄기차게 공산군과의 휴전을 반대했다. 이 대통령의 주장은 ‘북진통일(北進統一)’이었다. 나중에 다루겠지만, 이 대통령은 그 주장을 절대 꺾지 않아, 미군과 워싱턴의 미 행정부와 자주 심각한 갈등 관계에 놓였다.
국군 1군단장으로 전선을 지키다가 갑자기 휴전회담 대표로 뽑힌 내 처지가 난감했다. 명령에 따라 휴전회담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 본인은 강력하게 그 회담을 반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이승만 대통령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을 꺼냈다. “저는 대한민국 군인입니다. 참모총장께서 휴전회담에 참석하라는 지시를 내려 이렇게 나섰지만, 대통령 각하의 뜻이 그렇다면 제가 회담에 나서는 것을 포기하겠습니다.”
그러자 대통령은 “미국 사람들이 저렇게 휴전회담을 서두르고 있으니 가지 않을 수는 없다. 미국 사람들과 협조한다는 의미도 있으니 참석하도록 하라”고 말했다. 다른 말은 없었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나는 밖으로 나왔다.
나는 육군본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먼저 이종찬 참모총장 방에 들러 간단히 보고를 마쳤다. 총장은 “이수영 대령(전 주프랑스 대사)이 연락장교로서 당신을 보좌할 것”이라고 말해줬다. 총장과 헤어져 나는 곧장 문산으로 향했다.
문산. 전쟁이 발발하면서 내가 북한군과 처음 싸움을 벌였던 국군 1사단 방어지역이었다. 아울러 북진 때 이곳을 지났고, 중공군에 밀려 내려올 때도 방어선을 펼쳤던 곳이다. 격렬한 전쟁을 벌였던 이 문산으로 와서 적들과 휴전협상을 벌여야 하는 상황에 접어드니 마음이 착잡했다.
회담장에서 공산주의자들과 협상을 벌어야 한다는 점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그들은 내가 경험한 바로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였다. 상대방의 틈만을 노리고, 허점을 잡았다고 생각하면 바로 그곳을 치고 들어오는 집요한 심리전의 명수들이었다. 총을 놔두고 필설(筆舌)로 공산주의자들과 맞서는 또 다른 전쟁, 그것은 길고 지루하면서 험난한 과정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는 대한민국 정부나 유엔군이 정식으로 전해준 임명장이 없었다. 그저 유엔군 측의 통보에 따라 육군참모총장이 구두로만 임명한 상태였다. 모두 전시(戰時)에서 벌어지는 일들이었다.
문산 동쪽 개울가에 사과밭이 있었고, 휴전회담 관련 요원들이 묵을 천막이 그곳에 세워져 있었다. 이름이 ‘평화촌(Peace camp)’이었다. 유엔 측 회담 대표는 미 극동해군 사령관 터너 조이 중장이 수석이었다. 그 밑에 미 8군 참모부장 행크 호디스 소장, 미 극동공군 부사령관 로런스 크레이기 소장이 있었다.
“도쿄를 다녀와야 한다”면서 엊그제 강릉에서 내게 작별 인사를 했던 알레이 버크 소장도 극동해군 참모부장 자격으로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그곳에 와 있었다. 버크는 나를 보더니 멋쩍은 듯이 씩 웃기만 했다.
휴전회담은 그해 6월 23일 소련의 유엔 대표가 처음 제의했고, 일주일 뒤인 6월 30일 매슈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이 원산항에 정박 중인 덴마크의 병원선 유틀란디아 선상에서 회담을 열자고 장소를 제안해 이뤄지게 됐다.
그러나 중국이 7월 1일 베이징 방송을 통해 회담 장소를 개성으로 하자고 수정 제의함에 따라 최종적으로 개성에서 열기로 정해졌다. 유엔군 측은 “열흘쯤 지나면 협상이 타결될 수도 있다”며 낙관하는 분위기였다. 군인끼리 하는 회담이라 간단히 결말이 날 것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만나는 유엔 측 사람들에게 “회담이 결코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했지만, 그런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한국전쟁기념재단] 창립 이사장에 백선엽 장군
중앙일보
입력 2010.06.22 00:09
업데이트 2010.06.22 10:00
“60년 전 대한민국은 초근목피로 연명했습니다. 전쟁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됐습니다. 국군과 유엔 참전 용사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자유와 민주, 경제 발전은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땅, 한 뼘도 거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발전된 대한민국이 은혜를 갚을 때가 왔습니다.”
