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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本文)은 논술(論述)입니다.
이번에는 필자(筆者)가 조선(朝鮮)의 “삼경”(三京)이 무엇인지 궁금하여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찾아보았다.
아래 <자료 1>의 <조선왕조실록> 주석(註釋)에 따르면,
고려(高麗) 태조(太祖) 때의 “삼경”(三京)은 중경(中京), 서경(西京), 동경(東京)이라고 한다.
동경(東京)은 경주(慶州)이고, 서경(西京)은 평양(平壤)이다.
중경(中京)은 개경(開京) 즉 개성(開城)이다.
여기서 동(東)쪽과 서(西)쪽의 기준은 중경(中京)=개경(開京)이어야 하는데,
한반도(韓半島)를 고려(高麗)의 중심(中心)이라고 한다면, 동경(東京)과 서경(西京)의 방위(方位)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의 한반도(韓半島)가 “휴전선”(休戰線)을 기준(基準)으로 남(南)과 북(北)으로 나뉜 것처럼, 동(東)과 서(西)를 구분하는 기준도 마찬가지이다.
기준점(基準點)이 똑같다면, 남(南)-북(北) 또는 동(東)-서(西)가 짝을 이루어 존재하여야 한다.
또한 아래 <자료 2>의 <위키백과>에 따르면,
고려(高麗) 문종(文宗) 21년 (1067년) 양주(楊洲)에 남경(南京)을 설치한 후에는 “사경”(四京)이 되었으나, 경주(慶州) 즉 동경(東京)은 존폐(存廢)가 잦아서, 통상 “삼경”(三京)이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려(高麗) 시대에는 지리적 위치에 관계없이 “북경”(北京)이라는 용어(用語) 자체가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도대체 방향(方向)의 기준이 어디에 있었기에 북경(北京)이 없는 것일까?
그리고 무슨 이유로 경주(慶州)=동경(東京)이 소홀히 취급되었는가?
<반도사관(半島史觀)>에 따르면, 경주(慶州)는 상대적으로 일본(日本)/왜(倭)와 가까운 지역이므로 중요한 곳이었다.
지금부터 조선(朝鮮) 시대의 “삼경”(三京)은 어디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아래 <자료 1>의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朝鮮) 태조(太祖) 때에는 동경(東京), 서경(西京)과 함께 개경(開京) 즉 고려(高麗) 시대의 중경(中京)이 있었으므로 조선(朝鮮)의 도읍지(都邑地)인 “서울” 즉 한성(漢城)을 포함하면 실질적으로 “사경”(四京)이 된다.
고려(高麗) 시대의 호칭(呼稱)으로 대응시키면,
중경(中京)=개경(開京)=개성(開城), 서경(西京)=평양(平壤), 남경(南京)=서울=한성(漢城), 동경(東京)=경주(慶州)가 되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주석(註釋)에 따르면,
조선(朝鮮) 성종(成宗) 때의 삼경(三京)은 i) 중경(中京)=개성(開城)), 서경(西京)=평양(平壤), 남경(南京)=서울이거나, ii) 중경(中京), 서경(西京), 동경(東京)=경주(慶州)이거나, iii) 서경(西京), 남경(南京), 동경(東京)이라고 한다.
조선(朝鮮) 선조(宣祖) 때의 삼경(三京)은 개성(開城), 평양(平壤), 서울=한성(漢城)이라고 한다. 즉 중경(中京), 서경(西京), 남경(南京)이 된다.
어떤 경우에는 삼경(三京)을 개성(開城), 평양(平壤), 경주(慶州)라고도 한다. 즉 중경(中京), 서경(西京), 동경(東京)이 된다.
조선(朝鮮) 광해군(光海君) 때의 삼경(三京)은 평양(平壤), 서울=한성(漢城), 경주(慶州)를 말한다. 즉 서경(西京), 남경(南京), 동경(東京)이 된다.
조선(朝鮮) 순조(純祖) 때의 삼경(三京)은 개성(開城), 평양(平壤), 서울=한성(漢城)이라고 한다. 즉 중경(中京), 서경(西京), 남경(南京)이 된다.
위에 인용된 <조선왕조실록>의 주석(註釋)에 따르면,
조선(朝鮮)의 삼경(三京)은 경우에 따라 그 구성이 달라지는 모습을 보인다.
