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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제임스 케네디의 ‘내가 믿는 이유’를 읽고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무엇을 믿는지 물어보면 다양한 대답들이 나옵니다. 내가 믿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여러 가지 표현으로 말하는데 하나님의 무엇을 믿는다는 것인지 꼭 집어서 얘기해 보라면 망설이는 분들도 있지요. 믿음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주관자가 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이 아닐까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대게 사도신경으로 믿음을 고백합니다. 거기에는 삼위이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외아들이신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과 십자가 고난의 의미와 사역을 믿고 우리를 악에서 구하여서 죄 용서의 확신과 영생의 길로 인도하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신경의 깊은 믿음의 고백을 구절마다 풀어서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요체는 이 고백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이 고백을 드릴 수 있을까요? 다시 한번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찰해 봅니다. 한자로 믿음은 신(信)이지요. 이 글자를 잘 살펴보면 사람의 말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진실한 본보기가 되고 사람의 대표가 되시는 분이 예수님이시기에 우리는 그 ‘사람’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믿지 않으시거나 이제 신앙생활을 시작하신 분들은 무슨 말인가 이해가 안 되시겠지만 하나님이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시었는데 이 말씀은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 의해 예수님이 실제로 이 우주만물을 만드셨다는 것이죠.
그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완전한 삶의 모습을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보통 인간은 말과 행동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자는 없습니다. 선각자나 현인들도 진리에 근거한 완벽한 삶을 살지는 못하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완벽한 삶을 살아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은 더욱 빛이 나고 우리가 반드시 따라야 하고 따를 수 있는 말씀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말씀을 믿습니다. 단 한 번의 오류도 수정도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은 태초에서 지금까지 선포된 이후에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고 폐지된 것 하나 없습니다. 인간은 말하고도 수시로 자신의 영달을 위해 바꾸고 폐하기를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게 하지요. 그러므로 언제나 변함이 없으신 진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무한이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상황이나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서 변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형편에 따라 관점이 계속 변한다면 더 이상 진리가 아니겠지요. 그러므로 진리는 우리 삶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담는 가치로 남을 수 있고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이끌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디 제임스 케네디 목사님께서 쓰신 ‘내가 믿는 이유(Why we believe)’라는 책을 읽으며 다시금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묵상해 보았습니다. 13 장으로 구성된 책의 내용은 절대적 진리를 믿는 이유를 통해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성경
먼저 그 이유를 성경에서 찾고 있습니다. 저는 나이 쉰이 다 될 무렵 성경을 읽게 되면서 땅을 치고 후회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왜 이제야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읽고 인류 최고의 베스트셀러라는 책을 읽게 되었는가. 읽으면 읽을수록 그 속에서 묻어나는 진리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면서 저를 깨우고 감동하게 하고 눈물 나게 하는 이 책을 왜 이제야 읽는가 하는 아쉬움이 몰려왔습니다. 수많은 책을 읽으면서 진리를 찾아, 인생의 가치를 찾아 47년을 살았는데 성경을 접하고 보니 그 안에 모든 진리의 말씀이 살아서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케네디 목사님은 성경의 권위에 대해 2,000여 가지 구약의 예언 중 몇 가지 실례를 가지고 말씀을 전하십니다. 이 세상의 많은 선지자들이라 칭하는 자들의 예언은 한 치 앞을 분간하지 못하고 쏟아낸 말들이 폐하여지는 것이 당연지사이지만 성경의 예언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이루어진 사실을 마주하게 될 때 우리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바벨론(Babillon)을 위시하여 에굽(Egypt), 두로(Tyre), 시돈(Sidon), 사마리아(Samaria), 예루살렘(Jerusalem), 에돔(Edom) 등 수 많은 도시나 국가들에 대한 정확하고 구체적인 예언의 성취는 성경이 인간이 허구로 만들어낸 책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상기한 어떤 것 내지는 성경의 어떤 예언도 고고학자들의 연구를 통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다시금 성경은 저작이 아니라 기록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학자 토리(R. A. Torrey)박사의 말처럼 ‘수많은 성읍들, 장소들, 왕들과 개인들의 이름 등 과다하게 보이는 성경의 세목들은 종이에 비치는 무늬와 같아서 그 저작 시기와 장소를 알려 주는 지울 수 없는 증거’가 됩니다. 관심의 부재 또는 가슴의 저항으로 인해 성경을 밀어내지 말고 단 한 가지의 예언이라도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게 된다면 불신의 어둠에서 믿음의 빛으로 나아올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성경이 어떻게 예언하였고 과거 역사를 통해 현재의 모습이 어떠한지 구글링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2. 고고학적 증거
수 많은 역사적 사실이 정확하게 성경의 예언과 일치하고 신화처럼 들리던 ‘노아의 방주’와 같은 성경의 사건들이 고고학의 발전에 따라 하나하나 실존한 역사로 드러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성경을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수 세기에 걸쳐 여러 고고학자들이 그들의 고고학적인 발굴과정을 통해서 크리스천으로 전향하였듯이 무신론자로서 성경의 오류를 증명하겠다던 옥스퍼드 대학의 박사 학위를 지닌 윌리엄 람지 경도 고고학적 발굴과정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답니다. 이스라엘의 저명한 고고학자 넬슨 글루엑은 “고고학의 발견이 성경에 언급된 내용을 부정한 경우는 한 건도 없음을 단언할 수 있다” 고 하였습니다.
