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클라라 성녀는 1194년 이탈리아 아시시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복음적 생활에 감명을 받은 그는 수도 생활에 대한 열망으로 클라라 수도회를 세웠다. 수도 생활에 대한 집안의 반대가 심하였으나, 오히려 동생 아녜스마저 언니 클라라의 뒤를 따라 수도자가 되었다. 클라라 성녀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본받아 철저하게 가난하고 겸손한 삶을 살았다. 성인은 1253년에 선종하였으며, 알렉산데르 4세 교황이 1255년에 시성하였다.
본기도
하느님,
복된 클라라를 자비로이 이끄시어 가난을 사랑하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가난의 정신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마침내 하늘 나라에서 하느님을 직접 뵈옵게 하소서.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너희 조상들을 사랑하셨으므로 그 후손들을 선택하셨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4,32-40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32 “이제, 하느님께서 땅 위에 사람을 창조하신 날부터
너희가 태어나기 전의 날들에게 물어보아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물어보아라.
과연 이처럼 큰일이 일어난 적이 있느냐?
이와 같은 일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33 불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도
너희처럼 살아남은 백성이 있느냐?
34 아니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너희가 보는 가운데 너희를 위하여 하신 것처럼,
온갖 시험과 표징과 기적, 전쟁과 강한 손과 뻗은 팔과 큰 공포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 가운데에서 데려오려고 애쓴 신이 있느냐?
35 그것을 너희에게 보여 주신 것은 주님께서 하느님이시고,
그분 말고는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36 그분께서는 너희를 깨우치시려고
하늘로부터 당신의 소리를 너희에게 들려주셨다.
또 땅 위에서는 당신의 큰 불을 너희에게 보여 주시고,
너희가 불 가운데에서 울려 나오는 그분의 말씀을 듣게 해 주셨다.
37 그분께서는 너희 조상들을 사랑하셨으므로 그 후손들을 선택하셨다.
그분께서는 몸소 당신의 큰 힘으로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
38 그리하여 너희보다 크고 강한 민족들을 너희 앞에서 내쫓으시고,
너희를 이 땅으로 데려오셔서,
오늘 이처럼 이 땅을 너희에게 상속 재산으로 주신 것이다.
39 그러므로 너희는 오늘,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
40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규정과 계명들을 지켜라.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잘되고,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영원토록 주시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복음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24-28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명상과 기도의 차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영성 생활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지금까지의 나의 주인이었던 자아를 죽여야만 합니다.
가리옷 유다는 자기를 비우지 못하고 돈을 섬겨서 예수님을 모실 수 없었습니다. 누구든 누구를 받아들이기 위해 상대를 품을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보다 큰 하느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이 세상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영향을 받는 그 대상이 내가 섬기는 우상입니다.
그런데 내가 세상 것들에 영향을 받지 않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아주 커지거나 아주 작아지면 됩니다. 온 우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동시에 어떤 것도 쪼갤 수 없는 수준으로 작아지면 그것도 아무것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영화 중에서 우주에서 괴생명체가 지구에 추락하여 결국 그것들이 지구를 멸망시키게 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지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 우주를 멸망시킬 수는 없습니다. 지구로 보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들이지만, 온 우주로 보면 작디작은 먼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내가 커져서 세상 것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는 노력을 ‘명상’이라고 합니다. 명상은 나에게 일어나는 일을 나보다 더 큰 자아를 만들어서 그것을 제삼자가 보듯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입니다. 명상할 때 호흡이나 감각에 먼저 집중하라고 하는데 이는 나를 제삼자로 바라보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나의 감정에 빠지지 말고 나에게서 벗어나 더 큰 나를 나로 의식하며 나를 바라보는 방식입니다.
전직 방송인 김상운 씨의 『마음을 비우면 얻어지는 것들』에는 이러한 사례가 나옵니다. 한 여인이 심한 두통으로 직장까지 그만두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의사들의 처방은 진통제와 수면제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복용량은 갈수록 증가했고 그렇게 삶을 더 피폐해져 갔습니다. 그분이 이것을 치유한 것은 약물이 아니었습니다. 친구의 소개로 찾아가 만난 한 의사는 약물 대신 명상을 시켰습니다.
“눈을 감으시고 머리 안에 곧 터져버릴 것만 같은 고통 덩어리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머리는 그것으로 가득 차서 그것 때문에 머리가 아픈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나의 머리가 1m로 커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다음은 10m, 다음은 이 도시만큼, 우리나라, 더 나아가 지구와 온 우주 크기만큼 커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명상을 매일 조금씩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한 달 뒤 두통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참으로 멋진 아이디어입니다. 결국 불교의 명상도 이와 같습니다. 세상 것에 영향을 받는 나 자신을 아주 작게 만들거나 없게 만들기 위해 진짜 나를 우주의 크기만큼 확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명상에는 약점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눈을 뜨면 다시 자아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 효과는 분명히 있지만, 그리 지속적일 수 없습니다. 다시 나로 살면 욕심이 생겨나고 욕망이 올라옵니다. 이는 ‘나’로부터 나오는데 나를 아무리 의식적으로 온 우주만큼 확장하려 해도 결국 이 세상에서 살려면 나라는 정체성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이 발목을 잡는 것입니다.