고려(高麗) 시대의 경우와 비슷하다.
그 공통점은, 지리적 위치에 관계없이 “북경”(北京)을 언급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아래 <자료 3>의 <조선왕조실록> 기사를 살펴보면,
조선(朝鮮)의 삼도(三都)는 한성(漢城), 개성(開城), 평양(平壤)을 가리키므로, 경주(慶州)=동경(東京)의 중요성이 떨어짐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려(高麗) 시대와 비슷하다.
그렇다면, 조선(朝鮮) 시대의 “京兆”(경조)는 무엇인가?
아래의 <자료 4, 5>에 따르면,
경조(京兆)는 “서울” 또는 “장안”(長安)을 가리키며, “천자(天子)가 계시는 땅”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조선(朝鮮) 시대에 “서울”을 무슨 이유로 “한성부”(漢城府)라고 호칭(呼稱)하였는지 현재 널리 알려진 ‘일반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살펴본다.
조선(朝鮮)의 도읍지(都邑地)인 “서울”은 고려(高麗) 시대에 양주(楊洲)=남경(南京)이었는데, 그 후 1308년 충렬왕(忠烈王) 34년에 삼경(三京) 제도가 폐지되어 “한양부”(漢陽府)로 지위가 격하(格下)되었다. 동시에 서경(西京)은 평양부(平壤府), 동경(東京)은 계림부(鷄林府)로 바뀌었다.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때에 이르러 배원(排元) 정책을 취하고 삼경(三京) 제도가 부활되었고, 남경(南京)의 궁궐(宮闕)을 중수(重修)하여 한양천도론(漢陽遷都論)이 대두되었다. 한양천도론(漢陽遷都論)은 우왕(禑王) 때 더욱 고조(高調)되어, 1382년 9월과 그 후 공양왕(恭讓王) 때 잠시 천도(遷都)하기도 하였다.
조선(朝鮮) 개국(開國) 후, 한양부(漢陽府)=남경(南京)은 1395년(태조 7년) 6월 6일에는 “한성부”(漢城府)로 개칭(改稱)되었으므로, 서울=경조(京兆)는 “한성부”(漢城府)를 가리킨다.
아래의 <자료 7>에 따르면,
한성부(漢城府)는 조선(朝鮮) 시대 “서울”의 이름이고, 오부(五部)는 한성부(漢城府)의 행정구역(行政區域)을 말한다. 오부(五部)는 동(東), 서(西), 남(南), 북(北), 중(中)으로 나뉜다.
필자(筆者)가 지금까지 <조선왕조실록>을 검토한 결과,
고려(高麗) 시대와 마찬가지로, “북경”(北京)이라는 용어(用語)를 찾을 수 없었다.
역사기록(歷史記錄)에 등장하는 중국(中國)의 북경(北京)과는 무슨 관계가 있었을까?
예를 들어, 한반도(韓半島)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평양(平壤)을 “북경”(北京)이라고 불렀어도 무방(無妨)하였을 것 같은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기존(旣存)의 명칭(名稱)을 고수(固守)한 흔적만 보인다.
참고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서문(序文)에 따르면,
조선팔도(朝鮮八道)는 사방(四方)의 복판에 있는 것을 경기(京畿)라 하고, 서남(西南)은 충청(忠淸), 동남(東南)은 경상(慶尙), 남(南)쪽에 치우친 것은 전라(全羅), 정동(正東)은 강원(江原), 정서(正西)는 황해(黃海), 동북(東北)은 영안(永安)=함경(咸鏡), 서북(西北)은 평안(平安)이라고 한다.
동북(東北)과 서북(西北)의 지역명칭(地域名稱)에는 모두 “안”(安)이라는 한자(漢字)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특히 북방(北方)의 안위(安危)를 염두(念頭)에 둔 것 같다.
결국, 조선팔도(朝鮮八道)는 이른바 방패연(防牌鳶) 모양이므로,
경기(京畿)를 중심으로 다른 도(道)를 거치지 않고서도 각(各) 도(道)에 직접 갈 수 있는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방패연(防牌鳶) 모양을 전제(前提)로 단순히 논리적으로만 따진다면,
조선팔도(朝鮮八道)는 서울[京畿]=중경(中京)을 중심으로 동경(東京), 서경(西京), 남경(南京), 북경(北京)으로 구성되는 “오경”(五京)이어야 하는데 “사경”(四京)이고, 게다가 당연히 존재하여야 되는 북경(北京)이라는 용어(用語) 자체가 없다.
