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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야스는 진심으로 겁을 먹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라이벌 대명의 중신들을 차례로 매료시킨 ‘구애 문구’ / 2/12(목) / 프레지던트 온라인
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을까. 역사 작가인 카와이 아츠시 씨는 “요인 중 하나는 다수의 유능한 무장을 스카우트한 점이다. 거기에는 히데요시 특유의 시대 흐름을 읽는 눈과 교묘한 인심 장악이 있었다”고 전한다. (제1회)
※ 본고는 가와이 아츠시의 『전국 무장은 전쟁이 없을 때 무엇을 했는가』(포플라 신서)의 일부를 재편집한 것입니다.
■ 히데요시가 우수 인재를 모은 의외의 방법
전국시대 무장 중에서 가장 많은 용장을 스카우트한 사람은 틀림없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일 것이다. 서민 출신이라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처럼 대대로 신하로서 한 가문에 봉사하는 가문인 후다이(譜代)의 가신을 두지 못한 히데요시는 처음부터 가신단을 만들어야 했다.
시가현 나가하마시의 나가하마에서 성주가 된 시점부터, 히데요시는 가족은 물론 친척, 그리고 아내 네네 일가까지 전부 가신으로 끌어들였다. 도요토미 정권이 수립될 무렵, 그들은 모두 자신의 영지를 가지고 다이묘가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부하가 부족하다. 그래서 신속히 여러 다이묘의 가신단으로부터 유능한 인재를 스카우트한 것이다.
유명한 일화는, 군사 전략가 다케나카 한베에를 맞이했을 때의 일화이다. 유비 현덕이 제갈공명을 맞이할 때 ‘삼고의 예’를 실천한 『삼국지』 이야기를 근거로, 한베에를 자주 찾아가 부하가 되어 달라고 간청하고, 이를 승낙시켰다고 전해진다. 다만, 이 이야기는 후세의 『태공기』 등에 등장하는 내용이라 신빙성이 부족하다.
■ 라이벌 이에야스의 충신을 강탈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례는, 이에야스의 중신인 이시카와 카즈마사의 경우이다. 천정 13년(1585) 11월 13일, 아이치현 오카자키시의 오카자키성 대리인 카즈마사가 성을 떠나 도망쳐 히데요시에게 달려갔다. 이시카와 가문은 유력한 도쿠가와의 가문 다이묘로, 카즈마사는 니시미카와(현재 아이치현 중부)의 인솔자, 즉 도쿠가와 정규군의 한 축을 담당하는 최고 사령관이었다. 게다가, 한때 오다·도쿠가와 동맹 체결에 힘쓰며 이마가와 가문의 인질이었던 마쓰다이라 노부야스(이에야스의 장남)를 되찾아, 나가시노 전투에서 오다군의 지원을 얻은 인물. 그야말로 도쿠가와 최고의 공신이었다.
다음 날, 이에야스는 오카자키성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카즈마사는 아내와 신하를 데리고 도망친 뒤였고, 성은 텅 빈 껍데기만 남아 있었다. 이에야스의 동요는 격렬했으며, 불안했을 것이 분명하다. 최전선인 신슈 코모로(나가노현 코모로시)를 지키고 있던 오오쿠보 타다요에게 곧 돌아오라고 재촉하고 있다.
중신인 미즈노 타다시게도 같은 시기에 도쿠가와 가문을 떠나, 히데요시에 복종하고 있다. 카즈미사와 사전에 합의한 행동이었다.
■ 히데요시의 계략 가능성도
코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격돌한 이후 형식적인 화의를 맺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대립해 교토 진입 요청에 응하지 않아 냉전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때 히데요시가 이시카와 카즈마사 일행을 빼냈다. 카즈마사는 도쿠가와의 군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를 걱정한 이에야스는 타케다 신겐의 옛 신하를 불러 군법을 타케다류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카즈마사가 히데요시에게 달려간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히데요시와 접촉할 기회가 가장 많았던 도쿠가와 가신이 카즈마사였다는 점이다.
시라가다케 전투 승리를 축하하는 이에야스의 대리인으로 찾아간 것도, 코마키·나가쿠테 전투 후 평화 협상을 담당했던 것도 카즈마사이었다. 그래서 히데요시의 매력과 위대함을 몸소 느꼈을 테니까. 그 때문에 카즈마사는 이에야스에게 교토로 올라가 신하로서 복종하도록 설득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이를 계속 거부했다. 그 사이 카즈마사는 동료들로부터 ‘도요토미와 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되었다. 게다가 그 소문을 들은 히데요시는 일부러 공개된 자리에서 카즈마사의 인품을 칭찬하며, 십만석을 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크게 외쳤다고 한다.
