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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6일 연중 제32주일
지혜는 우리의 일상과 함께 있다. 이것을 발견하고 깨닫고자 갈망하고 찾아 나서는 사람만이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우리의 삶은 충만한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머무는 자리이다(제1독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고 죽음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는다. 곧 믿는 이들은 살아서도 주님과 떼어 놓을 수 없지만 죽음도 떼어 놓을 수 없다는 뜻이다. 죽음이 우리를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데려가신다(제2독서). 슬기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는 준비하고 깨어 있는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의 차이다. 과거에 매달리는 것도,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도 깨어 있음이 아니다. 늘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 깨어 있는 삶이다(복음).
제1독서:<지혜를 찾는 이들은 그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6,12-16
12 지혜는 바래지 않고 늘 빛이 나서 그를 사랑하는 이들은 쉽게 알아보고 그를 찾는 이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3 지혜는 자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미리 다가가 자기를 알아보게 해 준다.
14 지혜를 찾으러 일찍 일어나는 이는 수고할 필요도 없이 자기 집 문간에 앉아 있는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15 지혜를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완전한 예지다. 지혜를 얻으려고 깨어 있는 이는 곧바로 근심이 없어진다.
16 지혜는 자기에게 맞갖은 이들을 스스로 찾아 돌아다니고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상냥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그들의 모든 생각 속에서 그들을 만나 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서 말씀입니다. 4,13-18<또는 4,13-14>
짧은 독서를 할 때에는 < > 부분을 생략한다.
13 형제 여러분, 죽은 이들의 문제를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4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 <15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 말을 합니다. 주님의 재림 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죽은 이들보다 앞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16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17 그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18 그러니 이러한 말로 서로 격려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5,1-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7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8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서울] 준비하는 사람/고준석 신부
세계적인 명지휘자 이탈리아의 토스카니니(1867∼1957)가 걸은 지휘자의 길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토스카니니는 원래 첼로 연주자였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는 아주 심한 근시여서 앞에 놓인 악보조차 잘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관현악단에서 첼로 연주를 할 때마다 토스카니니는 항상 악보를 미리 외워서 연주회에 나가곤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번은 연주회 직전에 갑자기 지휘자가 공석이 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악단에서는 지휘자를 대신할 사람을 바쁘게 찾았습니다. 악단을 지휘하기 위해선 연주할 곡을 전부 악보 없이 외우고 있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오케스트라의 단원 중에 곡을 전부 암기하여 외우고 있던 사람은 오직 토스카니니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임시 지휘자로 발탁되어지휘봉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19세, 바로 세계적인 지휘자 토스카니니가 탄생한 순간이었습니다.
준비된 사람에게 늘 새로운 기회가 찾아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서 “항상 깨어 주님의 날, 주님의 시간을 잘 준비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우리 신앙인의 준비 자세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비유에서는 열 처녀 중에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을 맞을 준비로써 등잔뿐만 아니라 기름까지 준비했습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신랑을 위해 충분한 기름이 필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충분한 기름으로써 등불을 밝히며 밤늦게 찾아온 신랑을 마중 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잔만 준비했지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기에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항상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일이 준비와 실천에 따라 그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철저한 준비와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정직과 성실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그리스도인이라는 등잔이 있습니다. 하지만 등잔만 가지고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등잔에 참 그리스도인이라는 진정한 신앙생활의 기름이 필요합니다. 착한 행실과 열심히한 기도생활, 그리고 이웃을 위한 희생과 봉사가 참 그리스도인이라는 기름이라고 하겠습니다.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 기름을 충분히 준비했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우리도 항상 준비하는 생활로 우리의 기름을 채워야하겠습니다.
[마산] 등만큼 중요한 기름/한주인 신부
우리 신앙인들은 매 주일마다 주님을 만나 뵙기 깨끗하게 샤워를 하고, 머리를 다듬고, 꾸겨진 옷을 정성들여 다려 입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옷을 입으면서 흐트러진 머리를 다듬고, 거울을 보며 ‘이만하면 우리 주님께서도 흡족해하시겠지?’ 라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미사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이 과정이 우리들이 주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단계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을 먼저 말씀해 드리고자 합니다.