이것은 조선(朝鮮) 시대의 “한성부”(漢城府)=“서울”을 오부(五部)의 행정구역(行政區域) 즉 동(東), 서(西), 남(南), 북(北), 중(中)으로 나눈 사례(事例)에 비추어 살펴보면 납득(納得)이 안 되는 내용이다.
<대륙사관(大陸史觀)>에 따르면, 조선(朝鮮)의 강역(疆域)은 엄청나게 넓었으므로,
조선팔도(朝鮮八道)를 동서남북(東西南北) 방향으로 크게 구분하면,
서울[京畿]=중경(中京)을 중심으로 동(東)조선(朝鮮), 서(西)조선(朝鮮), 남(南)조선(朝鮮), 북(北)조선(朝鮮)으로 나눌 수 있다.
따라서 각(各) 조선(朝鮮)을 대표하는 “경”(京)이 하나씩 있어야 하고, 북(北)조선(朝鮮)에는 “북경”(北京)이 있어야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筆者)가 앞에서 검토한 <조선왕조실록>의 내용과 차이가 난다.
이것은 역사기록(歷史記錄)의 왜곡/날조(歪曲/捏造)와 어떠한 관련이 있을까?
추가적으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서문(序文)에는,
i) “경(京)이 둘이고, 부(府)가 넷, 대도호부(大都護府)가 넷, 목(牧)이 20, 도호부가 44, 군(郡)이 83, 현(縣)이 1백 7십 3이니 안팎의 산하(山河)의 세로와 가로가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ii) “경도(京都)의 첫머리에 총도(摠圖)를 기록하고, 각각 그 도(道)의 앞에 도(圖)를 붙여서 이 양경(兩京) 8도로 50권을 편찬하고 정서하여 바치나이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양경(兩京) 즉 경(京)이 둘이라고 하는데,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
고려(高麗) 시대의 양경(兩京)은 경우에 따라 “개성(開城)과 평양(平壤)” 또는 “개성(開城)과 경주(慶州)”이었다고 한다.
반면, 조선(朝鮮) 초기(初期)의 양경(兩京)은 “서울과 개성(開城)”이었다.
그런데 “서울”은 나중에 “한성부”(漢城府)로 바뀌었으므로, 양경(兩京)은 “개성(開城)과 평양(平壤)”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개성(開城)과 경주(慶州)”인가?
지금까지 검토한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
조선(朝鮮) 태조(太祖) 때에는 ‘실질적’으로 중경(中京)=개성(開城), 서경(西京)=평양(平壤), 남경(南京)=서울=한성(漢城), 동경(東京)=경주(慶州)가 존속(存續)하여 “사경”(四京)이었는데,
후대(後代)에는 서울=한성(漢城), 개성(開城), 경주(慶州)를 포함하는지 여부에 따라 “삼경”(三京)이라고 하였다.
서경(西京)=평양(平壤)은 어느 경우이든 다 포함되었다.
조선(朝鮮)의 삼도(三都) 즉 한성(漢城), 개성(開城), 평양(平壤) 중에서도 평양(平壤)은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하고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단군(檀君)과 기자(箕子)가 그곳에 도읍(都邑)하였기에, 고대(古代)부터 역사적(歷史的) 의미가 매우 깊은 지역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서문(序文)에는,
“신 등이 지금 세상에 살면서 역대의 사적을 모두 찾아야 하고, 서울에 거처하면서 사방의 먼 곳까지를 상고하자니, 이것은 들고 저것은 빠뜨리며 그릇된 것은 그대로 따르고 진실은 잃은 것을 어찌 면할 수 있사오리까?”
