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1-2).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은 공관 복음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이 말씀에 따른 것이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리는 축일이다.
오늘 축일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 14일) 사십 일 전에 지낸다. 교회의 전승에 따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사십 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미리 보여 주시고자 거룩한 변모의 표징을 드러내셨다. 1457년 갈리스토 3세 교황이 로마 전례력에 이 축일을 도입하였다.
본기도
하느님,
외아드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때에
율법과 예언서의 증언으로 신앙의 신비를 밝혀 주시고
저희를 자녀로 삼으실 것을 미리 알려 주셨으니
하느님의 종인 저희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소서.
제1독서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었다.>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7,9-10.13-14
9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10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
13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14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제2독서
<우리는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 베드로 2서의 말씀입니다.1,16-19
사랑하는 여러분,
16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줄 때,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리한 것입니다.
17 그분은 정녕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존귀한 영광의 하느님에게서,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하는 소리가
그분께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18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19 이로써 우리에게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날이 밝아 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복음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7,1-9
그 무렵 1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2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3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4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5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6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8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기도의 목적
오늘은 주님 변모 축일입니다. 주님 변모 축일은 기도에 대한 예시입니다. 기도의 장소는 이스라엘 전통 상 ‘높은 산’입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 모세와 엘리야를 만납니다. 모세는 진리이고 엘리야는 은총입니다.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십계명, 곧 하느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주었고, 엘리야는 카르멜산에서 제물 위에 성령의 불이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미사 때의 말씀의 전례, 성찬의 전례라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미사나 기도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바로 변모하기 위함입니다. 어떻게 변모하기 위함일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다음에 어떤 내용이 나오는지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내용은 악령 들린 아이를 고쳐주시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은 그를 치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이리 데려오너라.”(마태 17,17)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기도로 이 세상을 참아내고 치유하기 위한 힘을 얻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머물기 위해서는 그 상대를 끊임없이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 힘을 얻기 위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용서는 나의 죽음입니다. 미워하는 내가 죽지 않으면 용서가 안 됩니다. 내 안에 그 미움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결국 나를 죽음으로 이끕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타볼산에서 내려오시며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오늘 복음이 이 기도의 올바른 목적을 말하는데, 어쩌면 우리는 기도의 목적을 잘못 알고 헛된 기도를 할 수도 있습니다.
한 인도 수도사가 18년이 걸려서 갠지스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자랑처럼 떠드는 제자에게 스승은 묻습니다. “자네는 18년 동안 18루피(갠지스강 건너는 뱃삯)를 벌었네.”
기도를 얼마나 오래, 얼마나 많이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통해 얼마나 남을 용서하지 못하게 만드는 나 자신이 죽었는지, 얼마나 더 그리스도로 변모했는지가 중요합니다.
워룸(2015)은 기도의 목적이 무엇인지 잘 알려주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남편은 직장에서도 돈을 횡령하고 외도하려고 하며 가정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아내는 그런 남편이 미워 옆집 할머니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남편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자 옆집 할머니는 왜 교회에 다니면서도 기도는 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기도는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잘못된 기도를 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싸움의 대상을 잘못 잡았다는 것입니다.
워룸은 전쟁에서 지휘관들이 하는 회의 장소를 의미합니다. 할머니는 집에 작은 공간을 만들고 남편과 싸우지 말고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과 싸워 하느님께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청하라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옷장에서 자신을 위한 기도가 적힌 것을 보고 아내가 이미 자신의 외도 사실까지 알면서도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깊이 회개하고 아내와 딸에게 사과합니다.
기도로 싸워야 할 대상은 은총의 가치를 모르는 나 자신입니다.
제가 부모님의 굳은살을 보았을 때 라면 하나도 부모님이 거저 주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가 먹는 것은 부모님의 살과 피였습니다. 그것을 알게 되자 불만 가득했던 내가 죽고 부모님의 뜻을 따라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고통을 감내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순종 할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나를 위해 피를 흘리고 계신다면 나도 기도할 때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래야 은총의 가치를 알고 순종으로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삼손은 은총을 많이 받았지만, 그 은총의 값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하느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던지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여자에 빠진 삼손의 머리카락이 잘리게 만듭니다. 성령의 불이 꺼진 것입니다. 눈도 뽑힙니다. 그제야 삼손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총이 당신 눈을 빼서 주시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게 되자 이제 그분의 뜻을 위해 목숨을 바칠 용기가 생깁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과 미움을 함께 묻어 버립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기도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내가 죽어야 미움도 죽습니다. 그리스도가 사셔야 용서와 사랑이 성취됩니다. 우리는 기도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 완전히 그리스도로 변모하여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한 설문조사 기관에서 575명의 직장인을 대상으로 “회사가 나의 재능을 잘 알아준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재능을 알아준다고 대답한 응답자는 얼마나 되었을까요? 그렇게 높지 않았습니다. 겨우 25%였지요. 회사가 나의 능력을 충분히 알아주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이 75%나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회사는 직원의 재능을 알아주어야 할까요? 재능을 알고 여기에 맞춰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한다면 업무 향상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직원의 재능을 알아보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회사를 위해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만을 바라봅니다.
예전에 직원 채용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성당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주말에도 출근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면접 중에 이를 이야기하니, 한 사람은 “주일에 일하는 것은 힘들 것 같습니다. 주일에는 쉬고 대신 평일에 정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라고 말했고, 다른 사람은 “당연히 제가 맞춰야죠. 뽑아만 주십시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누가 채용되었을까요? 회사가 나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회사에 맞춰야 채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를 생각해봅니다. 주님이 내게 맞춰야 할까요? 아니면 내가 주님께 맞춰야 할까요? 주님께서 내 재능을 몰라준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 뜻대로 해주지 않는다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리는 날입니다. 그 자리가 너무나 영광스럽고 행복하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나서서 여기에 지내면 좋겠다고 말하지요.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거룩한 변모가 이루어지는 그 장소에 계속 머물러 지내는 것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저 제자들이 원할 뿐이었습니다. 해처럼 빛나고 옷이 빛처럼 하얘진 주님 모습에 하느님 나라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힘든 전교 활동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이 아니지요.
주님의 뜻에 맞추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소리가 났던 것입니다.
주님을 나에게 맞추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할 때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께 맞춰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주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끊임없이 이해하면서 오해하고, 오해하면서 이해합니다(정유민).
주님의 거룩한 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