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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 4,1-7.11-13>
형제 여러분,
1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3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4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5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6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7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11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12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3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 복음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9,9-13>
그때에
9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부르신 다음, 그의 집에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십니다.
그러나 이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합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마태 9,11)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마태 9,12)
이 말씀은 예언자 호세아가 선포한 말씀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것입니다.
예언자 호세아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부부 혹은 연인의 관계로 설정하고, 스스로 부정한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여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부정한 여인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주는 남편의 모습을 통해서, 부패와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을 당신 품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이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회개로 초대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진정한 회개의 길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신의이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이다.”
(호세 6,6)
이는 ‘진정한 회개’의 길은 애꿎은 짐승을 잡아 바치는 외적인 제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신의와 형제들에 대한 자비를 지키는 일이며, 이를 ‘하느님의 마음을 아는 예지’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회개'란 곧 ‘하느님의 신의와 자비를 배우는 일’이요, ‘하느님의 마음을 아는 일’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죄인 세리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은 그들과 타협하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두둔하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크신 자비요, 신의요, 호의였습니다.
용서와 사랑의 하느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바로 이 사랑, 이 호의를 입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입니다.
그토록 사랑과 호의를 입은 이들이기에, 또한 그렇게 사랑과 호의를 베푸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용서를 입은 죄인들입니다.
‘용서받은 죄인’이란 다름 아닌 용서하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이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 9,12)
<팡세>를 쓴 파스칼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며, 하나는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죄인이다.”
오늘 만약 우리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긴다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들의 친구인 그분을 친구로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진정 죄인이라면, 먼저 죄의 용서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일곱 번 용서하기에 앞서, 일흔 번 용서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용서해야 하는 사람이기에 앞서, 먼저 용서를 청해야 하는 사람,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인 것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
예나 지금이나 천대를 받고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태오라는 인물은 세금 징수원으로 천대를 받는 사회계급에 속해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세리를 부정하게 돈거래 하는 사기꾼이나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부르시고 그 집에서 함께 음식을 나누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마태 5,44-46)
하신 말씀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 9,11)하며 비위에 거슬린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 9,13)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습니다.
매일 다짐하지만 흔들비쭉인 우리의 마음을 헤아리시는 주님이 계시니 행복합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이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2사무 12,13) 하고 자기 죄를 고백함으로 용서를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루옷을 걸치고 흙을 뒤집어쓴 채 단식을 하여(느헤 9,1) 회개하였습니다.
요나도 죽음의 뱃속에서 살려달라 외쳤더니 그 호소를 하느님께서 들어 주셨습니다(요나 2,3).
세리도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13). 하고 기도했고, 자캐오는 주님의 부름을 받고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남을 속여 먹은 것에 대해서는 그 네 곱절을 갚아 주겠다고 말씀을 드렸고,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8-9)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십자가 위의 오른 쪽 죄수는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저를 기억하여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여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는 확답을 얻었습니다.
죄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가운데 자비를 입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에게 의사로서 다가가셨고, 외적인 병을 치료하는 것을 뛰어넘어 뿌리를 다스리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진정 회개하는 죄인에게 구원의 기쁨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도 그분이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이웃에게로 다가가야 하겠습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밉살스러운 사람은 더 큰 사랑으로 더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보기 싫어도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로마 13,8 공동번역)
우리는 사랑에로 불리움 받았습니다.
“사랑의 핵심은 용서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상대의 실수를 이해하고 도와줄 방법을 아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그러므로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에페소서 4,1-2) 최선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9,13) 하신 말씀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 은혜를 기억하는 가운데 기쁨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대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지금 내세에 가게 될 똑같은 세상을 만들며 산다>
넷플릭스 ‘수리남’은 마약왕 조봉행의 실화를 다루고 있는 드라마입니다.
국정원은 애초에 조봉행을 잡고 싶었지만, 수리남 대통령과 깊은 유착관계가 있는 그를 건들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를 체포하기 위한 작전이 7년간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다 국정원은 뜻밖의 조력자를 만나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는 강인구라는 이름을 가집니다.