그러하오나, 책을 펴서 그 일을 상고하고 도(圖)를 펼쳐 그 자취를 본다면 태산(泰山)에 오르거나 황하(黃河)의 근원을 끝까지 파고들 것 없이 8도의 지리가 마음과 눈에 환하여 문을 나가지 않고도 손바닥을 보듯이 분명히 알 것입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조선(朝鮮) 성종(成宗) 때에도 역사지리(歷史地理)에 관하여 “그릇된 것은 그대로 따르고 진실(眞實)은 잃은 것을 피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매우 어려운 사안(事案)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연구자(硏究者)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조선(朝鮮)의 지리(地理)를 논하면서 무슨 이유로 “태산”(泰山)과 “황하”(黃河)를 언급하였을까? 무슨 관계가 있었을까?
그러한 표현이 반드시 필요하였을까?
혹시 소중화(小中華) 사상(思想)의 발로(發露)인가?
(이하, 인용 자료)
<자료 1>
태조 5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3월 1일(경자) 3번째기사
예조에서 동경과 서경의 구정과 초례를 혁파하고 개경에만 남겨두기를 청하니 윤허하다
예조에서 장계(狀啓)하였다.
“전조(前朝: 高麗)의 태조(太祖)가 삼경(三京)에 순행하여 거주했던 까닭으로, 동경(東京)과 서경(西京)에 모두 구정(毬庭)과 초례(醮禮)를 설치했는데, 지금 정치를 혁신(革新)하는 초기에 마땅히 그전의 폐단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사오니, 청하옵건대, 동경과 서경에는 없애버리고 다만 본경(本京)에만 시행하게 하소서.”
그대로 따랐다.
[출처=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註) 본경(本京)은 개경(開京)이고, 초례(醮禮)는 초제(醮祭)를 이름이니 ‘성신(星辰)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자료 2>
고려(高麗)의 행정 구역은 성종 초부터 정비되었으며, 전국을 5도 양계와 경기로 크게 나뉘었다. 그 안에 3경·4도호부·8목을 비롯하여 군·현·진 등을 설치하였다.
고려의 삼경(高麗三京)은 ① 중경·서경·남경 ② 중경·서경·동경 ③ 서경·남경·동경를 일컫는다.
고려삼경은 도참사상(圖讖思想)에 따라 창건된 것으로, 시대에 따라 일정치 않았으나 대개 위의 세 가지를 말한다. 역대 왕이 이를 중요시하였다.
고려의 경(京)은 왕경(王京)으로서의 개경(開京), 태조 때 설치한 서경(西京), 987년(성종 6)에 경주를 고쳐 동경(東京)이라 하여 중경·서경과 함께 삼경의 체제를 갖추었고, 현종 때는 동경의 격(格)을 낮추어 경주라 하고 동경유수(東京留守)를 폐하였다가 후에 다시 설치하였다. 1067년(문종 21) 때 양주(楊洲)에 남경(南京)을 설치하여 실지로는 사경(四京)이었으나, 동경은 그 존폐가 잦았으므로 풍수설에 들지 못하게 되고 그 중요성을 잃게 되어 사경이라 하지 않고 보통 삼경이라 하였다.
따라서 남경(南京)이 설치되기 이전의 삼경은 중경(中京)·서경(西京)·동경(東京)이다. 남경이 설치된 후에는 왕이 순행하던 삼경은 중경·서경·남경이며, 왕경으로서의 개경을 제외한 삼경은 서경·동경·남경을 말한다.