초등학교 시절 한산대첩축제 기간이 되면 어김없이 학교의 모든 학생들이 만드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산대첩 거리행렬을 위한 갓등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학생들이 자신의 개성을 살려서 타원형으로 만들기도 하고, 사각형으로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갓등의 형틀이 완성되어지면 알록달록하게 예쁜 그림도 그려 넣었습니다. 축제날. 해질 무렵이 되면 아이들은 각자 정성들여 만든 갓등을 들고 공설운동장에 집결해 갓등행렬을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몇몇은 가장 중요한 것을 준비해 오지 않은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초였습니다. 정성들여 만들었던 갓등을 아름답게 비춰줄 촛불이 없다면 갓등의 아름다움은 어둠 속에 가리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의 갓등을 환히 밝힐 수 있도록 준비했던 초반을 나눠 준 기억도 있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게 꾸며진 것이라 할지라도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근본 된 요소가 빠지게 된다면 아무 소용이 없음을 말해 주는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를 들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이들을 말씀해 주십니다. 이 열 처녀 역시 혼인찬치에 들어가기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옷을 차려 입고, 신부의 집에서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만 준비하고 기름을 준비하지 않아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반면에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환히 밝힐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여 혼인잔치에 신랑과 함께 기쁜 마음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나라 혼인잔치에 초대 받은 이들입니다. 초대 받은 이들로써 우리는 외형적인 것들을 갖춰 입고 준비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우리를 알아 볼 수 있는 충분한 기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준비해야 할 기름은 무엇이라 생각되어집니까?
그것은 영적 ․ 내적 기름입니다. 주님에 대한 강한 믿음과 주님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마음에 가득 채우고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만 머물러 있다면 충분한 기름을 준비한 것이라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이라야 충분한 기름을 준비한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충분한 영적 기름으로 등을 밝히는 이들을 주님께서는 알아보시고 당신의 혼인잔치로 초대해 주실 것입니다.
[부산] 마태 25, 1-13./ 서공석 신부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하였습니다. 그 이야기에는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색한 부분도 있습니다. 먼저 신랑 한 사람에게 열 처녀가 결혼하겠다고 나선 것 같은 오해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유대인들의 결혼 관습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신랑과 신부가 약혼하면, 일 년 정도는 각자의 집에 머물게 합니다. 결혼식을 거행할 날이 오면, 신랑이 신부 집에 와서, 신부와 신부의 친구들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갑니다. 그리고 많은 손님들을 초대하여 며칠 동안 잔치를 합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열 처녀는 신부와 함께 잔치에 갈 신부의 친구들입니다.
또 하나 어색한 것은 처녀들이 등불을 준비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등불만 준비한 것이 아니라, 그 중 다섯 사람은 예비 기름까지 준비하였습니다. 본시 신랑은 등불이 필요 없는 낮에 와야 합니다. 만일 등불을 필요로 하면, 그 준비는 당연히 신랑의 몫입니다. 예비 기름을 미리 준비했던 다섯 처녀가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누어주지 않는 것도 이상합니다. 함께 초대받은 처지에 기름이 있으면, 기쁘게 나누어 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신랑도 이상합니다. 기름을 사러 갔다가 다섯 처녀가 늦게 도착하니까, 신랑은 ‘나는 그대들을 모른다.’고 말하면서 문을 열어 주지 않습니다. 잔칫날 잔칫집 문을 잠근 것도 이상하고, 그 기쁜 날, 늦게 도착한 신부 친구들을 신랑이 그렇게 거절하는 것도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나라를 그 시대 혼인 잔치에 비유하면서 여러 가지 무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비 기름을 준비한 사람들을 ‘슬기로운’ 사람이라 부르고,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이라 부릅니다. 그러면서 슬기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운명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서가 말하는 슬기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복음서에 물어 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비유이야기를 제공한 마태오복음서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제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입니다.”(7 24). 그리고 이어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제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을 것입니다.”(7, 26).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이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다는 말입니다. 듣고 실천해야 하는 말씀의 내용을 복음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누구든지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것입니다.”(7, 21). 결국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이가 슬기로운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이야기에 보면, 하느님은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하는 분입니다. 잔치는 구약성서(이사 25, 6)와 신약성서(루가 22, 30)가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잔치는 베푸는 사람이 있어서 열리고, 초대받아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기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고,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기쁨이고 즐거움입니다. 그렇다면 마태오복음서가 말하는 슬기로움은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의 일을 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실천하다가, 유대교 지도자들로부터 배척당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병을 고쳤다, 혹은 마귀를 쫓았다는 말은 모두 하느님의 선하심을 실천하였다는 말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까지 사랑하라’, ‘달라는 사람에게 거저 주어라’, 이런 예수님의 말씀들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우리도 실천하여 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삶의 공간에는 하늘과 땅이 있고,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대도시 빌딩의 숲 속에서, 아스팔트를 밟으며, 경쟁의 대상으로만 보이는 사람들과 더불어 삽니다. 