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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16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제1독서 : 이사 26,7-9.12.16-19
복 음 : 마태 11,28-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삶은 짐이 아닌 선물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요즘 수도원 배밭 곳곳에서 끊임없이 하늘 향해 타고 오르며 폈다 지는 야생화 메꽃들입니다.
그대로 수도자들의 하느님 찾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상징합니다.
아주 예전에 애송했던 자작시 메꽃이 생각납니다.
-“이가지 저가지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하늘 가는 여정의 다리로 삼아
분홍색 소박하게 하늘 사랑 꽃 피어내며
하늘로 하늘로 오르는 메꽃들!”-1997.8.21
삶은 짐인가 선물인가?
화두 같은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소재로 하여 참 많이 강론을 했습니다.
누구나 공감하는 그러나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선물 같은데 잘 들여다보면 짐인 게 또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대부분 많은 이들이 삶의 짐으로 힘겨워합니다. 하여 인생고해人生苦海라는 말도 있습니다.
결론하여 믿는 이들에게 삶은 짐이 아닌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단 주님의 초대에, 환대에 응답하여 주님과 함께 살 때입니다.
바로 이때 삶의 짐은 선물로 변합니다. 바로 이에 앞서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초대에 응합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신앙고백의 시가 참 아름답습니다.
그대로 하느님 찾는 갈망이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참 아름답고 절실하여 많은 부분 그대로 인용합니다.
글이든 말이든 삶이든 기도든 참으로 절실하면 진실하고 아름답습니다.
“주님,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
저의 영혼이 밤에 당신을 열망하여 저의 넋이 제 속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평화를 베푸십니다.
저희가 임신하여 몸부림치면 해산하였지만 나온 것은 바람뿐,
저희는 이 땅에 구원을 이루지도 못하고, 누리의 주민들을 출산하지도 못합니다.
당신의 죽은 이들이 살아나리이다.
그들의 주검이 일어서리이다.
먼지 속 주민들아, 깨어나 환호하여라.
당신의 이슬은 빛의 이슬이기에, 땅은 그림자들을 다시 살려 출산하리이다.”
참 아름답고 깊은 신앙고백의 시이자 기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 이들 누구나가 공감하는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하느님을 찾는 영혼의 갈망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만나야 살아나는 영혼입니다.
영혼의 무한한 배고픔과 목마름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 수 있어도 영혼의 한없는 갈망은, 허기虛氣는
하느님 사랑만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 없이 영혼은 결코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바로 주님은 이런 갈망의 목마른 사람들을 당신의 배움터에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의 초대에 응답할 때 무거운 고해인생苦海人生은 축제인생祝祭人生으로 바뀌며 안식의 선물입니다.
짐은 변하여 선물이 됩니다.
그러나 저절로의 안식이 아니라 주님의 배움터에서 주님께 배워야 합니다.
공부해야 합니다. 이래서 하느님께 대한 갈망에 이어 배움에 대한 사랑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지만 배움에는 끝이 없습니다. 장자에 나오는 글입니다.
주님의 배움터에서 무엇을 배웁니까? 바로 온유와 겸손입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평생 예수 성심의 온유와 겸손의 사랑을 배웁니다.
순리에 따를 때 경지에 도달합니다. 바로 평생 온유와 겸손의 순리에 따라 살 때 경지에 이릅니다.
점차 우리의 불편한 멍에는 주님의 편한 멍에로 바뀌고,
우리의 무거운 짐은 주님의 가벼운 짐으로 바뀝니다.
온유와 겸손의 수행으로 주님과 일치가 깊어질 때의 은총입니다.
하여 우리의 짐은 점차 주님의 선물로 변합니다. 아, 이것이 우리 인생의 모두입니다.
말 그대로 예닮여정의 축복 은총입니다.
