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ging
언젠가 변한다. 시대도, 사람도, 사랑의 형태도.
그 순간, 에릭은 문밖에서 뭔가가 와장창 하고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는 뛰쳐나갔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펴도 그런 소리를 낼 만한 것은 없어 보였다. 다만, 창문으로부터 흘러오는 밀키웨이의 은빛을 그대로 감싸 안고 있는 작은 사파이어 원석이 있었을 뿐이다. 무심하게 고개를 숙이던 에릭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는 원석을 둘러싸고 있는 특유의 기운이라고나 할까, 이를테면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을 강렬하게 받는 느낌이 기묘하게 일치했다.
'혹시 그건가......'
미카엘라가 에릭과 함께 떠날 때, 고향의 장로들이 언젠가 도움이 될 것이다, 절대로 남에게 넘기지 말라, 잘 돌보아 주어라 등등 신신당부를 하며 새하얀 실크 주머니에 뭔가를 담아 주었다. 에릭은 그 정도의 크기에 가치가 있고 여성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보석 정도밖에 생각나지 않아 그냥 그러겠거니 했다. 그러나 아델라로 돌아오는 길에서는 왠지 주머니가 계속 눈에 밟혔다. 정작 에릭 자신은 그것에 별 관심도 없었는데 말이다. 게다가 그들이 아델라에 도착한 이후로는 더이상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그 당시에는 기분 탓이라 여겼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작고 볼품없는 원석은 그걸 부정하고 있었다. 아마 아델라에 도착한 직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내일 아침 미카엘라에게 돌려주리라는 생각으로 에릭은 푸른 조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 이건 제가 마샤한테 준 건데, 어째서......."
흑단의 머리카락을 빗던 미카엘라는 보란 듯이 사파이어를 내미는 에릭한테 굳이 의아함을 감추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되묻듯이 중얼거렸다.
"아델라에서의 첫 친구라고 소개해 준 그 여자? 확실히 줄 만한 가치가 있겠군."
"이것 봐요. 왜 아침부터 심술이에요?"
즉각 에릭의 말에 가시가 돋쳐 있다는 것을 알아챈 미카엘라가 감정을 그대로 담아 따져 물었다. 그녀는 에릭이 왜 기분 나빠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꽤 있다. 예컨대,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한참을 빈정대다가 끝까지 미카엘라가 그 이유를 찾지 못하자 결국은 '미안하다'라는 말로 끝내는 식이었다. 고향에서는 전혀 없었던 일이기에 가끔 이런 게 자신의 일족과 인간의 차이점인가, 라고 고민한 적도 있었다. 아니면 단순히 남자와 여자의 차이, 또는 신체의 성장이 인간보다 훨씬 느려서일까 싶었다. 미카엘라는 어머니와 한 몸였을 때가 다섯 해, 세상에 나온 지 열아홉 해가 되지만, 제니퍼와 인간의 성장 차이 탓에 겉으로 보기에는 아직 어린 티가 나는 소녀처럼 보일 뿐이다. 그런데 20살 성인식을 치른 지 5년째가 되는 에릭과 혼인했으니, 여러모로 에릭의 생각을 따라가지 못할 때가 잦을 법도 했다.
"장로들이 소중하게 간직하라고 했잖아?"
"내가 최초로 사귄 인간 친구보다 소중하지는 않아요."
제니퍼는, 인간으로 치자면 여자밖에 없다. 따라서 자손을 남기기 위해서는 다른 종족들-이를테면 요정-과 쌍을 이뤄야 하는데, 그 후손은 제니퍼의 진한 피만을 물려받기 때문에 종족 대부분의 장로들은 그녀들과 맺어지기를 꺼렸다. 물론, 그렇다고 그녀들을 싫어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약초와 마술에 능한 제니퍼가 있어서 나쁜 점은 없기에 대개는 환영하는 편이었다. 제니퍼들 역시 수명이 매우 길기에 굳이 자손을 남기려 애쓸 필요도 없어 그러한 태도를 신경 쓰지도 않았다. 애당초 한 종족을 책임지는 장로들만이 싫어할 뿐이고, 실제로는 별 상관도 없이 젊은이들이 서로에게 반해 식을 치르고는 했다.
그러나 인간만은 제니퍼의 존재는커녕 그들 이외의 종족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극히 일부만이 알고 있었고, 그나마도 입 밖에 내면 미친 취급을 받는다며 평생을 혼자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아 그 수 역시 줄어들고 있었다. 게다가 대다수의 인간들은 18세기에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제니퍼의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 점들을 고려한다면, 처음 마샤와 친구가 되었을 때 미카엘라가 얼마나 기뻤을지는 에릭도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장담하건데 그렇게 간단히 줘 버릴 정도로 가벼운 물건은 아닌 것 같았다. 따라서 자신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고 성급하게 결정한 미카엘라가 좀 원망스러웠을 뿐이다.
"마치 다시 돌려주러 갈 기세군. 그런 여자한테."
"내 친구를 그렇게 말하지 말아 줄래요?"