우리는 하늘도 보지 않고, 땅도 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웃도 함께 사는 동료이기보다는 우리가 사는 데에 장애물이거나 경쟁자로 보일 때가 더 많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내가 더 잘 살아야 합니다. 도로에서는 내가 떠 빨리 달려야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밖에 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현대 어떤 작가는 “남은 지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늘도 땅도 보지 못하는 우리에게, 이웃은 욕심, 경쟁심, 미움, 다툼 등 우리를 지옥과 같이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으로만 보인다는 말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하는 자기반성이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땅도 공해로 죽어가고, 사람도 땅과 함께 죽어가고 있습니다. 오염된 공기와 물을 마시고, 오염된 음식을 먹으면서, 우리는 이 지구를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이웃은 우리 불행의 원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세상은 하늘도 두렵지 않고, 땅도 소중하지 않으며, 이웃도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길 필요를 느끼지 않는 곳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세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우러러 땅과 사람을 생각합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슬기로운 길입니다. 신앙인은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선하심을 가슴속에 새기고, 그 선하심을 동기로 세상과 이웃을 봅니다. 하느님이 선하시기에 선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웃에게 기쁨도 주고, 즐거움도 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오늘 열 처녀에 대한 비유이야기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선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은 그와 같이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잔치를 비유의 주제로 삼은 것은 ‘하느님, 당신 생각에 그저 기쁘고 즐겁습니다,’라는 시편(9, 1) 말씀을 깨닫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 하느님과 함께 사는 슬기로운 사람이 되자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삶이라는 잔치를 베푸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우러러 세상과 이웃을 보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을 확산시키는 데에 하느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자녀가 이 세상에서 할 일이고, 죽음의 휘장을 넘어서도 하느님과 함께 있는 길입니다. ◆
[안동] 깨어 있어라/김한모 신부
찬미 예수님! |
[의정부] 슬기로운 처녀들이 준비한‘기름’은 ‘구윈 받았음에 대한 확신’이 아닐까요?/여해동 신부
오늘 복음은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은 늘 깨어있으라는 것이지요.
하늘나라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준비되어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백년 후쯤에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분명히 만약에 내가 신앙이 없다면 그 때는 이미 차가운 땅 속에 묻혀 백골이 진토 되어 흙이라도 있고 없고를 생각하고 있겠지만, 나는 확실하게 믿고 있습니다. 백년 후에는 나는 분명히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예수님과 함께 누리며 영원한 충만을 누리며 살고 있을 것이라고!
그것을 알기에 지금 조금 무시당하고 조금 손해보고 힘들고 슬퍼도 참을 수 있고, 그래도 나눌 수있고 용서할 수 있으며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을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하느님께서 내 눈물을 닦아주시고, 하느님 안에서 나는 지난 한 세상 아무
것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테니까요.
‘깨어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깨어있다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미 구원을 받은 소중하고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와 목적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에게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모르는 신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늘 그 사실을 잊은 채 살아간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저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고 가진 것은 잃지 않으려고 하며, 그것 때문에 분노하고 미워하며 고통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마치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 난다고 믿는 사람
들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 너희들이 아무리 무시당하고 손해보고 시련을 겪어도 결코 머리카락 한 올도 잃지않을 것이라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요한 5, 24).
[인천]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최화인 신부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는 오디션이나 경연에 대한 프로그램이 많아졌고 인기도 매우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현재 유행 중인 말 줄이기를 통해 위탄, 슈스케, 나가수 등의 신조어가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각각의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끼와 재능을 짧은 시간에 보여줘야 하고 그 후에는 조언자나 평가단의 칭찬이나 질책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에 최대한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다음 단계도 더 잘 통과하게 됩니다.
이러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엄청난 노력도 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시해야 하는 점이 있습니다. 바로 계속해서 그때그때의 자신의 장단점을 잘 파악하고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본인이 잘 하는 부분을 부각하고 미숙한 부분에는 더 많은 공을 들여야 인정을 받고 그렇게 하지 못하면 프로답지 못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또한, 조언자나 평가단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파악해야 합니다. 이처럼 자신을 잘 파악하고 조언자들의 조언을 잘 이해해야 발전하게 되고 인정을 받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슬기로운 처녀들은 여분의 기름을 준비합니다. 이는 곧 신랑이 빨리 올 것이라고 속단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신랑을 자신만의 생각과 틀 속에 넣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본인의 힘과 능력만으로 등을 계속해서 밝힐 수 없음을 알고 있고 이 사실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름을 더 챙긴 것입니다.