바벨론 토판은 한 가지 흥미있는 사실을 확중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노아는 아담의 10대 자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바벨론 토판은 홍수 이전에 살았던 바벨론의 열(10) 왕들의 이름을 밝혀 놓고 있습니다. 또 다른 토판은 바벨론의 모든 왕들의 이름을 망라하고 있는데, 처음 10명의 왕들이름을 열거하고 나서 "대 홍수가 임하여…”라는 말을 잇고 있습니다. 이런 토판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고고학자들의 삽은 성경을 확증해 주는 수많은 사실들을 발견하게 해 주었습니다. 성경에 관계된 장소들만 해도 2만 5천이 넘는 곳에서 발굴을 하였습니다. 수만 명의 인물과 사건에 관한 기록들도 발견되었습니다. 가장 최근에 점증하는 고고학적 증거들은 전에 했던 그러한 증거들과 마찬가지로 비평가들이 재구성해 놓은 성경을 뒷받침해 주기보다는 분명하고도 일관성 있게 우리의 본래 성경을 액면 그대로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윌리엄 올브라잇 박사는 “고고학이 구약성경 전통의 실제적인 역사성을 확증해 주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존재
때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논리적 변증으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심을 증명하기가 훨씬 더 어렵습니다. 우리가 무심히 여기는 사물들 가운데 하나님이시라는 절대적이고 전지전능하신 분이 계시지 않으신다면 인간의 한계가 분명히 드러난 지력으로는 만물의 존재 근거 내지는 근원을 밝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과학을 신앙처럼 믿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과학이 세상의 모든 이치를 설명하고 있고 이를 과학이 증명하지 못한다면 가치가 없는 것처럼 치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과학이 논리적 근거로 증명할 수 있는 분야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고, 과학의 가장 근본적인 근원을 연구하는 양자 물리학자들의 90%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그들은 근원의 연구를 통해 우리가 얼핏 들어 알고 있는 원자 내부의 양성자와 중성자와 전자 등 의 소립자 차원에서 서로 간의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불가항력적인 강한 충돌이 있다는 사실과 우주 전체가 놀라우리만치 아름답게 조화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고, 우주의 수 많은 법칙과 질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지구만 놓고 보더라도 크기, 태양과의 거리, 자전하는 축, 달과의 관계, 대기권, 질소의 순환, 오존층, 물 심지어 먼지까지 그 오묘한 비밀이 우리의 삶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불필요할 것 같은 먼지에 대해 살펴보자면, 먼지가 없다면 우리는 결코 푸른 하늘을 볼 수 없을 것이며, 17마일을 하늘로 올라가면 먼지가 없고 검은 하늘이 존재할 뿐입니다. 먼지는 비를 내리게 하는 중요한 매개체인데 한 방울의 비는 8백만 개의 미세한 물방울들이 아주 작은 먼지 하나를 둘러싸고 있고 먼지가 없다면 지구상의 생물은 다 메말라 존재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인체를 두고 보아도 그 신비로움은 형언하기가 힘들죠. 아울러 형체가 없지만 누구나 그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는 마음을 생각해 보시지요. 인간의 두뇌는 겨우 1,500 그램 밖에 되지 않지만 500톤의 전자장비와 전기장비가 해낼 수 있는 일을 감당합니다. 또 그 하나 하나가 살아 있는 단위가 되는 약 150억 개의 신경 세포들(neurons)이 우리 마음을 깜짝 놀라게 하는 묘기들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우연히 생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4. 창조