그는 수리남에서 마구 버려지는 홍어를 한국에 수입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로 사는 조봉행이 그를 마약 밀입국자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돈도 없고 약한 이들을 이용해 한국으로 마약을 밀반입하여 많은 가난한 이들이 죄도 없이 감옥에 갔다고 합니다.
전요한(조봉행) 목사는 신도들과 함께 천국을 만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천국이란 자신이 왕이 되는 세상입니다.
배신하거나 명령에 불복종하면 바로 총살입니다.
자기만 천국이지 실제로 주위는 지옥입니다.
우리에게도 힘이 주어지면 우리는 그 힘으로 천국을 만들기도 하고 지옥을 만들기도 합니다.
자신이 믿는 천국을 만듭니다.
하지만 권력을 추구하고 있다면 주위는 무자비한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성 마태오 사도의 축일입니다.
마태오 사도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힘으로 그를 사도로 맞아들였습니다.
자비의 세상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리사이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잘 사는 사람이라 여겼습니다.
그들이 만드는 세상은 자신들만 천국이고 주위는 지옥인 세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마태 9,13)
그들이 바치는 희생은 뇌물이었습니다.
마치 전요한 목사가 힘을 얻기 위해 수리남 대통령에게 주는 뇌물과 같습니다.
그 뇌물은 마약을 팔아서 마련한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으로 주위를 지옥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가리옷 유다는 권력층이 주는 돈과 신뢰로 하느님까지도 팔아먹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가 천국에서 은총을 받으면 천국도 지옥으로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반면 마더 데레사나 이태석 신부는 자신들에게 들어오는 돈으로 무엇을 했을까요?
주위를 천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지금 어디 계실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가 힘을 가지게 될 때 내세에 어디로 가게 될지 알게 됩니다.
내가 가정에 들어갔을 때 가족들이 나에게 몰려와서 인사하고 함께 이야기합니까?, 아니면 각자 방으로 다 들어갑니까?
내가 천국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가족들이 나에게 몰려올 것입니다.
힘이 있을 때 자녀들을 이용해서 나를 높이려 했다면 그 가정은 지옥이 됩니다.
사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강의를 많이 다니다 보니 성당마다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위기는 바로 본당 신부가 만들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본당 신부들은 각자 자신들이 천국이라고 여기는 세상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주의하려고 합니다.
내가 만드는 세상이 내가 가게 될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자비가 흘러넘쳐서 천국이 실현된 것이 우리 각자의 성당이 되게 해야 합니다.
캐나다 노바스코샤주의 한 노부부가 한화로 약 125억 원에 달하는 거액을 복권 당첨금으로 받았지만, 이를 전액 기부해 훈훈한 감동과 함께 잔잔한 화제를 일으켰습니다.
78세인 비올렛 라지(Violet Large)씨와 알렌(Allen)씨는 결혼한 지 35년이 넘은 아름다운 커플입니다.
남편인 알렌은 용접공으로서 일했고, 비올렛은 소매업을 통해서 차곡차곡 돈을 모으며 살아 온 캐나다의 성실한 부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복권 우승상금으로 1,130만 캐나다달러가 노부부에게 돌아갔을 때, 그녀는 암에 걸려 화학 치료요법을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비올렛 부부는 먼저 1,100억 캐나다 달러(한화 약 121억 원)를 남을 돕는데 기부하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단 1%도 자신들을 위해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이 베풂을 실천한 곳은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암으로 고생하고 있던 비올렛은 자신이 암 치료를 해오던 투루로(캐나다의 항구도시)와 할리팩스에 있는 병원에 기부합니다.
또한 지역 소방서, 교회, 묘지, 적십자, 구세군, 암과 알츠하이머, 당뇨병을 치료하는 기관 등 도움이 필요한 곳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들은 무려 두 페이지에 달하는 기부자 리스트를 작성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았다고 하니, 그 과정이 이 부부에게 어느 정도 고된 노동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나그네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주에서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돈은 우리의 건강이나 행복을 살 수 없습니다.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니었던 돈에 대해서는 일말의 후회도 없습니다.
