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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코헬렛의 말씀 3,1-11>
1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2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3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부술 때가 있고 지을 때가 있다.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
5 돌을 던질 때가 있고 돌을 모을 때가 있으며 껴안을 때가 있고 떨어질 때가 있다.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간직할 때가 있고 던져 버릴 때가 있다.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의 때가 있고 평화의 때가 있다.
9 그러니 일하는 사람에게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
10 나는 인간의 아들들이 고생하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일을 보았다.
11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9,18-22>
18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9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22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어제 복음에서는 군중들과 헤로데가 예수님을 누구라고 여기는지를 보았습니다(루카 9,7-9).
오늘 복음은 군중들과 제자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여기는지를 보여줍니다.
사실 군중들은 예수님을 단지 ‘예언자’ 차원에서 이해했을 뿐 메시아로 인식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바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당신을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라고 고백했을 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습니다(루카 9,21).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선언은 이미 천사들과(2,11) 예언자 시메온과(2,26) 마귀들에게서(4,41) 선언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을 뿐입니다.
제자들 또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라고 고백하지만, 잘못 알아듣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이 바라고 있는 그리스도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곧 예수님을 민족적이고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그리스도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직접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를 깨우쳐 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루카 9,22)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몹시 당혹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바라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다음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9,23-29).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먼저 알아들어야 할 것은 “반드시 ~ 해야 한다.”(Dei)라는 표현입니다.
바로 이 표현에 ‘아버지 절대 복종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맞게 될 일을 네 개의 동사, 곧 “고난을 겪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되살아난다.” 로 표현하십니다.
‘고난을 겪는 일’이란 한 두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로 많은 고난을 여러 차례 겪는 일입니다.
그것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 겪는 일입니다.
그리고 기꺼이 자발적으로 겪는 일입니다.
그 고난은 여타의 다른 것이 아니라 ‘배척을 받는’ 고난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죽임을 당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 일은 능동태가 아닌 수동태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벌어지고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여 겪는 일입니다.
곧 자신의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분을 죽기까지 믿고 복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다시 살아나는’ 일입니다.
믿음과 복종으로 다시 살아나는 일입니다.
이는 “믿음은 행위 속에서만 믿음일 수 있다.”(본 회퍼)는 말을 떠올려 줍니다.
마치 한 알의 밀알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듯이, 믿음의 복종은 결코 시들지 않는 생명으로 되살아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반드시' 살아야 할 믿음과 복종의 삶입니다.
그래서 본회퍼는 말합니다.
“믿는 사람은 복종하고, 복종하는 사람만이 믿는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루카 9,22)
주님!
오늘도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을 갑니다.
당신께서 ‘반드시’ 걸어야 했던 길이기에 당신을 따르는 이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한두 번 겪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많은 고난을 죽을 때까지 겪는 일입니다.
어쩔 수 없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흔연히 끌어안고 겪는 일입니다.
그러니 배척받으면서도 배척하지 않으렵니다.
죽어 사라지기까지 사랑하렵니다.
당신과 함께 그러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께 대한 나의 생각>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옛 예언자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내 생각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여러 활동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관해 가르치셨는데 그 가르침을 받은 것에, 상응하는 답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고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 하고 고백했습니다.
‘하느님의 기름부음 받으신 이’라는 이 말은 이사야의 예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이사야 61,1)
베드로의 고백은 완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 고백은 힘을 잃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임금으로 정하신 분'입니다.
낚싯바늘만 있고 미끼가 없는 낚싯대, 아무리 낚싯바늘이 좋아도 고기가 물지 않습니다.
말만 있고 행동이 없으면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면 그에 걸맞은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 앞에서 떳떳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합니다.
내 행동 하나하나가 예수님에 대한 내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녀 마더데레사 수녀님은 “나는 주님의 손에 들린 몽당연필입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수녀님은 연필을 잡은 주님 안에서 기뻐했습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무엇입니까?
나에게 있어서 주님은 도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자신을 ‘예수님의 데레사’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신앙을 고백하지 말고 내 신앙을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누구이십니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이사야 53,4)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받은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사야 53,3)
"그는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이사 53,8)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
(이사 53,11-12)
이사야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 속죄의 제물이 되시고 부활의 기쁨으로 다시 오신 주님, 그분을 우리의 주님으로, 저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기쁨이 더욱 커지시기를 기도합니다.