이렇게 어깨가 좁아진 카즈마사는 이에야스를 포기하고, 히데요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리라. 이것이 히데요시의 계략이었다면 무섭다.
■ 123만석 → 4만석으로 줄여 신하를 빼앗는다
유능한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냉혹한 수단을 자주 사용했다. 혼노 변 이후, 오다 가문의 숙노인 냐와 나가히데는 히데요시에게 편을 들어 주었고, 그 보답으로 에치젠(현재 후쿠이현 북동부), 와카사(현재 후쿠이현 남서부), 카가(현재 이시카와현 남부) 등 총 123만석을 지배하도록 인정했다.
하지만 천정 13년(1585) 나가히데가 사망하고, 14세의 나가시게가 가문을 계승하자, 히데요시는 여러 가지 트집을 잡으며 차례로 장중의 영지를 깎아 결국 사만석까지 몰아넣었다. 게다가 그 사이에 단바 가문의 중신인 나가츠카 마사이에, 토다 카츠나리, 미소구치 히데카츠, 무라카미 요리카츠, 우에다 시게야스 등을 자신의 가신으로 삼아버렸다. 정말 비열한 스카우트 방법이다.
그런데, 히데요시에게 스카우트된 이시카와 카즈마사에 따르면, 그는 8만석의 다이묘로 발탁되고, 추가로 10만석까지 증봉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히데요시의 경우, ‘이적’ 후 대우가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주가를 옮겨 토요토미에 봉사한 무장도 많다.
예를 들어, 츠쿠고 야나가와(현재 후쿠오카현 야나가와시) 성주인 타치바나 무네모는 오오토모 가문의 가신이었고, 쿠로다 칸베이는 코데라 마사시의 중신이었다. 시마즈 요히사의 일파였던 이주인 타다무네도 히데요시에 신하로 있다.
■ '정권을 안정시키는' 스카우트란 무엇인가
그들을 윤리 의식이 없는 비겁한 사람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다시 말하지만, ‘두 군에게 봉사하지 않는다’는 무사도는 영주가 절대적인 통치를 확립한 에도 시대에 확립된 사상이다. 전국시대는 하극상의 시대였으며, 무능한 주군이라면 가신은 가차 없이 버렸고, 혹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물론, 좋은 봉사처로 옮기는 것이 드문 일도 아니었고, 비난받을 일도 아니었다. 한때 위대한 장수라면 모두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을 최대한 평가하고, 이를 온전히 활용해 주는 주군의 존재를 찾고 있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 미묘함을 잘 파악했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천하인이 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히데요시는 천하인이 된 시점부터 다른 다이묘의 중신들을 스카우트하는 척하면서 자신의 정권을 안정시키는, 꽤 정교한 수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대상이 된 인물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인 혼다 타다카쓰와 오쿠보 타다요, 다테 마사무네의 중신 카타쿠라 코주로 카게츠나,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참모 나오에 카네쓰구, 시마즈 요시히사의 무장 신노우 타다모토, 호소카와 토우코의 일문격 마츠이 야스유키 등이다.
■ 히데요시의 구애 문구
히데요시는 당당히 그들에게 ‘가신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권유하고 있다. 모두가 제안을 거절했지만, 천하인에게 연락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뛰어난 인재로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당연히 기뻐했을 것이고, 히데요시에 대한 호감을 갖게 되었다. 즉, 여러 대명가의 버팀목이 되는 인물을 교묘히 유인해 적진에 아군을 만들고, 스스로 정권을 유지하려 했다.