지금보면 참으로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저도 성경을 읽기 전까지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아무런 저항 없이 진화론을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원숭이가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도 힘들고, 진화의 과정을 설명할 화석의 존재가 전무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의 기원’을 쓴 다윈도 이 정도는 쉽게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일부의 추종자들-헉슬리, 스펜서- 같은 이들은 왜 자신이 증명도 할 수 없는 진화론을 확산시키고자 하였을까요. 그들은 서로 주고 받은 수많은 편지에서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과 초자연에 대한 편견 때문에 진화론을 교리로 승화시키고 있었던 것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과학자도 밝혀낼 수 없는 이 우주 만물의 경이로움은 절대자의 창조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방법이 없겠지요. 단백질 분자 하나가 우연히 생성되는데 걸리는 시간이 10의 262승 년이 걸린다는 확률은 다시금 가장 작은 단세포 생명체인 마이크로플라즘 호미니스 에이치 39(microplasm hominis H 39)가 생성되기 위해서는 10의 119,841승 년이 걸린다는 사실 앞에서 진화론의 어이없음을 확고히 합니다.
300억 광년의 넓이를 지닌 끝없는 우주가 대폭발설(Big Bang Theory)에 의해 생성되었다고 주장하는 스티븐 호킹 박사의 말은 최근에 그가 다시 언급하는 대폭발 이전의 상태에 관한 학설에 의해 흔들리고 있습니다. 저는 그의 명석한 두뇌를 따라갈 수가 없지만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이던 우주가 거듭되는 대폭발에 의해 생성되어지고 팽창되어진다면 그 혼란의 상황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우주는 행성끼리 서로 충돌하고 폭발하면서 질서는 커녕 대혼란(Kaos) 상태를 벗어나기 힘들 것입니다.
5 & 6. 천국과 지옥
복음을 전하려고 대화를 하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천국과 지옥의 존재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부정하는 경우를 접하게 됩니다. 필자 역시 불신의 상태에 있을 때 우리의 삶은 우리가 이 세상에 오기 전에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듯이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면 아무런 존재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생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을 얻게 된 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제는 천국의 존재를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천국과 지옥을 믿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는데
첫째, 성경에서 그 존재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서 천국과 지옥을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성경 전체를 통해 천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앙생활이 무의미함을 확정하고 있습니다.
둘째, ‘없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무지에서 비롯된 오류이거나 논리적 오류를 야기시킨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보지 못한 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일 문명세계를 접해보지 못한 아프리카의 원시 부족에게 문명의 존재를 얘기하면 믿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를 뿐이지 그 세계는 당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또한 혹자가 호주에는 다이아몬드가 ‘없다’라고 주장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있다’라고 함으로 두 사람은 같이 호주에 갔습니다. 운이 좋게도 ‘있다’라고 주장한 자는 도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이아몬드를 길에서 줍게 됩니다. ‘없다’를 주장하던 자는 그것은 ‘우연이다’라며 다이아몬드의 존재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없다’를 증명하고자 호주 대륙을 다 돌아보고 나서 ‘없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있다’를 주장하는 자는 이를 수용할 수 없으니 땅을 파보라고 합니다. ‘없다’라는 자는 전력을 다해 호주 땅을 1미터 깊이로 다 파 보고는 ‘없다’를 증명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있다’라는 자는 그것이 몇 미터 깊이에 나올지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합니다. 결국 ‘없다’를 주장하는 자는 자신의 논거를 증명할 수가 없는 것이죠.