일상 안에서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내 할 일 다 하고 짬이 나서야 그분을 생각하는 처지가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도구로 삼아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먼저 감사하고, 다른 무엇에 앞서 주님의 거처를 마련했으면 좋겠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묵시 21,3)
주님께서는 나의 삶의 자리에서 나를 찾고 계십니다.
내가 그분을 찾기 훨씬 전부터.....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들은 왜 나를 만만하게 보는가?>
여기 피로와 무기력감, 자살에 대한 유혹을 느끼는 막 40대에 접어든 미혼 여성의 삶을 보고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이 여성은 공무원이라는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연봉은 많지 않았지만, 그녀가 만족스럽게 살아가기에는 충분했습니다.
1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난 그녀는 소위 한국의 전형적인 장녀였습니다.
아버지를 일찍이 사고로 잃은 그녀는 고등학생 때부터 집안의 기둥 역할을 맡아왔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도 사춘기도, 질풍노도의 시기도 그녀에게는 사치에 가까웠습니다.
“네가 빨리 자리를 잡아 어린 남동생을 경제적으로 도와줘야 한다.”라는 어머니의 말에 따라 청춘도 연애도 뒤로하고 오직 안정된 직장을 잡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남동생이 재수, 삼수를 하는 동안 학원비는 언제나 그녀의 몫이었습니다.
대학에 합격하자 남동생은 그녀가 평생 엄두도 내보지 못한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오기를 원했고 그다음은 사업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사업비용은 어머니의 대출로 이루어졌고 어머니의 대출금은 당연하게도 그녀가 갚아나갔습니다.
동생의 결혼을 여러 날 앞둔 어느 날 어머니의 다음 말은 그녀를 폭발하게 하였습니다.
“너희 아버지가 남겨준 아파트 있지?
그거 네 동생 신혼집으로 주기로 했다.
그래도 명색이 남잔데 집 한 칸은 해줘야 사돈 보기에도 체면이 서지.”
기가 막힌 그녀가 “그러면 엄마는 어디로 이사할 건데?”라고 묻자 어머니는 당연한 듯 말했습니다.
“너희 집으로 가면 되지.
이제 같이 나이 먹어 가는 모녀끼리 친구처럼 한 번 살아보자!”
그녀도 이번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생애 처음 반대의견을 말한 뒤 에 돌아오는 것은 어머니의 순식간에 일그러진 얼굴과 폭언,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빨대 꽂아 다 빨아먹은 동생의 적반하장 반응이었습니다.
“불효녀”, “욕심 많은 년”,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누나 왜 그렇게 엄마 힘들게 해!”와 같은 비난이었습니다.
몇 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남겨준 아파트는 동생이 신혼집으로 쓰고 있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의 집에 함께 살고 있습니다.
만나던 남자친구는 어머니의 반대로 헤어졌습니다.
[출처: 『이제 독성관계는 정리합시다』, 권순재, 생각의 길]
위 여성의 문제는 이전 세상을 찢을 용기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자궁이 좋아서 자궁을 찢을 용기가 없다면 아기는 자궁보다 더 넓은 세상을 맛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여성의 정체성은 ‘어머니의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로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흔들리고 휘둘리고 이용당하고 가스라이팅 당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내가 나의 것이 된다는 것에 희망을 걸지 마십시오.
나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인간은 분명 누구에겐가는 의존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속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은근히 우리를 자기 영역 안으로 끌어들여 자신들 맘대로 하려고 합니다.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에 쉽게 넘어가는 이유는 내가 나를 너무 믿기 때문입니다.
나로 사는 것이 강한 삶이라 착각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군가에게 속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로 산다는 말은 세상 것들이나 사람들에게 다 휘둘리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어떤 피조물이건 버려진 깡통과 같습니다.
나 스스로는 다른 것들로부터 나를 보호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피조물의 본성적 의존성 때문입니다.
피조물은 스스로의 힘으로 에너지를 생성하지 못합니다.
