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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列國志 제124회
한편, 연합군이 임치성(臨淄城)을 포위한지 엿새째가 되었는데, 홀연 鄭나라에서 보고가 날아들었다. 대부 공손 사지(舍之)와 공손 하(夏)가 연명으로 봉한 서신을 보냈는데, 그 안에 긴급한 기밀사가 들어 있었다. 정간공(鄭簡公)이 서신을 읽어 보니, 대략 다음과 같았다.
신 사지와 신 하는 군명을 받들어 자공(子孔)과 함께 나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자공이 모반할 마음을 먹고 은밀히 楚나라와 내통하여, 楚軍을 불러들여 鄭나라를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내응하려고 하였습니다. 지금 楚軍이 이미 어릉(魚陵)에 당도하여 조만간에 도성에 이를 것입니다. 사태가 아주 위급하니, 주군께서는 빨리 회군하여 사직을 구하십시오!
[제119회에 보면, 자공(子孔)은 공자 가(嘉)의 字이고, 공자 가는 즉위하여 정간공이 되었다. 제121회에, 공자 가(嘉)가 상경이 되었다고 했는데, 그 후에 보면 실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은 공손 사지이다. 착오가 계속 이어진다.]
서신을 본 정간공은 크게 놀라, 즉시 서신을 가지고 晉나라 군중으로 가서 진평공(晉平公)에게 보여주었다. 진평공이 중행언(中行偃)을 불러 의논하자, 중행언이 말했다.
“아군이 齊나라의 다른 성들을 공격하지 않고 곧장 임치성으로 진격해 온 까닭은, 기세가 날카로울 때 일고(一鼓)에 임치성을 함락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齊나라는 성을 잘 지켜 무너지지 않고 있는데, 鄭나라에 또 楚軍이 쳐들어왔습니다. 만약 鄭나라를 잃게 된다면, 그 잘못은 우리 晉에 있게 됩니다. 차라리 회군하여 鄭나라를 구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번에 출병하여 비록 齊나라를 격파하지는 못했지만, 齊侯도 이미 간담이 서늘해졌을 것이니 다시는 감히 魯나라를 침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진평공은 그 말에 찬성하고, 포위를 풀고 회군하였다. 정간공은 진평공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먼저 귀국하였다.
제후들이 축아(祝阿) 땅에 당도하여 휴식을 취했는데, 진평공은 楚軍이 걱정이 되어 제후들과 술을 마시면서도 즐겁지 않았다. 사광(師曠)이 말했다.
[사광(師曠)은 이름이 광(曠)인 악사(樂師)를 말한다. 음률을 잘 판별했고 소리로 길흉까지 점쳤다고 하는 중국 역사상 유명한 악사이다.]
“신이 소리로 길흉을 점쳐 보겠습니다.”
사광은 ‘남풍(南風)’이라는 노래를 연주하고, 또 ‘북풍(北風)’이라는 노래를 연주하였다. 북풍은 소리가 평화로워 듣기 좋았지만, 남풍은 소리가 잘 나지 않고 쓸쓸하여 살기가 느껴졌다. 사광이 아뢰었다.
“남풍의 소리가 잘 나지 못하고 죽음에 가까우니, 공이 없을 뿐만 아니라 화를 자초할 것입니다. 사흘이 지나지 않아 좋은 소식이 올 것입니다.”
사광은 字가 자야(子野)였는데, 晉나라에서 제일 귀가 밝은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하였으나, 자신이 음악에 전념하지 못하는 것을 괴롭게 여기다가 탄식하며 말했다.
“내 기술이 뛰어나지 못한 것은 생각이 많기 때문이고, 생각이 많은 것은 보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사광은 쑥을 태워 그 연기를 쐼으로써 두 눈을 멀게 하고, 음악에만 전념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천기(天氣)와 음양의 변화를 살필 수 있게 되어, 천시(天時)와 인사(人事)에 통달하였다. 또 풍각(風角)과 새 울음소리로 길흉을 판단했는데,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晉나라 태사(太師)가 되어 음악을 관장했는데, 평상시에 晉侯가 깊이 신뢰하여 출전할 때에도 반드시 따라다녔다.