우리는 둘이 함께라는 것에 충분히 만족합니다.”
이분들이 갈 곳은 어디일까요?
천국일 수밖에 없습니다.
힘이 들어왔을 때 주위를 천국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내 주위는 천국인지, 지옥인지 살펴야 합니다.
나는 잘 모릅니다.
내 주위 사람들이 내 앞에서 천국처럼 편안해하는지 아니면 눈치를 보며 두려워하는지 보면 됩니다.
내가 만드는 세상이 내가 내세에도 살 세상과 같습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세리가 사도가 되다니...>
끝도 없이 반복되는 악습으로 인한 괴로움이 사무칠 때마다, 어둡고 깊은 죄의 동굴 속에 앉아있을 때마다 큰 위로와 위안을 주는 복음이 있으니,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시는 대목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세리 마태오 제자 발탁 사건은 제자 공동체뿐만 아니라 유다 사회 전체에 엄청난 스캔들이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세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곧 매국노요 돈만 아는 수전노, 민족의 반역자요 대죄인이라는 말과 동일시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세리 일을 하고 있다면, 그는 깊은 어둠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은 사람으로서 가문과 민족의 수치로 여겼습니다.
더 이상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은 기약할 수 없는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던 세리 마태오에게 가까이 다가가십니다.
그를 눈여겨보십니다.
그의 말못할 내면의 고통을 바라보십니다.
그의 깊은 상처를 들여다보십니다.
그가 평생토록 받아온 수모를 헤아리십니다.
이윽고 세상 다정하고 따뜻한 음성으로 그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마태오 복음 9장 9절)
세리 마태오의 제자단 입적 사건으로 인한 제자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제자들 사이에 이런 수근거림도 분명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우리 스승님 해도 해도 너무하신 것 아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세리가 사도가 되다니...그가 우리 동료가 되다니...
적어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평소 배배꼬인 시선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바라보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비아냥을 더 심했습니다.
'정말이지 저 집단은 웃기는 집단이로군.
인간말종 세리를 핵심 멤버로 발탁하다니, 저 집단 미래가 불을 보듯 뻔하군.'
이런 분위기 속에서 던지는 예수님의 촌철살인의 말씀이 죄인인 오늘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큰 위로요 희망이 되는지 모릅니다.
참으로 관대하고 너그러운 주님, 정녕 좋으신 주님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오 복음 9장 12~13절)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구원의 출구 - 따름의 여정, 부르심과 응답, 공동체의 일치>
오늘은 성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역시 순교자 복음사가이기에 빨간 제의를 입습니다.
마태오는 갈릴래아 태생인 듯 하며 마르코 복음에 의하면 알패오의 아들로 원래의 이름은 레위였습니다.
예수님이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신 것처럼, 레위에게 마태오라는 이름을 주신 것으로 보고 있으며, 교회 전통 역시 둘을 동일한 인물로 봅니다.
마태오라는 이름은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히브리어 ‘마티아’에서 유래하며 그 이름 뜻대로 마태오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은총의 선물처럼 주님께 불림을 받습니다.
열두 사도중의 하나인 마태오는 특별히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로 복음서를 저술했다고 전해집니다.
전승마다 차이는 있지만, 마태오는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에티오피아에서, <예로니모 순교록>에 따르면 페르시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교회미술에서 성 마태오는 성경에 언급된 ‘살아 있는 네 생물’ 중 날개 달린 사람(천사)의 모습으로 표현되며, 이렇게 일치시킨 분은 리옹의 주교 성 이레네오였습니다.
성 마태오가 복음사가는 세리였던 경력으로 특별히 은행원과 장부 기장자, 회계사와 세무 직원들의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동방교회에서는 그의 축일을 11월16일에 기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마태오의 성소는 그 이름 뜻처럼 순전히 하느님의 선물이었음을 봅니다.
