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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안이 낳은 걸출한 대학자 지포 김구를 찾아서 | 전라북도 부안은 산과 들과 바다가 어울어진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자연환경을 보유한 보배로운 땅이다. 여기에 유서깊은 역사문화의 향기가 어우러져 수많은 이들이 한번쯤 꼭 찾아 가보고 싶은 고장으로 평가한다. 특히 부안 변산은 곳곳이 숨은 비경(秘景)이요, 찾으면 찾을수록 역사의 숨결이 그윽한 곳이다. 백제부흥운동의 마지막 거점인 주류성 전투가 있었고, 푸르른 곰소만의 고려청자가, 또한 조선실학의 선구인 반계 유형원이 머물렀던 곳이다. 여기에 고려후기 부안이 낳은 걸출한 대학자 지포 김구 유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
| 역사의 현장에서 정신을 찾는다는 것은 지역사(地域史)의 중심을 잡는 것이고, 교육의 지표와 지역사회의 구심점을 잡는 것이다. 부안의 인물은 많이 있지만 지역사회에 손꼽히는 영향력 있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말하자면 조선실학의 선구라 할 수 있는 우반동의 반계 유형원(柳馨遠, 1622~1673)과 임진왜란때 의병장인 우반동의 김홍원(金弘遠, 1571~1645), 마지막 유학의 거두라 하는 계화도의 간재 전우(田愚: 1841~ 1922) 정도이다. |
하지만 이 보다 더 중요한 인물을 찾는다면 지포 김구(止浦 金坵, 1211∼1278)를 빼 놓을 수 없다. 김구는 부안의 정신사적 중심인물로서 고려대의 문신이자 학자이자 뛰어난 외교가이며, 또한 그가 남긴 문풍의 영향으로 이후 조선시기에 부안 뿐 아니라 전라도 지역 유학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던 인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김구와 관련된 유적은 부안 변산 운산리에 김구의 묘역이 있고, 이 밖에 부안읍 연곡리의 도동서원터와 부안읍 선은리의 김구유허비가 여기에 해당한다. 먼저 김구를 주벽(主壁)으로 삼는 1534년(중종 29)에 세워진 도동서원(道東書院)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라 하는 경상북도 영주의 소수서원(紹修書院, 1542년, 중종 37)보다 8년 앞서 세워진 한국 서원의 선구적이며 발원적 의미를 지닌 유학의 중심지였다.
이는 조선시기 부안지방이 유림의 세력이 비교적 강하고 그의 후손인 부령김씨(부안김씨)들이 생원·진사가 많이 배출된 것과 무관하지 않으며, 김구의 도동서원 중심배향이 전라도 지역은 물론 전국에서 선구적인 것이라는 점을 통해서 볼 때 매우 주목되는 곳이다.
또한 기록에 의하면 “김구가 벼슬을 쉬는 사이에 부안 선학동(현 선은리)에 살 곳을 정하고, 변산 지지포에서 후학을 가르쳤다”는 내용과 관련, 조선말 대표적인 유림(儒林)으로 말년을 계화도에서 보낸 간재 전우가 1910년에 세운 ‘문정공 김구 유허비문‘도 주목된다. 이 비문은 지포 김구가 태어나고 만년에 선은동과 지지포를 오가며 예의윤강(禮儀倫綱)을 다하였다는 내용과, 부안 땅에 문풍진작를 찬양하는 비문으로 매우 주목된다. |
부안출신의 역사적인 인물은 김구가 최초(最初)이며 최고(最高)의 인물이다. 이를 반증이라도 하듯 역대 부안의 군지(郡誌) 등에는 그의 행적이 항상 인물조 첫머리에 상세히 소개될 정도이다. 김구는 고려시대 전라도 부령현(현 부안군) 사람으로 1211년(희종 7) 어지러운 세태인 고려 무신정권기에 출생하여 몽고간섭기 초기인 1278년(충렬왕 4)까지 활동하였던 관료이자 학자이다. 그는 부안에서 성장한 신흥사류로서 중서시랑평장사라는 재상의 반열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
<도표> 부령김씨 김구 가계도 (부령김씨족보) |
부傅 - 경순왕 (897~978)