[‘풍각(風角)’은 사방의 바람을 궁(宮)·상(商)·각(角)·치(徵)·우(羽) 오음(五音)으로 감별하여 길흉을 점치는 방술(方術)이다.]
진평공은 사광의 말을 듣고, 군대를 머물게 하고 사람을 내보내 정탐해 오게 하였다. 사흘이 지나지 않아 정탐꾼이 鄭나라 대부 공손 채(蠆)와 함께 돌아와 보고하였다.
“楚軍은 이미 물러갔습니다.”
진평공이 놀라면서 자세한 사정을 묻자, 공손 채가 대답하였다.
“楚나라에서는 자경(子庚)이 자낭(子囊)을 대신하여 영윤이 되었는데, 선대의 원수를 갚고자 鄭나라를 정벌할 모의를 했습니다. 그때 자공(子孔)이 은밀히 楚나라와 내통하여, 楚軍이 당도하면 적을 맞이한다는 거짓 핑계를 대고 병력을 거느리고 성을 나가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공손 사지(舍之)와 공손 하(夏)가 자공의 음모를 미리 알고 성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공은 楚軍을 만나러 성을 나가지 못했습니다.
자경은 영수(潁水)를 건너왔으나 자공의 내응이 소식이 없자, 어치산(魚齒山) 아래에 주둔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큰비와 눈이 쏟아져 며칠 동안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楚나라 영채는 물에 잠겨 수심이 1자가 넘었습니다. 楚나라 군사들은 모두 높은 언덕에 올라가 비를 피했는데, 추위가 심하여 태반이 얼어 죽었습니다. 군사들이 원망하며 욕을 하자, 자경은 할 수 없이 회군하였습니다.
과군께서는 자공의 죄를 물어 이미 참형에 처하였습니다. 그리고 연합군에 번거로운 수고를 끼칠 것을 염려하여 신을 보내 이렇게 고하게 하였습니다.”
[자낭은 공자 정(貞)이다. 제119회에, 초공왕이 임부를 처형하고 임부의 아우 공자 정을 영윤에 임명했었다. 제123회에, 초공왕이 훙거하고 초강왕이 즉위했는데, 그때 吳王 제번이 초나라의 국상을 틈타 공자 당(黨)으로 하여금 초나라를 정벌하게 했다가, 양유기가 쏜 화살에 공자 당이 맞아 죽고 吳軍은 패하여 돌아갔다. 그때 자경이 양유기와 함께 참전했었고 그 후 영윤이 되었다. 자경은 초장왕의 아들로서 이름은 오(午)이다.]
진평공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자야(子野)는 참으로 소리에 정통했도다!”
진평공은, 楚軍이 鄭나라를 정벌하러 왔다가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회군했다는 사실을 여러 제후들에게 알리고, 각자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사관이 시를 지어 사광을 칭찬하였다.
歌罷南風又北風 남풍을 연주하고 또 북풍을 연주하여
便知兩國吉和凶 양국의 길흉을 알았네.
音當精處通天地 음률에 정통하여 천지의 변화에 통달했는데
師曠從來是瞽宗 사광은 원래 장님이었도다.
때는 주영왕(周靈王) 17년 겨울 12월이었다. 晉軍이 황하를 건너 본국으로 돌아갔을 때에는 18년 봄이 되었다.
중행언은 행군 도중에 홀연 머리에 종기가 생겼는데, 고통이 너무 심해 참을 수가 없어 저옹(著雍) 땅에 머물러 치료했다. 하지만 2월에 이르러 종기가 다 문드러지고 두 눈알이 튀어나와 죽고 말았다. 머리가 땅에 떨어진 꿈과, 경양 무당의 말이 모두 들어맞았던 것이다.
식작(殖綽)과 곽최(郭最)는 중행언이 죽어 어수선한 틈을 타서, 형틀을 부수고 탈출하여 齊나라로 달아났다.