그러니 예언자 이사야처럼, 시편의 사람들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배움터에서 온유와 겸손을 배울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평생 주님께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주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한평생 주님을 찬미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시편146,1-2).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이들의 삶이 이래야 합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삶의 영적 전쟁터에서 평생 싸워야 하는 평생 현역의 주님의 전사이듯,
살아있는 그날까지 주님의 배움터에서 평생 온유와 겸손을,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배워야 하는
주님의 평생 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죽어야 제대이고 죽어야 졸업입니다.
그러니 넘어지면 일어나 다시 새롭게 배움의 여정에 오르는 것입니다.
멀리 밖이 아닌 오늘 지금 여기가 삶의 영적 전쟁터이자 주님께 배우는 삶의 배움터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 온유와 겸손을 닮게 하시고
영혼의 목마름을 해갈시켜 주시며 당신 찾는 배움의 여정에 항구할 힘을 주십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떤 학생이 수능이 끝난 후에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다행히 자신의 자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상담사가 왜 자살을 시도했느냐 물으니, 자신이 쓸모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인생을 살아도 행복할 것 같지 않아서 죽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복이 수능 잘 보는 것으로 단정을 짓는 것이었지요.
수능을 망쳤으니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없고
그래서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진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괴로운 상태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수능을 잘 보지 못했어도 우리 각자는 소중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역할은 단지 수능을 잘 보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수능이라는 것은 소중한 ‘나’를 만들기 위한 수많은 과정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얼마 전에 서랍을 정리하다 보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문구류가 있었습니다.
좋은 문구류인데 서랍을 열어서 사용하지 않다 보니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서랍 구석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도 이렇게 서랍 속에 갇혀 있던 문구류와 마찬가지는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능력을 믿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도 잘 알고 계십니다.
충분히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으면서 쉽게 포기하고 좌절한다는 것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서 다시금 힘이 될 수 있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정말로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향해서 내게 오라고 할 수 있습니까?
도저히 개선이 안 될 것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향해 내가 도와주겠다고 오라고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라고 초대하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충분히 배울 수 있으며, 충분히 고쳐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충분히 하느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낼 수 있다고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충분한 능력과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랍 속에 두고서 사용하지 않은 좋은 문구류처럼, 단지 아직 그 힘이 사용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주님께로 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멍에는 편하고, 주님의 짐은 가볍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 28)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병들고 죽어가는
우리의 마음을
다시 살리십니다.
주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됩니다.
주님안에
진정한 위로와
참된 쉼이 있습니다.
주님께 의탁하는
참된 기쁨입니다.
우리의 생활에서
주님께 의탁하는 법을
다시 배우는 시간입니다.
의탁을 통해
온유와 겸손을
다시 만납니다.
생명은
이와 같이
안식을 필요로 합니다.
주님께 맡겨드리는
믿음의 안식입니다.
믿음의 방식은
온유와 겸손입니다.
먼저
마음을 깨우시고
마음을 살리시는
주님을 믿고
이 모든 것을 의탁합니다.
십자가가 무거울수록
더욱
깊어지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십자가조차
주님께 맡겨드리는
의탁입니다.
‘나’라는 멍청한 자기운영 체계에서 벗어나는 법
전삼용 요셉 신부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각자의 운영체계에 의해 움직입니다.
기러기는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먼 곳을 여행하고 꿀벌은 꿀을 찾으며 개미는 여왕을 위해 일합니다.
각자의 운영체계에서 벗어나면 모든 생물은 생존의 위험에 직면하게 됩니다.
인간도 처음에는 이 생존체계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 생존체계가 강하게 나를 지배할수록 인간관계가 힘들어집니다.
인간관계가 힘들어지면 행복이 깨집니다. 모든 행복은 관계에서 옵니다.
우선은 인간의 이전 자기운영 체계를 벗어던져야 함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식 폴더폰만을 고집한다면 스마트폰의 체계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유식만 먹으려 한다면 맛있는 음식은 맛볼 수 없습니다.
이전 체계의 불편함을 알아야 새로운 체계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사람이 더 행복할까요, 아니면 동메달을 딴 사람이 더 행복할까요?