마태오처럼 우리의 성소 역시 주님의 선물임을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나 부르심을 받아 응답했기에 비로소 마태오의 운명은 바뀌고 완전히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된 것처럼, 우리도 그러합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날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새롭게 시작하는 날이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착안한 강론 제목이 ‘구원의 출구’입니다.
구원의 출구인 주님을 만나 부르심에 응답한 마태오입니다.
지하 주차장에서 출구를 통해 나오는 것처럼 출구를 찾지 못하면 자동차는 지하에서 계속 헤맬수 있습니다.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만일 마태오는 물론 우리가 구원의 출구인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마태오는 평생 구원의 출구를 찾지 못하고 세리 레위로 인생을 무의미하고 허무하게 마쳤을 것이며 우리 역시 방황하다 세상을 마쳤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세상에는 평생 구원의 출구인 주님을 찾아 만나지 못해 무의미하고 허무하게 살다가 아까운 인생 마치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마태오의 예수님과의 만남은 우연이 아닌 은총의 섭리였음을 봅니다.
세관에 앉아 진리이신 주님을 찾는 마태오의 갈망을 한 눈에 알아채신 주님은 즉시 그에게 명하십니다.
주님은 죄인 세리라는 선입견이나 편견없이 마태오의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마음을, 갈망과 열정을 직시하십니다.
참으로 부르심에 앞서 주님을 찾는 마태오의 간절한 갈망이 전제됨을 깨닫습니다.
“나를 따라라.”
구원의 부르심입니다.
길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길이자 구원의 출구이신 주님을 만남으로 이제부터 단조롭고 무의미한 일상에서 탈출하여 참길이신 주님을 따르는 새 삶이 시작된 마태오입니다.
“나는 불림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처럼, 지금까지 존재감없는 삶에서 이제부터 존재감 충만한 삶을 살게 된 마태오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죽는 그날까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라 나서는 ‘따름의 여정’에 오르게 된 마태오요 우리의 삶이기도 합니다.
주변으로부터 죄인 취급 받으며 세관에서 '혼자' 고립, 소외된 삶을 살다가 마침내 예수님의 제자공동체에 합류하여 이제부터 '더불어' 주님을 따르는 구원의 여정에 오른 마태오입니다.
교회공동체, 수도공동체에 속한 우리의 모습도 마태오와 흡사합니다.
예수님 제자들의 공동식사는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잔치를 연상케 합니다.
공동체의 일치를 이뤄주는 공동식사의 미사잔치입니다.
바로 여기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는 공동식사에 이의를 제기하는 바리사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의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참으로 예수님을 통해 회개한 죄인을 사랑하시는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회개한 죄인들의 공동체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요 우리가 속한 교회공동체입니다.
죄가 없어서, 잘나서 불림받은 우리가 아니라 병자요 죄인이기에 은총으로 불림 받았음을 깨닫습니다.
깊이 잘 들여다보면 세상에 병자 아닌 사람, 죄인 아닌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이걸 깨달을 때 저절로 감사요 겸손입니다.
이런 자비로운 예수님을 공동체의 중심에 모시고 혼자가 아닌 더불어 주님을 따르는 여정중의 우리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에페소서에서 바오로의 가르침이 참 적절합니다.
세상에 문제없는 공동체는 없습니다.
에페소 교회 공동체 역시 내외적으로 불화와 이단의 위협을 겪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오로 사도는 공동체 성원들 모두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라 하시며 공동체의 일치의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서로 사랑으로 참아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을 바라볼 때 이렇게 살 수 있고, 이렇게 살 때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을 닮습니다.
이어지는 공동체의 특성인 하나에 대한 강조가 참 인상적입니다.
하나의 희망,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 하나의 성령, 하나의 주님, 하나의 믿음, 하나의 세례, 하나의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모두가 하나 중심의 일치의 공동체임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은 곳이 없다는 무소부재(無所不在), 그분의 힘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는 무소부지(無所不知)의 하느님에 대한 묘사도 은혜롭습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해, 만물 안에 계십니다."