셋째, 임사체험을 한 분들의 경험적 증거를 통해서 천국과 지옥은 다시 한 번 확증을 줍니다. 상상 외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문턱에 임한 체험을 통해 천국과 지옥을 경험한 증언이 존재합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분으로 18세기에 뉴턴과 어깨를 나란히 한 스웨덴의 과학자 스베덴 보리의 27년간 이어진 임사 체험은 너무도 다양하고 생생하고 구체적이어서 내세의 세계를 환히 들여다보는 듯합니다.. 그리고 의사인 레이먼드 무디 박사는 직접 자신의 임사 체험 이후 미국 전역의 유사 체험 사례를 연구하여 죽음 이후에는 분명히 천국과 지옥이 존재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현명한 자들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여러 가지 방법들, 독서, 논리적 유추, 타인의 증언 등을 통해 현상과 진실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독단적 무지에 머물다가 사후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범하는 후회를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천국과 지옥은 이 땅의 삶처럼 잠시 있다가 떠날 곳이 아니라 영원히 지내야 할 곳입니다. 자신이 어디에서 영원한 삶을 지낼 것인가는 자신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7. 절대도덕
케네디 목사님의 저서에는 절대 도덕의 존재를 믿음의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저는 현 시대의 문제점을 다원주의에서 찾고자 합니다. 너무나 다양한 생각과 사상을 다름으로 인정하여 충돌을 피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으나 많은 사람들이 무엇이 진리인지 깊은 성찰이 없다 보니 지력이 현저히 떨어져 사고의 중심 즉, 가치관이 부재하게 된 것입니다. 현시대의 사람들은 헨리 박사의 말대로 “무엇을 당연히 해야 한다”라는 당위 개념이 사라져 버린 세대를 살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절대적 가치는 지키고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할 터인데 비판할 능력도 없이 맹종하거나 도무지 가치를 두기가 민망할 우상을 자신의 삶의 가치로 붙잡고 마는 것이 개탄스러울 따름입니다.
지존의 가치관이 없다보니 절대도덕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저잣거리의 노인 보듯이 하거나 하늘에 떠 있는 구름 보듯이 합니다. 심지어 종교계의 큰 어른격에 있는 분이 ‘절대선은 다 통하게 되어 있다’라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진리를 흔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그런 분의 말 한 마디에 수 억 명의 인류는 정신을 잃고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쉽게 치부해 버립니다.
절대도덕이신 하나님은 유일하신 진리이십니다. ‘진리’라 함은 ‘참된 이치’인데 ‘참되다’는 것은 상황 논리에 불변하여 시공간을 초월하여 보편적 불변의 사실을 반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옳으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계시지 않음은 성경의 기록이 너무도 완벽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철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진리의 말씀을 다르게 해석하거나 하나님을 대적해 보고자 숱한 노력을 경주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고에는 항상 반대 견해와 오류가 있어 왔고 불완전하였습니다. 어떠한 인간의 고뇌에서 추론된 논리나 사상도 창조에서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담아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1,700년 동안 기록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제적이고 실증적으로 보여주심으로 완벽함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8. 그리스도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 역사적인 증거들에 기초를 둔 유일한 종교입니다. 성경은 결코 우리를 맹목적인 신앙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그 대신 언제나 증거에 의해서 확립된 사실들에 근거한 믿음으로 이끌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는 절대적이어서 우리를 압도합니다.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리스도를 불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의 기록뿐만 아니라 수 많은 역사서에서 예수님의 기록은 너무도 풍부하게 존재합니다.
아울러 나폴레옹의 고백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깜짝 놀라게 했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했다”라고” 하면서 “그는 인간이 아니시다”라고 하였습니다. 세익스피어도 “나는 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서 영생의 상속자가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지요. 바이런 경도 “만일에 그 자신이 하나님이었거나 하나님과 동일한 인간이 있었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이셨다”라고” 하였습니다. 허무주의자였던 톨스토이도 “예수의 가르침을 믿고 나서 나의 모든 삶은 갑자기 변화되었다... 죽음이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맛보았다”라고” 하였습니다. 괴테도 “나는 네 복음서들 모두를 철저히 참된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거기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숭고한 영광의 빛이 비취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시도록 결정한 본디오 빌라도마저 예수님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우리의 모든 생각을 그에게 드리며 그를 구주와 주님으로 모시고 온전히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언젠가 모든 사람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될 때 우리는 주님이 실제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처음 그를 알게 된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의 죄를 위하여 내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를 하나님이 보내신 나의 구주로 바라볼 때였습니다.. 그분은 나를 위하여 이마에 가시관을 쓰시고 손과 발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11:28). 나는 거기 십자가 위에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시는 분을 뵈었습니다. 그는 나의 아버지나 어머니, 아내, 자식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는 나를 영원히 사랑하실 것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나를 위하여 지옥의 고통을 대신당하셨습니다.. 나는 앉았던 의자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무릎을 꿇고 그를 나의 삶에 모셔 들였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왜 그렇게 했냐고요?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나를 감동하셔서 마음을 열고 그에게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나의 구원주,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또한 믿게 되었습니다.
