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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2일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35-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이상한 주인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주인은 이상한 주인입니다. 밤늦게 집에 돌아오면 피곤할 텐데 종들을 위하여 허리에 띠를 매고 종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웨이터로서 시중을 들고 있는 주인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주인입니다.
일반적으로 허리에 띠를 맨다는 것은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첫째, 일을 하고 있다는 표지입니다.
종은 주인을 위해서 아주 부지런하게 일을 해야 하는데 일을 하기 위해서 옷이 걸리지 않도록 단속을 잘 해야 합니다. 여성들이 한복을 입고 부엌일을 하기 위해서 앞치마를 입고 또한 아이를 업을 때도 포대기에 끈이 달려서 등에 업고 바짝 졸라매야 일을 할 수 있지요. 신부님들도 장백의를 입고 띠를 두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일(聖事)을 하기 위한 준비이며,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뿐만 아니라 가족과 이웃을 위해서, 하는 일은 무엇이며 성심을 다하여 일 하고 있는지를 주님은 물으십니다. 그렇게 일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일일이 다 갚아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사람의 신분을 나타냅니다.
지금 우리는 거의 같은 허리띠를 매고 삽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신분을 허리띠에 표시했습니다. 전에 상주(喪主)들은 굵은 삼베옷을 입고 삼베와 짚으로 꼬아 만든 허리띠를 둘렀지요. 자신이 죄인임을 표시하는 허리띠입니다. 임금님의 관복에도 관대(冠帶)로써 신분을 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하들도 각각 다른 허리띠가 부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띠에 맞도록 일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허리띠는 그 사람의 직책에 맞도록 부여 되었다면 우리의 신분은 무엇입니까? 왕자와 공주의 신분인가요? 종의 신분인가요? 죄인의 신분인가요? 아니면 왕의 신분으로 허리띠를 가지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직책에 맞는 허리띠를 가지고 있습니까?
셋째, 연결을 상징합니다.
종의 허리띠는 주인과 연결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콜로새 3,14)는 것처럼 신부님의 영대와 허리띠는 주님과 연결되고 모든 신자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가장의 허리띠는 가족이 연결되어 있고 부부간의 연결과 자식들과의 연계를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와 연결되어 있습니까? 주님인가요? 사랑스런 가족인가요? 아니면 권세나 부귀와 명예와 영화로운 삶인가요? 사탄의 유혹이나 세상의 온갖 것들에 연결되어 있습니까? 물론 세상의 모든 것과 연결을 맺고 살아야 하지만 어디 그것뿐이겠습니까?
넷째, 고심극기를 상징합니다.
4-50년 전에 서울 가톨릭신학대학교의 한 교수신부님이 돌아가셨는데 신학생들은 큰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돌아가신 후에 신부님의 시신을 수시(收屍)하는 과정에서 굵은 베로 꼬아 만든 새끼줄이 신부님의 허리 살을 파고들어 박혀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 새끼줄을 허리에 매고 살았으면 살 속에 박혀있었을까요? 그분은 자신을 이기고 세상의 모든 유혹을 이기고, 주님의 고통의 신비를 체험하기 위해서 그렇게 허리띠를 매고 사셨던 것입니다. 흔히 삼베는 젖었다가 마르면 더 옥죄는 것이죠. 그래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허리띠를 동여매고 죽기 살기로 일을 한다.’라고 하는지 모릅니다. 나는 호의호식하며 세상의 유혹에 빠져서 고심극기를 모르고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항상 부끄럽습니다.
다섯째, 일치와 화합을 상징합니다.
미사 때에 주님을 기도를 바치며 모두 손에 손을 잡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형제애의 띠를 만듭니다. 하나로 묶어주며, 한 마음으로 지향하는 곳을 향하게 합니다. 당신의 품안에 머무르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나누어 주시고, 당신의 전부를 아낌없이 나누어 주시기 위해서 언제나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하나 되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 11) 그러나 항상 주님과 이웃과 일치하지도 못하고 화합하지도 못한 채 살았습니다. 그래서 가슴에 찔린 채 살고 있답니다.
여섯째, 십자가 짐을 상징합니다.