미국 코넬 대학교 심리학과 연구팀은
1992년 하계 올림픽 중계권을 가졌던 NBC의 중계자료를 분석했습니다.
메달리스트들이 게임 종료 직전에 어떤 표정을 짓는지 감정을 분석하는 연구였습니다.
분석이 가능했던 23명의 은메달리스트와 18명의 동메달리스트 표정을 보고
결정적인 순간에 이들의 얼굴이 비통에 가까운지,
환희에 가까운지 10점 만점으로 평점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시상식에서 선수들이 겪는 감정을 분석했습니다.
분석결과 동메달리스트의 행복점수는 10점 만점의 7.1로 나타났습니다.
은메달리스트의 행복점수는 4.8이었습니다.
연구팀은 한발 더 나아가 은메달리스트와 동메달리스트의 인터뷰 내용도 분석하였습니다.
분석결과를 보면 동메달리스트의 인터뷰에서는 만족감이 더 많이 표출되었고,
은메달리스트의 인터뷰에서는 ‘아쉽다’라는 표현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왜 은메달리스트가 동메달리스트보다 덜 만족하는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요?
바로 나를 지배하는 시스템 때문입니다. 이 자아라는 시스템은 ‘비교’를 좋아합니다.
남과 비교하게 만들어야 인간을 더 자신의 노예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은메달리스트는 금메달리스트와 자신을 비교하고,
동메달리스트는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우리는 이런 어리석은 시스템에 지배받으면서도
그것이 행복인 것처럼 당연히 지배당하며 살아갑니다.
배려해주어야 하는데 ‘나’라는 시스템은 자기 우선으로 생각하게 만들기에
이기적 인간이 되게 합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심리학과에서는 이런 실험을 하였습니다.
대학생 두 명을 한 조로 짝지어서 한 명에게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려서
어떤 노래를 연주하게 하고 다른 학생은 그 연주가 끝나면 그 노래 제목을 맞추게 한 것입니다.
노래를 손가락만을 두드려서 연주한 학생에게 연주가 끝난 후
상대가 자신이 연주한 노래의 제목을 알아맞힐 확률을 적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평균 50% 이상은 알아맞힐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들은 사람이 제목을 알아맞힌 결과는 2.5%였습니다.
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참조: ‘프레임’, 최인철, 유튜브 채널 ‘책한민국’]
나를 지배하는 자기라는 시스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직 생존만을 위한 시스템이기 때문에 나를 모기로 만듭니다.
나를 살게 하도록 이웃의 피를 빠는 존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시스템에서 우리를 해방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 방법은 무엇일까요? 아주 단순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우선 이전의 시스템이 고생스럽고 무거운 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아를 나로 믿어버렸기 때문에 그 시스템에 지배를 받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다른 시스템에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소가 주인이 없다면 잡아먹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멍에를 매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임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면,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분이 내 안에 들어와 사시고 곧 나의 나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으면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걷는 시스템을 장착하게 됩니다.
마음을 온유하고 겸손하게 갖기 위해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가 나 자신이라고 믿었듯이 내가 그리스도라고 믿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단순히 그리스도인이 된 것뿐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이 된 것을 기뻐하고 감사드립시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보내 주신 이 은혜를 이해하십니까-
놀라고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사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분과 우리는 온전히 한 인간입니다.”
어떤 나라들의 장기기증 비율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평균 60%나 높습니다.
그 이유는 그 나라의 시스템은 장기기증을 하는 시스템이고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지 않겠다고 신청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다른 나라들은 하지 않는 시스템이고 하고 싶다면 신청해야 합니다.
그래서 장기기증 신청을 받는 나라들은 20%가 장기기증을 한다면,
하기 싫은 사람이 신청하는 나라는 80%가 되는 것입니다.