[출처=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EA%B3%A0%EB%A0%A4%EC%9D%98_%ED%96%89%EC%A0%95_%EA%B5%AC%EC%97%AD]
<자료 3>
선조 93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10월 6일(계해) 10번째기사
병부 상서 형개가 천자의 뜻을 받들어 보낸 자문과 그에 대한 회답
(前略)
예로부터 병화를 겪은 뒤에 백성을 모으고 훈련을 하자면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자도 수십 년의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신 같은 자가 어찌 이 같은 것을 바라겠는가. 본국은 예로부터 삼도(三都)라는 칭호가 있었으니 한성(漢城)·개성(開城)·평양(平壤)이다. 평상시에는 인민들이 많고 창고도 건실하여 다른 작은 고을과 같지 않았으나 변란을 겪은 뒤로는 잔패가 더욱 심하여 수백 리 안이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後略)
[출처=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자료 4>
경조 [京兆]
중국 산시성[陝西省] 장안(長安) 일대를 관할하던 행정구역.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처음 설치하고 그 우두머리로서 경조윤(京兆尹)을 둔 이래, 수(隋)·당(唐)·송(宋)·금(金)의 시대를 거쳐 원(元)의 초기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원나라 초기 이후 이를 봉천로(奉天路)라고 개칭하였는데, 경조는 천자(天子)가 계시는 땅이라는 뜻이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자료 5>
京兆 경조
京 서울 경
兆 조 조
서울. 장안(長安)
-관련 한자어- (類義語)
都邑 도읍 都府 도부 京邑 경읍 京師 경사 京府 경부 京輦 경련 京洛 경락 京都 경도 京闕 경궐
-관련 단어-
京兆尹 경조윤 ①한성부(漢城府) 판윤(判尹)을 달리 이르는 말 ②중국(中國) 한(漢)나라 때 서울을 지키어 다스리던 으뜸 벼슬. 한무제(漢武帝) 태초(太初) 1(104 B.C.)년에 우내사(右內史)를 고친 이름. 좌풍익(左馮翊)ㆍ우부풍(右扶風)과 함께 삼보(三輔)라 이름. 경윤(京尹)
[출처=네이버 한자사전]
<자료 6>
한성부 [漢城府]
[명사]<역사> 조선 시대에, 서울의 행정·사법을 맡아보던 관아. 태조 5년(1396)에 한양부(漢陽府)를 고친 것으로 삼법사(三法司; 刑曹=형조, 司憲府=사헌부, 漢城府=한성부)의 하나이다. ≒ 광릉(廣陵)·한성(漢城).
[출처=네이버 국어사전]
<자료 7>
한성부(漢城府)는 조선 시대 서울특별시의 이름이자, 그 지역을 담당하여 관할하는 관청이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조선 태조는 풍수 도참설에 따라 1394년 조선의 수도를 이곳으로 정하였다. 이 당시 한성부의 영역은 현재의 종로구, 중구보다 좁은 지역이다. 이어 조선 태종 때, 궁궐을 확장하고 상가를 짓는 등 도시가 확장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도시는 많이 파괴되었다가 19세기에 많이 복구되었다. 19세기말, 각종 근대 문물이 들어왔고,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경성부로 개칭되었다. 한성부는 정2품인 한성판윤이 최고 책임자였다. 하부 행정구역은 오부와 방(坊)과 계(契)·동(洞)으로 구성되었다. 15세기 초 인구는 10만명 정도였다.
1395년(태조 7년) 6월 6일에 한양부(漢陽府)의 명칭을 한성부(漢城府)로 고쳤다. 한양 천도 당시에 궁궐과 관청이 세워진 지역에 살던 백성들을 현주(見州)로 옮기고 양주군(楊州郡)이라 고친 바 있다.
오부(五部)는 조선시대 한양의 행정구역을 말한다. 동·서·남·북·중(中)의 오부로 구성되었으며, 이 아래에는 방(坊)과 계(契)·동(洞)을 두었다. 한성부 설치 당시에는 52방을 두었다.
52방은 세종 때 서부의 3방을 폐지하여 49방이 되고, 영조(英祖) 때는 동부 6방, 남부 11방, 서부 9방, 북부 12방, 중부 8방으로 5부 46방이었으며, 그 밑에 328계(契)를 두었다. 그후 1865년(고종 2) 동부에 경모궁방(景慕宮坊)이 신설되어 47방이 되고, 계도 11개가 증가되어 339계가 되었다.