십자가를 잘 지고 살기 위해서 띠로 십자가를 묶어야 합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잘 지고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 적절한 띠를 준비합시다. 그리고 우리에게서 십자가가 떨어지지 않도록 잘 묶고 살아갑시다.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2,12-22
형제 여러분, 12 그때에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약속의 계약과도 무관하였고, 이 세상에서 아무 희망도 가지지 못한 채 하느님 없이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13 그러나 이제, 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15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16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17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18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19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축일10월 22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John Paul II)
신분 : 교황
활동 연도 : 1920-2005년
같은 이름 :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파울로, 파울루스, 폴, 후안
1920년 5월 18일 폴란드 바도비체(Wadowice)에서 탄생한 카롤 요제프 보이티와(Karol Josef Wojtyla)는 1978년 10월 16일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아버지 카롤 보이티와(Karol Wojtyla)와 어머니 에밀리아 카초로프스카(Emilia Kaczorowska)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세례를 받았다. 교사였던 그의 어머니는 1929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의사였던 그의 형 에드문트(Edmund)도 1932년에 사망하였다. 폴란드 육군 하사관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하고 있던 1941년에 세상을 떠났다. 어린 시절과 청년기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아픔을 겪은 그는 9살 때 첫영성체를 하고 18살 때 견진성사를 받았다. 고향인 바도비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크라쿠프(Krakow)의 야기엘론스키(Jagiellonski)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939년 9월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 세력이 대학교를 폐쇄하자 젊은 카롤은 독일군으로 징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석회암 채석장과 솔웨이(Solway)의 화학 공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사제 성소를 발견한 카롤은 1942년부터 아담 사피에하(Adam Sapieha) 대주교가 운영하는 크라쿠프의 지하 신학교에서 비밀리에 사제 수업을 받기 시작하였다. 또한 카롤은 지하 극단인 ‘랩소디 극장’의 연극 활동에 참여하고 후원하기도 하였다. 종전 이후 카롤은 다시 열린 크라쿠프 신학교와 야기엘론스키 대학교 신학부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1946년 11월 1일 크라쿠프 교구장인 아담 사피에하 추기경으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 아담 사피에하 추기경은 그를 로마로 보내 계속해서 공부하도록 했다. 그는 1948년 6월 십자가의 성 요한의 작품에 드러난 신앙을 주제로 쓴 논문(Doctrina de fide apud S. Ioannem a Cruce)으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당시 그는 방학이 되면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에 있는 폴란드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사목활동을 하였다.
1948년 여름에 폴란드로 돌아온 그는 크라쿠프 인근 니에고비치(Niegowice) 마을의 승천 성당과 크라쿠프의 성 플로리아누스(Florianus) 성당에서 본당신부로 사목하였다. 1951년까지 그는 야기엘론스키 대학교의 교목으로 있으면서 철학과 신학 연구를 계속하였다. 1953년 그는 루뱅 대학교에서 “막스 셸러(Max Scheler)의 윤리 체계를 바탕으로 한 그리스도교 윤리학 성립 가능성에 관한 성찰”을 주제로 한 박사 논문을 제출하였다. 그 후 그는 크라쿠프 신학교에서 사회윤리학을 강의하고, 1956년에 가톨릭 루블린 대학교(Catholic University of Lublin)의 윤리학 교수가 되었다. 그 당시 그는 가톨릭 신문에 현대 교회의 문제에 대한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글을 기고했고, 시와 희곡에도 관심을 두어 여러 작품을 출판했으며, 학생들과의 다양한 야외 활동과 운동 및 토론에도 즐겨 참여하였다.
1958년 7월 4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는 그를 옴비(Ombi)의 명의 주교 겸 크라쿠프 교구의 보좌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는 1958년 9월 28일 크라쿠프의 바벨 주교좌성당(Wawel Cathedral)에서 유게니우스 바지아크(Eugeniusz Baziak) 대주교에게서 주교품을 받음으로써 38세로 폴란드에서 가장 젊은 주교가 되었다.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는 1963년 12월 30일 그를 크라쿠프의 대주교로 임명하였고, 1967년 6월 26일에는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카롤 보이티와 대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에도 참석하여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Gaudium et spes)과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Dignitatis Humanae)을 준비하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그는 또한 교황직에 오르기 전까지 세계주교대의원회의(Synod of Bishops)의 다섯 번의 회의 중 네 번을 참석하였다.
그는 1978년 10월 16일 제264대 교황으로 선출됨으로써 교황 하드리아누스 6세(Hadrianus VI, 1522~1523년 재위) 이래 455년 만의 비(非)이탈리아인 교황이자 최초의 슬라브인 교황이 되었다. 1978년 10월 22일에 교황으로 즉위하여 보편 교회의 목자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교황 성 바오로 6세의 선종 이후 교황좌에 오른 교황 요한 바오로 1세(Joannes Paulus I)가 한 달여 만에 갑자기 선종한 후 교황으로 선출된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시작한 교황 성 요한 23세(Joannes XXIII)와 공의회를 마무리한 교황 성 바오로 6세의 뜻을 계승하고자 한 전임자의 뜻을 이어받아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라는 교황명을 선택하였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27년간 사도좌 직무를 수행하면서 이탈리아에서 146회의 사목 방문을 하고, 로마 교구장으로서 로마의 332개 본당 중 317개의 본당을 방문하였다. 그는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로서 보편 교회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세계 129개국을 사목 방문했다.
