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7.6.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강론>
<마태9,32-38>그때에 32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33 마귀가 쫓겨나자 말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34 그러나 바리사이들은,“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35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36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말을 잘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외국어 학원에 가보면,
보통 사람들은 말을 빠르고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초보 단계에서는 맞습니다.
하지만 고급단계에서는 필요하고 저절한 표현을 간결하게 하는 사람이겠지요.
우리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 기본은 다름아닌,
안과 밖이 같은 상태인 것이지요. 하지만 세상에서는 이용당하기 딱 맞게 됩니다.
어렸을 적에는 무슨 말이든 진실만을 말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이 말하다가도 “승관아! 이거 맞니? 정말이니?” 라고 제가 줄곧 묻곤 했습니다.
하지만 머리가 크고 나의 진실이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는 감추고 싶은 치부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복잡해 졌습니다.
거짓말의 정의를 신학교 윤리신학 전공인 교수 신부님께서 정의해주셨습니다.
“거짓말이란 내 이익을 위하여 상대편에게 피해를 주는 말” 이라는 것이지요.
그 때 부터 고해성사 때 “거짓말을 했습니다” 라고 고백하면 이 정의를 이야기 해줍니다. 거의 자신의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 하는 말이지 실제로는 죄에 해당하는 거짓말이 아닌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지만 모든 경우에서 자유롭게 되려면 진실함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겠지요.
그 진실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나름대로 원칙과 희생이 따르게 됩니다.면 그것 역시 감수해야 할 우리의 몫입니다.
말을 잘하는 것이란?
나를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실만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외의 것은 모두 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에고를 꾸미는 것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잘못된 나의 말로 알게 모르게 받은 상처에 대한 치유의 방법일 것입니다.
방법은?
1.하루에 50번~500번 되고 싶은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2.성서를 매일 1장이상 읽습니다.
<Matthew9,22-38>
32 As they were going out, a demoniac who could not speak was brought to him,
33 and when the demon was driven out the mute person spoke. The crowds were amazed and said, "Nothing like this has ever been seen in Israel."
34 But the Pharisees said, "He drives out demons by the prince of demons."
35 Jesus went around to all the towns and villages, teaching in their synagogues, proclaim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and curing every disease and illness.
36 At the sight of the crowds, his heart was moved with pity for them because they were troubled and abandoned,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37 Then he said to his disciples, "The harvest is abundant but the laborers are few;
38 so ask the master of the harvest to send out laborers for his harv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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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배경과 신념이 제각각인 사람들이 모이더라도 공동 합의를 끌어내기 위한 대화를 시작하면 놀라운 합의를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관련된 사람들이 공동선을 염려하는 마음이 같다면,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성격을 띤 의견 충돌, 예컨대 종교 단체들 간의 의견 충돌, 세속 단체와 종교 기(LET US DREAM 렛 어스 드림, 더 나은 미래로 가는 길, 프란치스코 교황 POPE FRANCES, 오스틴 아이버레이/김주현 옮김,(주)북이십일 21세기북스, 2020, p.249)/
관 간의 의견 충돌도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하나가 되는 데 장애물이 될 수 없습니다. 경직성과 근본주의가 일부 기관에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기관들은 애초부터 이런 대화에 참여하지 않으니까요.
(LET US DREAM 렛 어스 드림, 더 나은 미래로 가는 길, 프란치스코 교황 POPE FRANCES, 오스틴 아이버레이/김주현 옮김,(주)북이십일 21세기북스, 2020,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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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교회가 전례를 바꾸거나 쇄신할 수 있나요?
전례에는 바꿀 수 있는 요소와 바꿀 수 없는 요소가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처럼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전해 받은 모든 요소는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꿀 수 있는 요소도 있는데, 교회가 그런 요소들을 바꿔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어느 시대에나 어느 장소에서나 선포되고 거행되며 살아 있는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례는 개별 민족들의 정신과 문화에 상응해야 합니다.[1200-1209]
우리가 전례를 오로지 매력적이고 흥미로우며 아름답게 꾸밀 방법만을 모색한다면, 전례는 쇠퇴하게 됩니다. 전례의 관건은 본래의 주체이신 하느님과 함께하는 ‘하느님의 행위Opus Dei’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베네딕토 16세 교황, 2007년 9월9일)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4,5-6)
입문(initiation, ‘시작’을 뜻하는 라틴어 ‘initium’에서 유래)
‘입문’은 이미 존재하는 공동체에 외부인이 편입되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정신과 지성, 마음과 의지 등 인간 전체에게 말을 거셨스니다. 그분이 오늘날 전례에서 원하시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아프리카의 전례는 유럽의 전례와는 다르고, 양로원에서 거행하는 전례는 세계 청년 대회에서 거행되는 전례와는 다르며, 본당 공동체의 전례는 수도원의 전례와는 다른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례는 전세계 모든 교회에 공통된 전례로 여전히 인식되어야 합니다.
