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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코헬렛의 말씀 11,9―12,8>
9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10 네 마음에서 근심을 떨쳐 버리고 네 몸에서 고통을 흘려 버려라.
젊음도 청춘도 허무일 뿐이다.
12,1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불행의 날들이 닥치기 전에.
“이런 시절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아.” 하고 네가 말할 때가 오기 전에.
2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 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3 그때 집을 지키는 자들은 흐느적거리고 힘센 사내들은 등이 굽는다.
맷돌 가는 여종들은 수가 줄어 손을 놓고 창문으로 내다보던 여인들은 생기를 잃는다.
4 길로 난 맞미닫이문은 닫히고, 맷돌 소리는 줄어든다.
새들이 지저귀는 시간에 일어나지만 노랫소리는 모두 희미해진다.
5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 길에서도 무서움이 앞선다.
편도나무는 꽃이 한창이고 메뚜기는 살이 오르며 참양각초는 싹을 터뜨리는데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하고 거리에는 조객들이 돌아다닌다.
6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7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
8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9,43ㄴ-45>
그때에
43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44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45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거룩한 변모를 이루신 다음, 산에서 내려와 더러운 영에 들린 아이를 고치시자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루카 9,44)
그러나 제자들은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루카 9,45 참조)
이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믿음의 순명과 사랑의 마음이 아니고서는 따를 수가 없나 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하느님이 너에게 바라시는 것은 말이 아니라 마음이다.”
성경을 읽다 보면, 때로는 성경본문이 아무 말씀도 안 할 때도 있고, 전혀 알아들을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불투명한 말이나 난해할 때도 있습니다.
곧 말씀이 뜻을 감추고 침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의 침묵은 우리의 대화가 단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도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며, 바로 그것을 통하여 성경 본문에 철저히 복종해야 함을 깨우쳐주기도 합니다.
또한 성경을 읽는 동안 그분을 기다리도록 도와주고, 우리 힘만으로는 이해할 수도 기도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며, 우리를 훨씬 능가하는 분 앞에 서 있다는 의식과 함께 사랑의 자세를 깨우쳐주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채로도 사랑의 마음, 순명과 믿음으로 응답하고 따르도록 인도합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알아듣기 어려운 성경본문을 접근할 때, 중요한 것은 신앙이라고 이렇게 강조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대가 장애라고 여겼던 대목들이 실로 크고 거룩한 유익이 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필로칼리아)
또한 사막의 마카리오는 역시 믿음으로 먼저 실행할 것을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는 분량에 만족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도록 애쓰시오.
그리하면 이해되지 않은 채 남아 있던 바가 여러분의 영에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들은 말씀을 비록 알아듣지 못한다 하더라도, 알아듣지 못한 채로 말씀하신 분에 대한 믿음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곧 신비를 살라는 말씀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인생은 풀어야 하는 숙제가 아니라, 살아야 할 신비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성으로 이해하는 바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비를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곧 삶은 풀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당신께 오라고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말씀, 혹은 삶은 품고 살아야 하는 선물이요, 그것을 통하여 그것을 주신 분을 만나야 하는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이토록 우리가 참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바로 그분과의 만남의 신비를 사는 일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죽음으로서 만나게 되는 신비를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의 손에 넘겨져 죽음으로써 되살아나셨듯이, 오늘 우리도 형제들의 손에 넘겨져 죽음으로써 되살아나는 부활의 신비의 삶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루카 9,45)
주님!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 이해하지 못해도 신비를 살아가게 하소서.
죽음에 넘겨져 되살아나는 부활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죽어 사라져 되살아나는 사랑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말씀을 귀담아들어라>
학창시절에 시험공부를 하면서 느꼈던 것입니다.
잘 모르던 것이 시험을 코앞에 두어서야 이해되는 것이 많았습니다.
선생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당장에 이해되지 않더라도 들어놓으면 때가 되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일에 놀라워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루카 9,44)
이 말씀은 당신의 수난에 대한 예고였습니다.
헛된 이상에 사로잡히거나 허망한 희망에 들떠 있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에 대해 예고하셨는데 제자들은 아직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의 수난을 목격한 후에야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손은 참으로 좋기도 하고 무섭기도 합니다.
'불완전하고 절대적이지 않은 사람의 손'이 하느님을 죽였습니다.
우리의 손의 부족함을 인정하게 될 때 하느님을 살리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내 탓이오"를 일깨우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간직하는 작업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말합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 때가 되면, 부모는 이미 세상에 계시지 않아 후회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고.
