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26고난주간특별새벽기도회 [예루살렘을 위한 마지막 순간들] 김성현감독(강석준집사님 정리)
막 14:3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막 14:4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막 14: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막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막 14: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막 14:8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막 14: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복음서를 볼 때, 주님의 계신던 때의 상황을 정확히 확인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주님은 더욱 더 위험하고, 더욱 더 주님을 배척하는 세상에 나타나셨다.
사람들은 주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큰 목소리로 추궁하시고, 질책하시는 것처럼 생각한다.
특히 요한복음에서는 교계 지도자들을 책망하시니, 많은 권세를 누리신 것처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천년전 주님 오신 당시에는 그렇게 않았다.
그것은 이후에 많은 핍박 속에서도 교회가 성장해야 하고, 자부심을 갖고, 용기를 갖기 위해, 자기들의 주님을 그렇게 표현할 수 없고, 좋게 표현했다.
성경이 정착될 때까지, 말씨를 아름답게 다듬으면서 왔다.
진짜 주님이 오셨을 때는 세상이 너무 미워하고, 너무 무시하고, 멸시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주님은 훨씬 더 무시당하셨고, 너무 많이 이 세상에 의해서 고난받으셨다.
우리는 주님의 고난을 생각할 때, 단지 골고다에 오르시기 위한 준비, 억울한 재판, 유대 지도자들의 간계로 인해 잡히시고, 십자가에 달리는 것, 선동당한 군중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리는 것, 잘 알고 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에서 그의 고난을 생각하며, 받으시고, 그 압력으로 인해 매우 괴로워하셨다.
이런 장면들이 멋지게 잘 맞추어지지 않는다.
인생 전체가 주께는 매우 괴롭고, 뼈아픈 인생이었다.
이 세상은 그가 지었지만, 주님을 거부했다.
주님은 이 세상을 아름다운 모양으로 창조하셨지만, 모든 것들이 주님으로부터 너무 많이 멀어졌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주님과는 너무나 멀고, 상관없게 되었다.
자기 땅에 오셨는데, 자기 백성들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했다. 이것은 온 인류가 배척한 것이다.
이 땅의 환경, 문화 모든 것이 주님을 배척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었고, 주님을 위해 창조되었지만, 하나도 주님과 맞지 않았다.
주님에 대해 예언했던, 이사야서를 보면, 주님이 이 세상에서 너무 많이 괴로움을 당하신 것이 나온다.
간고를 많이 겪은 자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권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말씀이다.
슬픔의 사람.
시편의 다윗의 시에도 주님의 고난 받는 모습이 그대로 나온다.
다윗왕도 고생했지만, 주님의 고생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래도 자기 성공을 맞보았다.
현장에서 당한 괴로움을 표현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주님의 괴로움에 대해 말하게 되었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너희가 내게 속했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라고 하셨다.
너희가 세상에 속했다면, 세상이 너희를 사랑할 터이나, 내게 속한 고로 세상이 미워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보다 내가 먼저 세상의 미움을 받았다.
그동안 너희에게 행복과 평안이 없었지 않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을 주노라. 내게 있는 평안은 세상에는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이 평안하다고 하지만, 하나도 평안하지 않다.
이 세상은 전면적으로 주님을 무시했다.
이것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전면적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굉장히 권위주의적이고, 주님을 죽이려고 했다.
주님이 오셨을 때, 그들의 눈에 얼마나 하찮았을까.
주님은 미움을 많이 받으셨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하셨다.
이 세상에는 종교가 많다.
교회도 많다.
그러나, 우리가 많은 경험을 통해 배웠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저 신앙생활만 하는 교회도 많다.
그저 반복되는 루틴속에서 진행되는 신앙생활, 거기에는 종교 요소만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없다.
주님을 배척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마음이다.
이 세상에 적응된 심령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기 어렵다.
그들은 세상이 그렇게 괴롭지 않다.
주님은 주님과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을 견뎌내셔야 했다.
주님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고비를 넘기셨다.
본인이 하나님이시면서도 미움을 받는 상황 속에서 저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주려고 오셨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을 뿐 아니라, 모든 불행과 지옥의 고통에서 건져 내셨다.
이 세상을 만족할지 모르지만, 그 심령은 타락이 많이 진행된 심령일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이 내게 유익이 있는지 생각하는 심령들은 너무 많이 간 것이다.
교회들에게 종교성이 충분히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마음으로 열심히 하자, 하나님을 사랑하자, 헌신하자고 하지만, 종교 안에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주님을 기억하고, 사랑하고, 배신하지 않는 것, 종교를 주신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신 주님을 기억하는 것, 내 주님을 내 삶속에 모시고, 힘을 얻고 용기를 얻고, 그만을 내 마음속에 모시면서, 영원한 미래를 꿈꾸는 것이 우리 삶이다.
