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갤러리가 있다. 그 곳은 서울 도심 세종로 아래 5호선 지하철 역 내부에 있다. 그리고 그곳을 시민들이 오고간다. 광화문 갤러리 외벽은 유리로 되어 있다. 그래서 시민들은 오고가다 갤러리 내부를 '투명하게' 볼 수 있다. 이 '투명함'이 그 곳의 '공공성'을 가시화한다. 더욱이 광화문 갤러리 유리 외벽은 인사동에 밀집한 화랑이나 갤러리 건물이 가진 폐쇄적 이미지와는 명백히 대조된다. 그 곳에서 열리는 미술전시들의 대부분은 이 유리 표면에의 집착과 매혹에 이끌림 당한다 해도 무리는 아니다 싶다. 애초부터 이 곳은 시민들의 문화예술 접촉 기회를 확대한다는 일차적인 취지에서 '서울시 지하철 여백 메우기' 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말 그대로 5호선 광화문 역을 어슬렁거린 사람들의 체감 지도에서 그 곳의 위치는 지하철 역 '빈 여백'에 들어 서 있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의 일상적인 행보와 동선을 방해하지 않는 한계 내에서 말이다. 여기서 본 프로젝트는 바로 이 한계를 탐색하는 지점으로부터 출발한다. 즉 일상 구조의 '빈 여백'을 차지하고 있는 문화 영역이 일상의 공공 영역의 틈을 비집고 들어서서 기능할 수 있는 공공적 가치와 소통의 힘, 그 비판력이 어떻게 얼마나 가능할 수 있는가를 재확인하는 작업들이 이루어질 것이다.
박주연_12번 보관함_실물설치 & 프린트_광화문갤러리·교보문고 진입역사 보관함_2002
오늘날 세계화나 신자유주의의 등장처럼, 공익보다는 사적 자율성을 강조하는 현대 자본주의 경제 중심적 사회에서 특정 독점 자본과 권력기구들의 비공식적, 비공론적 의견이 우리 일상의 맥락과 공적 의사소통의 기층을 형성하고 그 권위적 통제력을 장악하고 있음을 목도한다. 죽어서도 거대한 무덤을 차지하고 들어선 사적 소유 욕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 「돼지같은 놈」이나, 세계 경찰을 자처하는 미국을 빅 브라더스로 모셔야 하는 한국의 정치-경제적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작업 「Made in USA」 들은 공적 영역을 잠식하는 패권적 '私'를 노출하는 메세지를 소통시킨다. 우리는 지난 80년대 독재개발 시대에 대한 우울한 공공의 기억 또한 가지고 있다. 공중목욕탕이나 이발소를 상징하는 적 /청의 간판이미지나, 부강한 국가 건설이라는 정책 사업의 일환으로 시행된 국민체조 동작를 재현하는 「미워도 다시 한번」도 또한 역사적 기억의 한 조각, 그러나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과거로서 혹은 현재에도 계승되는 공공의 기억들을 재환기시킨다.
송상희_site & gallery interactive installation series-어라 공사장에 별이 있네_실물설치 및 사진_2002
기실 공공 영역이란 다양한 사적 개인들의 이해관계, 의견, 행위들이 조율, 소통되는 네트워크이다. 공공 영역의 이러한 소통회로는 가족, 친구 혹은 친족 등 멀고 가까운 상호 네트워크로 짜여진 사적 생활 영역과 결합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공공 영역은 일상사적 반향을 일으키는 사회적 문제 상황에 대한 사적 해석에서 동력을 얻기도 한다. 근대 가부장제 사회에서 사적 개인, 특히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구속-매너 익히기 「착한 딸이 되기 몸짓」의 경우나 「성공을 위한 몸 교정기-명암주기」는 개인의 신체에 각인되는 권위적인 공공적 가치를 노출시키기도 한다.
이인철_Made in USA-성조기_컴퓨터 그래픽 출력_2002
기형적 공공 영역이 패권을 가진다면, 그 문제들은 사회적 고통과 압박의 반사물로 개인들의 생활 체험에 반영된다. 예술의 언어에서 적절한 표현을 얻는 경우 이러한 작업은 문화와 정치, 별개의 영역으로 구분될 수 없다. 따라서 패권적 공론의 일방적, 위계적 소통 구조에 대항하여 각 개인의 다양한 채널의 발언을 통해 권력기구의 정책 결정을 추적, 폭로, 비판 등에 입각하여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공공 영역은 개인, 사회적 권력자들의 반공공적 권력 남용을 제재하는 저항적 논의의 장으로 변혁될 수 있다. 이 점에서 본 프로젝트는 미술이 기존의 공공적 구조의 '구멍'을 가시화할 수 있는 대항기획이길 바란다.
한진수_공중(The Public, The Air)_플라스틱 입체 픽토그램 가변크기 설치_2002_part
항상 되풀이되는 선언적인 수준에서나 방법적인 접근에서 그 한계를 드러낸다 하더라도, 미술의 공적 개입은 여전히 그리고 반드시 요청된다. 기실 80년대 민중미술의 거세 이후 미술이 사회에 대해 갖는 공적 개입은 비판적 개념을 선언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실천적인 생산력이 아닌 순수하고 개념적인 생산력의 사이클을 벗어나지 못한다. 예술이 갖는 특수성을 통해 사회를 총체적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은 고래와 싸우는 새우의 힘겨운 몸짓만큼 힘이 든다. ● 그러나 무엇보다도 권위적 공론 영역에서 배제되거나 포섭되지 않는 소수자들의 의견들과 갈등, 내적 긴장의 노출은 공공영역을 형성하는 것보다 더 공공 영역의 자기 변혁에 더욱 더 내재적 잠재력을 가지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미술은 끊임없이 공공적 구조속의 '구멍' 즉 非공공적 혹은 反공공적 의견, 적대, 모순들을 가시화하는 작업들을 놓지 말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힐링 소사이어티' 프로젝트는 완성될 수 없는 미완의 프로젝트이다. ■ 강선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