제자들도 때늦은 후회를 하게 되었고 오늘 우리도 그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명심하면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그분과의 통교를 이룰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야고 1,21)
말씀을 귀담아들으면, 때가 되면 그 의미를 알아듣게 되고 그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야고보 1,22)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야고 1,25).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루카 10,38-43)를 보면,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고 마르타는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루카 10,42)
참으로 들음은 소중한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근본이 섭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로마 10,17)
말씀 안에 풍요로움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제가 당신의 가르침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온종일 그것을 묵상합니다.
당신의 계명이 저를 원수들보다 슬기롭게 만들었으니 그것이 영원히 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19,97)
미룰 수 없는 사람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모든 것이 사라지고 우리 앞에 오직 한 가지 필요한 것이 남는데, 그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어르신들에게는 무척 송구스런 말씀이지만, 저도 이제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보다 자주 읽고 묵상하게 되는 성경이 있습니다.
잠언이 그렇고, 다른 무엇에 앞서 코헬렛이 그렇습니다.
코헬렛을 읽고 묵상하다 보면, 공동체 생활을 하는 데 참으로 큰 도움이 됩니다.
형제들과 티격태격 아웅다웅하다가도 코헬렛 저자의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라는 구절을 접하는 즉시, 그래 별 것 아닌 것에 내가 또 목숨을 걸었구나, 하면서 제 가슴을 크게 치게 됩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걸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단 한 걸음만 물러서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을 일이었는데, 그 순간을 못 참아서 몇날 며칠을 두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때로 건너지 말아야 할 강도 건너고 맙니다.
사실 마음 크게 먹으면 모든 것 다 포용이 됩니다.
단 하루만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머리 맞대고 으르렁대면서 싸울 일 하나도 없습니다.
목숨처럼 중요시 여기는 TV 채널, 크게 마음먹고 양보하면 아주 마음이 편해집니다.
안보면 큰 일 날 것 같은 주말 드라마, 안 봐도 아무 일 생기지 않더군요.
심각해 보이는 형제의 결점, 눈 한번 찔끔 감아보니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도저히 용서못 할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이의 허전한 뒷모습을 바라보니 모든 것이 다 용서될 뿐 아니라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이런 것들을 포함해서 그 모든 것이 헛됩니다.
그토록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인연들, 그토록 우리가 자부심을 가졌던 학벌, 직책, 성과, 업적들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쌓아왔던 그 모든 것들, 특히 육적이고 인간적인 것들은 결국 한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더군요.
한 마디로 ‘인생 뭐 있어?’입니다.
이런 우리 인간의 실상에 대해서는 오늘 화답송에서도 잘 나와 있습니다.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 때와도 같나이다.
주님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나이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가나이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리나이다.”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자신이 살았던 암울한 시대 상황을 자신의 글에 반영합니다.
그래서 그의 글의 톤은 무척이나 비관적입니다.
우울합니다.
“세상만사 허무로다!
인생은 덧없구나.
모든 것이 허무로다!”
그는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맛보았을 것입니다.
부귀영화도 마음껏 누려봤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좋은 시절이 가고 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도 갔을 것입니다.
잘 나가던 시절, 괴로웠던 시절, 행복했던 시절, 괴로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저자는 결론으로 모든 것이 덧없다, 모든 것이 지나간다,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모든 것이 지나가고 최종적으로 남게 되는 것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언젠가 우리가 재가 되고,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려도, 자취가 없이 사라져도 우리에게 영원히 남을 소중한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추종하고자 몸부림쳐왔던 우리의 신앙여정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언젠가 우리가 세상을 떠나고, 결국 우리 앞에 남을 오직 한 가지는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영혼이며, 우리가 이 세상사는 동안 모아둔 영적 보화들입니다.
꽃은 시들고 잎은 떨어집니다.
세상 모든 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가치들과 사고방식들도 아침이슬처럼 사라집니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우리 앞에 오직 한 가지 필요한 것이 남는데, 그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고 계시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창조주를, 심판을 기억하라 - 나무처럼, 시詩처럼, 한결같은 삶>
어제 금요 강론 대목 중 잊혀지지 않는 대목과 설명입니다.
베네딕도 규칙서 머리말 마지막 50절 중 ‘주님의 가르침에서 결코 떠나지 말고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란 대목에 대한 설명입니다.
"한결같음과 머뭄은 정적靜的인 어떤 상태가 아니라, 살아 있는 나무처럼 뿌리를 내리는 것을 뜻한다.
뿌리를 내리면서 나무는 가지들을 뻗는다.
그것은 하느님을 향해 서두르는데 한결같음을 뜻한다.