| 일鎰 - 마의태자 (917~?)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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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수景修 - | 춘春 - 戶長同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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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순仁順 - 正位戶長
| 작신作辛 - 扶寧君
| 의宜 - 神宗登科
| 구坵 - (1211∼78)
| ① 宗 - ②盂 - ③叔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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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가문은 부령김씨(扶寧金氏, 현 부안김씨)로 족보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장자인 마의태자에서 출발한다. 이후 고려조에 부안에 세거하면서 마의태자 6세손으로 보이는 부안김씨 시조(始祖)인 김경수(金景修, 추정 12C중엽)때부터 호장(戶長)세력으로 활동하다 김경수의 5세손, 즉 김구의 아버지 김의(金宜)가 과거에 급제한 후 개경으로 올라가 문신가문으로 활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아버지 김의나, 김구가 태어난 시기는 최충헌 정권기(1196~1219)로 무신정권내에서도 이규보나 최자, 진화, 김극기 등 여러 문인들이 등용되며 활약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이와 관련해 김구 역시 출생지가 부안이든, 개경이든 분명 자신의 기반지역이 부안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부령김씨로 그의 선대의 사회·경제적 근거지를 부안에 두고 개경으로 정치적 활로를 모색하였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 김의는 국자박사까지 오르며 상당한 학문적 소양으로 최충헌 정권기에 활약한다.
특히 김구는 이러한 부친의 활약을 발판으로 12세인 1222년(고종 9년)에 성균시에 합격한다. 이후 22세인 1232년(고종 19)에는 예부시 과거에 2위로 합격하며 본격적인 관료생활에 접어든다. 특히 당대의 제1의 문호인 이규보가 최자와 함께 김구를 천거하여 관직생활을 하였다는 점에서 김구의 학문은 매우 출중했음을 입증해 주는 부분으로 평가된다. |
| 24세인 1234년(고종 21)에 정원부(定遠府) 사록에 임명되지만 황각보의 고변으로 결국 제주판관으로 임명되어 관도(官途)에 오르게 된다. 김구의 제주판관 시절 6년은 그야말로 선정(善政)의 목민관으로 평가된다. 특히 탐라지(耽羅志) 풍속편에 보면 “김구가 판관이 되었을 때에, 백성에게 고통을 느끼는 바를 물어서 돌을 모아 담을 쌓아 경계를 만드니, 백성들이 편안게 여겼다. ”는 기록에서도 볼 수 있듯이 백성의 입장에서 민본주의 선정을 펼쳤던 인물로 상당한 치적을 쌓아서 제주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고 ‘고려사’에도 전한다. 현재 전라북도에서보다 제주도에서 김구는 더 잘 알려진 인물로 존경과 추앙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이를 대변이나 하듯 제주시 삼양동에 소재한 제주민속박물관에는 “돌문화의 은인 판관 김구선생 공적비”까지 건립되어 있고, 현재 제주 애월읍 설촌마을에는 제주 특유의 현무암 돌담길이 문화재로 등록예고(2006. 10. 19)된 것도 여기에 기인된 것으로 보인다. |
