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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미, 배 밑에 깔려있던 정준의 양말 한 짝을 끄집어내더니, 뒤로 휙 던지고 한숨을 쉰다.
괴로운 듯 머리 위로 이불을 뒤집어쓰는 동미.
씬 60. 대학로 거리/낮.
중고생들이 바글바글 울긋불긋한 대학로 거리.
정장으로 쫙 빼입은 나난, 기다리고 서있다가 뜨악한 얼굴이 된다.
현란한 캐쥬얼 차림의 수헌이 솜사탕 두 개 들고 씩 웃어 보인다.
<점프> 떨떠름한 나난 얼굴에서 카메라 빠지면, 나난, 부케마냥 솜사탕 들고 있다.
수헌: (싱글벙글) 우리도 꼭 영계 같지 않아요?
수헌이 솜사탕 뜯어 나난 입에 넣어주자 할 수 없이 푸스스 웃어주는 나난.
나난NA: 동미 말이 맞다. 배고프다고 아무거나 덥썩 먹으면 안 된다.
ㅁ
씬 61. 소극장 안/오후.
무대에서 마임이 진행 중이다.
계단에도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나난과 수헌이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있고 옆에는 한 사람이 더 앉아있다.
수헌, 좁아서 불편한 듯 나난 쪽으로 더 바짝 당겨 앉는다.
나난, 수헌의 체온이 느껴진다. 가슴이 콩닥거려 괜히 신경질 부려본다.
나난: (소근 거리며) 좀 밀지 말아요.
수헌: (무뚝뚝) 나두 팔저려 죽겠어요. (갑자기 나난의 어깨에 팔을 덥썩 두른다.) 이러니까 좀 편하네!
수헌, 어깨동무한 채 무표정하게 앞만 본다.
나난, 뻔뻔한 수헌의 수법이 기가 막히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여 웃어버린다.
수헌의 숨소리가 귓가에 느껴지자 가까워진 기분이다.
수헌의 옆얼굴을 힐끔 보는 나난,
나난NA: 느끼하고 썰렁하고 유치한 데다 엉큼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뭐, 최악은 아니네. 데리고 다니기에 쪽팔린 얼굴은 아니잖아.
그때 핸드폰 벨소리가 극장 안을 울린다.
사람들, “뭐야?” 하며 웅성이는데 나난, 그제야 제건지 알고 허둥지둥 핸드폰을 받는다.
나난: (작은 소리로) 여보세요?
동미: (F) 난아, 나 동미.
나난: 왜? 극장이야, 끊어.
동미: (F) 나, 준이랑 자버렸어.
나난: 뭐라고?
동미: (F) 정준이랑 잤다구!
나난: (큰소리로) 뭐어? 정준이랑 잤다구?
수헌은 물론, 주위 관객들 죄다 나난을 쳐다본다.
무대 위 배우도 놀라서, 연기 할 생각도 잊고 쳐다본다.
씬 62. 소극장 로비/오후.
나난, 구석에서 통화중이다.
나난: 대체 어쩌다가?
정준: (F) 어제 니 전화 받고 아무래도 화해해야 할 것 같아서 거실로 나갔거든. 오, 맙소사…….
나난: 거기까진 동미 얘기하고 똑같으니깐 생략하고 그 다음에? 그 다음에 어떻게 된 거야?
정준: (F) 술을 마셨거든. 갑자기 슬퍼지는 거야. 막 눈물이 나더라구. 그래서 동미한테 안겨 우는데 동미도 나를 안고 울어버리는 거야.
나난, 돌아보면 수헌이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슬쩍 웃어준다.
민망한 듯 웃어 보이는 나난.
나난: 그래서 해버린 거야?
정준: (F) 모르겠어. 자고 일어나니깐 동미 방이더라.
씬63. 나난의 집 앞/저녁.
대문 앞에 수헌의 차가 와 멈춘다.
운전석에서 수헌이 내리더니 차 뒤로 가 트렁크를 열었다 쿵! 닫는다.
그제야 삐죽 열리는 조수석문. 나난이 내리려는데 수헌이 잽싸게 달려와 문을 열어준다.
미안한 표정의 나난이 뭐라 하면 쾌활하게 웃던 수헌, 다시 차에 타고 가버린다.
그제야 터덜터덜 걸어오는 나난. 대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동미, 일어선다.
동미: 야, 왜 그냥 보냈어? 차라도 한잔하고 가라고 해서 자빠뜨려 버리지.
나난: 으이구, 기지배, 아직도 정신 못 차렸냐?
동미: (킥킥, 웃는) 사실 니가 그 남자 데리고 들어 올까봐 간이 벌렁벌렁했다.
나난: 왜? 자고 갈려고?
동미: 당연하지. 걔 얼굴을 어떻게 보냐…….
나난: 안 돼. 당장 가서 볶아먹든 삶아 먹든 니들 둘이 알아서 해!
동미: 너 때문이야! 니가 화해하라구 하도 설치는 바람에 이렇게 됐잖아!
나난: 화해하라구 했지, 누가 그거 하라고 했냐?
갑자기 후다닥 나난의 뒤로 숨는 동미. 나난이 뒤돌아보면 정준이 오고 있다.
나난: 넌 또 왠 일이냐?
정준: 도저히 동미 얼굴을 못 보겠어서…….