에우치리우스는 “우리는 부르심과 진보의 자리에 서있으면서 한결같음과 인내로서 경주에 승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변하는 역동적인 사회에서 우리는 뿌리를 아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한결같은 위치로서의 어떤 자리와 함께 하는 정체성을 지닌 사람은 내적 안정과 함께 유연하고 온세상에 열려 있다. 나무처럼!"
여기 요셉 수도원의 배경인 한결같은 불암산과 곳곳에 산재한 무수한 나무들은 정주의 표상으로 안정과 평화, 위로와 치유를 줍니다.
세계 2차 대전 중 젊은 나이 32세로 전사한, 평생 32편의 시만 남겼다는 미국 뉴저지주 출신 조이스 킬머(1886-1918)라는 시인의 ‘나무들’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나는 생각한다. 나무들처럼 사랑스런
시詩를 결코 볼 수 없으리라고.
대지의 단물 흐르는 젖가슴에
굶주린 입술을 대고 있는 나무.
온 종일 신神을 우러러보며
잎이 무성한 팔을 들어 기도하는 나무.
여름엔 머리칼에다
붉은 방울새의 둥지를 치는 나무.
그 가슴에 눈이 쌓이고
또 비와 함께 다정히 사는 나무.
시詩는 나같은 바보가 짓지만
나무를 만드는 것은 오직 신神일뿐.”
하느님만을 찾는 정주 수도승의 특징은 나무를 사랑한다는 것이며 나무를 닮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무처럼’, ‘하느님의 시詩처럼’ 살아가는 천진무구天眞無垢한 정주의 수도승들입니다.
문득 25년 전 써놓은 ‘나무’라는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나무는
넉넉한 품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서
날아오는 새들 모두 안아 들이는
넉넉한 품
새들은
나무에 자취를 남기지 않고
나무는
새들에 집착하지 않는다
사랑은 이런 것”
- 1997.3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결같은 하느님의 나무처럼, 하느님의 시처럼 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로서 코헬렛은 끝나지만 내용이 참 풍요롭고 공감 충만입니다.
‘젊음을 즐겨라’, ‘늙음과 죽음’, ‘맺음말’로 끝나며 아쉽게도 마지막 ‘발문’은 생략되고 있습니다.
일부 대목을 인용합니다.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 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 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돌아간다.”
수시로 후렴처럼 강조되는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말마디입니다.
창조주와 더불어 우리의 ‘죽음’ 역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어 코헬렛의 맺음말은 처음과 똑같이 인생 허무에 대한 고백입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
마지막 임종어가 이 말마디라면 얼마나 허전하겠는지요!
우리의 창조주 하느님, 심판, 죽음, 허무에 대한 묵상이 우리 모두 분발하여 언제나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 중심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 향해 가지들 뻗은 나무들처럼 한결같은 삶을 살게 합니다.
생략된 코헬렛의 마지막 부분도 나누고 싶습니다.
“책을 많이 만들어 내는 일에는 끝이 없고,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은 몸을 고달프게 한다.
마지막으로 결론을 들어보자.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켜라.
이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지당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좋든 나쁘든 감추어진 온갖 것에 대하여 모든 행동을 심판하신다.”
그러니 결국 허무로 시작해서 하느님 경외로 끝나는 코헬렛이요, 결국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늘 삶의 허무와 죽음, 하느님을 기억할 때 일희일비함이 없는 한결같은 삶, 담담한 내적 열정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이 점이 부족했습니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의 변모 체험 후 어떤 아이에게 더러운 영을 내쫓아 내신 주님의 일에 몹시 놀라 한없이 고무된 제자들에게 주님은 두 번째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니 청천벽력같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아직도 스승이신 주님을 모르는 미숙함을, 한결같지 못함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입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으니,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며, 이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합니다.
놀라움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제자들의 마음이 몹시 불안해 보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이요, 주님의 수난에 이어 부활 체험 후에야, 한결같은 파스카의 삶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 때의 주님 제자들과는 달리 우리는 이미 파스카의 삶을 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영원한 삶이 가능합니다.
이에 더하여 삶의 허무, 죽음, 심판에 대한 생각이 더욱 우리를 깨어 한결같이 나무처럼, 시처럼 살게 합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한결같은 영원한 삶을 살게 합니다.
허무에 대한 결정적 답은 이 거룩한 파스카 잔치 미사뿐임을 깨닫습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코로나가 심각하게 번져나갈 때입니다.
병원마다 중환자가 가득했습니다.
사망자들이 늘어났습니다.
미사도 중단되었고, 식당도 문을 닫았습니다.