30세가 되던 해인 1239년(고종 26) 권직한림으로 한림원 (翰林院)에 들어온 김구는 이 때부터 문사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김구는 이 무렵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다녀와 기행문인 “북정록(北征錄)”를 남겼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현존하지 않는다. 그 다음해인 1240년에도 서장관으로 몽고에 갈 때, 일찍이 1231년(고종 18) 몽고의 침입에 끝까지 항쟁하다 죽은 판관 이원정(李元禎)을 기리는 “과철주(過鐵州)”를 비롯한 여러 시를 지었는데, 이것은 그가 강렬한 항몽의식을 갖고 있었음을 역설하는 대목으로 평가되는 명시(名詩)이다. |
| 과철주(過鐵州)
당시의 성난 도적이 요새 문을 막아버리니 40여 성이 불 붙은 언덕 같았지. 산을 의지한 외로운 성첩은 적의 길에 해당하고 만군의 큰 소리가 한꺼번에 삼킬 듯 하였지. 백면 서생이 이 성을 지켰으니 나라에 몸 바치기를 기러기 털처럼 가벼워 했었지 일찍이 仁信을 끌어와 사람의 마음을 맺었으니 장사들의 환호 소리에 천지가 기울어지려 했지 서로 의지한 지 반 달에 해골 쪼개어 밥해 먹고 밤낮으로 싸우고 지키기에 영웅도 지쳤었네 형세가 다 하고 힘이 꺽였으나 오히려 한가함을 보이니 다락 위 관현 소리 더욱 슬프구나 나라 창고가 하루 저녁에 붉은 불꽃으로 피어 오르고 달갑게 처자와 함께 재로 되어 사라졌네. 충성스런 혼과 장한 넋은 어디로 향해갔나 천고의 고을 이름 부질없이 철자(鐵字)로 기념하는구나 |
강화에서 배를 타고 지지포에 내렸을 김구를 회상한다. |
이후 1247년(고종34)에는 합문지후(閤門祗候)를 거쳐 국학직강(國學直講)이 되었으나, 김구의 나이 40세인 1249년(고종 36)에는 최충헌 아들 최우정권이 끝나고 최우의 아들 최항(崔沆)이 집권하면서 김구의 관직생활은 암초에 걸리고 만다. 최항의 명으로 지은 “원각경(圓覺經)” 발문에 쓴 시가 최항의 뜻을 거슬러 좌천되어 10여년 이상 은거하게 된 것이다. 이 때 최항이 원각경을 인쇄할 때 김구로 하여금 발문(跋文)을 짓게 하자,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최항을 조롱하고 비판하였다. |
| 벌(蜂)은 노래 부르고 나비는 춤추며, 온갖 꽃들이 아름답게 피었으니, 이것이 모두 천지의 진기함을 간직하였다. 종일토록 읊조리며, 원각경을 설교하느니보다 입을 다물고 늦은 봄의 경치나 구경하자! |
이에 최항이 성을 내어 “나더러 입을 다물라는 것이냐”고 하면서 드디어 그를 강등시켰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있다. 이는 김구 자신의 무신정권에 대한 반감도 어느정도 있었으나 같은 정치계열인 경주김씨 김약선·김미 세력과 연계가 강등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아마도 이 무렵 김구는 자신의 재지기반인 부안으로 내려와 부안 선학동(선은리)와 지지포(변산 운산리)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문풍을 진작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즉 40세인 1249년(고종 36)부터 49세인 1258년(고종 44)의 10여년간을 관직에서 물러나 부안에 은거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강화도에 고려조정이 있었는데 문득 강화에서 배를 타고 서해를 거쳐 쓸쓸히 변산 지지포에 닿았을 김구를 회상한다. |
이후 49세인 1258년(고종45)에 최항·최의정권이 끝나고 김구와 친밀한 유경·김준정권이 등장하면서 김구도 이 무렵부터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1257년(고종44)에는 한림원 지제고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50세인 1259년(고종46년) 김구는 강화도에서 개경으로의 환도(還都)와 태자의 입조(入朝)에 대한 표문을 작성하여 세상에 그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된다.
