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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다리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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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이야기 맛 이야기
시냇물 추천 0 조회 60 23.06.23 06:24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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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3.06.26 06:18

    첫댓글 밀가루의 맛​/ 이혜미


    얼음을 핥으며 오래 말을 아꼈지
    케이크를 자르고 낮술을 마시던 창가에서

    그 희고 연약한 윤곽을 망쳐놓으며
    너는 없는 아름다움에 대해 말했다
    무심히 손을 휘저으며
    미음과 리을 받침에 대해 이야기했지

    나는 알곡처럼 선연하다
    분명하여 부서지는 것들에 대해
    부서지며 같은 크기의 입자가 되어가는 것들에 대해

    왜 부서져 떠돌다 싫은 덩어리로 마무리되는 것일까

    입으로 불어도 손으로 쓸어도 자국을 남기던 눈송이들
    얼어붙은 잔설이 회색으로 얼룩진 그 창가에서

    흰 가루라면 무엇이든 슬프던 계절이 지나간다

    눈처럼 녹아 사라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끈질기게 혀에 붙어 끈적이는
    더럽고 슬프고 무거운

  • 작성자 23.06.26 06:19

    우설 (牛舌 )/ 이서화


    몇몇이 둘러앉아 소의 혀 요리를 먹는다
    줄에 묶여 있는 듯한 맛과
    사각거리는 풀의 맛이 입안에서 잡초처럼 자란다
    소의 배 속에서 꾸르륵거리던 풀씨들과
    나무에 묶여 오래 질겅거리던 그늘
    나뭇잎들은 혀의 허기처럼 날름거리고
    소가 묶여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비빔밥이라 칭해도 무방하겠다

    멀리까지 갔다 오는 메아리가 있었다
    제 몸을 묶은 줄을 혹은 나무를 집으로 정해 놓고 고개를 숙여 제 앞의 여물을 먹는 경건한 식사
    소가 여름내 먹은 것은 풀과 꽃들이다
    그 꽃들이 몰려가 꽃등심이 되고
    느리고 질긴 시간이 밭을 열던 봄날이 있었다

    늘 배고픈 혀
    한 번도 배부르지 않던 혀의 날들
    맛이 가득 들어있던 부위는 질긴 울음의 맛이 난다
    서로 혀끼리 만나는 질긴 시간
    소가 묶여 있던 한 그루 외양간과
    금식에 들어있는 나무가 생각난다

    소의 혀를 씹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에서
    푸르고 무성한 들판 하나 쏟아져 나온다

  • 작성자 23.06.26 06:19

    식빵을 굽는 봄날의 레시피 /송종규

    이 이스트는, 이 반죽은,
    누가 방금 던져 놓고 간 내 미래 같아서
    나는 괜히 수줍고 두려워 그 보드라운 속살에 코를 갖다 대거나
    손가락으로 찔러 보기도 하지만

    이 이스트는, 이 반죽은,
    누가 방금 보내 온 눈사람 같기도 해서
    나는 괜히 슬프고 두근거려 차양을 치듯 얼굴을 가리거나
    흘러간 노래를 흥얼거려 보기도 하지만

    오늘 스페인 풍의 접시와 식탁과 고무나무는 마치
    숲의 입술을 열고 호루라기 소리가 튀어나오던 청춘의 한 날 같아서
    나는 괜히 울컥하고 멋쩍어
    연미복을 입은 열두 시에게 마음을 들킨다네

    나를 모르는 사람이 나를 아는 사람보다 몇 억 배 더 많은
    이 지상에서
    소금 덩어리와 탁본과 물고기의 화석을 말한다 한들
    누가 들어주기나 할까, 봄날의 아름다운 퇴폐를
    읽어주기나 할까

    삶은 때때로 세월이 내팽개친 반죽 같아서

    나는 혼자서도 곧잘 부풀어 오르고 혼자서도 곧잘 풀이 죽기도 한다네
    당신께 핑계도 안부도 전할 수 없지만
    수줍고 멋쩍고 두려운 문장을 적을 수밖에 없다네

    나는 마치, 방금 도착한 나의 미래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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