코로나로 인한 피해도 컸지만, 우리 사회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고, 느낄 수 없는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캄캄한 동굴을 불 없이 걸어가는 것 같은 공포였습니다.
3년이 지난 지금은 그런 두려움과 공포는 많이 사라졌습니다.
백신이 나왔고, 치료제도 개발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의 강론이 생각납니다.
“코로나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감기를 두려워하지 않듯이 이제는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교통사고가 두렵다고 운전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교통법규를 잘 지키고, 안전운전하면 자동차는 쉽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도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를 건널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잠시 누워계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풍랑이 거세어졌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놀랐고, 두려웠습니다.
제자들의 소리에 눈을 뜨신 예수님은 풍랑을 잠재우시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요.’
제자들에게 이렇게도 당부하셨습니다.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더러는 박해를 받고, 감옥에 갇힐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함께 있을 겁니다.’
또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요.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먼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르세요.’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여러분에게 평화를 줍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면, 굳이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요?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이렇습니다.
‘기도하면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한 사람은 기도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한 사람은 하느님과 만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은 논리와 이성을 넘어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단순히 본능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헛되고 헛된 것들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며 살아야 하는지 식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고를 때, 차를 살 때, 집을 살 때 우리는 꼼꼼히 따져보고, 신중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잘못 판단을 하면 커다란 손해를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하느님은 어떤 것을 원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식별’입니다.
처음에는 올바른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한번 써보고, 살아봐야 안다.’
겉보기와는 다른 경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식별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식별의 결과입니다.
결과가 좋고, 결실이 있으면 영적식별을 잘 한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가 나쁘고, 결실이 없으면 그것은 악의 유혹을 따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위로와 고독’이 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면 결과는 늘 기쁨과 평화입니다.
악의 유혹을 따를 때도 ‘위로와 고독’이 있습니다.
악의 유혹을 따를 때 결과는 늘 불평과 불만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늘 감사하십시오. 항상 기도하십시오.’
이것은 영적식별을 잘 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영적식별을 잘 하는 사람은 3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겸손입니다.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남의 의견도 충분히 듣습니다.
누군가 영적 식별을 잘 했는데, 교만하다면 그것은 악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둘째는 진중함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쉽게 하지 않습니다.
남의 허물과 탓을 이웃에게 전하지 않습니다.
깊은 바다와 같아서 사람들을 품어 줄 수 있습니다.
셋째는 순종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의 의견이 교회의 가르침과 다를 때, 교회를 비판하고 순명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영적식별이 아닙니다.
비록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할지라도 교회의 가르침에 순명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예수님을 따른 다는 것은 영광의 길이기도 하지만, 고난과 십자가의 길이기도 합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플라세보 효과라고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실제로 아무 효과가 없는데도 사람의 신념에 의해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어떤 남자가 말기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의 몸에는 야구공만 한 종양이 자라고 있었지요.
마침 신약이 나왔고, 주치의는 획기적인 신약이 나왔다며 이 약의 효능을 설명하고 환자에게 주사했습니다.
주말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환자의 상태가 좋아졌습니다.
종양도 절반도 줄었고, 10일 후에는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환자는 퇴원한 지 두 달 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신약의 효과로 점점 좋아졌던 환자가 왜 이렇게 안 좋아졌는지를 보니, 자신에게 사용된 신약이 전혀 효과가 없다는 신문 기사를 봤다는 것입니다.
이 기사에 절망한 그는 급격히 상태가 안 좋아졌고 이틀 만에 사망했습니다.
대만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스님께서 시한부 판정을 받았습니다.
절망에 빠진 스님은 자기 스승을 찾아가 이 사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사람은 어차피 죽는다.
빨리 가느냐, 좀 늦게 가느냐의 차이뿐이다.
누구나 한 번은 죽는 것이니 사는 동안 후회 없이 살아야 한다.”
이 말에 용기를 얻어 ‘시한부 환자’라는 생각 자체를 내려놓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현재 20년이 지났음에도 열정적으로 살고 계십니다.
어떤 마음으로 가져야 할까요?
우리 모두 예외 없이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저 열심히, 열정적으로 후회 남기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예고를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의 스승이 수난과 죽음을 겪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벗어버릴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말씀하셨을까요?
걱정하고 두려움 속에서 힘든 마음으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을 사는 제대로 된 마음이 필요함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의 영광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욕심보다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지금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의 영광만을 추구하다가는 커다란 실망 속에서, 지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영광을 바라보며, 지금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간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열정적으로 후회 남기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삶을 살겠습니까?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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