모두가 생존하려면 에너지를 소진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에게 속하지 않으면 내가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 소멸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더욱더 누군가에게 속하려고 합니다.
누구에게도 속하지 못한 불안함은 나를 의존적으로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남에게 휘둘릴 준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휘둘리지 않는 유일한 법은 내가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는 대상의 것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도 흔들 수 없는 대상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흔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루카 9,20)라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루카 9,220)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입니다.
‘의’가 붙으면 소유격이 됩니다.
하느님의 소유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은총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성령으로 아드님을 소유하십니다.
성령은 은총이기도 하지만 소명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인지 알리지 말라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루카 9,22)
아버지로부터 소명을 받지 않으면 아버지의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뜻에 의해 움직일 때 그 사람의 것이 됩니다.
만약 그 사람이 하느님이라면 그 사람은 세상 누구의 뜻에도 휘둘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휘둘리며 살 것인가, 아닌가는 내가 누구의 것이 되느냐에 달렸습니다.
고집부리는 것과 줏대 있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고집부리는 사람은 분명 누군가에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의 주인입니다.
그러면 흔들립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발로 차 봅니다.
하지만 줏대 있는 사람은 누군가의 뜻을 따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누군가의 권위에 따라 사람들은 그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에게 만만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고집부리는 사람이 가장 만만합니다.
그 사람의 주인이 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의존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어차피 휘둘리게 태어납니다.
‘나’라는 존재는 실제로 어떤 권위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휘둘린다고, 나를 무시하는 거냐고 화내지 마십시오.
그건 내가 누구의 권위 있는 대상의 것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용당하지 않고 가스라이팅 당하지 않으려면 누구도 그럴 수 없는 대상의 것이 되십시오.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창조자의 것이 되십시오.
그분의 뜻을 따르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창조자로서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우리가 당신 것이라 천명하십니다.
“그러나 이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분, 이스라엘아, 너를 빚어 만드신 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이사 43,1)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 삶을, 자연을 ‘렉시오 디비나(성독聖讀)’하기>
만34년 이곳 요셉 수도원에 정주하다보니 우리 수도형제들은 물론 많은 분들의 변화된 모습을 봅니다.
한때는 처녀처럼 젊었던 30대 분들이 이제는 할머니로 변화된 모습에서 세월의 흐름을 실감합니다.
오랫동안 한곳에 정주하다보니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를 매해 체험하며 사랑하는 많은 이들의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모습도 한눈에 들어옵니다.
예전 오랜만에 만난 두 분의 말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수사님은 늙지 않을 줄 알았어요.”
“수사님은 수도원에 살아도 늙네요.”
옛 사진을 보면 세월의 흐름을 절감합니다.
아무도 시간 안에서, 세월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늙어감을, 또 죽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오늘 코헬렛의 주제는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입니다.
설명이 필요없는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내용 중 일부를 인용합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울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할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의 때가 있고
평화의 때가 있다.”
코헬렛 저자는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하며, "나는 인간의 아들들이 고생하도록 하느님이 마련하신 일을 보았다." 고백합니다.
이어 하느님은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으며 우리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주셨다 고백하며 결론 같은 말도 붙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시간에는 ‘크로노스(chronos)’ 연대기적 시간만 있는 게 아니라, ‘카이로스(kairos)’ 하느님과의 만남이란 결정적 시간도 있습니다.
육안肉眼만 있는 게 아니라, 참으로 주님과 깊은 관계중에 살아가는 기도의 사람에게는 지혜의 눈, 관상의 눈이란 영안靈眼도 있습니다.
세상의 크로노스 시간을 통해 카이로스 하느님의 때를 봅니다.
참으로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때를 분별하는 깊은 영성생활이, 관상생활이 지혜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영적 삶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게 성서의 관상적 독서인 렉시오 디비나 성독입니다.
신구약 성서가 렉시오 디비나의 1차적 대상이지만, 렉시오 디비나는 확장되어 우리 각자의 삶이나 공동체 삶은 물론 자연에 까지 이릅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우리의 삶도, 자연도 성서가 됩니다.
