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의 시
신동옥 저물녘이면 혼자 강을 산책했다 자작나무 언덕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이따금 안개가 피어오르고 이내에 젖어서 발을 벗고 걸으면 축축한 모래가 스미고 발아래로 무언가 끝없이 흐르는 게 느껴진다 마지막 빛이 사라질 때 눈에 선연하던 실루엣 길을 잃고 혜매던 손을 끌던 그림자 보여줄 심장이 없다면서도 들려줄 노래로 가득하던 눈빛 내가 이름 없는 말을 타고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달린 다음 당신의 꿈에서 뛰어내려 이생으로 돌아온 밤이면 양은 대야에 이불 홑청을 삶았다 난로 앞에 앉아 감자에 돋은 싹을 도려냈다 도려내 불 속에 던져 넣었다 예외 없이 독을 품은 것은 칼날이 아니라 여린 싹이거나 날름거리는 불꽃이어서 고집스레 창을 비집고 들어온 바람은 등피에 수놓이는 불빛을 필사하고 하얀 밤 텅 빈 하늘 아래 자작나무들이 열을 맞추어 걷는지 낡은 레코드판을 뒤집듯 그믐의 달빛 아래 곡조를 바꾸며 뒤채는 은빛 이파리 겨울 물고기 돌아와 눕는 물결 위에 기다란 속눈썹 몇 낱 흘려보내며 돌아누운 염소와 당나귀의 꿈속에 스미는 역청 같은 어둠 속에도 남은 빛이 있고 음악이 있었다 내가 이렇게 계절을 셈하지 않고 별을 지도 그리지 않으며 당도한 여기 강가에 오두막을 짓고 산정을 떠가던 구름을 셈하다가 바람에 짓이겨진 꽃잎에 스민 겨울빛을 그러모아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의 문법을 복기하는 밤 죽도록 사랑 노래에 매달렸지 그러다 마침내 어떠한 인유도 없이 내 몫의 사랑 노랠 불렀지 하지만 그날 이후 네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볼우물에 고이는 다디단 침묵 누구나 그렇게 멈춘 자리가 있었다 누구에게나 그 자리가 시금석이었다 정초였다 거기 새집을 올리고 새 공화국을 열었다 새 노래를 불렀다 물론 당신이라면 훨씬 잘 쓸 수도 있겠지만 한 줄 시가 모든 이유를 납득시킬 수는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줄 시가 당신과 나를 얼어붙게 만드는 밤이 있었다 그 밤에는 혼자 강을 산책했다 내가 이렇게 끝없이 아름다운 음악을 꿈꿔도 되는 걸까 이생 끝에서 저생 끝까지 강가에 서면 무언가 끝없이 차오르기만 하는데 ―《한국문학》 2023년 상반기호, 《현대시》 2024년 2월호 재수록 ----------------------- 신동옥 / 2001년 《시와반시》로 등단. 시집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 『웃고 춤추고 여름하라』 『고래가 되는 꿈』 『밤이 계속될 거야』 『달나라의 장난 리부트』 『앙코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