나난의 뒤에 있는 동미를 발견한 정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서로를 쳐다보는 동미와 정준.
나난: 이것들이 내 방을 피난민 수용소로 아나…….
씬 64. 옥상/밤.
술에 취한 세 사람. 바닥에 술병들이 나뒹굴고 있다.
나난: 둘이 결혼해라.
정준/동미: 뭐?
나난: 한 지붕 아래 살면서 부엌도 같이 쓰고 화장실도 같이 쓰는데 이불도 같이 쓰면 되잖아.
정준: 말도 안 돼.
동미: 차라리 나보고 죽으라 그래라.
정준: 나도 안 해. 쟤하곤 죽어도 안 해.
나난: 그런데 왜 해? 왜 했냐구?
정준/동미: ……. (할 말이 없다. 서로 눈 마주치더니 팽 고개 돌리는…….)
<시간경과>
나난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앉은 동미와 정준, 오바 해가며 둘이 잔을 부딪친다.
나난NA: 결국 우리는 합의를 봤다. 지난밤의 사건은 없었던 일로 하기로…….
동미: (정준과 쨍 부딪치며) 마시자 칭구야!
정준: 마이 무라, 칭구야!
동미: (정준에게 오징어다리 먹여주며) 안주 무라, 칭구야!
정준: (동미에게 같이 먹여주며) 니두 무라, 칭구야!
가운데서 왕따 당한 나난, 둘이 노는 꼴을 같잖게 보고 있다가 짐짓 큰소리로.
나난: 좋아, 그럼 다시 친구가 된 의미에서 건배!
잔을 부딪치고 원샷하는 세 사람. 나난. 문득 멈추고 둘에게 물어 본다.
나난: 근데 말야, 니들하고 똑같아 질려면 나도 준이하고 한번 자야 되는 거 아니냐?
그 말에 술을 마시던 두 사람이 사래가 걸려 푸하, 술을 토해내고 만다.
<시간경과>
흐트러진 모습의 세 사람.
정준, 앉아 졸고 있고 동미, 취해 목청 높여 떠들고 있다. 나난은 적당히 취했다.
동미: 띠바, 이건 완전히 폭력이야. 처음 보는 인간마다 꼭 물어봐. “결혼하셨어요?” 근데 꼬옥, 결혼한 인간들일수록 물어봐. 그러면서 꼬옥, 결혼하지 말라 그래. 그러면서 왜 물어봐? 차라리 “너 행복하니?” 이런 거 물어봐!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어. “행복할려구 노력중입니다!” 아, 그래, 나도 결혼하고 싶어. 근데! 하고 싶은 결혼을 하고 싶지, 해야 되는 결혼은 안 해!
정준: (중얼) 안 해, 난 안 해……. (딸꾹)
나난: 알았다, 내 잘못했다. 둘이 결혼하지 마라.
동미: 그래, 솔직히 나두, 한 달에 한 번씩은 결혼하고 싶어 미치겠어.
나난: (절규) 카드 값 날아올 때!
동미: 크하, 그땐 정말 돈 많은 놈팽이한테 날 왕창세일하고 싶다.
나난: 미 투!
동미: 근데 스물아홉은 시한폭탄이냐? 가만 두면 뻥 터져? 일 년에 몇 백씩, 그렇게 돈 들여가면서까지 짝짓기란 걸 해야 돼? 울 엄마 아부지, 울 언니들 죄다 중매결혼 했잖냐. 서른 넘으니까 가슴팍에 왕창세일 붙이고 순순히 가드라. 열라 재미없어.
나난: 울 아부진, 제발 늦게 가랜다. 집에 한몫 보태고 가라고. 근데, 서른 넘기지 말고 알아서 가래. 어휴…….
동미: 울 아부지만 불쌍해. 뼈 빠지게 갈쳐놨더니 그저 그런 놈한테 헐값에 넘기구, 그게 왠 밑지는 장사야? 난 결혼안하구두 잘 살수 있다는 거 보여주고 말거야.
나난: 니가? 잘도 살겠다.
동미: 이동미 향후 30년 액션 플랜, 완벽하게 마쳤다. 다 짜고 보니까……. 결혼할 틈이 없는거 있지.
나난: 연애 할 시간은 있구?
동미: 당근이쥐. (사이) 혹시 모르지, 그러다 결혼할지두…….
나난: (다 알고 있다는 듯) 한 50억 광년 후에, 외계인하구?
동미: (음산한) 넌 너무 많은걸 알고 있어. 죽어줘야겠어! (나난에게 헤드락 건다.)
나난: 아악, 아퍼!
동미: (끌어안고) 너두 결혼하지 마라! 우리 같이 살자, 응? 넌 돈벌어오고! 이넘은 살림하고!
나난: 그럼 넌?
동미: 나? (궁리하다가) 애는 내가 낳아 올께.
나난: 싫어!
동미: (더 끌어안으며) 자갸 나 버리지 마라.
나난, “왜 이래?” 하며 동미를 밀어버리다 “으이구”, 하며 끌어안는다.
둘이 부둥켜안고 흔들흔들 하고 있는데 옆에서 졸던 정준, 딸꾹질하다 깨어 눈을 홉뜨고 쌍꺼풀 진 채로 고개를 든다.