종교성은 우리에게 주님을 믿는 가이드라인을 주어, 질서있게 해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 신앙의 본질은 주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난 항상 예배드리리라 말하지만, 주님이 예배받으시는가. 주님은 우리의 사랑과 회개를 받으신다.
우리는 사랑하는 자일까.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한다.
그것도 의심스럽다. 정말 사랑하고 있을까.
우리 성질 자체가 사랑하는 자일까.
나는 사랑하는 자일까.
나는 사랑이 있는 자일까.
주님은 사랑하는 자를 기대하고 계시다.
사랑하는 자가 이 세상에 많이 있었어야 한다.
주님께서 이 땅에서 인생의 마지막 일주일을 보내시려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셨다.
이미 주님은 종교 지도자들의 눈에 나서, 피해 다니고 계셨다.
언제든지 피살될 위험이 있었다.
그가 특별히 무엇을 누리거나, 자기 것을 많이 갖고 있거나, 그를 따르는 자가 위험스럽거나 하지 않았다.
성경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예쁘게 표현했다.
유대 교계가 너무 잔인했다.
그래야, 잘 먹고, 잘 사니까.
원래 유대 종교는 하나님께 회개하는 신앙이었다.
주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나귀새끼를 타고 들어오시면서, 많은 사람의 환영을 받았다.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을 회복할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원치 않았다. 정권이 바뀌면, 자기 일자리가 빼앗길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자기 창조주를 죽이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선동당해서, 그들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들은 미움이 가득하고, 불만을 풀어줄 희생거리를 찾았다. 그들은 사랑하지 않는 자였고, 충실하지 않은 자였다.
주님은 예루살렘에서 피살당하지 않기 위해서, 들어오셨다가도 거기를 피해서 베다니에서 주무셨다.
지나가면서, 시장하여 무화과 나무에서 열매를 구하였으나, 때가 아니므로, 열매를 주지 못하자, 저주하시고, 무화과 나무는 말랐다.
그리고,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을 보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다 내쫓았다.
성전에서는 주님을 죽여야겠다고 결단하게 되었다.
주님은 목숨의 위협을 느끼셔서, 베다니로 피하셔서 주무시고, 다음날 들어오셔서, 유대교 전체에 대해서 최후의 경고를 하셨다.
유대인들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했다.
그들과 논쟁을 벌이고,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해, 농부들이 아들을 죽이고 배반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 세상의 모든 배반이 마귀를 따라가는것이다.
이후에도 여러건의 논쟁이 있었다.
너희는 다윗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를 아느냐. 그리스도는 다윗보다 큰 이다.
그들은 주님이 하신 말씀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이해하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주님을 하찮게 보았다.
그러나, 그들과 다른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주님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향유옥합을 깬 자였다.
삼백데나리온은 노동자 일년 품삯이다. 그것은 주님의 장사를 위한 것이다.
가룟 유다는 왜 낭비를 하느냐고 불만을 하고, 그 여인을 비난했다.
그러나, 그 여인은 그것이 비싸고, 말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의 장사를 준비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마지막 시간을 보내시는데,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고 있었다. 자기에게 가장 값진 것을 깨서, 향유를 부어드렸다.
향유는 시신에서 냄새가 나지 않도록 장사할 때, 쓰는 것이었다. 보통 하지 않는 행동을 했다.
가룟 유다를 포함해서, 왜 저런 일을 하느냐고 할 때, 주님은 저 여인이 힘을 다하여 했다고 하셨다.
너희는 맞는 말을 하지만, 사랑이 없다.
가룟 유다는 말은 거룩한 체하지만, 뒤에서는 도둑질을 했다.
이사야서에 보면, 극상품 포도를 심었지만,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이냐,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실망, 경고였다.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자기를 사랑해주신 분이 곧 죽으시지만, 내 사랑을 드린다.
그분이 죽으시고, 끝이더라도, 나는 사랑한다.
충실하게 그의 마음을 드렸다.
죽으시니, 이후에 내게 도움이 안된다고 등돌리지 않았다.
그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저 여인이 행한 일은 복음이 전파되는 모든 곳에 전파되리라고 하셨다.
사랑하는 자가 되기 바란다.
세상 선동에 몇번씩 마음이 변하는 자가 아니라, 정말 충실한 자, 그리스도로 완전히 정착되기 바란다.
주님의 십자가의 길이 자기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잊지 않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