9. 부활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의 십자가마저도 단순히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처형당하신 사실로 치부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힘있게 선언하고 있는 것이 바로 부활이 지니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 누구도, 어떤 성인도 부활을 경험한 자는 없습니다. 지난 이천년 동안 이 사실을 뒤집기 위해 많은 이들이 시도하고 공격을 했으나 이 실제적 사건을 뒤엎은 사람은 없습니다. 루 월러스(Lew Wallace)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부활을 부정하는 책을 쓰기 위해 착수하는 책을 쓰는 일에 착수하였다가 결국은 인정하는 유명한 책으로 마쳤습니다. 그 책이 바로 벤 허(Ben Hur)입니다. 하버드대의 저명한 법학교수였던 싸이먼 그린리프는 부활을 법정적 증거의 채택 방법에 의해 집중 심리한 결과 부활은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었으며 그 증거를 정직하게 검토하면 이것이 사실임을 확신하게 될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부활의 증거를 몇 가지 살펴보면, 먼저 예수님이 십자가의 처형을 앞두고 새벽에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리라는 말씀대로 그를 부정했던 제자 베드로와 뿔뿔이 자신의 삶을 찾기에 급급했던 나머지 열 명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목숨을 바쳐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던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낙망하여 갈 길을 몰라 하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복음을 전한 것이 지금의 기독교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신분이 낮고 교육 수준도 낮아서 무슨 야심을 품거나 미룰 수도 없는 초라한 지위에 살면서 어떠한 목표를 두고 그들의 삶을 고난과 죽음으로 맞바꾸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자들 이외에도 예수님을 보고 만난 사람들이 수 백명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의 안식일인 현재의 토요일 다음 첫째 날인 일요일을 주님의 날로 기념하며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므로 지금의 달력이 정해진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가장 중요시하던 유월절을 버리고 부활절을 지키게 된 이유로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아울러 예수님의 빈 무덤과 남겨진 수의, 최후의 만찬, 당시의 벽화나 조각, 찬송가 등에서 이 사건의 증거를 보게 됩니다.
10. 기독교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통해서 인류의 역사는 세상에 해방과 자유를 주었습니다. 이 세상의 가장 연약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 기독교의 복음으로 인해 자유를 얻고 인간다운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로마시대 아버지의 부속물 취급을 당하던 아이들이 인격적 대우를 받게 되고,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된 곳에서는 여성이 인권을 가지게 되고 노예가 해방되었습니다. 아직도 세상의 많은 곳에서 이슬람의 율법에 따라 혹은 힌두교의 카스트제도에 의해 계급과 성별로 말미암아 차별을 받는 곳이 너무도 당연시되며 존재한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로마의 끔찍한 검투사 경기가 막을 내리게 된 것도 텔레마쿠스(Telemachus)라는 크리스천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경기를 막음으로 인하였습니다. YMCA를 통한 빈민가의 구제, 선교사들이 자신의 삶을 내어 놓고 복음을 듣지 못한 나라의 암울한 인간들에게 학교를 지어 교육을 시키고 병원을 지어 건강한 삶을 살도록 하는 일은 기독교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실천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세상에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옛 시대의 나라는 왕이나 다스리는 자들이 최고였고, 백성은 종속물에 불과했습니다.. 현대에 와서도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에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고 무신론에 입각하여 유물주의로 국민을 몰아감으로 인간의 존엄을 실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고 예수님께서는 개개인에게 고유의 가치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절대자의 자녀가 된 다는 것은 생각만 하여도 가슴 뛰는 일이 아닐까요.