한순간에 차가워진 미카엘라의 태도에 에릭은 마치 강한 전류가 심장을 관통하는 것처럼 느꼈다. 미카엘라는 사교계의 여자들과는 달랐다. 언제나 솔직했고, 자신의 생각은 끝까지 고수했다. 그런 주제에 처음 아델라로 왔을 때 시골출신이라며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욕을 하면 참다 참다 혼자 있을 때 쉽게 감정을 터트렸다. 속세에 때 묻지 않은 자연 속에서 그녀를 포함한 요정들과 살아서인가. 처음에는 쉽게 감정적으로 무너지곤 했다. 물론 그렇다고 약한 여자는 아니었다. 대화로 풀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지적으로 과시하기도 하면서 나중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이유로 미카엘라를 좋아하게 되었으니까....... 그래서 요즘 에릭의 기분이 썩 좋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그는 그런 건 자신만이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왜 그 여자한테 저걸 줬지? 그 정도는 대답해 줘. 어째서 나한테 말조차 하지 않았는지도."
"별로 대답하고 싶지도 않고, 나도 내 기분이라는 게 있어요. 당신이야말로 왜 이러는 건데요?"
"왜냐하면, 난 네 생각과는 달리 꽤 속이 좁은 남자니까."
".......아파요."
그제야 에릭은 어느샌가 자신이 미카엘라의 손목을 꽉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아 살며시 내려놓았다. 미안, 이라고 중얼거리면서...... 미카엘라는 그 말에 조금은 기분이 풀려 천천히 말의 서두를 띄웠다.
"처음 만났을 때 마샤는 울고 있었어요. 처음에는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는데, 점점 그 파동이 세져서 결국은 참을 수가 없게 되었어요. 그래서......"
파동이 느껴지지 않는 에릭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물끄러미 쳐다보다 계속이었다.
"그래서 왜 그렇게 우냐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기는 어떤 남자를 정말 사랑하는데, 신분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대요. 한참을 그렇게 하소연하다가 나중에는 더 울 기운도 없이 지쳐 버리자 제가 부럽다고 말하더군요. 왠지 모르지만 미안해서...... 그리고 장로들이 준 그 원석은 남자가 떠날 때 붙들어 잡아놓는 돌이에요. 난 당신이 내가 싫어서 떠난다고 해도 억지로 붙잡을 생각은 없어요. 물론 꽤 힘든 일이 되겠지만요."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착잡함이 느껴지는 건 미카엘라의 착한 성격 탓인가 싶다. 타인의 감정으로 말미암아 저만큼의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을 에릭은 여러 번 보아 왔다. 그러나 겨우 그 정도로 감정이 뒤틀리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정신이 흐트러진다. 마지막으로 미카엘라가 방에서 뛰쳐나가는 모습까지 보고 나서야 에릭은 겨우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여자의 모습은 쓸쓸해 보였다. 차가운 느낌....... 그리고 묘한 심사의 뒤틀림. 화려한 궁전 복도의 장식은 그것을 도드라지게 했다. 사정을 모르는 누군가는 그녀에게 다가와 친근하게 군 모양이지만 여자는 어울려 줄 생각이 없었다. 평범하게 지내기에는 감정이 너무 메말라 버렸기에. 다만, 어쩌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장단을 맞춰 주었을 뿐이었다.
"마샤!"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 마샤는 불쾌감을 표시하다가 이내 웃는 낯으로 고개를 돌렸다. 실제로는 저런 인간-아니, 어제의 이야기로 짐작하건대 인간도 아니지-하고 상종하는 것도 싫었다.
"일어나셨군요. 식사 준비를 시키겠습니다."
"음...... 혹시 기분 안 좋아? 왠지 우울해 보여."
"......."
당신 때문이야, 마샤는 그렇게 톡 쏘아주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아직은, 아직은 때가 아니다. 좀 더 기다리면 기회가 올 거야, 라며.
"그보다, 너 그거 떨어트렸어. 침실 밖에 있길래 에릭이 주웠나 봐."
"아......"
그제서야 호주머니를 뒤지며 원석을 찾아본 마샤가 어쩔 수 없이 미카엘라의 손에서 푸른 것을 건네받았다. 필시 어제 침실을 지나가다 떨어트린 것이다. 그리고 그때 알아버린 내용은....... 미카엘라에게 있어 치명적인 사실.
마샤는 눈을 감고 잠시 상황을 정리했다. 미카엘라는 몰라도 군주라면, 그리고 이 원석을 받았다고 하면 분명히 입막음을 시킬 것이다. 그녀가 누설했을 시에 생길 사태는 비단 미카엘라에게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여자만은 확실히 파멸시킬 수 있다. 이건 확실하다.
그렇다면 자신이 택해야 할 길은 단 하나밖에 없다.
"마샤?"
"아, 전 급한 일이 생겨서 이만......."
"으응....... 알았어. 나중에 내 방으로 오는 거 있지 마!"
마샤는 그 말을 무시하고 아마 절대로 만날 일 따위는 없으리라며 비웃음을 흘렸다. 부디 오늘이 저 여자에게 있어 최고의 날이 되기를. 그럼 내일의 불행은 죽음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강렬한 것일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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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ㅋㅋ 감사해요~ 그보다 줄 간격 좁지 않나요? 음.. 전 괜찮다고 보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 같아서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