범개(范匄)는 중행언의 아들 오(吳)와 함께 영구를 모시고 晉나라로 돌아갔다. 진평공은 오로 하여금 중행언의 대부 직을 잇게 하고, 범개를 중군원수로 임명하였다. 또 오를 중군부장으로 임명하고, 중행씨를 다시 순씨(荀氏)로 바꾸게 하여 순오(荀吳)라 하였다.
그해 여름 5월, 제영공(齊靈公)이 병이 났다. 대부 최저(崔杼)와 경봉(慶封)은 상의하여, 사람을 보내 즉묵에 있는 폐세자 광(光)을 모시고 오게 하였다. 경봉은 가병을 거느리고 태부 고후(高厚)의 집을 찾아가 대문을 두드렸다. 고후가 문을 열고 나오자, 경봉은 고후를 죽였다. 광은 최저와 함께 궁으로 들어가, 융자(戎子)를 죽이고 또 공자 아(牙)를 죽였다.
[제123회에, 제영공은 부인 안희의 잉첩인 종희의 아들 광을 세자로 세웠다가 폐하고, 애첩 융자의 누이동생 중자의 아들 아(牙)를 세자로 세우고, 고후를 태부, 숙사위를 소부에 임명했었다.]
제영공은 변란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피를 몇 말이나 토하고 숨이 끊어졌다. 광이 즉위하니, 그가 제장공(齊莊公)이다. 환관 숙사위(夙沙衛)는 가속들을 이끌고 고당(高唐)으로 달아났다. 제장공은 경봉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숙사위를 추격하게 하였다. 숙사위는 고당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제장공이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가서 고당을 포위하고 공격했지만, 한 달이 넘도록 함락하지 못했다.
고당 사람 공루(工僂)는 용력이 있어, 숙사위가 기용하여 동문을 지키게 하였다. 공루는 숙사위가 성공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 성 위에서 서신을 화살에 끼워 아래로 쏘아 보냈다. 밤중에 대군이 동북쪽에서 성을 오르면 내응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제장공이 믿지 못하고 주저하자, 식작과 곽최가 말했다.
“그가 약속을 했으니, 필시 내응할 것입니다. 소장들이 가서 저 개 같은 환관 놈을 사로잡아 석문산(石門山)에서의 원한을 설욕하겠습니다.”
제장공이 말했다.
“장군들은 조심해서 공격하시오, 과인이 접응하겠소.”
식작과 곽최는 군사를 이끌고 동북쪽으로 가서 밤중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밤중이 되자 성 위에서 깃 밧줄이 여러 개 아래로 내려왔다. 식작과 곽최는 밧줄을 잡고 성 위로 올라갔다. 군사들도 그 뒤를 따라 성을 올라갔다.
식작은 공루의 인도를 받아 숙사위를 사로잡고, 곽최는 성문을 열어 대군을 입성시켰다. 성중에는 대란이 일어나, 양군 사이에 혼전이 벌어졌지만 약 1시간 후에 평정되었다. 제장공이 입성하자, 공루가 식작과 함께 숙사위를 포박하여 끌고 왔다. 제장공이 큰소리로 숙사위를 꾸짖었다.
“개 같은 환관 놈아! 과인이 너에게 무슨 잘못이 있길래, 너는 장자를 폐하고 어린 아들을 세자로 세웠느냐? 지금 공자 아는 어디 있느냐! 너는 소부(少傅)이니, 지하에 가서 보좌해야 되지 않겠느냐?”
숙사위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제장공은 숙사위를 끌어내어 참수하고 그 시신으로 젓갈을 담아 신하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게 하였다. 제장공은 공루를 고당의 수장(守將)으로 임명하고 임치로 회군하였다.
그때 晉나라 상경 범개는, 지난번에 齊나라 도성을 포위하고서도 성공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고, 진평공에게 청하여 다시 대군을 거느리고 齊나라를 침공하였다. 황하를 건너자마자 제영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범개가 말했다.
“齊나라에 국상이 생겼으니, 이때 공격하는 것은 불인(不仁)한 짓이다!”
범개는 회군하였다.
晉軍이 회군했다는 보고가 齊나라에 전해지자, 대부 안영(晏嬰)이 아뢰었다.
