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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낭비
마가복음 14:1~9
1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2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제가 부목사로 재직할 때는 당회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당회원인 장로님 한 분이 기타 논의 시간에 강단의 꽃꽂이에 대하여 안건을 내놓았습니다.
내용인즉 강단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꽃꽂이가 낭비라는 것입니다. 넓은 강단에 다양한 꽃으로 장식한 후 주일을 지내고 나면 버려지는데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냐는 것입니다. 일견 설득력 있는 말입니다. 이 제안을 듣고 있던 한 장로님이 그러면 꽃꽂이 비용을 매주 자기가 부담할 터이니 계속하자고 말하여 일단락 지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까?
낭비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에 낭비라는 표현보다는 헌신이라고 판단하시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그 안에 사랑이 담겨 있으면 낭비가 아닙니다. 문제는 사랑이 없이 형식적으로 행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낭비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주님께 드리는 향유 한 옥합에 대한 사건을 우리에게 말씀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헛된 낭비냐 아니면 주님을 사랑하는 표현이냐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마가복음 14장 1에서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라고 하였습니다. 명절이 가까운 시각에 그것도 이스라엘의 구원 사건을 기념하는 명절에 말입니다. 사실 이 명절의 주인공은 구원의 완성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먼저 알아보고 그분을 섬겨야 할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가들이 예수를 모함하여 죽이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유월절이면 이스라엘뿐 아니라 해외에 거주하는 많은 유대인이 몰려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에 각계각층에 알려졌고 그를 따르는 숫자도 많았습니다. 그런 예수를 잡아 버리면 혹시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은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명절이 가까운 시점에서 예루살렘 한구석에서 이런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던 그 시각에 본문의 사건은 일어납니다. 막 14: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나병 환자였던 시몬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지금도 나병이라는 것이 치료가 어려운데 당시에는 나병을 불치병이며 저주스럽게 인식하였습니다. 절망 중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치료를 경험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잔치를 벌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잔치에 관한 이야기와 똑같은 내용이 요한복음 12장에도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우리가 잘 아는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도 등장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는 형제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옮겨졌던 겅험을 가진 자가 벌리는 잔치입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식사하는 가운데 향유를 갖고 온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죄 많은 여인’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그 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밝히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정확한 그녀의 이름도 거명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로 본문의 여인에 대하여 추측들이 난무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녀는 일곱 귀신 들린 여인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요12:3 말씀은 그 여자의 이름이 마리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가지고 온 향유가 자세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이때 마리아는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왔습니다. 향유라는 단어의 앞과 뒤에 여러 가지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그 여인이 가지고 와서 예수님께 쏟아부은 나드 향유는 인도나 히말라야 고산지에서 자라는 나르드(강송향)라고 하는 나무의 뿌리에서 채취하여 만든 향유인데 여기 ‘순전한’ 것이라고 했으니 백 퍼센트의 진액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향유는 너무 비싸기도 하지만 쉽게 증발하는 특성이 있어서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옥합 안에 밀봉되어 있어서 한번 쓰려면 옥합을 깨뜨려야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나드 향유는 그야말로 아주 비싼 상품입니다. 삼백 데나리온은 당시 일일 노동자들의 일 년 품삯이니 이 향유가 상당히 비싼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그냥 부을 수 있었을까요?
일반적으로 귀한 손님이 오면 그 집의 여주인이 향유 몇 방울을 떨어뜨려 주는 것이 팔레스타인 지역의 문화적 관습이었다고 하는데 그 집 여주인도 아닌 익명의 여인이 그녀가 가진 미래를 위한 값비싼 ‘소장품’을 한 번에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문화를 뛰어넘는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합니다.
그녀의 이런 헌신적 행동에 대한 여러 사람과 제자들의 반응은 막 14: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값비싼 향유는 어떤 곳에 사용하는 것이 허비하지 않고 제대로 사용하는 것일까요? 그들은 이렇게 대안을 말했습니다. 막 14: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노동자가 하루 받는 품삯이 한 데나리온입니다. 그렇다면 삼백 데나리온이면 일 년의 품삯에 해당하는 엄청난 것입니다. 이렇게 값비싼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준다면 가치가 있고 보람이 있지 않겠냐는 논리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여인을 바라보니 한심스러웠고, 책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여인의 행위에 대하여 막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행동보다 그 행동을 유발시킨 마음의 동기를 아시고 ‘가만 두어라’고 하시면서 그 여인이 한 행동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좋은 일’은 헬라어에서 두 가지 단어로 사용되는데, 하나는 ‘아가도스’이고 다른 하나는 ‘칼로스’입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단어는 후자인 칼로스입니다. 전자는 좋은 일이지만 그 내용이 담고 있는 의미는 마음이 담겨 있지 않은 착한 일이라면 후자인 칼로스는 사람의 마음을 끌며 아름답고 매력이 있는 일을 말합니다. 즉 그 안에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담겨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려지는 헌신이 때로는 허비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고 그것을 착한 일이라 하며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첫 번째 하나님께서 내게 베푼 사랑에는 할 수만 있으면 적극적인 표현이 중요합니다.