이에 비해 어리석은 처녀들은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습니다. 이는 일단 신랑이 그들의 바람대로 일찍 올 것이라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좀 더 깊게 생각해본다면, 어리석은 처녀들은 신랑 곧 ‘주님’을 본인만의 욕심과 상상 속에 가둬 넣은 것입니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 등이 꺼질 것이며 그러면 여분의 기름이 필요할 것이라는 부분까지 아직 생각하지 못한 것인데, 이는 곧 평소에 자신을 성찰하지 않고 자기 주변의 일들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기도 안에서 바라보지 않을 때의 우리네 모습과 연관 지을 수 있습니다. 결국, 어리석은 처녀들은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과 주님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을 때의 우리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 모두를 자신 안에 담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안에서, 오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부산] 죽어서도 그리운 이름/김강정 신부
늘 두려운 게 한가지 있습니다. 심판대에서 주님을 만나야 할 걱정입니다. 그날에 제가 드릴 수 있을 말씀이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기껏 생각해낸 한 마디가 “저는 사제로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라는 말뿐이었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그것 말고는 도무지 자랑삼을 게 없습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주님 앞에 섰을 때, 이 못난 사제의 고백이 부디 초라한 변명이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수도자로 일생을 봉헌했습니다.” “저는 레지오 단장을 했고, 사목 위원이었고, 성가대를 했으며, 반봉사자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주님은 이런 화려한 업적들을 묻지 않으실 겁니다. 그 속에서 빠뜨린 나의 진짜 삶을 요구하실 겁니다. 정작으로 중요한 건 기름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과 미련한 처녀들의 차이는 아주 미미했습니다. 미련한 처녀들한테서 기름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기름이 약간 모자란 것뿐이었습니다. 이 근소한 차이가 빚어낸 엄청난 결과를 결코 잊어선 안 될 겁니다. 사제로서 수도자로서 평신도로서 소명의 불을 밝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직분에 합당한 기름이 필요할 겁니다. 내실이 결여된 외적인 열심은 아무런 공로가 되지 못할 겁니다.
기름이 떨어져 애를 태우는 이들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름 없이 등잔만 들고 주님을 만나러 가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더는 어리석은 선택은 없었으면 합니다. 우리에게서 가장 우선적인 선택은 오로지 주님 한 분뿐, 우리를 우리답게 지켜주는 이름은 그 이름밖에 없습니다. 주님 외에 어떠한 것도 그 이름을 대신할 수도 앞서서도 안 될 겁니다. 우리에게서 주님을 빼고서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얼른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날 당신과의 만남이 어색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신 얼굴이 전혀 낯설지 않고, 늘 뵈온 듯 편안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날을 위해 오늘의 준비를 서두르겠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오실지 보다는 어떤 모습으로 맞을지를 먼저 생각하며 살겠습니다. 포기할 건 포기하고, 버릴 건 버리며, 잡을 건 잡겠습니다. 잡아야 할 걸 놓치고 사는 어리석은 짓은 안 할 겁니다. 버려야 할 걸 붙들고 사는 미련은 다신 없을 겁니다. 두 번은 당신 손 놓는 일 없을 겁니다. 심판 하나만을 생각하고 그날 하루만 보면서 살겠습니다. 그날 제 영혼은 날개를 달고 당신과 아름다운 비행을 할 겁니다. 당신을 향해 훨훨 드높이 날아오르는 순간, 어쩌면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여행이 시작되고 있을 겁니다.