이렇게 삶을 렉시오 디비나 할 때 풍요로운 영적 삶이요, 지난 과거나 다가올 미래에 살지 않고, 오늘 지금 여기서 나답게, 아름답게, 행복하게, 자유롭게 삽니다.
이런 영적 깨달음의 은총이 참으로 우리를 흐르는 세월중에도 내적초월을 이루어 자유롭게 살게 합니다.
삶의 렉시오 디비나에서 탄생한 깨달음의 시, 둘을 나눕니다.
“눈은 있어도
‘지혜의 눈’없는 사람이 너무 많다.
거의가 제정신이 아닌,
맹목의, 광신의 사람들이 참 많다
그래서 죄도 병도 악도 범람하는 세상이다.
그러니 끊임없는, 한결같은 기도가, 하느님 공부가, 말씀공부가, 회개가
참으로 절실하고 절박하다
주님을 사랑하고 찾아 만나라.
주님은 언제나 지혜의 눈이시다.”
- 2022.4.20
날로 한결같은 영적수행으로 주님을 닮아갈 때 주님의 시야를 지닙니다.
세월 흘러 나이 들어도 주님의 시야를 지니지 못한 지혜가 결핍된 철없는, 철부지 노인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가을인생은 가을인생답게, 겨울인생은 겨울인생답게 살아갈 때 진정한 아름다움입니다.
세월흘러 나이들어간다 하여 저절로 지혜로운 삶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역시 ‘주님의 시야로 바라보자’는 시를 나눕니다.
“넓고 멀리, 높고 깊이 바라보자
주님의 눈, 주님의 시야로
그리고
오늘 지금 여기를 바라보며 살자
삶도 자연도 똑같다
예수님 부활상 배경의 단풍나무 사라지니
주변이 탁트여 참 환하다
불암산이, 또 숱한 크고 작은 이런저런 나무들이
배경이 되어주는 구나
그러니
넓고 멀리, 높고 깊이 바라보자.
주님의 눈, 주님의 시야로!”
- 2022.4.29.
이런 주님의 시야를 지닐 때 풍요로운 정주의 삶입니다.
단조롭고 메마른 반복의 평범한 크로노스의 일상도 주님을 만날 때 충만한 카이로스의 시간, 주님의 시간이 됩니다.
요즘 수도원 쓸모없는 주변 땅에는 꽃말도 예쁜 '영원히 사랑스러워'라는 빨간 유홍초가 한창입니다.
며칠 전 써놓은 ‘하늘나라’란 자작시입니다.
“자리탓하지 말자
어디든
뿌리내려
활짝 곱게 꽃피어 내면
거기가 꽃자리, 하늘나라다.”
- 2022.9,18
깨달은 사람의 눈에는 모두가 충만한 하느님의 시간,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이런 면에서 수도원의 시간은 거룩한 시간, 카이로스의 시간들입니다.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바치는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 은총이 시간을 성화聖化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시야를, 관상적 눈을, 지혜의 눈을 갖게 하는 공동전례기도의 은총입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 말씀의 묘사가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셨다’(루카 9,18)에서 보다시피, 기도에서 발단이 되어 자신의 신원을 확인하신 후 자신의 수난과 부활의 때를 처음으로 예고하십니다.
주님은 분명히 기도의 때에 이뤄진 깨달음을 나누십니다.
예수님께는 모든 시간이 하느님의 때, 카이로스의 의미 충만한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성서나 교회의 모든 성인성녀들 역시 충만한 카이로스 하느님의 시간을 살았습니다.
오늘 기념하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 오상의 비오 수도사제 역시 똑같습니다.
비오 신부는 1918년부터 세상을 떠난 1968년까지 무려 50년 동안을 예수님의 오상을 몸에 지닌채 고통을 받았습니다.
성인은 초자연적 현상과 고통속에서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였으며 겸손과 순명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모든 비판과 오해를 풀어나갔습니다.
그가 선종하신 지 3년 후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성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비오 신부님이 얻은 명성을 보십시오.
그분의 주위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가 철학자이기 때문에? 현명하기 때문에?
아닙니다. 그가 겸손하게 미사를 지내서 그렇습니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고해소에 머물며 고해를 들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쉽게 언급할 수는 없지만, 주님의 오상을 몸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기도와 고통의 사람이었습니다.”