기도도 산에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는 나 스스로 커지려는 노력이 아니라 오히려 작아지려는 노력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사랑 앞에서 작아지는 것과 같습니다. 대신 부모의 눈으로 나와 세상을 보게 됩니다. 그렇기에 나에게 닥치는 것들을 제삼자, 곧 부모의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기도가 이와 같습니다. 은총과 진리로 작아져 하느님의 눈으로 나와 세상을 바라봅니다. 하느님은 온 우주보다 큰 분이십니다.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에 ‘16년 전 방송출연하였던 아기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란 사연이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 혼자 아들을 키웠는데 그 아들마저도 눈이 잘 보이지 않지만 아버지에게 감사하며 사는 내용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새로운 눈을 주었습니다. 아들은 자신의 처지에 감사해합니다. 이를 위해 아들은 먼저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보아야 하며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 은총과 진리가 아들에게 새로운 눈을 줍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을 키우며 고생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오래된 동영상을 보며 눈물을 흘립니다. 아버지가 없으면 자신은 아무 존재도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들은 이제 아버지의 눈으로 자신과 세상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는 소중한 존재인지, 그리고 불우한 환경과 신체를 지니고 태어났지만, 그것 또한 얼마나 감사한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 대건이는 눈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 대신 세상을 아버지 눈으로 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이는 마치 탈출기에서 파라오이 속해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 성막 안에 하느님을 품고 하느님의 눈으로 자신들의 처지와 세상을 바라보게 된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마치 밀떡으로 부서져서 그 안에 하느님을 담은 성체와 같습니다. 비록 가장 작은 모습이지만, 온 우주보다 큰 분을 담고 계십니다. 그렇게 나는 영향을 받지 않고 내 안의 참 주인이신 분의 감정에만 집중하며 살게 됩니다. 이것이 고통에서 탈출하여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만드는 기도의 목적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날씨만 좋으면, 매일 새벽 일어나 먼저 기도한 뒤에 곧바로 운동하러 나갑니다. 운동하러 나가면서 “아싸~ 운동하러 간다.”라면서 신나게 밖으로 나갈 것 같지만, 새벽 운동을 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날씨도 별로 안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이 새벽에 다른 것을 하고 싶기도 하고, ‘낮에 자전거 타면 안 될까?’ 등의 유혹이 계속 몰려옵니다. 하지만 싫은 일을 먼저 해야 다른 일도 할 수 있음을 잘 알기에 억지로라도 자전거를 끌고 밖으로 나갑니다.
처음 30분까지는 힘만 들고 재미없습니다. 그러나 30분 이상을 타다 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피로감이 사라지고 새로운 힘이 생긴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아마 운동하시는 분들은 이 과정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를 ‘러너스 하이’라고 합니다. 보통 심박수가 1분에 120회 이상 되면서 느끼게 되는 쾌감입니다. ‘러너스 하이’라는 쾌감에 도달하면 새로운 힘이 생기면서 더 큰 즐거움과 기쁨을 갖게 됩니다. 이 쾌감을 얻게 되는 이유는 힘들게 달려온 과정 때문입니다.
우리 삶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힘들게 달려온 과정을 통해서 ‘러너스 하이’와 같은 또 다른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힘든 과정은 경험하기 싫고 대신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새로운 힘만 얻기를 원합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과정 없이 결과를 얻을 수 없듯이 힘든 과정을 거쳐야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고통과 시련을 주신 주님을 원망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대신 그 이후에 있을 ‘러너스 하이’를 기대하며,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계속해서 찾아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지만, 무엇인가라도 한다면 여기에 맞는 결과를 분명히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십자가가 예수님의 부활 이후 영광의 십자가로 바뀌었지만, 그 영광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수난과 죽음이라는 커다란 고통이 있어야 했습니다. 십자가가 곧바로 영광만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은 이에 따른 고통과 시련을 부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실제로 예수님께서 그 모범을 당신의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함을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의 크기가 너무 커서 죽을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피하고만 싶습니다. 남들도 피하고 싶어 하는 그 길을 내가 특별한 사람도 아닌 데 가야 하냐고 따지고만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누리는 행복이 훨씬 크기에 또 우리의 궁극적인 바람은 하느님 나라에 있기에 십자가를 지고서 주님의 길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선물을 얻게 됩니다.
그토록 많았던 슬픈 저녁은 잊히지만, 어느 행복했던 아침은 잊히지 않는다(장 가뱅).
성녀 클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