‘받았던 나라에서 되갚는 국가로, 교육으로 보은한다’는 슬로건을 내건 한국전쟁기념재단(Korea War Memorial Foundation·이사장 백선엽) 창립식이 21일 오전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렸다. 6·25전쟁 당시 국군 1사단장으로 활약했던 백선엽(90) 예비역 대장은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힘찬 목소리로 이렇게 환영사를 낭독했다.
21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한국전쟁기념재단 창립식에서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부터 에르도안 세리프 이쉬잔 주한 터키 대사, 이기수 고려대 총장, 조영길 전 국방부 장관, 이수성 전 국무총리, 조윤선 한나라당 의원, 백선엽 재단 이사장, 박희태 국회의장, 이홍구 전 국무총리, 김인규 KBS 사장, 타나빗 심하세니 주한 태국 대리 대사, 키릿 바제 주한 인도 영사, 실비아 마라사이간 주한 필리핀 총영사, 이재술 딜로이트 한국총괄대표, 인요한 연세대 의대 국제진료소장. [김태성기자]
김택환 중앙일보 멀티미디어랩 소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행사에는 재단 고문인 이홍구·이수성 전 총리와 조영길 전 국방장관을 비롯, 이기수 고려대 총장(대학교육협의회 회장), 김인규 KBS사장(한국방송협회 회장), 조윤선 한나라당 의원, 인요한 연세대 의대 국제진료소장, 배희숙 한국여성벤처협회회장, 박영순 온누리약사복지회 회장, 전영기 중앙SUNDAY편집국장(이상 재단 이사진) 등 재단 설립에 힘을 모아온 인사들과 박희태 국회의장 등 각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에르도안 세리프 이쉬잔 주한 터키 대사, 실비아 마라사이간 필리핀 총영사, 타나빗 심하제니 태국 대리 대사, 마누엘 솔라노 콜럼비아 대리 대사, 키릿 바제 인도 영사 등 6·25전쟁 참전국(의료지원 포함) 외교사절단도 자리를 함께했다.
3년간 이어진 6·25전쟁에는 미국을 비롯한 21개국에서 194만 명이 참전했고, 이 가운데 4만5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60년 전 1인당 국민소득 67달러의 최빈국에서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둔 대한민국이 이들의 희생에 보답하자는 게 재단 설립의 취지다.
핵심 사업은 참전 용사들의 손자녀에 대한 교육 지원이다. 생활이 어려운 초·중·고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한국 유학 경비도 대준다. 발군의 젊은이들을 한국으로 초청, 그들이 정치·경제 각 분야에서 참전 국가의 리더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지원하는 프로그램도 펼친다.
박희태 국회의장은 “백선엽 장군의 환영사를 들으며, 그동안 부끄럽고 죄송한 세월을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동안 참전 용사들에 대해 말로는 감사한다고 하면서도 똑 부러진 일은 제대로 해보지 못했는데, 재단의 출범은 그런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홍구 전 총리는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은 미래가 없고, 교훈을 새기지 못하는 나라는 장래가 없다. 의리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운 민족이 우리 아닌가. 참전 용사의 후손 교육 지원 사업은 장래 한국의 미래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수성 전 총리도 “재단의 활동은 전쟁은 일어나선 안 된다는 신념, 그리고 전쟁의 상처도 이렇게 치유할 수 있다는 고귀한 측면을 함께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며 기대를 나타냈다. 재단 탄생에 산파 역할을 한 조윤선 의원은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간다는 말이 있다”며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나눈다(We remember and share)는 재단의 정신을 국민 모두가 함께하는 국민 운동으로 승화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기수 고려대 총장은 “참전용사 후손들에 대한 교육 혜택은 과거 전쟁의 참변과 비극의 역사를 창조와 환희의 미래로 이어지도록 하는 일”이라며 “고려대와 대교협 차원에서 참전용사 손자녀들에게 학문의 기회를 열어주도록 적극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재단 설립에는 KBS의 역할도 컸다.
김인규 KBS사장은 “재단의 활동이 6·25전쟁 참전 보답 차원을 넘어 대한민국이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고 글로벌화에 앞장서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며 “국가기간방송으로서 재단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KBS는 6·25 전쟁 60주년인 25일 오후 5시40분부터 70분간 한국전쟁기념재단 창립 특별 생방송 ‘대한민국의 약속’을 방영한다.
글=김수정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