각 나라에 사는 사람은 그 나라의 시스템 때문에 특별한 노력도 없이
이웃에게 자신의 장기를 내어주는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내가 어느 나라 시민인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나라고 믿는 사람과 내가 그리스도라고 믿고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멍에로 메었다고 믿는 사람과는 천지 차이가 납니다.
그분은 이제부터 뱀인 자아가 나가 아니고 당신이 나임을 믿게 하시기 위해
살과 피로 우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나’라는 멍청한 자아의 운영체계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나는 나다’라며 오시는 그분이 진정한 나요, 나의 운영체계임을 믿는 것뿐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이미 바뀌었습니다.
믿고 사용하기만 하면 안식을 얻으실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주차장 마당에 풀이 많이 자랐습니다.
풀이 많지는 않은 것 같아서 전지가위를 들고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5분도 되지 않았는데 무릎이 아팠습니다.
모기는 기세 좋게 날아왔습니다. 자기들의 보금자리를 빼앗겨서 인가 봅니다.
2달 전에 청소를 해 주시는 형제님이 마당의 풀을 뽑았습니다.
형제님은 커피를 마시면서 쉽게 하는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꽃의 이름을 몰라도 향기는 있습니다. 새의 이름을 몰라도 아름다운 노래를 듣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름에 집착하여 꽃의 향기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새의 노래를 제대도 듣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산보를 하면서 이름을 모르지만 열심히 일하는 분들을 봅니다.
도시가스를 교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있기에 가정에서 편하게 요리할 수 있습니다.
잔디를 깎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마당을 볼 수 있습니다.
쓰레기를 치우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있기에 깨끗한 마을에서 지낼 수 있습니다.
직업이나 직책이라는 옷을 벗으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피부색이라는 선입견을 버려야 합니다. 직업이라는 편견도 버려야 합니다.
종교라는 ‘틀’에 갇혀서도 안 됩니다.
꽃밭의 꽃은 저마다 향기를 내듯이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향기를 내는 겁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눈, 귀, 코는 정보를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행동으로 표현하지는 못합니다.
눈으로 아름다운 자연을 볼 수 있고, 귀로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코로 꽃의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행동으로 표현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입, 손, 발입니다. 우리가 입, 손, 발을 잘 다스리면 권력을 가지지 못했어도,
큰 재물이 없어도, 명예를 지니지 못했어도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고, 존경을 받으면서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여러분은 모두 나에게 오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안식을 주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들의 곁에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셨습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산으로 가셨습니다.
고난의 길을 기꺼이 가셨고,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우리의 몸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우리가 따라갈 수 있다면 우리는 영원한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과 멀어진 많은 사람들은 그릇된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길, 재물의 길, 명예의 길은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사랑의 길, 희생의 길, 나눔의 길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안내 해 줄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제2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누군가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가고 싶다는 뜻으로 ‘사명’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말하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가톨릭 신앙인이다.’
이 말에는 ‘믿음, 희망, 사랑’의 삶이 담겨 있습니다.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 하느님의 정원
"나에게 오너라.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8)
안 콘실리아 수녀
우리는 많은 것에 얽혀서 살아간다.
조금 더 단순해지면 쉽게 살아갈 수 있지만
태어난 이후 보고 익히는 경험들에 의해
다른 이의 기준으로 그틀에 묶혀
가벼운 짐 안에 각자의 약함으로 만들어진 무거운 돌멩이들을 넣고 걸어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달려죽기까지 순명하신
온유와 겸손으로
우리 각자의 돌멩이를 꺼내라고 한다.
당신이 친히 우리의 무거운 짐을 메고 갈테니
대신, 당신의 멍에를 매라고 하신다.
세상 누구도 우리의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할 수는 없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다.
예수님을 멍에를 바라보면 우리를 무겁게 누르는 모든 것이 솜처럼 가벼워질 것이다.
예수님 , 저희가 만들어낸 모든 짐들을 내려놓고 당신의 멍에를 메고 갈 수 있는 은총을
이 땅에 가난하고 비천한 모든 이에게 내려주소서.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