[안영의 성은 안(晏), 이름은 영(嬰), 字는 중(仲)이다. 시호는 평(平)으로 보통 평중(平仲)이라고도 불리며, 안자(晏子)라고 존칭되기도 한다. 제나라 영공(靈公)·장공(莊公)·경공(景公) 3대에 걸쳐 나라를 바르게 이끌어 관중과 더불어 훌륭한 재상으로 후대에까지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논어에서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안평중은 사람을 잘 사귀었는데, 오래되어도 남들이 그를 공경하였다.”라고 하였다.]
“晉軍이 우리의 국상을 틈타 공격하지 않고 회군한 것은, 우리에게 인(仁)을 베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晉을 배신한다면, 그것은 의롭지 못한 일입니다. 晉에 화평을 청하여, 양국이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안영은 字가 평중(平仲)이었는데, 키가 불과 5척밖에 되지 않았지만, 齊나라에서 가장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제장공은 국가가 이제 비로소 조금 안정되었는데 晉軍이 다시 쳐들어올까 두려워 안영의 말을 따랐다. 제장공은 사신을 晉나라에 보내 사죄하고 동맹을 청하였다.
진평공은 전연(澶淵) 땅에 제후들을 소집하여, 범개로 하여금 제장공과 삽혈하고 동맹을 맺게 하였다. 그로부터 1년여 동안은 아무 일이 없었다.
한편, 晉나라 하군부장 난영(欒盈)은 난염(欒黶)의 아들이었고, 난염은 범개의 사위였다. 범개의 딸은 난염에게 출가하여 난기(欒祁)라 불렸다. 난씨는 난빈(欒賓)으로부터 시작해 난성(欒成)·난지(欒枝)·난돈(欒盾)·난서(欒書)·난염·난영에 이르기까지 7대에 걸쳐 경상(卿相)을 지내 그 세력이 누구도 비할 바 없이 강성하였다.
[제39회에, 晉나라의 역사를 설명한 부분에서, 소후(昭侯)가 즉위하여 숙부인 환숙(桓叔)을 곡옥(曲沃) 땅에 봉하고 곡옥백(曲沃伯)이라 불렀다고 했는데, 난빈은 환숙을 보좌했던 인물이다. 환숙의 손자 진무공(晉武公)이 익(翼)을 공격하여 애후(哀侯)를 죽였는데, 난성은 그때 애후의 스승이었다. 제71회에, 중이(진문공)가 秦나라에 있을 때 난지의 아들 난돈이 찾아와 내응을 약속했고, 중이가 晉나라로 돌아오자 난지는 앞장서서 대신들을 이끌고 영접하여 2등공신이 되었다. 난지 이후 난영에 이르기까지 모두 중책을 맡아 큰 공을 세웠다.]
晉나라 조정의 문무 관원 중 절반은 난씨 일족이고 나머지 절반은 그 인척이나 도당(徒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 위씨로는 위서(魏舒), 지씨로는 지기(智起), 중행씨로는 중행희(中行喜), 양설씨로는 양설호(羊舌虎), 적씨로는 적언(籍偃), 기씨로는 기유(箕遺)가 있었는데, 모두 난영의 세력에 의존하여 사당(死黨)을 결성하였다.
[‘사당(死黨)’은 죽음을 각오하고 단결한 도당이다.]