부둥켜안은 두 여자를 보고 딸꾹! 하더니 두 여자 사이에 끼어들어 안기는 정준.
<CUT TO>
나난이 옥상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골목을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정준과 동미가 보인다.
나난NA: 두 인간은 자고 가라는 내 권유에도 잠은 자기네 집에 가서 자겠다며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고 나갔다.
어깨동무를 하고 거리로 나가는 정준과 동미.
골목이 울리도록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며 사이좋게 걸어가고 있다.
옥상에서 소리치는 나난. “야, 그러다 니들 또 자지마.”
나난NA: 하지만 난 다시 잤으면 했다. 그래서 결혼까지 했으면 했다. 결혼해서 평생을 친구처럼 살면 안 되나?
씬 65. 하이락 클럽/밤.
홀.
영업 정리 분위기. 점장이 외친다.
점장: 회식 모드로 전환!
수현, 미단보다 오히려 더 당황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점점 더 가까워지는 R.
R과 미단을 번갈아 보며 머뭇대는 수현.
손을 내미는 미단.
엉겁결에 덥쑥 손을 맡기는 수현.
미단, 그를 안은 채 옥상 밑으로 몸을 날린다.
아뿔싸!
수현, 비명 지를 틈도 없이 동반낙하.
옷자락이 바람에 날리고 다행히 두 사람, 그 밑을 달리던 유조탱크위로 떨어진다.
옥상 위에서 지켜보고 있는 R.
그들을 태운 유조탱크는 사거리 교차로를 지나 대로로 향한다.
R: (시니컬한) …….
씬 43. 거리.
요란하게 흔들대는 트럭 위.
불안하게 주위 살피는 미단.
수현, 넋 빠져 미단 보고 있다.
미단: (다급한) 제 얘기 잘 들어요. 조금 전 그 사람은 당신을 죽일지도 몰라요. 당분간 그곳엔 가지 말아요.
수현: (무슨 얘길 하는지 어리둥절) ?
트럭위로 철교가 부딪힐 듯 위협스럽게 지나고 아슬아슬 몸 숙인 채 피하는 미단, 수현.
요란하게 철교 위를 지나는 전철.
미단: 어디든 멀리 떠나요. 이곳에 다시 돌아와선 안돼요.
수현: (도리질) 대체 무슨 얘길 하는 거예요? 그 사람 누구예요. 왜 날 쫓는 거죠?
미단: 그 사람은 증오의 화신 이예요. 지난 백칠십 년간 악령들의 흑암에 갇혀 있다 다시 풀려났어요.
수현: (기막힌)
미단: (두리 번) 더 이상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전 지금 가야 돼요.
수현: 갈 때 가더라도 하나씩 차근차근 얘기해 봐요.
미단: 내가 지금 가지 않으면 한사람이 죽게 돼요. 전 그 사람의 육신을 빌려 나왔어요.
수현: 그럼 대체 당신은.
미단, 손으로 입술 가린다.
미단: (간절한) 내 말 명심해요.
미단, 입술 가렸던 손 내린다.
수현: …….
미단: (눈가에 홍조) 미단. 내 이름은 미단 이예요.
미단이라는 말에 멍해져 보는 수현.
미단, 자신이 그린 그림에 붙여준 이름이 아닌가.
수현: (점점 혼돈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수현, 입속말) 미단?
off - 빠앙!
요란한 크락숀.
씬 44. 도로 한곳.
길 가장 자리에 급정거하는 대형트럭.
고약하게 생긴 유조탱크 운전수, 차문 열고 탱크쪽 밟고 올라서며 탱크쪽 본다.
수현, 머뭇대다 미안쪽 보면 없다.
두리 번. 미단 찾는 수현.
운전수: (기막힌 듯 보고 있는 운전수) 야. 너 거기서 뭐하니?
수현, 감쪽같이 사라진 미단 찾아 앞 뒤 좌우, 아래 살피지만 감쪽같이 사라졌다.
운전수, 기어 올라가 다가간다.
운전수: (능청) 날은 폭폭 찌는데 피서 갈 돈은 없고 남들 다 있는 깔 쌈한 갈치 하나 없고, 아 한 많은 세상. 나라도 죽고 말지. (갑자기 팔 걷어 부치고 달려가며) 애라이 개자식아 왜 하필 내차야. 내 밥줄!
으랏챠!
이단 옆차기로 몸을 날리는 운전수.
첫발질.
주루룩 미끄러져 짐칸 아래로.
쾅!
악!
수현, 아랑곳 않고 사라진 미단을 찾느라 두리번거린다.
씬 45. 수현 작업실.
침대를 등지고 창밖을 바라보는 R의 실루엣.
R: 너무도 긴 시간이었어.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감격스러워 눈물이라도 흘려야 할 판에 왠지 슬퍼.
뒤돌아 침대 흉상 내려 본다.
조각된 남녀 흉상.
R, 손으로 남자의 흉상을 가리며.
R: 이 친구는 이미 과거의 종문이 아냐. 더 이상 날 슬프게 만들지 마.
말없는 여자의 흉상.
씬 46. 병원 영안실.
환자 영철<미단으로 인해 죽은>의 영정.
off로 들리는 카세트의 찬송가.
영정 앞의 촛불, 영혼이 움직이는 듯 꺼져 버린다.