예를 들어,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동해 지방에서 관동으로 옮길 때, “오오쿠보 타다요는 용장이니 4만5천석을 주어 오다와라성을 지키게 하라”고 명령했다. 또한, 우에스기 케이카츠를 회즈(현재 후쿠시마 현 서부) 120만석으로 증봉·이전시킨 뒤, “나오에 카네쓰구에게 요네자와(현재 야마가타 현 남부) 30만석의 영지를 주라”고 말했다.
https://news.yahoo.co.jp/articles/d8a78229246c226029144616d75c8b729ff4b442?page=1
家康は本気でビビっていた…豊臣秀吉がライバル大名の重臣たちを次々にメロメロにしていった「口説き文句」/ 2/12(木) / プレジデントオンライン
狩野光信画 豊臣秀吉像(写真=南化玄興賛 高台寺蔵/CC-PD-Mark/Wikimedia Commons)
なぜ豊臣秀吉は天下をとれたのか。歴史作家の河合敦さんは「要因の一つに、数多くの有能な武将をスカウトしたことがあげられる。そこには、秀吉らしい時流の読みと、巧妙な人心掌握があった」という――。(第1回)
【画像をみる】家康から秀吉に寝返った武将が建てた“国宝”城
※本稿は、河合敦『戦国武将は戦がないとき、何をしていたのか』(ポプラ新書)の一部を再編集したものです。
■ 秀吉が優秀な人材を集めた意外な方法
戦国武将のなかで、最も多くの勇将をスカウトしたのは、間違いなく豊臣秀吉であろう。庶民出身ゆえ、織田信長や徳川家康のように譜代(代々、臣下として一つの主家に仕える家系)の家臣を持たない秀吉は、一から家臣団をつく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長浜(滋賀県長浜市)城主になった頃から、秀吉は家族だけでなく親戚、さらに妻・ねねの一族まで、かたっぱしから家臣に取り立てていった。豊臣政権を樹立する頃には、彼らはいずれも自身の領地を持ち、大名へと成り上がっていた。だが、それでも部下が足りない。そこで手っ取り早く、諸大名の家臣団から有能な人材をスカウトしたのである。
有名なのが、軍師の竹中半兵衛を迎えたときの逸話。劉備玄徳が諸葛孔明を迎えるに際し「三顧の礼」を以(もっ)てした『三国志』の故事にちなみ、たびたび半兵衛のもとを訪ねては、部下になってほしいと懇願し、了承させたという。ただ、これは後世の『太閤記』などに出てくる話なので、信憑性に欠ける。
■ ライバル家康の忠臣を強奪
史実として有名なのは、家康の重臣・石川数正の例だ。天正13年(1585)11月13日、岡崎城(愛知県岡崎市)代(留守居)の数正が城から出奔し、秀吉のもとへと走った。石川氏は有力な徳川の譜代大名であり、数正は西三河(現在の愛知県中部)の旗頭、すなわち徳川正規軍の片翼を担う最高司令官だった。しかも、かつて織田・徳川同盟の締結に尽力し、今川家の人質になっていた松平信康(家康の長男)を取り戻し、長篠の戦いで織田軍の支援を取りつけた人物。まさに徳川一の功臣だった。
翌日、家康は岡崎城へ駆けつけたが、すでに数正は妻子や家臣を連れて逃げたあとで、城はもぬけの殻だった。家康の動揺は激しく、不安だったのだろう、最前線の信州小諸(長野県小諸市)を守っていた大久保忠世に、すぐに戻るよう催促している。
重臣の水野忠重も時を同じくして徳川家を去り、秀吉に臣従している。数正と示し合わせての行動だった。
■ 秀吉の策略の可能性も
小牧・長久手の戦いで激突して以来、形式的な和議を結んだとはいえ、徳川家康は豊臣秀吉に反目して上洛要請に応じず、冷戦状態が続いていた。そんなおりに秀吉が石川数正らを引き抜いたのだ。数正は徳川の軍法を熟知していたので、憂えた家康は、武信玄の旧臣を召して軍法を武田流に改めざるを得なかった。
数正が秀吉のもとへ走った理由はよくわからないが、一ついえることは、秀吉に接する機会が最も多かった徳川家臣が数正だったことだ。
賤ヶ岳の戦いの勝利を祝う家康の代理として訪ねたのも、小牧・長久手の戦い後の講和交渉を担当したのも数正だった。だから、秀吉の魅力と偉大さは身に染みて感じていたはず。そのため数正は、家康に上洛して臣従するよう説いたらしい。
しかし、家康はこれを拒み続けた。そのうち数正は、同僚たちから「豊臣に通じ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疑いの目で見られるようになった。しかも、その噂を耳にした秀吉が、わざと公の場で数正の人としての器を褒め称え、十万石を与えても惜しくはないと、声高に語ったという。
こうして肩身が狭くなった数正は、家康を見限り、秀吉を頼らざるを得なくなったのだろう。これが秀吉の策略だったとしたら恐ろしい。