난영은 어릴 때부터 겸손하고 선비들을 공경하였으며 재산을 털어 빈객들과 교제했기 때문에, 목숨을 바치려는 자들이 많이 귀부하였다. 주작(州綽)·형괴(邢蒯)·황연(黃淵)·기유(箕遺) 등이 모두 난영의 부하 효장들이었다. 역사(力士) 독융(督戎)은 천균(千鈞)을 드는 힘이 있었으며 2개의 화극(畵戟)을 잘 썼다. 그는 난영의 심복으로서 항상 촌보도 떨어지지 않고 따라다녔다. 그리고 가신(家臣) 신유(辛俞)와 주빈(州賓) 등 난영을 위해 힘을 아끼지 않는 자들이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제122회에, 晉軍이 역림에서 秦軍과 싸웠을 때 난염의 아우 난침이 전사하고, 난침과 함께 참전했던 범앙은 난염의 노여움을 피하여 秦나라로 달아났었다. 범앙은 진경공(秦景公)에게 난영이 교만하여 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직후 난염이 죽고 난영이 뒤를 이어 하군원수가 되었다. 제123회에, 중행언의 꿈속에서 상제가 난서 자손이 5년 내 절멸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난영의 아버지 난염이 죽었을 때, 그 부인 난기는 나이가 마흔이었는데 수절을 하지 못했다. 가신인 주빈이 부중(府中)에 들어와 일을 아뢸 때, 난기는 병풍 뒤에서 엿보게 되었다. 난기는, 주빈이 젊고 준수한 것을 보고 은밀히 시녀를 보내 뜻을 전하고 마침내 사통하게 되었다. 난기는 집안의 재물을 주빈에게 많이 주었다.
난영이 晉侯를 따라 齊나라를 정벌하러 가자, 주빈은 공공연히 부중에 머물면서 남의 눈도 피하지 않았다. 난영은 귀국하여 그 사실을 알았지만, 모친의 체면을 생각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다른 일을 핑계하여 문지기들을 호되게 꾸짖고, 앞으로는 가신일지라도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게 하라고 일렀다.
난기는 처음엔 부끄러웠으나, 그 부끄러움이 노여움으로 변하고, 또 더 이상 음심(淫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난영이 주빈을 죽일지도 몰랐다. 이런저런 이유로 난기는, 부친 범개의 생신에 축수한다는 핑계로 친정으로 가서 틈을 보아 부친에게 호소하였다.
“난영이 난을 일으킬 것 같은데, 어찌하면 좋습니까?”
범개가 자세한 사정을 묻자, 난기가 말했다.
“난영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범앙(范鞅)이 우리 형을 죽게 해서 우리 부친이 그를 쫓아냈는데, 그는 다시 귀국하여 죽음을 당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인데 도리어 주군의 총애를 받고 있다. 그래서 지금 저들 父子가 국정을 전담하여, 범씨는 날로 강성해지고 난씨는 쇠퇴하고 있다. 나는 죽을지언정 맹세코 범씨와 양립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는 밤낮으로 지기·양설호 등과 밀실에 모여 모의하면서 여러 대부들을 모두 제거하고 자신들의 사당(私黨)을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 일을 바깥으로 누설할까 두려워 문지기들로 하여금 엄하게 단속하게 하여 외가(外家)와 통하는 것도 금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억지로 찾아온 것은, 훗날 아버지를 다시 뵙지 못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부녀간의 깊은 정 때문에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122회에, 범앙과 함께 秦軍으로 돌격하여 전사한 사람은 난침이며, 난침은 난염의 아우라고 했으니, 난영의 숙부이다. 착오가 있다.]
그때 범앙이 곁에 있다가 난기의 말을 거들었다.
“저도 그런 소문을 들었는데, 이제 보니 과연 소문이 맞았습니다. 저들의 도당이 한창 강성하니, 방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들과 딸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얘기하자, 범개는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범개는 곧장 진평공을 찾아가 은밀히 아뢰고, 난씨를 축출할 것을 청하였다. 평공은 은밀히 대부 양필(陽畢)에게 물었다. 양필은 평소 난염을 미워하고 범씨와 친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난서는 여공(厲公)을 살해했으며, 난염은 그 뒤를 이어 흉악한 짓을 저질러 이제 난영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 백성들도 난씨에게 귀부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만약 난씨를 제거하여 시역한 죄를 밝힌다면, 주군의 위엄을 세우는 동시에 국가의 복이 될 것입니다.”
평공이 말했다.
“난서는 선군(도공)을 옹립하였고 난영의 죄도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니, 제거할 명분이 없소. 어찌하면 좋겠소?”