이 표문은 원 세조를 높이는 글이지만 결국 이후 몽고의 무리한 요구와 압력을 해결하는 중요한 전기가 된 글로 평가된다. 이후 원종(1260∼1274), 충렬왕(1274∼1308) 초기 그가 죽기 전까지 김구는 국가의 주요 외교문서나 의례에 수반되는 문한(文翰)를 맡는 중심인물로서의 역할을 주로 수행하였다. 실제로 당시의 원나라에 보내는 표전문(表箋文)은 거의 도맡아 썼다고 했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마음속에 비분강개의 항몽의식은 내재하나 국가의 실리를 위한 외교문장가로서의 김구의 삶의 궤적은 여기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당시 새로운 군왕인 원종과 당시 최고의 권신인 이장용과 유경이 학자이자 문장가로서의 그 실력을 인정하고 후원함으로써 김구는 원활한 관직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하지만 김준·임연·임유무로 이어지는 무신세력의 견제, 강화도에서 개성으로의 환도, 몽고에 굴복하여 부마국으로 전락(1270년)하는 국가의 위기속에서 김구 자신은 정치 권력 전면에 나서지 못한채 대몽관계 속에서 외교문서의 작성하는 실리적인 문신활동에 머무르는 안타까움도 살펴보게 된다.
어쨌든 김구는 원종대에 주로 외교문장가 활동하였고, 또한 1267년(원종 8)에는 감시시원이 되어 인물을 발탁하기도 하였고, 그해 10월에는 수찬관을 겸하여 신종·희종·강종의 삼조실록(三朝實錄)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이후 60세인 1269년(원종10)에는 은청광록대부 문창좌상, 이듬해에는 추밀원 좌상시, 1271년(원종12)에는 정당문학(政堂文學), 1273년(원종14)에는 참지정사(參知政事), 과거를 맡아보는 지공거(知貢擧)에 임명되어 예부시를 주재하기에 이른다.
65세가 되는 1274년(원종15)에 이르러서는 정2품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임명되어 재상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 관직은 이 후 충렬왕 때 관제 개편에 따라 첨의부 찬성사로 직함이 바뀌지만 그가 충렬왕 4년 68세 세상을 뜰 때까지 주어진 관직이다.
이후 충렬왕 즉위 뒤에 김구는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참문학사(參文學事)·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를 역임하였다. 충렬왕대 초기 김구는 외교문장가 활동 이외에 다루가치에 아부하는 강윤소를 강하게 비난 등 친원세력에 당당히 맞서기도 하였다. 아울러 1276년(충렬왕2)에는 당시 미천한 역관의 횡포에 대항하여 젊고 능력있는 자들에게 통문관(通文館)을 설치하고, 궁중 학관(學館)의 연소한 참외(參外)들로 하여금 한어(漢語)를 습득하게도 하기도 하였다.
김구의 성품은 “성실하여 말이 적었으나 국사를 논함에는 강직하여 어려움을 피하지 않았다.” 고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고려사’에 보면 “국사를 논할 때 말이 절도있는 직언으로 피하는 바가 없었다”라고 평가할 정도로 국가에 대한 김구의 성품이 매우 강직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김구는 1278년(충렬왕 4) 6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본관은 부령(扶寧: 현재의 扶安). 초명은 백일(百鎰), 자는 차산(次山), 호는 지포(止浦)이다. 그가 죽자 충렬왕은 국가에서 장사비용을 대고, 시호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다. 김구는 첫째부인 박씨에게 1녀, 둘째부인 경주최씨에게 3남1녀를 두었다. 자녀들은 해주정씨, 청주정씨, 경주김씨등 당시 명문과 혼인하였다. 특히 그의 손녀사위가 기철(奇轍)인 점으로 보아 김구는 당대 최고의 권문세족과 연혼관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지포 김구는 정치가라기보다는 학자로서, 사상가라기보다는 문장가로 유명한 인물로 평가된다. 불행히도 그가 남긴 저술인 원나라에 다녀온 “북정록(北征錄)”은 현존하지 않고, 그의 시문이 “용루집”, “동문선” 등에 일부 전해지고 있다. 조선 정조때에 그의 18세손 김동호가 여러 자료에서 유문을 찾아내어 3권 2책의 “지포집”을 간행하여 그의 학문과 행적을 이해하는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그의 학문적, 사상적인 측면으로 살펴보면 비교적 유교적 군신관에 충실한 인물이었고, 불교적인 안목도 있었던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김구의 학문은 지극히 실용주의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다. 그는 경학과 사장을 중시하는 고려전기 이래 학풍을 가지고 있었지만, 특히 현실정치에 필요한 표전 등의 저술 능력을 중시하였다.