예배 보는 교회 자매들.
카메라 이동하여 그 뒷켠에 놓인 관으로, 어둠속에 놓인 관.
쿵, 쿠궁!
그 속에서 사람 움직이는 소리.
관속 소리 조금씩 커진다.
반대편 영정 쪽.
어떤 여자, 죽은 영철의 형과 얘기중이다.
여자: (정중히)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영철 형: 평소 동생의 뜻에 따랐을 뿐입니다. 동생은 죽었지만 한 사람의 광명을 밝힌 건 저희로서도 기쁜입니다.
여자: (준비한 봉투 건네주며) 약소하지만 저희 가족의 성의입니다. 받아주세요.
영철형: (봉투 백에 도로 넣어주며) 동생 눈 팔아 먹었단 얘기 듣고 싶지 않습니다. 가져가십시오.
이때 off로 들리는 영철 동생의 고함소리.
동생: 야! 너 잘 왔다!
소리 나는 쪽을 보는 영철형과 여자.
영철 동생, 인사차 온 선영에게 퍼붓고 있다.
동생: (눈빛이 정상이 아니다. 담담하게) 어이 돌팔이. 우리 형 살려내. 우리 형, 응? (손가락질) 네가 죽였어. 니가. 수술 받고 말짱하던 형이 왜 죽어. 니가 수술 잘못 한거야.
진명, 막아서며.
진명: 이봐요. 죽이긴 누가 죽였다고 그래요?
동생: 아니면. 나야, 너야? 귀신이 죽였냐?
진1
인파 헤치고 달린다.
노점상 물건들이 부딪혀 구른다.
피하는 행인들.
단순히 도망치거나 특정된 목적도 없다.
너무 큰 충격에 자신도 모르게 달리고 있는 것이다.
씬 56. 근처 도로.
빠아앙!
끼이익!
수현, 미친 듯 도로를 가로질러 달린다.
제정신이 아닌 듯.
아슬아슬 차들이 비켜 지나고.
씬 57. 유흥가 락 카페 입구.
요란뻑쩍한 락 카페 입구.
수현, 용수철처럼 튀기듯 돌아와서는 유리벽에 부딪혀 멈춘다.
숨 가쁜 호흡.
땀이 비 오듯 흘러 등짝을 흥건히 적셨다.
수현, 속이 매스꺼웠는지 가슴을 움켜쥐고 꺽꺽댄다.
한참 만에 숨을 다듬고 고개 드는 수현.
유리에 비친 자신을 본다.
거울속의 수현.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몸과 얼굴을 만져본다.
유리벽 앞의 남자는 분명 자신이고 살아 있다.
그렇다면 조금 전 R의 손에 죽어 있던 그는 누구란 말인가.
<인터넷 - R에게 멱살 잡힌 채 죽어있는 수현 자신>
수현, 공포. 혼돈. 고통으로 괴로워한다.
씬 58. 카페 안.
자욱한 연기.
현란한 춤.
강한 조명.
락카페 구석 전화박스 앞의 수현 뒷모습.
뭔가 얘기하고 싶은데 말이 안 나온다.
(휠 터): 경찰입니다. 말씀하세요. 여보세요? 거기 어디예요? 죽은 사람과는 어떤 관곕니까?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수현, 답답함에 수화기 놓고 춤추는 사람들 사이에 헤치고 비틀대며 나온다.
씬 59. 작업실 안.
어둡고 음산한 작업실 분위기.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R의 실루엣.
R: (시니컬한) 사랑의 재물이 된 가엾은 친구.
(침대에게) 재회의 인사가 기껏 이건가? 얼마나 더 죽이고 싶어? 이따위 눈속임은 너완 어울리지 않아. 다 소용없는 짓이야. 어서 거기서 나와. (흉상) 쾌쾌한 그 침대속이 지겹지도 않나?
R을 보고 있는 듯 한 침대 흉상.
씬 60. 카페.
스탠드에 나란히 앉은 선영, 진명.
선영: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죠? (픽) 이럴 땐 어떻게 해야 돼요?
진명: 각막 이식만 안했어도 이렇게까지 문제될 건 없는데.
선영: 세상 사람들 모두 날 비웃겠죠? 죽지도 않은 환자를 죽었다고 안구 이식까지 시켜 병신 만든 돌팔이 의사. 해외 토픽 깜이죠.
진명: 곧 밝혀지겠지만 이건 누구의 실수나 잘못이 아냐.
선영: 괜히 위로할거 없어요. 그 사람은 제 환자고 모든 게 내 책임 이예요. 이미 얼간이 병신된 건 나라구요. 그 사람은 다시 살아났고 난 죽었어요. 모든 게 끝장 이예요. (눈물 핑) 내일 뵈요.
일어나 백 들고 나가는 선영.
진명, 착잡한 심정으로 안쓰럽게 본다.
씬 61. 선영 오피스텔 복도.
띵!
엘리베이터 문 열리며 나오는 선영.
좁고 긴 복도를 따라 걷는다.
신경질 섞인 발걸음.
키를 꺼내 자신의 룸 앞에 멈춘다.
누군가 바로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듯 한 시선.
철컥.
키를 꼽아 돌리지만 열리지 않는다.
다가가는 그림자.
다른 키를 꼽아보는 선영.
문을 열리고 안으로 들어간다.