“난서가 선군을 옹립한 것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서였습니다. 선군께서는 사사로운 은덕 때문에 난서가 나라의 원수임을 잊었는데, 주군께서도 그를 그냥 놔두시면 그 해악이 점점 더 키질 것입니다. 난영의 악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리신다면, 먼저 그 도당들을 잘라내고 난영은 사면하여 타국으로 보내십시오. 그가 만약 반항한다면 죽일 수 있는 명분이 생길 것이고, 그가 만약 죽음을 피하여 타국으로 달아난다면 주군에게는 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평공은 양필의 말에 찬성하고, 범개를 불러들여 함께 그 일을 의논하였다. 범개가 말했다.
“난영을 제거하지 않고 그 도당들만 잘라내면, 난을 재촉하게 될 것입니다. 주군께서는 난영을 저읍(著邑)으로 보내 성을 쌓게 하십시오. 난영이 떠나면 그 도당들은 주인이 없게 되니, 그때 도모하면 됩니다.”
평공이 말했다.
“좋소.”
평공은 난영을 저읍으로 보내 성을 쌓게 하였다.
난영이 떠나려 하자, 그 도당인 기유가 간했다.
“난씨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주인께서도 알고 계실 겁니다. 조씨(趙氏)는 하궁(下宮)의 변란 때문에 난씨를 원망하고 있고, 중행씨(中行氏)는 秦나라를 정벌할 때의 일 때문에 난씨를 원망하고 있으며, 범씨(范氏)는 범앙이 쫓겨난 일 때문에 난씨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지삭(智朔)이 요절하고 지영(智盈)은 아직 나이가 어려 중행씨의 말을 듣고 있으며, 정정(程鄭)은 晉侯의 총애를 받고 있어, 난씨의 세력은 고립되어 있습니다. 저읍에 성을 쌓는 일은나라의 급한 일이 아닌데, 하필이면 주인을 보내려 하겠습니까? 주인께서 사양하여 晉侯의 의도가 무엇인지 살펴본 후에 대비해야 합니다.”
[제114회에, 도안가가 진경공(晉景公)에게 참소하여 하궁에 살고 있던 조삭을 죽였다. 그때 난서는 도안가의 부탁을 받고 조씨를 위하여 변명하지 않았다. 제122회에, 중행언이 중군원수가 되어 秦나라를 정벌하러 갔을 때 하군원수였던 난염은 중행언의 명을 어기고 멋대로 회군하였다.]
난영이 말했다.
“군명을 거절할 수는 없소. 나에게 죄가 있다면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나에게 죄가 없다면 晉나라 사람들이 나를 동정할 것이니 누가 나를 해칠 수 있겠소?”
난영은 독융을 어자로 삼아 강주(絳州)를 떠나 저읍을 향해 떠나갔다.
난영이 떠나고 사흘 후, 평공은 조정에 나와 대부들에게 말했다.
“난서가 예전에 선군을 시해한 죄가 있는데, 아직까지 그 죄를 밝혀 처벌하지 못했소. 지금 그 자손들이 조정에 있으니, 과인으로서는 치욕이오. 어떻게 하면 좋겠소?”
대부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마땅히 쫓아내야 합니다.”
평공은 난서의 죄를 선포하고 죄상을 쓴 방을 국문에 내걸게 하였다. 그리고 대부 양필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난씨를 쫓아내게 하였다. 양필은 나라 안에 있는 난씨 종족을 모두 국외로 쫓아내고 난씨의 식읍을 거두었다.
난악(欒樂)과 난방(欒魴)은 종족들을 거느리고 주작·형괴와 함께 강성(絳城)을 탈출하여 난영이 있는 저읍으로 달려갔다.
양설호는 기유·황연과 함께 성을 빠져나가려다가, 성문이 이미 닫혀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그때 난씨의 도당을 수색한다는 소문을 듣고, 세 사람은 가병들을 모아 밤중에 난을 일으켜 동문을 깨뜨리고 탈출하기로 모의하였다.
조씨의 문객인 장갱(章鏗)이 양설호의 이웃에 살고 있었는데, 그들의 모의를 듣고 조무(趙武)에게 달려가 알렸다. 조무는 또 범개에게 가서 알렸다. 범개는 아들 범앙으로 하여금 군사 3백을 거느리고 가서 양설호의 집을 포위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