참으로 공동체의 중심이신 주님과의 관계가 공동체의 일치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모두가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을 사랑하여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 공동체 일치의 유일한 지름길임을 깨닫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키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앞 번호의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1979년에 입학했으니 벌써 43년이 지났습니다.
같은 교복을 입었고, 방과 후에는 학교에 남아 농구도 하였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는 격랑의 시대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였고, 신군부가 등장하였고,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광주 민주화 운동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격랑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신학교에 가서야 알았습니다.
43년이 지난 친구들의 모습을 봅니다.
형준이는 일찍 미국으로 이민 와서 우편배달부 일을 하였습니다.
찬행이는 조경에 관심이 있어서 아직도 조경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정식이는 대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자동차 중개업을 하고 있습니다.
달순이는 반도체와 친구가 되어 반도체 회사에서 일하였습니다.
저는 사제가 되어서 지금 미국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같은 학교를 다녔지만, 같은 과목을 배웠지만 친구들이 하는 일은 모두 달랐습니다.
이렇게 흐르는 시간 속에 우리는 익어가고 있습니다.
1982년에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교가는 이렇습니다.
“진세를 버렸어라. 이 몸마저 버렸어라.
깨끗이 한 청춘을 부르심에 바쳤어라.
성신의 그느르심 아늑한 이 동산에 우리는 배우리라 구원의 Veritas!"
친구들은 10년간 신학을 배우고 1991년 사제가 되었습니다.
31년 동창사제로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니던 때는 교회에 큰 행사들이 있었습니다.
1984년에는 103위 성인의 시성식이 있었습니다.
성인이 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방한하셨고, 시성식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1989년에는 44차 세계성체 대회가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는 10년마다 100만 명씩 신자가 늘어나는 성장의 시대였습니다.
같은 신학교를 나왔지만 동창 신부님들의 직책은 많이 달랐습니다.
본당 사제로 지내는 친구, 교구청에서 지내는 친구, 신학교에서 지내는 친구, 장애인 복지시설에서 지내는 친구, 교포 사목을 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저는 뉴욕에서 가톨릭평화신문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직책은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사제로 지내고 있으며 흐르는 시간 속에 익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시작되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하는 직분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겸손과 온유를 다하는 것입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서로 참아 주는 것입니다.
오늘은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어둠 속에 있던 마태오는, 절망 중에 있던 마태오는, 조롱과 멸시를 받던 마태오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주님, 용서와 온유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마태오는 이제 또 다른 세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주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언젠가 이메일을 통해 도움을 청하는 메일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조금 난감했습니다.
솔직히 제가 이분을 알지도 못하고, 또 그 상황도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도울 수가 있겠습니까?
이 분은 몇 년째 저의 묵상 글을 보고 있다면서 친밀감을 표시합니다.
그러나 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또 갑곶 성지 초창기에 자주 왔었다고 말합니다.
역시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저를 잘 알고 있으니, 도움을 당연히 줘야 하는 것처럼 메일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냥 무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분을 모르니까요.
어떤 형제님으로부터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친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기 필요할 때만 연락하고, 친구의 연락에 대해서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얼마 전에 그 친구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줬다고 하더군요.
“필요할 때만 연락하면,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없어.”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필요하지 않을 때도 깊은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필요할 때만 연락하면서 필요한 것을 얻기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과 이기심입니다.
그런데 주님께도 이런 모습을 취했던 우리는 아닐까요?
필요할 때만 기도합니다.
과연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관심이 컸습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보여주신 표징과 힘이 되는 말씀은 ‘메시아가 아닐까?’라는 가능성을 갖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로마의 지배를 받는 상태에서 진정한 해방을 가져다줄 메시아의 도래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지요.
그래서 계속해서 자신들이 믿을 수 있는 확실한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표징을 보여주어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로마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필요한 것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욕심과 이기심에서 벗어나는 자신의 변화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리들과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면서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많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실천만을 우리에게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실천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자기 필요한 것만을 계속 청하고만 있는 우리가 아닐까요?
주님께서 부르는 사람은 능력 있고 재주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을 지금 부르십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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