[춘천] 충분한 준비/안기민 신부
“함 사세요!” 하는 소리를 요즈음 동네 어귀에서 듣기가 힘들다. 그나마 간혹 드라마를 통해서 그 모습을 간접적으로 볼 수가 있다. 신부측은 함을 지고 온 함잡이를 신부의 집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돈 봉투를 여러 장 충분하게 마련하고 술상도 넉넉히 준비해 놓는다. 이런 것들이 부족하다 싶으면, 함잡이는 좀처럼 움직이려고 하지 않고, 그 순간부터 신부 측과 실랑이가 벌어진다. 물론 나중에 함잡이는 돈 봉투를 마지 못하는 듯 안주머니에 슬그머니 챙기고 술잔을 몇 잔 받아 마시고 못이기는 척하면서 신부의 집으로 들어가서 함을 건네 준다. [군종] 깨어있음, 준비되고 충실한 삶/박정호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는 앞서 24장의 종말에 대한 여러 비유에 이어 종말을 대비하여 준비된 삶을 살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계속하여 깨어있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열 처녀 중에서 슬기로운 처녀이든 어리석은 처녀이든 결국은 그들 모두 신랑을 기다리다가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깨어있으라고 했는데 모두 잠들었으니 뭔가 이상합니다. 하지만 이 비유는 깨어있음의 본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깨어있음은 그 시간을 제대로 맞추기 위한 대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간이 언제가 되어도 상관없는 충실한 삶이 바로 깨어있음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야곱의 우물 시작기도
이것이 한국의 결혼 풍습 중에 한 면이라면, 오늘 복음 속에서 보여주는 팔레스티나 지방에서 예수님 당시의 결혼 풍습은 다소 생소하게 보인다. 그 지방에서는 결혼을 할 때, 신부 측에서 열 명의 처녀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신부와 함께 신랑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 우리나라‘함’은 밤에 오는데, 팔레스티나에서 ‘신랑’은 신부 측에서 방심한 틈을 타서 예기치 않은 때
에 온다. 그 때문에 신랑이 한 밤중에 오기도 한다. 신랑이 일단 도착하면 문이 닫히게 되고 뒤에 오는 사람은 그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다. 이 결혼 풍습을 통해, 오늘 복음에서 등에 기름이 떨어져 기름을 사느라 늦게 잔칫집 문을 두드린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잔치에 참여하지 못 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깨어 있고 준비하고 있는 것’이 팔레스티나 결혼 풍습에서 실제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혼 풍습의 비유를 들면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깨어 있고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5,13).
그렇다면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은 무슨 문제가 있었는가? 그 처녀들은‘ 충분히’ 준비하고 있지 않았다. 슬기로운 처녀들과 마찬가지로 등에 불을 켜고 있었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 등에 기름이 다 되어서 그만 꺼지고 만 것이다. 이것이 졸음을 쫓고 졸면서 신랑을 기다리나, 끝내 신랑과 함께 잔칫집에 들어가서 향연을 누리지 못한 원인이 된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깨어 있다’는 의미를 다시 묵상하게 된다. ‘깨어있다’는 것은 신앙적으로 ‘충분한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충분한 준비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늘‘ 지금, 현재’ 시점에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신앙생활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내 자신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가 하늘나라 잔치에 참여하고, 하지 못하는 관건이 된다는 것이다. 내 자신이 ‘지금, 현재’ 신앙인으로서 성실하게 살아갈 때 내가 들고 있는 등에 기름이 떨어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등에 기름이 충분히 있기에, 주님이 오신다는 외침을 듣더라도 기름을 준비하기 위해서 허둥대는 일 없이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깨어 있어라.”
슬기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의 잠은 겉으로는 같은 모습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완전히 다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이 오는 시간이 예상보다 늦어져 잠들 수 있는 가능성까지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미 기름을 준비해 두었으니 잠을 자도 편안하게 잘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처녀들은 그렇게 늦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적당히 신랑이 올 시간을 자기 나름대로 계산해서 그때까지만 쓸 기름만 준비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잠은 불안한 잠일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곳에서 같이 잠들어도 어떤 이들은 편안했고 또 어떤 이들은 불안했습니다. 이 차이는 준비되고 충실한 삶과 적당한 기회주의적 삶의 차이입니다.
이걸 현대식으로 얘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의 논리가 잘못된 것임을 알지만 세상을 좀 더 편안하게 살아가기 위해, 남들과 다르지 않게 살아가기 위해 일단 세상에 맞춰 살다가, 적당한 때에 회개하고 하느님만 찾으면서 살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리고 그 적당한 때는 자꾸 늦춰지기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언제까지나 내일이 지속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당신이 의미 없이 보낸 오늘은, 다른 어떤 이에게는 그토록 간절히 바랐던 내일입니다.’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이었다고 할지라도 후회 없는 삶, 그때가 언제이든 상관하지 않고 언제나 그런 충실한 삶을 살아간다면, 언제나 우리는 주님께서 어서 오시기를 기다리며 행복하고 편안한 잠에 빠져들 수 있을 것입니다.