■ 123万石→4万石にして家臣を奪う
有能な人材を手に入れるため、豊臣秀吉は非情な手段を使うことも多かった。本能寺の変後、織田家の宿老・丹羽長秀は秀吉に味方してくれたので、これに報いるため越前(現在の福井県北東部)・若狭(現在の福井県南西部)・加賀(現在の石川県南部)など合わせて百二十三万石の支配を認めた。
だが天正13年(1585)に長秀が死去し、14歳の長重が家督を相続すると、秀吉はさまざまな難癖をつけて次々と長重の領地を削り、とうとう四万石にまで転落させた。しかもその間、丹羽氏の重臣である長束正家、戸田勝成、溝口秀勝、村上頼勝、上田重安などを自分の家来にしてしまったのである。なんともえげつないスカウト方法だ。
ところで、秀吉にスカウトされた石川数正だが、彼は八万石の大名に抜擢され、さらに十万石に加増されたという。このように秀吉の場合、“移籍”後の待遇が破格だったから、なかには自分から主家を乗り換えて豊臣に仕えた武将も多い。
たとえば、筑後柳川(現在の福岡県柳川市)城主・立花宗茂は大友氏の家臣だったし、黒田官兵衛は小寺政職の重臣だった。島津義久の一門だった伊集院忠棟も秀吉に臣属している。
■「政権を安定させる」スカウトとは
彼らを、倫理観のない卑怯者だと見るのは間違いだ。繰り返しになるが、「二君に仕えず」といった武士道は、藩主の絶対制が確立した江戸時代に確立した考え方。戦国時代は下剋上の世であり、無能な主君であれば家臣は容赦なく見限ったし、あるいはこれに取って代わった。
もちろん、良い奉公先へ移ることは珍しい話でも、非難される行為でもなかった。ひとかどの武将たるものは皆、現実に満足せず、己を最大に評価し、活かし切ってくれる主君の存在を探していたのである。極言すれば、その機微をよく把握していたからこそ、秀吉は天下人になれたともいえるのだ。
なお、秀吉は天下人になった頃から、他大名の重臣たちをスカウトするふりをして自らの政権を安定させるという、なかなか手の込んだ手法を用いるようになっている。
その対象になったのは、徳川家康の家臣である本多忠勝や大久保忠世、伊達政宗の重臣・片倉小十郎景綱、上杉景勝の参謀・直江兼続、島津義久の猛将・新納忠元、細川藤孝の一門格・松井康之らである。
■ 秀吉の口説き文句
秀吉は堂々と彼らに「家臣にならないか」と勧誘しているのだ。皆、申し出を固辞するが、天下人に声をかけられたということは、逸材と認定されたことを意味する。当然うれしいだろうし、秀吉に対して好感を抱くことになる。つまり、諸大名家の支柱たる人物を籠絡し、敵中に味方をつくり、自らの政権を維持しようとしたのだ。
たとえば秀吉は、家康を東海地方から関東へ移封した際、「大久保忠世は勇将だから四万五千石を与えて小田原城を守らせよ」と命じている。また、上杉景勝を会津(現在の福島県西部)百二十万石に加増移封したおり、「直江兼続に米沢(現在の山形県南部)三十万石の地を与えろ」と述べた。このように他家の人事に干渉してまでも、大名の重臣を優遇したのである。
そこまで自分を買ってくれた人間に、感謝しないはずがない。事実、兼続は秀吉亡きあと、豊臣家を守るために家康と敵対するよう、上杉家を誘導している。
まことに巧妙な、秀吉の人心掌握術といえよ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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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合 敦(かわい・あつし)
歴史作家
1965年生まれ。東京都出身。青山学院大学文学部史学科卒業。早稲田大学大学院博士課程単位取得満期退学。多摩大学客員教授、早稲田大学非常勤講師。歴史書籍の執筆、監修のほか、講演やテレビ出演も精力的にこなす。著書に、『逆転した日本史』『禁断の江戸史』『教科書に載せたい日本史、載らない日本史』(扶桑社新書)、『渋沢栄一と岩崎弥太郎』(幻冬舎新書)、『絵画と写真で掘り起こす「オトナの日本史講座」』(祥伝社)、『最強の教訓! 日本史』(PHP文庫)、『最新の日本史』(青春新書)、『窮鼠の一矢』(新泉社)など多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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歴史作家 河合 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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