그가 반포한 주요 문헌으로는 14개의 회칙, 15개의 교황 권고, 11개의 교황령과 45개의 교황 교서가 있다. 그는 또한 여러 책도 저술하였다. 여기에는 “희망의 문턱을 넘어서”(Crossing the Threshold of Hope, 1994년 10월), “은총과 신비 : 사제 수품 50주년을 맞이하여”(Gift and Mystery : On the Fiftieth Anniversary of My Priestly Ordination, 1996년 11월), “로마 삼부작 - 명상”(Roman Triptych : Meditations, 2003년 3월), “일어나 가자”(Rise, Let Us Be On Our Way, 2004년 5월), “기억과 신원”(Memory and Identity, 2005년 2월) 등이 포함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47차례의 시복식을 주재하여 1,338명을 복자품에 올렸고, 51차례의 시성식을 주재하여 총 482명을 성인품에 올렸다. 또한 9차례의 추기경 회의를 소집하여 231명(1명의 비밀 추기경 제외)의 추기경을 임명하였다. 그는 1978년부터 세계주교대의원회의를 15회 소집하였다. 여기에는 정기총회 6회(1980, 1983, 1987, 1990, 1994, 2001년), 임시총회 1회(1985년), 특별총회 8회(1980, 1991, 1994, 1995, 1997, 1998[2회], 1999년)가 있다.
1981년 5월 13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성 베드로 광장에서 신자들과 만나는 도중 괴한의 습격을 받아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성모님의 자애로운 손길 덕분에 총알이 그의 심장을 살짝 비켜 가서 목숨을 구한 그는 대수술 후 오랜 회복기를 거친 다음 암살 미수범이 있는 교도소를 직접 찾아가 대화를 나누고 그를 용서하였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새 삶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더욱 영웅적 덕행을 발휘하며 사목 활동에 힘을 쏟았다. 그는 목자로서 신자들을 배려하기 위해 많은 교구를 설립했고, 라틴 가톨릭 교회와 동방 가톨릭 교회를 위한 교회법전도 공표하였다. 또한 하느님 백성을 격려하는 특별한 영적 의미가 있는 구원의 해, 마리아의 해, 성체성사의 해, 2000년 대희년 등을 제정하였다. 그는 또한 신앙에 대한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s)를 제정하였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만큼 사람들을 많이 만난 교황은 없을 것이다. 매주 수요일에 있는 일반 알현(1,160회 이상) 때 1천 7백만 명 이상의 순례객이 교황을 만났다. 여기에 특별 알현이나 예식(2000년 대희년에만 800만 명), 이탈리아를 포함 전 세계의 사도 방문에서 만난 수백만의 신자들이 추가된다. 38회의 공식 방문을 통하여 많은 정부 관리도 교황을 알현하였다. 그리고 738차례의 알현과 모임을 통해 국가 원수들을, 246회의 알현과 모임을 통해 총리들을 만났다.
1996년부터 파킨슨병을 비롯한 여러 합병증으로 고생하던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바티칸 교황궁에서 2000년에 그가 제정한 하느님의 자비 주일(부활 제2주일, 사백주일) 전야인 2005년 4월 2일 토요일 오후 9시 37분에 선종하였다.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십시오.”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선종한 그는 4월 8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거행된 장례미사 뒤에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의 지하 무덤에 묻혔다. 그리고 2011년 5월 1일, 생전에 그가 제정하고 그 전야에 선종한 하느님의 자비 주일에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가톨릭 교회 역사상 최단기간에 복자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교황 즉위 기념일인 10월 22일로 정해졌다. 그리고 2014년 4월 27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에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 요한 23세 교황과 함께 시성식을 갖고 성인품에 올랐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과 시성은 한국 가톨릭 교회에도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1984년 5월 3일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 중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으며, 6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100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미사와 한국 103위 순교복자 시성식을 거행했다. 이는 시복 시성식을 바티칸에서 거행하는 교회의 오랜 전통을 깬 파격이기도 했다. 1989년 10월 5일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맞아 다시 한국을 찾은 그는 65만여 명이 운집한 여의도 광장에서 남북한의 화해를 바라는 평화 메시지를 낭독했고, 5·18 광주 민중항쟁의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두 번에 걸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은 한국 천주교회의 비약적인 성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오늘 축일을 맞은 요한 바오로(John Paul)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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