씬 62. 오피스텔 안.
안으로 들어서는 선영.
불쑥 그 앞을 가로막는 수현.
화들짝 놀라는 선영.
수현, 선영을 벽 쪽에 몰아세우며.
수현: 잠깐.
수현, 문으로 다가가 문구멍으로 밖을 확인한다.
선영: 무슨 짓이야. 사람 놀라게.
수현, 안절부절 룸 안으로 걸어 들어오며.
수현: 아무래도 다시 병원에 가봐야겠어.
선영: 검사 결과 나왔어. 죽을 병 걸린 거 없으니까 걱정 마. 완벽해 무좀 빼놓고.
냉장고 문 연다.
수현, 탁자위의 위스키를 마시고는.
수현: 날 봐. 나 좀 봐. 나 맞어?
선영, 발로 냉장고 문 닫고 캔 맥주 딴다.
벌컥 들이키며 전화기 쪽으로.
수현: (off) 내 말 안 들려?
선영에게 몇 걸음 다가가는 수현.
수현: (가슴 치며) 나 맞냐구!
선영: (전화기 쪽으로 가며) 무슨 소리야.
수현: (답답) 난. 난 분명 죽었었어. 죽었었다구!
선영, 전화기 메모리 버튼 누르고 되돌아가며.
선영: (혼잣말 하듯) 죽은 건 그 사람이야. 분명히 죽었지.
수현: 누군가 날 죽이려 하고 있어!
선영: 다시 살아나겠지.
앞장서 가는 선영.
뒤 따라는 수현.
수현: 농담이 아냐!
선영: 농담이 아니길 바랬어.
수현: 그 자의 손에 죽어 있던 사람이 분명 나였어.
선영: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이건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있는 일이야.
서로 제각기 딴 얘길 하고 있다.
수현: 영화나 소설이 아냐! (뒤따라가다 멈춰서며)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구!
선영: (휙 돌아보며) 너까지 왜 이래! 난 지금 내 정신이 아냐!
수현: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선영: 더 이상 헛소리 지껄이려면 (손짓)밖에 나가서 혼자 해!
수현: 난 지금 심각해!
선영: 난 심각하다 못해 미쳐 죽어 버릴 것 같아!
수현: 나의 생사가 걸린 문제야! 어쩌면!
선영: 귀가 열 개라도 지금 내 귀엔 안 들어와! 아무 얘기도 하지마! 아무 얘기도!
수현: !
선영 다가와 와락 껴 안긴다.
선영: 안아줘.
수현: (착찹. 답답)
선영: 생애 최악의 날이야. (글썽) 내가 왜 이러는지 내일이면 알게 될 거야. 저명인사가 되어 있을 테니까.
수현: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씬 63. 철로 건널목.
지평선 같은 느낌의 다소 현실적인 건널목.
달리는 열차 바퀴.
바퀴 뒤편으로 미단의 하반신이 보인다.
씬 64. 노공 창고 안.
미로 같은 창고 안을 훑고 지나는 카메라.
따가운 역광이 내려쬐고, 친정을 찌를 듯 즐비하게 늘어선 가야금 재료 목재들.
씬 65. 철로 건널목.
(실외)
달리는 열차 부감.
건널목 정차중인 버스 000번.
버스 속에는 아무도 없고 노공만이 창밖을 보고 있다.
씬 66. 궁내 연못/새벽.
물안개 자욱한 새벽 연못.
무아지경의 종문, 탑 아래 앉아 가야금을 뜯고 있다.
종문을 바라보고 있는 미단 공주.
씬 67. 노공 창고 안.
계속 안쪽으로 파고드는 시야.
곳곳에 늘어서 있는 가야금.
씬 68. 철로 건널목.
달리는 열차.
열차 반대쪽에 선 미단.
씬 69. 노공 창고 가는 길 1.
주위 사방을 살피며 독특한 이미지의 길을 달리는 수현.
씬 70. 노공 창고.
가야금 뜯고 있는 종문. 연못에서 입은 고전 복장 그대로다.
씬 71. 노공 창고 앞.
창고 같은 허름한 집을 향해 달려오는 시야.
씬 72. 철로 건널목.
와이프 되듯 열차 지나가면 정면 향해 서 있는 미단.
씬 73. 노공 창고 안 앞.
열리는 문.
그 앞에 서 있는 수현.
등을 보이고 가야금 치던 종문, 연주를 멈추고 돌아본다.
씬 74. 종문 귀양지 바닷가/저녁.
초췌한 몰골의 미단, 간신히 버티고 서서 종문 바라보고 있다.
바람에 흩날리는 미단의 머리칼.
씬 75. 노공 창고 안.
빨려들 듯 걸어오며 손 내미는 수현.
산발적으로 늘어서 있는 <어느 정도 일직선>
노공, 종문, 미단, 황 장군.
수현의 시야, 마지막 황 장군의 얼 굴속으로 파고든다.
씬 76. 선영 오피스텔.
획!
고개 돌려 눈을 뜨며 잠에서 깨는 수현.
꿈이 너무 생생했는지 한동안 넋을 놓고 두 눈을 끔벅인다.
그 옆에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선영.
선영: (잠꼬대) 죽은 놈이 어떻게 살아나. 뭔가 잘못됐어. 그딴 속임수에 내가 넘어갈 것 같아? 사람 잘못 봤어. 잘못 봤어.