11. 중생 (重生)
예수님을 참으로 믿게 되면 인간은 거듭난다는 것을 중생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도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남의 교리를 신학적으로는 중생론(重生論, regeneration)이라고 합니다. 성경전체의 메시지는 창조(혹은 초생(初生)generation), 타락(degeneration), 중생(重生, regeneration), 세 낱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완전하게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에 빠졌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면 우리의 마음은 죄에서 떠나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중생의 길을 걷게 됩니다.
성경은 이 땅위에 사는 모든 사람이 다 죄와 허물로 죽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을 만져서 새롭게 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번 나면 두 번 죽고, 두 번 나면 한 번 죽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입니까? 여러분은 거듭나셨습니까?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땅의 문 앞에서 우리의 옛 삶은 낡은 옷처럼 벗어던지고 새로운 삶으로 들어갈 땅이 있습니다. 우리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 지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마음, 새로운 감정, 새로운 삶, 새로운 힘, 새로운 목적, 새로운 방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12. 성령
성경은 성령이 인격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나는 성경이 성령은 누구이신가를 말씀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그가 무엇을 하시는가를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를 믿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이 하시는 일들에 대해서 놀라운 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 하시는 일들의 목록은 너무 길어서 다 열거할 수가 없으나 그 중에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로 더불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성경을 기록하는 일에 영감을 불어넣으셔서 성경이 다른 책들과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인간 기록자들을 통해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게 하셨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성령이 네게 임하시리라”(누가복음 1:35)고 했습니다. 예수님께 임하시고, 그를 인도하시고, 그에게 권능으로 함께 해주신 분이 바로 성령이셨습니다. 성경은 성령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임하신 성령께서는 또한 오순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탄생하게 하신 분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시고 죄로 죽어 있던 그들을 살려 주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반드시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다면 크리스찬이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크리스찬 안에 거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린도전서 3:16), 성령께서는 거룩하게 하시고 깨끗하게 하시며 순결하고 깨끗하게 하십니다. 특히 이러한 일을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제가 성령을 믿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알고 체험한 사람들은 천국을 ‘보증’ 받았다는 것을 압니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얻었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십니다. 크리스찬으로서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하고 찬송을 부를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기심과 죄와 자기 의와 교만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으면 성령이 충만하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우리의 죄를 고백하며 우리의곧은 목을 숙여 겸손한 태도를 취하면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그의 약속을 이루어주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해 주실 것입니다. 성령은 사랑의 영이시요 또한 희락의 영이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새 마음, 부드러운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13. 그리스도의 재림
그리스도의 재림은 세 가지 이유로 인해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다시 오시리라고 선언하셨고, 기독교의 역사관 전체가 그것을 요구하고 있고, 성경이 재림에 앞서 나타나리라고 선언한 징조들-엄청나게 빈번해진 지진들, 지식의 폭발적 증가, 도덕의 부재, 절망의 확산, 방종한 성행위-로 인함입니다.
괴테는 말하기를 “세계와 인류 역사상 가장 심오한 유일한 존재로 남을 것은 신앙과 불신앙 사이의 갈등이며 나머지 모든 주제들은 그것에 종속된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한 번 주어진 삶의 가치를 위하여, 후회 없는 삶을 위하여, 많은 현상과 주제의 근간을 알기 위하여 꼭 성경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글 읽기를 즐겨하지 않는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책 내용의 핵심을 전하고자 하였고, 이해를 돕고자 필자의 개인적인 공부에 의거하여 설명하기도 하고, ‘내가 믿는 이유’의 원고를 그대로 옮기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것은 역사적인 자료나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관심의 부재와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맡기고자 하는 도덕적 결단을 내릴 의향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의 위대함은 면밀히 살펴볼수록 감소될 것이나, 그리스도의 인격은 우리가 깊이 알수록 더욱 순결하고 성스럽고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결심의 단계에 도달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많은 사람들이 제임스 케네디 목사님의 책에 쓰인 논증에 수긍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결심의 단계에 이르시기를 소망합니다.
<옮긴글>
[출처] 내가 믿는 이유 (은혜성서교회) | 작성자 사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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