오소서 성령님, 제 마음에 사랑의 불을 밝혀주시어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오늘 말씀에서 “그때에”(마태 25,1)로 시작되는 비유의 서두는 미래에 닥칠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키고 있습니다.(24,44.50; 25,3145 참조)
언제였던가요? 우리나라에서도 휴거설로 민심을 흔들던 때가 있었습니다. 제2독서에서와 같이 초대교회 신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곧 재림하시리라는 기대 속에 있었지만 재림이 지연되자 혼란과 갈등을 겪었습니다.(1테살 4,1314; 마태 24,2328 참조) 마태오는 종말 심판설교(2425장)를 전하며 반드시 ‘종말은 오겠지만 그때는 모르니 깨어 있으라.’(24,3225,30)는 말씀으로 종말의 지연과 함께 종말 사건에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를 제시하는 ‘열 처녀의 비유’를 시작합니다.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25,1)는 ‘어리석은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로 구분됩니다.(2절) 산상설교에서 슬기로움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마태 7,2427; 시편 14,1 참조) 그러면 무엇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움일까요?
신랑이 늦어지자 기다리다 ‘모두 잠이 들었던’ 열 처녀와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는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대조를 이룹니다.(마태 25,56) 졸다가 잠이 들었다는 것 자체는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실책은 아니지만 ‘한밤중’은 어둠의 절정으로 위기상황에 대처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각인 동시에 새날이 시작되는 시간임을 드러냅니다. ‘신랑이 온다.’는 소리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7절) 한밤중까지 밝혀두었던 등불이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열 처녀의 소임이 언제 올지 모르는 신랑을 맞이하는 일이라면, 그들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충분한 ‘기름’을 준비했는가, 하지 않았는가의 여부가 그들의 실태를 평가하게 합니다.(24절) 왜냐하면 어리석은 사람은 위기상황이 닥쳤을 때 비로소 준비하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미리 준비하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습니다.”(10ㄱ절) 슬기로운 처녀들은 밤길을 달려온 신랑의 발걸음을 등불로 밝히며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지만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사가지고 달려왔을 때는 이미 문이 닫힌 후였습니다.(1011절) 신약성경에서 혼인 잔치는 하느님 나라와 직결되는 구원의 사건이며(22,114) 신랑은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뜻합니다.(마태 9,15; 요한 3,29; 2코린 11,2) 슬기로운 처녀들이 하느님 나라를 받아 들일 준비를 갖춘 사람들의 모습이라면, 닫힌 문을 두드리는 어리석은 처녀들은 준비되지 않은 이의 처절한 모습을 대변합니다.(마태 25,11)
또한 “주인님, 문을 열어주십시오.” 하고 청하는 처녀들에게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12절)는 신랑의 외면은,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7,2123 참조)는 사실을 반영합니다. 이는 처녀들의 어리석음과 슬기로움이 지성적인 표현이 아니라 행동의 실천과 관련됨을 나타냅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꺼져가는 등불을 바라보며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고 있던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달라.”(25,8)고 청하지만 슬기로운 처녀들이 그 부탁을 거절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9절) 이 기름은 하느님의 뜻에 따른 행실 곧 사랑의 실천을 나타내기 때문에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6,1921.24.33 참조) 따라서 어리석은 처녀들의 중대한 과오는 필요한 시간, 필요한 곳에서 밝혀야 할 사랑의 불꽃 곧 사랑의 내적 힘을 기르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5,1416; 6,2223참조) 하고 말씀하십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의 재림이 언제 어느 때가 되든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른다.’ 해도 주님의 뜻을 따라 일상을 충실히 살아가며 사랑의 불을 밝히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마태 25,13)
묵상(Meditatio)
‘오늘과 내일’이란 시간은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의 분기점이 됩니다. 오늘을 펼쳐봅니다. 언제 어느 때라도 오시는 주님을 위해 등불을 밝힐 만큼 이웃을 향한 나의 마음은 쾌청한가? 뜻밖에 오신 주님 앞에 부끄러워 감추어야 할 어둠은 없는가? 내가 주님을 만나는 그 시간이 ‘한밤중’이라 해도 언제든지 불을 밝힐 수 있는 충분한 사랑의 기름은 준비되어 있는가? 기름은 준비하되 정작 불길을 당길 심지가 없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오늘 준비하지 못한 빛은 내일의 어둠으로 떠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Oratio)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합니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이 당신을 애타게 그립니다.(시편 63,2)
반명순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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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혜는 다정한 영이요, 주님의 영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
우리는 알아야 실천할수있읍니다. 수고해주시는 아줌마 고마워요.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