엎치락 뒷치락.
일어나 앉아 꿈 생각에 빠져 있는 수현.
선영, 휙 돌아서 수현위에 다리 걸친다.
수현, 점점 깊은 혼 돈속에 빠진다.
씬 77. 수현 작업실 복도.
다음날.
쾅!
작업실 문 닫는 수현.
괜한 두려움에 쫓기는 사람처럼 좌우 살피며 키 꺼낸다.
작업실 문 윗쪽 자물쇠를 잠그로 키 뭉치에서 아래쪽 키를 찾는 수현.
여전히 주변 의식하는 수현의 불안감.
누군가의 시선 하나가 수현에게 다가간다.
철컥!
아래 키 꼽고 잠그는 손.
복도 쪽으로 돌아서는 수현.
이때 불쑥 그 앞을 가로막고 서있는 옆집 할머니.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서는 수현.
할머니: (표정 없이 소포들이 대며) 소포 왔어.
수현: (너무 놀란 자신이 겸연쩍다. 휴- 안도)
할머니: 아침에 왔어. 외박했나봐.
수현: (받아들며) 일이. 좀 있어서요.
어물쩍 받아 들고 본다.
씬 78. 병원 회의실.
탁자 위 TV 모니터.
환자 영철의 동생, 두 눈 부라리며 인터뷰.
동생: 멀쩡한 사람 죽었다고 해서 형님 생전에 말씀대로 안구 기증했더니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구요! 모든 게 그 돌팔이 여의사 때문이예요!
기자: 가족 측에선 직접 사망유무를 확인해 보지 않았나요?
동생: 아! 의사가 죽었다는데! 뭘 확인합니까?
이게 말이나 되는 얘기예요? 우리 형님 봉사됐어요. 병원이 뭐하는 댑니까. 사람 살리러 병원 왔다가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어디 있어요!
병원 앞 기자.
기자: 이번 사건을 놓고 갖가지 언측과 이견이 떠도는 가운데 분명한 것은 죽은 사람은 되살아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병원장, TV를 끄고는 팽개치듯 리모컨을 내던진다.
선영, 진명, 동료 의사들 숨죽이고 앉아 있다.
원장: 병원 문 닫을 일만 남았군.
선영: (모멸감에 파르르 떨고 있다)
원장: 얘기들 좀 해봐요.
서로 눈치만 본다.
원장: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진명, 히끗 선영 보고는.
진명: 주위 분위기에 휩쓸려서 감정적으로 해결해선 안 된다고 봅니다. 좀 더 철저한 조사를 해서.
원장: (시비조) 조사? 김 선생 뭘 알고 싶어? 알고 싶은 게 뭔가.
진명: 단정할 순 없지만 가끔씩 의학적으로 풀 수 없는 불가사이한 일들이 종종 생기니까요.
원장: (돌변해 핏대 세우며) 김 선생 지금 제 정신이야! 죽었다가 예수처럼 부활했단 얘기야? (벌떡 일어나 진명쪽으로 오며) 여긴 병원이야! 병원! 우리가 사이비 교주 추종하는 광신도들인가? 여긴 파러필드 마술 공연장이 아니란 말이야! 어떻게 의사 까운을 입은 당신이 그런 얘길 할 수 있어!
선영: (단호한) 그 사람 분명 죽었었어요.
원장: 지금 살아 있잖아!
선영: 그걸 부인하고 있는 게 아녜요. 난 그 사람의 사망 사실을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원장: 오! 사망 진단에 이상이 없었다. 난 아무 잘못도 없다! 이 얘기야!쾅 닫는다.
그러자 저절로 탁! 하고 열리는 조수석 문. 놀라는 나난.
나난, 찜찜한 표정으로 올라타자 수헌, 운전석에 탄다.
나난: (안전벨트를 매려는데 안 된다.) 이거?
수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아, 그거 손으로 붙잡고 있어야 돼요.
나난, 벙찐 표정으로 보자 수헌, 시동 걸며 태연하게 말한다.
수헌: 차야 굴러만 가면 되죠.
씬 53. 달리는 차안/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서울의 야경이 아름답다.
나난, 힘겹게 안전벨트 부여잡고 피곤해서 넋 빠진 얼굴로 창밖을 보고 있다.
수헌: 원래 그렇게 까다로워요?
나난: (심드렁) 네? 네…….
수헌: 군대동기까지 소집해야 하나 했어요.
나난: 네…….
수헌: 나란 인간, 궁금하지 않아요?
나난: 네? 네…….
수헌: 우노증권에 다닙니다. 이름은 박수헌이구요.
나난: 네…….
수헌: 난이씨가 일하던 사무실 바로 위층인데……. 몰랐죠?
나난: 네…….
수헌: 언제 시간 좀 만듭시다!
나난: 네……. (했다 놀라 돌아보며) 네?
그때 뭔가 터지는 펑! 소리가 난다.
깜짝 놀라는 나난. 수헌, 역시 화들짝 놀란다.
본넷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씬 54. 거리/밤.
길가에 수헌 차 서있고 나난, 피곤에 쩔은 얼굴로 도로가에 쭈그리고 앉아있다.
눈이 거의 감긴 게 졸려서 기절하기 직전이다.