비오 신부님의 거룩함과 영성은 사후 더욱 알려져 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99년 5월 2일 시복되었고, 같은 성인 교황에 의해 2002년 6월16일 성 베드로 성당 앞 광장에서 30만명 신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때를 아는 것이 지혜이고 그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것이 겸손이며 그때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겠습니다.
참으로 내게 주어진 하루하루 시간의 선물을 하느님의 때로 깨달아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 중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예전에 <사랑은 뭐길래>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극중에서 엄격한 남편에게 순응하면서 지내는 아내가 혼자서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가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바람이 부는 날엔 바람으로 비 오면 비에 젖어 사는 거지.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우리네 헛짚는 인생살이
한세상 걱정조차 없이 살면 무슨 재미 그런 게 덤이잖소.”
제목은 산스크리트어 ’타타타‘ 입니다.
우리말로는 ‘그래 그런 거야’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한문으로는 진여(眞如)라고 합니다.
엄격한 남편은 아내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자녀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자상한 아내는 남편을 잘 알았습니다.
자녀들의 꿈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아들이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딸이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응원해 주었습니다.
드라마 제목처럼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모든 것이 ‘때’가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이라고 합니다.
열흘 넘게 피는 꽃이 없고, 권력이 10년 이상 가기 힘들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박수 칠 때 떠나라.’는 말도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겸손’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한 자매님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와 대화를 하면서 자신의 세례명을 바꾸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사연은 자신이 주보성인으로 모시는 성인이 너무나 힘들고 어렵게 살았고,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자신도 삶이 힘들고, 어려운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더 즐겁고, 재미있게 살았던 성인으로, 예술 분야에서 성공한 성인으로 세례명을 바꾸고 싶다는 거였습니다.
저는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함께 기도하고 생각해 보자고 했습니다.
그 뒤로 그 자매님이 저를 다시 찾아왔습니다.
저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님이 제게 말하는 겁니다.
"저요, 세례명 바꾸지 않을래요."
그러면서 그동안 생각을 많이 했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좋은 일도 많았었고, 주보성인의 삶을 따르기보다는 세상의 명예와 자리를 너무 따라갔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앞으로 주보성인처럼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면서 살겠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주변을 보니 다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고 있었다고 말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십자가가 자신의 것보다 더 가볍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매님처럼 때로 우리의 십자가를 던져버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굴레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럴 때 구상 시인의 ‘꽃자리’라는 시를 떠올립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 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우리들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지금 너의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지금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구원의 강을 건너게 해주는 고마운 다리가 될 것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한 소년이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어느 날 쪽지 시험을 봤는데 망쳤습니다.
소년은 “다음 시험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맞겠다.”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시험에도 망쳤습니다.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중간고사를 봤는데 망쳤습니다.
“다음에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맞겠다.”라고 결심했지만, 기말고사도 망치고 말았습니다.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시험을 보고 나서, “다음 시험에는 열심히 공부하자.”라고 결심했지만, 다음 시험도 망쳤습니다.
공부를 안 했기 때문입니다.
재수할 때도, 취업 시험을 보고 나서도 “다음 시험에는 열심히 공부하겠다”라고 결심했지만 늘 망쳤습니다.
공부를 안 했기 때문입니다.
운 좋게 조그마한 회사에 취업했습니다.
이 회사에서 하는 일은 너무 하찮은 일이었습니다.
‘내가 이런 걸 할 사람이 아닌데….’라고 생각하다 보니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습니다.
세상은 그에게 더 이상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런 세상을 한탄했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이번 생은 틀렸어. 다음 생에는 열심히 살아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뒤로 미루기만 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면서 당신의 신원에 관한 질문을 하십니다.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한 분이라는 대답을 합니다.
사실 제자들이 말하는 인물 모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자랑스럽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그 정답을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정답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미리 알려주시지요.
정답을 알기에 미래의 시간을 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과거에 매여있는 분이 아닙니다.
과거의 영광만을 떠올리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하는 하느님이심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희망으로 이끌어주시는 분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과거에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지금 이 자리에서 함께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걱정 없이 큰 기쁨을 가지고 희망의 미래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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