(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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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절 전례의 다양성과 신비의 단일성
전례 전통들과 교회의 보편성
->1200 최초의 예루살렘 공동체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에 이르기까지 사도들의 신앙에 충실한 하느님의 교회들이 어디에서나 기념하는 것은 동일한 파스카의 신비이다. 전례에서 기념하는 신비는 하나이지만, 전례를 거행하는 형태는 여러 가지이다.
->1201 그리스도의 신비는 헤아릴 수 없이 풍부하므로, 어떠한 전례 전통도 그것을 완전하게 표현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예법들이 발생하고 발달한 역사는 전례의 놀라운 상호 보완성을 보여 준다. 여러 교회들이 신앙과 신앙의 성사에 일치하여 이 전례의 전통들을 실천했을 때, 그 교회들은 서로를 풍요롭게 하였으며, 거룩한 전승과 온 교회의 공통 사명에 충실한 가운데 성장하게 되었다.(바오로 6세, 교황 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 63-64항: AAS 68(1976), 53-55면 참조)
->1202 전례의 다양한 전통들은 바로 교회의 사명 자체에서 생겨났다. 지리적, 문화적으로 같은 권역에 속하는 교회들은 문화적으로 유형화된 독특한 표현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비를 거행하게 되었다. 그 독특한 표현들이란 이를테면, ‘신앙의 유산’의(2티모1,14 참조) 전달, 전례적인 상징 체계, 형제적 친교의 조직, 신비들의 신학적 이해와 성덕의 여러 유형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민족의 빛이시며 구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한 교회의 전례 생활을 통하여, 그 교회가 파견되어 뿌리를 내린 그 곳의 민족과 문화에 자신을 드러내신다. 교회는 보편되다. 교회는 모든 문화들의 풍요로운 다양성을 정화하여 자신의 단일성 안에 수용할 수 있다.(교회 헌장, 23항; 일치 교령, 4항 참조)
->1203 현재 교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전례 전통 또는 예법은, 라틴 예법(주로 로마 예법이지만 암브로시오 예법이나 일부 수도회의 예법과 같은 지역교회의 예법도 있다), 비잔틴, 알렉산드리아나 콥트, 시리아, 아르메니아, 마로, 칼데아 예법 등이 행해지고 있다. “전통을 충실히 따르는 거룩한 공의회는 어머니인 거룩한 교회가 합법적으로 인정된 모든 예법을 동등한 권리와 영예로 존중한다고 선언하며 이 예법들이 앞으로도 보존되고 온갖 방법으로 증진되기를 바란다.”(전례 헌장, 4항).
전례와 문화
->1204 그러므로 전례의 거행은 각 민족의 특성과 문화에 부합해야 한다.(전례 헌장, 37-40항 참조) 그리스도의 신비는 “모든 이방인들에게 알려져 그들도 믿고 복종하게”(로마16,26) 되도록, 모든 문화 안에서 선포되고 거행되고 생활화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신비로 문화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받고 완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481)/
성된다.(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권고 ‘현대의 교리 교육’, 53항: AAS 71(1979),1319-1321면 참조) 그리스도께 받아들여지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변화된 고유의 인간 문화와 더불어 또 그 문화를 통하여, 하느님의 수많은 자녀들은 성부께 나아가, 한 분이신 성령 안에서 그분께 영광을 드린다.
1205 “전례, 특히 성사의 전례에는 변경될 수 없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부분이기 때문에 교회는 이 부분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 또 변경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를 새로이 복음화된 민족들의 문화에 적용시킬 권한과 때로는 의무까지 가지고 있다.”(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서 ‘이십오주년’, 16항: AAS 81(1989), 912-913면. 전례 헌장, 21항 참조)
->1206 “전례의 다양성은 풍요로움의 근원이 될 수도 있지만, 긴장과 상호 몰이해와 심지어 분열가지 일으킬 수도 있다. 이러한 문제에서, 당양성이 일치에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공통된 신앙, 교회가 그리스도께 받은 성사적인 표징들, 그리고 교계 제도의 일치에 대한 충실성을 지키는 범위 안에서만 다양성이 있을 수 있다. 다양한 문화들에 대한 적응은 마음의 회개를 요구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가톨릭 신앙과 양립될 수 없는 조상 전래의 관습과 단절할 것을 요구한다.”(요한 바오로2세, 교황 교서 ‘이십오주년’, 16항: AAS 81(1989), 913면)
간추림
->1207 전례의 거행은 교회가 존재하는 그 곳의 민족 문화 안에서 표현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 문화에 종속되어서는(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482)/
안 된다. 한편 전례 자체가 문화를 발생시키고 형성하기도 한다.
->1208 합법적으로 인정된 여러 가지 전례 전통이나 예법은 교회의 보편성을 드러낸다. 이 당양한 전례 전통들이 동일한 그리스도의 신비를 표현하고 전달하기 때문이다.
->1209 전례 전통의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보증하는 기준은 사도 전승에 대한 충실성이다. 곧 사도들에게서 물려받은 신앙의 성사들 안에서 이루는 친교이다. 이 친교는 사도적 계승으로 표명되고 보장되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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