나난: (짜증이 묻어나는) 고칠 수 있긴 하는 거예요?
본넷 열고 수리하고 있는 수헌, 검댕 묻은 얼굴을 삐죽 내밀며.
수헌: 말씀 안 드렸던가요? 저 정비병 출신입니다.
다시 본넷 안으로 고개 들이미는 수헌.
<CUT TO>
나난이 택시에 오르자, 택시 부웅 떠난다.
이를 망연자실 바라보는 수헌.
‘빵빵’
수헌, 머리 긁적이며 돌아서면 견인차에 수헌차가 매달려있다.
씬 55. 동미 정준네 거실/밤.
동미, 문 빠끔히 열고 눈치 보며 까치발로 걸어 나온다.
자기 냉장고를 열어 맥주 한 병을 꺼내는데 정준의 방문이 벌컥 열리고 정준이 나온다.
동미는 맥주를 딴 다음 병마개를 싱크대에 탁, 던져버리고 찬바람 나게 정준을 스쳐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정준도 인상을 부욱, 긋고 자기 냉장고를 열어 맥주 한 병을 꺼내 들고는 동미의 방을 노려보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다가 다시 걸어와 부엌 불을 끄고 들어가 버린다.
쿵, 소리와 함께 어둠에 쌓이는 거실.
전화벨이 오프사운드로 들린다.
씬 56. 동미의 방.
동미, 맥주마시며 인터넷 고스톱 하고 있다.
동미: 대학로? 왜, 마로니에 공원에서 배드민턴이라도 치자디?
화면 오른쪽 상단에 나난의 목 위 얼굴만 동그랗게 뜨더니 동미를 내려 보며 말한다.
나난: 안 만나주면 텐트치고 데모할 기세더라구…….
동미: 큼……. 배고프다고 아무거나 덥썩 먹지 마라. 젠장, 또 쌌어! 누굴 잊기 위해서 급하게 새 남자 만나는 거 위험하다.
그때 방 밖에서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놀라는 동미. “잠깐만” 하고 방문으로 걸어가면 나난의 얼굴이 없어진다.
문 밖에서 정준이 말하는 게 들린다.
정준: 공과금이다. 내꺼 여기다 놓고 갈 테니깐 니꺼 합해서 내일 니가 내라.
방문을 열어보면 방바닥에 세금 계산해 논 종이와 지폐와 10원짜리 동전들이 놓여있다.
그걸 집어 드는 동미. 수화기에서 나난이 소리치는 게 들린다.
나난: (소리) 뭐야? 준이야?
동미: 응.
나난의 얼굴이 다시 처음크기의 동그라미로 나타난다. 동미가 다시 침대로 와 철푸덕 앉으면, 나난의 얼굴이 그쪽을 향해 본다. 조금씩 커지는 나난의 동그라미.
나난: 니들 아직도 화해 안했어?
동미: 안했어. 아니 안한다! 참, 나 돈 좀 꿔주라. 여기서 빨리 나가고 싶은데 보증금이 모자란다.
나난: 야, 이동미. 너 보증금 모자라서 정준이네 집으로 들어간 게 엊그제야. 그리구 그때랑 지금 집값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 줄 알어?
동미: 됐어, 이년아. 너한테 돈 이야기하는 내가 바보지.
나난: 화해해. 그러면 꿔줄게.
동미: 됐어! 차라리 딸라 빚을 내고 말지…….
나난: 야, 준이 성격 몰라? 그 소심한 인간, 너한테 사과하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거다.
동미: 뭐? 안절부절? 그런 자식이 공과금 주고 가냐? 것두 10원짜리 한장까지 칼같이 계산해서? 저런 놈을 지금껏 친구라고 생각한 내가 미친년이다.
나난: 암튼 내 돈 필요하면 화해해.
조금씩 커지던 나난의 동그라미가 완전한 화면크기가 되어 다음 씬으로 연결된다.
씬 57. 나난의 방.
찰카닥, 전화를 끊는 나난.
손에 들고 있던 풍선으로 동물 만들기 연습을 마저 하다, 빵 터뜨린다.
“휴우” 한숨을 내쉬곤 다시 수화기를 들어 번호를 누른다.
1전화벨 소리가 들리고 이윽고 정준의 “여보세요”, 하는 목소리가 들리며 화면 오른쪽 상단에 정준 얼굴이 뜬다.
대화도중 정준의 동그라미가 점점 커진다.
나난: 야, 임정준, 너 남자가 왜 이렇게 째째해?
정준: (나난 내려다보며) 무슨 소리야?
나난: 아직도 뻗띵기고 있대메? 사과 안할 거야?
정준: 사과는 동미가 먼저 해야 돼. 난 지가 누구랑 연애를 하든 간섭 안했어. 근데 지는…….
나난: 야, 동미가 왜 그랬는지 너 몰라?
정준: (뚱한 표정) …….
나난: 정말 모르겠어? 너 취직 못하고 빌빌거릴 때 걷어 멕인 게 누구였어?
정준: (뚱한 표정) …….
나난: 빨리 화해해. 안 그럼 나 니들 둘 다 안 본다.
나난이 전화를 끊으면 정준의 동그라미가 완전한 화면 크기가 되어 다음 씬으로 이어진다.
씬 58. 정준과 동미의 집.