[출처=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ED%95%9C%EC%84%B1%EB%B6%80]
<자료 8>
漢城府 한성부
漢 한수 한/한나라 한, 신년 탄
城 재 성
府 마을 부
조선(朝鮮) 때 삼법사 또는 23부의 하나로, 서울의 행정(行政), 사법을 맡던 관아(官衙). 옛이름은 한양부(漢陽府)인 데, 태조(太祖) 4(1395)년에 개성(開城)에서 지금의 서울로 옮기고 이듬해에 한성부(漢城府)로 고쳐서 26대 고종(高宗) 32(1895)년에 23부(府)의 하나로 되었다가, 이듬해에 구제(救濟)로 회복(回復)하여 순종(純宗) 융희(隆熙) 4(1910)년까지 있었음. 한성(漢城)
[출처=네이버 한자사전]
<자료 9>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서문(序文)
(前略)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이 나라를 처음 세우고, 기자(箕子)가 봉함을 받았는데 모두 평양(平壤)에 도읍하였고, 한 나라 때에는 사군(四郡)과 이부(二府)를 두었습니다. 이로부터 삼한(三韓)이 오이처럼 나뉘어져 마한(馬韓)은 54국을 통솔하고,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은 각각 12국을 통솔하였습니다. 그러나 상고할 만한 도적(圖籍)이 없고, 그 뒤로는 신라ㆍ고구려ㆍ백제 세 나라가 솥발처럼 나뉘어졌습니다. 신라의 땅은 동남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지리산, 북쪽으로는 한강에 이르렀으며, 고구려는 동으로는 바다, 남쪽으로는 한강에 이르며, 서북으로는 요하(遼河)를 넘었습니다. 백제는 서남으로는 바다, 동으로는 지리산, 북으로는 한강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삼국이 강토가 비등하여 서로 위가 되지 못하다가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니 강토가 더욱 넓어졌으나, 그 말기에 이르러 영역이 날로 줄어들어 궁예(弓裔)는 철원(鐵原)에 웅거하여 후고려(後高麗)라 칭하고, 견훤(甄萱)은 완산(完山)에 웅거하여 후백제(後百濟)라 칭하니, 강토가 갈기갈기 찢어져 통일되지 못하다가 고려 태조가 계림(鷄林)인 신라를 멸망시키고 압록강(鴨綠江)을 차지했던 후고려(後高麗)를 쳐서 삼한(三韓)을 합쳐 통일하였습니다. 성종(成宗)이 비로소 열 개의 도(道)를 정하고, 현종(顯宗)이 3경(京)ㆍ4도호(都護)ㆍ8목(牧)을 정하고 56지주(知州)ㆍ28진장(鎭將)ㆍ20현령(縣令)을 두었습니다. 예종(睿宗)이 여진을 쳐서 쫓아내서, 9성(城)을 두고 뒤에 5도(道)ㆍ양계(兩界)로 정하였으니, 지리(地理)의 융성함이 이때가 최고였습니다. 다만 서북으로는 압록강, 동북으로는 선춘령(先春嶺)을 경계로 삼았으니, 서북은 고구려에 미치지 못하고 동북은 그보다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그 역대의 지지(地誌)는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대강 보이지만 자세하지는 못하였습니다.
(後略)
[출처=한국고전종합DB,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bookList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g012&gunchaId=&NodeId=&setid=2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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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적절한 댓글이 올라오지 않는군요 마치 기술자 없는 공사장 같은 느낌입니다 / 그렇습니다 한반도에 동경과 서경 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한반도 평양을 북경이라 하고 서울을 남경이라고 하면 그건 그럴듯 합니다 / 대륙에다 옮겨 놓으면 시안이 서경 일 것이요 낙양이 동경 이 되고 호북성 무한이 남경이 겠지요 / 한헌석 선생 의 주장을 따르면 중앙아시아 아무르다여 의 주변도시가 북경[엔키=연경] 이 되겠지요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에 북경이 안나오는 이유는 그곳이 이씨 왕조의 영역이 아니고 신성구역 이었기 때문 일겁니다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 한 문제 인데도 댁글이 올라오지 않으니 적막공산 같은 느낌 입니다
최남석 선생님, 제 글에 관심을 보여주시고 코멘트하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저도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현존하는 <조선왕조실록>"을 근거로 조선(朝鮮)의 북경(北京)에 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만... 회원 여러분의 견해도 참고하고 싶습니다. 또 다른 근거 (인용)자료나 분석 논리를 제시하실 분이 계시면 좋겠습니다.
낙양이 경주라는 견해는 '''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낮은 저무덤은 영웅호걸이 몆몆이냐'''''' 하는 민요에서 처럼 실지로 그곳에서 신라 의 유명인사 들의 봉분이 발견 되었고 그에 관한 기고가 본 사이트에 올라온 적 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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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진 선생님, 감사합니다. 문제 해결의 작은 단서라도 될 수 있다면 어떤 자료든 환영합니다. 생업이 있으므로, 검색하시는 일도 쉬운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