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마다 놓여있는 가지각색의 화분들, 주인이 되찾아 가지 않아 먼지만 잔뜩 쌓인 자전거들, 오래된 벽과 타일들의 퀴퀴한 냄새, 1층 아파트에서 신나게 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어릴 때 잠깐 살아본 복도식 아파트의 모습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어렸을 때는 가난한 아이들만 산다는 곳이라는 소리를 들은 이후 썩 좋아하진 않았지만, 어른이 되어 보니 이것도 다 추억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국 아파트 4층 404호]. 인터넷에서 사이가 좋았던 친구가 뽑아준 주소였다. 어른들은 항상 인터넷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도무지 그 사건을 나 혼자서 해결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경찰도 부모님도 친한 친구도 내 말이 헛소리라며 믿어주지 않았다. 이제 내가 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라곤 이거 하나뿐이었다.
딩동-. 용기를 내 초인종을 눌렀다. 초인종은 오랫동안 청소를 안 했던 건지 먼지가 잔뜩 쌓여있던 데다가 조금 끈적거렸다. 그러자 문 안쪽에서 누군가의 종종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사람이 안 살면 어떡하지, 와 같은 걱정은 정말이지 쓸데없는 잡생각이었다.
“안녕하세요. 핑크 공주님 맞으시죠?”
현관문을 열어준 사람은 굉장히 젊어 보이는 외형의 여자였다. 미성년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상담실은 이쪽이고, 잠깐 차 좀 끓일 테니 조금만 앉아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그녀가 안내해준 상담실은 큰 책상이 한가운데에 배치되어 있던 작은 방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안방으로 사용하기 제격인 크기였고, 침대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오래된 나무 책장이 배치되어 있었고, 그 속에는 서류 문서들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파일에서 삐죽 튀어나온 신문에는 ‘살인’, ‘방화’, ‘강간’ 같은 강력 범죄들이 자세하게 쓰여 있었다. 저 내용을 굳이 읽고 싶진 않아 고개를 돌렸다.
내 앞의 책상 위에는 가지각색의 필기구들과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도자기 인형들로 난잡했다. 내가 오기 전까지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었던 듯, 스티커가 잔뜩 붙여진 노트북 한 대만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평소 독서광이었던 나는 이곳이 셜록의 탐정 사무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홍차 좋아하시나요? 오랜만에 손님이 오신다고 너무 많이 만들어 버렸네요. 아, 이번에 가족이 외국에서 보내주신 쿠키가 있는데, 이것도 한 번 드셔보세요.”
“그럭저럭 좋아합니다.”
“다행이네요. 이걸 어떻게 혼자 다 먹을지 고민했는데.”
이윽고 그녀는 홍차 두 잔과 각설탕, 버터 쿠키가 잔뜩 올라간 접시를 들고 상담실에 들어왔다. 홍차에 대해 뭐 아는 게 없어 몇 번 입에도 대지 않았지만, 버터 쿠키 하나는 정말이지 끝내주었다. 겉은 바삭, 속은 촉촉한 간식이 맛있다는 여자 친구의 말을 무시했던 과거의 내가 바보 같았다.
“이번 사건을 해결할 김재희라고 합니다.”
“임승용입니다.”
“혹시 이 사건을 잡지에 실어도 가능할까요? 안 된다면 적어도 녹음 같은 기록이라도요.” 그녀가 책상 서랍에서 작은 녹음기를 꺼내며 말했다.
“네.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상관없었다. 오히려 내 사건이 널리 퍼트려서 내가 겪었던 일이 진짜라는 걸 증명하고,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었다.
“오늘은 2020년 7월 16일 수요일 낮 12시 50분. 의뢰인은 임승용. 지난주 일요일에 겪었던 사건을 해결하고 싶어 사무소에 찾아왔습니다.”
여자는 이번엔 내게 질문을 던졌다. 이럴 걸 며칠 전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온몸에 쉬이 긴장이 풀리지 않아 입이 바짝 말랐다.
“처음 상담을 받았을 때는 두 분께서 오시겠다고 했는데, 다른 한 분은 지금 어디 계시죠?”
“원래 상담은 여자 친구가 먼저 넣었어요. 지금 제일 괴로워하는 사람이었거든요. 시간이 지날수록 증상이 악화해서 결국 저만 오게 되었어요.”
“현재 상태가 매우 안 좋아 보이시는데, 혹시 어디가 아프신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병원에서는 불면증에 정신 불안이라면서 약을 지어주셨는데, 처음에는 효과가 조금 보였다가 나중에는 머리만 아파져서 못 먹겠더라고요. 사건 바로 다음 날에는 환상 같은 게 잠깐 보였고요. 여자 친구도 비슷해요.”
“흐음….”
재희는 지루하다는 얼굴로 노트북에 무언가를 이리저리 적었다. 누구는 며칠 동안 잠도 못 자고 끙끙 앓고 있는데, 그걸 들었음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괜히 원망스러웠다. 그곳에 먼저 들어갔던 건 나인데도 불구하고.
“혹시 그 날의 사건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때 어떤 생각이 드셨고 무엇을 닮았는지. 차근차근 말해주세요.”
정말이지 다신 생각하고 싶지 않아 온 집안의 물건을 부수었던 적도,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용기를 내 경찰한테 허겁지겁 설명했지만, 아시다시피 모두 헛수고였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지퍼라도 달려있던 것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숨이 가빠졌다. 그냥, 그냥 머리가 어지러웠다. 약이라도 가지고 왔으면 순간적으로는 효과를 보았겠지만, 지금 수중에 있는 건 집으로 갈 때 탈 버스비 정도의 돈이 들어있는 교통 카드와 약간의 체크카드 몇 장만 남아있는 가죽 지갑뿐이었다.
“괜찮아요. 이런 일이 있어서 약을 항상 구비 했거든요.”
“가, 감사합니다….”
나는 그녀가 가져다준 생수와 알약 하나를 꿀꺽 삼켰다. 아마 입 사이로 물이 흐르는지도 몰랐을 거다.
“안 좋으시다면 다음에라도 말씀해주셔도….”
“아뇨. 꼭 말해야 해요.”
마음을 굳게 먹었다. 머릿속으로 말해야 한다고 계속 생각했다.
말해야 한다. 고백해야 한다. 털어놓아야 한다. 말해야 한다. 고백해야 한다. 털어놓아야 한다. 말해야 한다. 고백해야 한다. 털어놓아야 한다. 말해야 한다. 고백해야 한다. 털어놓아야 한다. 말해야 한다. 고백해야 한다. 털어놓아야 한다….
“그러니까, 지난주 일요일에 함께 한 대학 동아리 MT 때부터였어요….”
이번에도 공포입니다^^
첫댓글 공포라매
아 초반이라구~~~
지난 번 껀 끝났었던가?
전개를 생각해뒀는데 아직 다 안 써서 그동안 이거라도 써보려곻ㅎ
@넙춘(뉴비를 사랑하는 무덱러) ㅇㅋ 재밌게 읽겠음
@쌈무 닉네임 쓰고싶 내 껄 재밌게 읽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ㅎㅎ
@넙춘(뉴비를 사랑하는 무덱러) 술술 잘 읽히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