<화면분할>
전화를 끊고 생각에 잠기는 정준. (앞에 가계부가 펼쳐져 있다.)
침대에 쪼그리고 앉아 곰곰이 생각하는 동미.
그러다 벌떡 일어나는 두 사람. 동시에 방을 나선다.
정준과 동미, 각각 문을 열고 거실로 나오다 마주치면 화면이 합쳐진다.
서로를 보고 속으로는 뜨끔했지만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딴전 피우는…….
힐긋 상대의 눈치를 보기를 여러 번…….
그러다 동시에 상대에게 말을 거는 두 사람.
“야”,……. 말이 부딪히자 어색해하는 두 사람.
다시 침묵이 찾아오는데…….
동미: 나 말야…….
정준: (동미를 쳐다본다.)
동미: 다음 달 내로 나간다.
정준: …….
동미: 나 나간다구! (그래도 대답 없자) 정말 나갈 거라니까!
정준: 응.
동미: (어랍쇼?) 딴 룸메이트를 찾든지, 내 보증금 빼주고 니가 인수하든지 해라.
정준: 알았어.
동미: (이게?) 그동안 이 남자 저 남자 데리고 와서 미안하다!
정준: …….
동미: 앞으로 있는 동안이나마 절대로 그런 일 없을 거다. 날도 더운데 나 나가면 훌떡 벗고 돌아다니고, 좋겠다. 임정준.
정준: (힐끗 보면)
동미: (퉁명) 비꼬는 거 아니다.
정준: 난 말이야…….
동미: 그러니까 나있는 동안 너! 이집에 그 지지배 들이지 마.
정준: ?
동미: 난 그 기지배 꼬라지도 보기 싫어. 그 년 때문에 우리가…….
정준: 야, 이동미. 걔 이름은 지혜야. 왜 멀쩡한 이름 놔두고 욕이냐?
동미: 그런 년은 욕먹어도 싸. 나쁜 년! 또 한번 말해주랴? 나, 쁜. 년.
정준, “나 원 참…….” 헛웃음을 짓고 만다.
그래도 굳어있는 동미를 보던 정준, “으이구!” 하며 갑자기 동미 허리를 안고 번쩍 들어버린다. “어어? 이거 안 놔?” 소리치는 동미.
“으이구!” 하며 동미를 안고 흔드는데 동미가 몸부림치자 중심 잃으며 콰당, 넘어지는 정준.
정준에게 안긴 채 바닥에 떨어지는 동미. “아야!”
<시간경과>
동미와 정준, 마루에 퍼질러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바닥에 뒹구는 캔 맥주, 소주병들…….
담배를 입에 문 정준이 라이터 불을 켜 동미에게 대준다.
머리를 맞대고 같이 담뱃불을 붙이는 두 사람.
한 모금 빨아들이고 길게 내뿜는 정준과 동미. 정준은 취한 상태다.
정준: (담배 보며 피식 웃는다.) 오랜만이다, 너……. 널 또 만나게 될 줄이야…….
동미: 사는 게 다 글치, 뭐…….
정준: 그날 나……. 괜히 너한테 화풀이한 거야. 내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고 비참해서…….
동미: 알어…….
정준: 지혜이가, 나보고 좋은 놈이래. 무지무지 화나더라. 왜냐, 난 좋은 놈이 아니거덩. 나 졸라 승질 드럽구 삐뚤어진 놈이야. 열등감 덩어리구. 아닌 척 할라구 허허 웃으면서 생쇼하는 거야. 바보 븅신이라 그래. 참고 웃어주니까 남들이 좋은 놈이라구 그러더라. 좋은 놈, 그것 말곤 인정받을 만한 게 없거든.
동미: (깊은 눈빛)
정준: 지혜이가! 지혜이가 나보고 좋은 놈이래. 근데 나 졸라 화났어! 왜? 나 좋은 놈인데, 지혜인 싫대잖아. 좋은 놈 이꼬르 무능력한 놈. (읊조려보는) 좋은 놈, 좋은 놈, 촌 놈……. 존 놈……. 야, 거기 존 놈! 계속 졸 거면 책상 들고 나가! (낄낄거린다.) 크하하, 하느님이 졸다 만들었냐, 난 왜, 돈두 없구, 능력두 없구, 왜 남들처럼 뽀대나는 집에 안 태어나구, 환갑 넘어서까지 농약칠하는 울 엄마 아부지한테 태어났냐구……. 시발…….
정준, 고개를 푹 떨구고 가만있다.
정준을 측은하게 보는 동미, 혼자 술을 들이킨다.
동미: 븅신…….
정준: (고개 떨군채 중얼거리는) 맞어, 난 븅신이야…….
동미: 등신…….
정준: 맞어, 난 등신이야…….
동미: (버럭) 아, 이 새끼 진짜 븅신이네. 딴 사람도 다 그래!
정준: …….
동미: 자냐?
정준: (고개 떨구고 있는데 가늘게 어깨가 흔들리고 있다.)
동미: 야!
정준의 발등 위로 눈물이 뚝 떨어진다.
숨죽이고 낮게 흐느끼는 정준. 동미, 순간 짠해진다.
동미, 정준의 옆에 가 앉아 어깨에 손을 올리고 등을 토닥여준다.
정준, 동미의 가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