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마티스, 마음의 색을 찾아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色) 하나를 찾기 위해
눈 속 깊은 곳으로 어두운 화산을 내려보내곤 하였다
-김경주의 시 '외계(外界)' 중에서
자신 안에 놓인 마음의 길을 따라 끝까지 가본 사람만이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자신만의 고유한 색을 얻기 위해 화가는 많은 날들을 깊은 시간 속으로 잠수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그가 유영하는 심연의 세계에서 마음은 무수한 빛의 굴절과 파장으로 남들이 상상하지 않는 이미지를 풀어놓곤 했을 것이다.
때로 이미지들은 자신의 마음과 공명하여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화폭에 담은 것은 세상을 향해 내어놓은 마음의 음악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림을 이해한다는 것 역시 당신의 마음을 여는 일이다.
열린 당신의 마음 안으로 화가의 음악이 흘러 들어오게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오늘 당신이 한 폭의 그림을 앞에 두고 새로운 음악을 듣고 있다면, 당신은 오늘 하나의 마음과 조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그림이 나와 소통의 주파수를 맞추지는 않는다. 어떤 것들은 전혀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는다.
마치 내가 그림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나를 외면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떤 그림은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처럼 가볍게 마음을 건드려 보기도 하지만 다음 순간 잊혀진다.
그러나 아주 가끔은 소통의 전율이 짜릿짜릿 온몸을 타고 흐르는 순간이 있다.
그런 순간 나는 아주 오래 그림 앞에서 마비된다. 혹은 행복해진다.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마주한 마티스의 'Dance'는 그런 충격파를 품고 있었다.
전시실의 한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벌거벗은 여인들의 춤.
단지 청색과 녹색만으로 분할된 배경과 여인들의 몸을 구성한 또 하나의 색.
검은 선을 제외하고 단지 세 개의 색만으로 만들어 낸 거대한 생동감.
아무렇게나 흘러간 듯 보이는 검은 선은 춤의 자유로움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것을 과연 음악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을까.
'색채의 대가' 혹은 '색채의 마술사'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는 앙리 마티스(Heinri Matisse, 1869년-1954년)는
색이 갖는 힘을 이렇게 고백한다.
"색채에는 각기 고유의 아름다움이 있다. 음악에서 소리를 보존하려고 애쓰듯, 우리는 색채의 아름다움을 잃어서는 안 된다.
구성은 색채의 아름다움과 신선함을 살리는 일이다."
그가 찾은 색은 대상이 가진 객관적 색이 아니라 색 자체가 가지고 있는 주관적 색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혹은 자신의 마음에서 얻은 색이라고 해야할까.
그의 예술가로서의 여정은 평생 색과 형태의 단순화를 통해 가장 순수한 색의 아름다움을 찾는 일로 물들어 있다.
그의 탁월한 색채감각을 "마티스의 뱃속에는 태양이 들어있다."라고 표현한 피카소.
상상해 보라. 태양을 품은 자, 그 빛을 통해 우주의 근원적 색을 환히 드러내고자 꿈꾸었던 자,
색을 통해 우리에게 행복한 음악을 선물하고 싶어했던 자.
그러므로 비평가 슈보프가 마티스의 작품을 보고
"단순화를 위한 줄기찬 노력 끝에 몇 가지 색채로 환원된 그의 그림은 색들이 서로 부르고 대답하며 노래를 부르는 그림이다."라고 말한 것은 정말 적절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마티스는 어디에서 이런 색의 영감을 얻었을까?
20세기의 미술을 떠올릴 때 피카소와 더불어 마티스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프랑스에서 태어나 일찍이 세잔·고흐·고갱의 채색 방법에 공감을 느낀 마티스는
이후 드랭·블라맹크 등과 함께 20세기 회화의 제일보로 불리는 야수파 운동에서 지도자적 역할을 담당한다.
단순한 구성을 추구하며 점차 독자적 화풍을 전개한 그는 특히
지중해와 모로코·타히티 섬에로의 여행에서 원색적인 색의 환희를 경험한다.
그래서 그가 주로 그린 여인이 있는 실내 풍경들은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지중해 풍의 색을 열정적으로 담고 있다.
"가장 아름다운 파랑, 노랑, 빨강 등 인간 감각의 저변을 뒤흔들 수 있는 색깔을 사용해야 한다.
나의 파랑과 빨강과 녹색의 조화는 충분한 스펙트럼과 가치를 만들어낸다."는 마티스의 주장은
직관적 감각으로 그림을 표현하고자 한 야수파의 근저를 이룬다.
"색은 단순할수록 우리의 감정에 더 강렬하게 작용한다."라는 그의 철학처럼 '푸른 누드'는 단지 청색만을 사용하고 있다.
색채에도 영혼이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은 이 작품은 색지를 오려서 만든 작품이다.
말년에 병으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 마티스가 고안해 낸 색지오리기 기법은
그가 추구한 단순함을 도리어 더 완숙하고 대담한 길로 나아가게 한다.
조수에게 종이에 푸른색을 칠하게 하고 침대에 누워 그 종이를 오릴 때 그는 여전히 지중해의 내면을 상상하였을까.
어쩌면 이 그림에서 우리는 심연의 무한함을 담은 그의 비밀을 엿보는 것일 수도 있다.
문득 낯선 신선함과 마주하고 싶다면 하나의 풍경이 던지는 은밀한 색채의 음악 속으로 여행을 떠나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혹 그곳에서 당신은 섬세한 마음 하나를 건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화가의 마음일 수도 있고 또는 당신이 한때 잃어버렸을지도 모를 당신 스스로의 마음일 수도 있다.
누구나 인생의 여정 위에 무수히 많은 그림을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지는 때,
한 사람의 영혼이 남겨놓은 공간의 울림이 당신의 영혼을 감돌아 갈 수도 있으므로.
첫댓글 쪼까 너무 길제...
아뇨, 맛좋은 글이에요.^^
다른건 모르고 마티스의 여인옆에 꽃병의 꽃은 기억이나. 연두색 흑사리꽃.ㅋ
이렇게 좋은글은 길어도 용서(?)가 됩니다...ㅎ
새로운 세계를 대면하는 순간의 두근거림과 설레임이 용천혈에서 부터 올라오네요. 고맙습니다. 무지함의 얼음을 깨주셔서.
많이기네 이사람아 ㅎㅎ 내자신만의색은...이쁜색은다좋은디..빨강색!
니도 빨강색 좋아해 정렬적이어서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