수년 전 광명시에 위치한 교인 수가 10여 명 미만인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할 때였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지 4개월 된 분이 친구가 전단지 한 장을 주면서 꼭 부흥회에 참석할 것을 권고하여 참석하게 된 것입니다. 그분은 어릴 적 부모를 잃고 친척 집에서 눈칫밥을 먹다 견디지 못하고 구두닦이 등 여러 허드렛일을 하면서 성장하여 결혼하였지만, 그 역시 평탄치 못했습니다.
그분에게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고 첫째 아들과 지체 장애로 제 몸을 가누기 어려운 둘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의 아내는 아들들을 팽개치고 있는 돈을 몽땅 가지고 사라졌습니다. 말할 수 없는 배신감과 끝을 알 수 없는 고난의 연속으로 삶을 마감할 생각도 여러 차례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서울 신설동에서 구두수선 일을 하며 근근이 생활을 영위하며 메마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분의 환경은 고달프고 피곤하기만 했습니다. 나는 어쩌다 이리되었나 싶기도 했고. 자기에게 둘러친 환경이 원망스럽고, 짜증스럽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제가 전하는 말씀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이 가슴에 사랑으로 파도치듯 들어오면서 자기에게 둘러친 환경을 용서하고 감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당신의 몸을 아낌없이 버리신 주님의 사랑에 자신의 마음에 담긴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분은 노후를 위하여 준비한 적금통장을 해약하여 정확하게 8,150,450원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후의 모든 환경을 지배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였더니 알 수 없는 기쁨과 소망이 넘쳤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분은 세상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러나 향유 한 옥합을 깨트려 자기에게 생명 주신 예수님께 온전히 드렸을 때 주님은 그의 사랑의 마음을 받으셨습니다. 사랑은 받은 것을 표현할 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랑의 표현은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 행하는 것입니다.
막 14: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내게 주어진 여건이 언제나 풍족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께 헌신하는 기회도 언제나 열려 있는 것도 아닙니다.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드리고자 하는 마음을 성령이 주실 때 이를 순종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 농촌에서 목회할 때 제가 농촌에서 목회할 때 신학대학원 동기분이 여주에서 개척하여 교회건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제게 감동을 주시기를 “주라 그리하면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 주리라”는 말씀을 떠 올리며 그 교회에 헌금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 내게 무엇이 있어요?”라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때 제가 결혼할 때 받은 다이아몬드 금반지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의논하여 하나님께 드리기로 하고 그 주에 사례비 15만 원 받은 것 중에 5만 원은 헌금으로 떼어놓고 10만 원과 결혼반지를 그 교회 건축헌금으로 드렸습니다.
제 마음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했을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감동을 주실 때 내게 있는 것을 아낌없이 드릴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는 사랑으로 이뤄지는 헌신은 낭비가 아니라 복음을 더욱 빛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막 14: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그는 힘을 다하여.” 본래 원문의 뜻은 마리아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 잡히실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마리아는 더는 예수님에게 가까이 갈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이 마지막 기회를 마리아는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마리아는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죽은 사람의 몸에 향유를 바릅니다. 그리고는 그때 향유를 담은 병을 깨뜨려 무덤 안에 두고 나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풍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도 자기의 옥합을 깨뜨려 그 안에 든 향유 전체를 예수님에게 붙어드린 것입니다.
막14: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중요한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강조하십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막13:10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다시 오시기 전에, 먼저 복음이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복음은 계속해서 온 천하에 전파되고 있습니다.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베다니의 마리아가 행한 일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오늘도 우리는 그가 행한 일을 말하며 그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이상 긴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베다니의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옥합을 깨뜨려 그 안에 담긴 향유 전체를 예수님에게 부어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그리함으로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했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귀하게 쓰임을 받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후세에 아름답게 기억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