이는 통문관 설치, 젊은 관료의 한어 습득 등에서도 나타난다. 또한 김구는 1260년(원종원년) 한림원 재직시에, 고려후기 최초의 성리학을 소개한 안향(1243∼1306)이 당시 18세 나이로 과거 급제 후 한림원에 재직하여 교류를 통해 성리학 도입의 여건 조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도 평가한다. 특히 사후에 그의 영향은 전라도와 부안지역의 유학 문풍 진작에 많은 영향력을 미침과 일정한 연관이 있다고 판단된다.
또한 ‘와룡산자운사왕사증시진명국사비명’를 짓기도 하고 당시 신앙결사운동 펼쳤던 백련사 천책(1206~1294)과 교류를 통해서 볼 때 불교에 대해서도 심도있는 이해를 가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함께 김구의 셋째아들이 불가의 중이 된 점도 당시 고려시기 시대상황속에서 불교의 사회적 역할에 따라 이해해 볼 수 있겠다. 아울러 그가 부안지역에 미친 영향력으로 보아 현재 변산반도에 소재한 내소사(來蘇寺)와 개암사(開巖寺) 등 이 지역의 사찰과 불교와의 연계성도 충분히 고려해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
김구 관련 금석문 중 먼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하고 있는 “김구 묘지석”을 살펴보면 김구 사후 고려조가 멸망까지는 그의 후손들이 개성의 귀족가문으로 생활을 영위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1392년 이성계에 의한 새로운 국가 조선이 개창되자, 부령김씨는 대체로 여기에 반대하여 부안지역으로 낙향하여 재지사족(在地士族)으로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김구가 잠들어 있는 곳은 그가 만년에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문풍을 진작하였고 하는 지지포에 있다. 지지포(知止浦)는 현재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운산리, 지서리 일대를 말한다.
특히 부령김씨족보에 의하면 김구가 처음 부령현의 북쪽 선학동에 거주하였고 늙어서는 변산의 북 지지포에 집을 짓고 양처를 소요하면서 스스로 즐기며 생도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또한 그의 연보에도 “처음에 부풍현의 풍속이 미개하여 글을 배울 줄을 모르더니, 그가 이 고을 선학동에 살 곳을 정하고 또 변산 바닷가에 지어 이름하여 지지포라 하여, 관직 생활을 쉰 한가한 틈에 두 곳을 소요자적하면서 거문고와 독서를 즐기며 후학들을 가르치는데 그 과정이 엄격하여 이로부터 인재가 많이 일어나고 고을 풍속이 변하지 아니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문정공 지포 김구선생 묘 (전라북도 부안군 운산리 소재) |
| 그의 호를 지포라고 한 것도 부안 지지포에서 따온 것으로 보아 김구 부안에 거주하면서 후학을 가르친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이처럼 김구가 부안에 복거하면서 후학을 가르쳤다고 하면 벼슬살이를 하던 중간 어느 한 때 부안에 은거하면서 지역의 자제들을 가르쳤던 것으로 보이는데 앞서 본바와 같이 아마도 40세인 1249년(고종 36) 최항집권때 이후로 10여년의 시기로 추정된다. 아직도 이 곳 운산리, 지서리, 지동리, 지남리 일대에는 후생들을 교육하며 거문고를 타며 여생을 보냈다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
일부 기록에 보면 김구는 시문만 잘한 것이 아니라 거문고도 잘 탔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 거문고가 18세기초까지 전하여져 왔다는 내용도 있다. 현재 운산리 운선마을에 소재한 김구묘역은 인근 신도비가 들어있는 신도비각과 경지재(敬止齋)라는 재실과 함께 있다. 묘역에서 남쪽으로 1km 남짓 떨어지는 지점에 “부령김문정공묘동(扶寧金文貞公墓洞)”이라는 묘역 입구 안내 표지석만이 이 곳에 김구가 잠들어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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