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19주일입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고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십니다. 호수에서 파도에 시달리던 제자들처럼 우리도 인생과 역사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을 알아 뵙고 어떠한 시련에도 의연하게 맞서며, 아버지께서 주시는 평화를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도록 기도합시다.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성령의 이끄심으로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르오니
저희 마음에 자녀다운 효성을 심어 주시어
약속하신 유산을 이어받게 하소서.
제1독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19,9ㄱ.11-13ㄱ
그 무렵 엘리야가 하느님의 산 호렙에 9 있는 동굴에 이르러
그곳에서 밤을 지내는데,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내렸다.
주님께서 11 말씀하셨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12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13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섰다.
제2독서
<내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았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9,1-5
형제 여러분, 1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의 양심도 성령 안에서 증언해 줍니다.
2 그것은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 영광,
여러 계약, 율법, 예배, 여러 약속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5 그들은 저 조상들의 후손이며,
그리스도께서도 육으로는 바로 그들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복음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22-33
군중이 배불리 먹은 다음, 22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23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24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25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26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27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8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29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30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 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31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32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33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노력하면 수영은 배울 수 있겠지만, 기도하면 물 위를 걷는다
오늘 복음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 물 위를 걷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고 제자들은 배 위에서 세찬 바람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는 기도가 세상의 고난을 밟고 걸을 수 있는 기적을 일으킴을 보여줍니다. 바다 위는 하늘 나라, 바다 밑은 지옥, 그리고 바다는 세상을 상징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본모습을 봄으로써 자신 또한 세상의 그러한 풍파에 시달릴 존재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괴롭히는 파도 위로 뛰어내려 밟아봅니다. 기도의 본질은 내가 그리스도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존재임을 믿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이들이 하는 것은 ‘노력’입니다. 수영을 배우거나 물에 뜰 수 있는 것들을 붙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들과 함께 바다에 가라앉고 맙니다.
2004년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한공주’(2014)란 영화가 있습니다. 부모도 그녀를 보호해주지 않습니다. 새로 전학 온 학교에서 성당을 다니는 친구가 외톨이 한공주에게 이유 없이 잘 대해주기는 합니다. 공주는 수영을 필사적으로 배웁니다. 자신도 자신과 함께 당하여 다리에서 뛰어내린 친구처럼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시 가해자들의 부모가 한공주를 괴롭히자 한공주는 도망 다니며 찜질방에서 자야 하는 신세가 됩니다. 공주에게 잘해 주었던 유일한 친구도 유포된 동영상을 보며 충격을 받아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오갈 데 없는 한공주는 다리 밑으로 뛰어내립니다. 다시 생겨나는 살고 싶은 욕망으로 그동안 배웠던 수영을 시도해 봅니다. 하지만 역부족입니다. 다시 물속으로 잠깁니다. 그렇게 다시 떠오르지 못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수영이나 결국 가라앉아버릴 것에 의지해서는 이 세상에서 생명을 보존할 수 없습니다. ‘수영을 배우지 말고 믿음을 가졌더라면!’ 성당 다니는 친구는 그녀에게 그런 것과 상관없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어야 합니다. 그러면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불안과 두려움은 인정받지 못해 생깁니다. 사랑받지 못해 생깁니다. 인정받음은 곧 자존감의 상승을 의미합니다. 부모에게 인정받으면 부모와 같은 본성임을 믿게 됩니다. 사람의 부모에게 인정받으면 사람이라 믿게 되고 그러면 적어도 세상에서는 살 힘을 지니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사람들입니다.
심리상담사, ‘고코로야 진노스케’의 『너무 노력하지 말아요』란 책이 있습니다. 고코로야가 심리상담사로 처음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우선 강연을 통해 사람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최신 사은품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홍보해도 강연장은 텅텅 빌 때가 많았습니다. 고코로야는 계속 자신의 문제점을 찾아내어 바꿔보려 했습니다. ‘홍보를 잘 못 했나?’, ‘수강료를 좀 더 싸게 했으면 잘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바뀌는 것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아! 내가 내 강의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구나!’
자기 스스로 자신의 강연이 ‘더 싸고 좋은 혜택이 있어야지만 관심을 가질만하다’라는 전제로 강연의 가치가 낮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 그는 ‘내 강연은 수강료가 비싸도, 사은품이 없어도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강연이다’라고 전제를 바꾸고, 원래는 도쿄까지 올라가서 하던 강연을 사은품도 없애고 자신의 고향인 교토에서 그냥 열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강연장에 사람이 꽉 찼습니다.
고아로 남의 집 식모살이만 하시며 자라신 저희 어머니가 자살을 생각하실 때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며 나병 환자촌 있는 곳으로 방향을 바꾸시며 말씀하십니다.
“저런 사람도 사는데 너는 왜 못 사니?”
어머니는 다시 살 결심을 하십니다. 나병 환자도 잘살게 해주시는 분이 어머니도 잘살 수 있게 해주시는 분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영화 ‘명량’(2014)에서 이순신 장군은 자신을 따르지 못하는 나머지 배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이렇게 청하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 14,28)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100미터 달리기 선수가 있습니다. 100미터 달리기는 10초대에서 경기 자체가 끝납니다. 그렇다면 거의 10초대에 끝나는 경기라서 이를 준비하는 시간도 짧을까요? 그렇지 않지요. 그 짧은 순간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 비지땀을 흘리며 엄청난 양을 훈련해야만 합니다. 만약 훈련을 전혀 하지 않고 시합에만 집중하면 어떨까요? 당연히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시간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이 세상 삶을 마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길 간절히 원하시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문제는 그 나라에 들어갈 준비에 충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일이 바빠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남들도 다 그렇다면서 자신의 준비 없음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아무런 준비 없이 우리 목표에 도달할 수가 있을까요? 무작정 하느님 자비에만 맡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실제 경기보다 훈련에 쏟는 시간이 더 길 수밖에 없고 또 더 중요한 것처럼, 지금 주님의 뜻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가에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주님께 대해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훈련의 시간이 길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 시간이 결국은 모두 나를 위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바로 물 위를 걸으시어 제자들 쪽으로 가신 것입니다. 마침 제자들은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모습에 “유령이다” 하며 두려움의 소리를 지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알아볼 수 있는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맞바람이 부는 거센 파도에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알아보지 못한다고 화를 내는 주님이 아니셨습니다. 오히려 용기를 불러일으켜 주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을 알아보는 것은 편하고 쉬운 삶 안에서만 이뤄져서는 안 됩니다. 거센 파도가 이는 고통과 시련에서도 주님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주님을 만나는 결과만이 아닌 계속된 훈련, 즉 믿음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라고 베드로가 청합니다. 예수님의 “오너라.”라는 대답에 그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걷습니다. 그러나 물에 빠지고 맙니다. 주님만을 바라봐야 했는데, 바로 거센 바람에 두려움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으뜸 제자인 베드로도 훈련이 계속 필요했습니다. 하물며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는 어떠해야 할까요? 늘 깨어 기도하면서 주님께 대한 믿음의 훈련을 계속해야 합니다. 참 하느님의 아드님과 늘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립도생(本立道生) 기본이 바로 서면, 나아갈 길이 보인다(논어 학이 편).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