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신문 1면 톱에 노르웨이 테러범의 뻔뻔한 사진이 게재되었다.
다들 테러와는 동떨어진 평화스런 나라라고 인정하는 노르웨이에서
우째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들의 피 속에는 바이킹의 DNA가 존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약 3년 전에 노르웨이로 캠핑여행 갔을 때의 상황을 떠 올려 본다.
2008년 8월3일 일요일 오슬로
05:20, 캠핑장 바로 앞의 도로 위를 질주하는 차 소리와 옆 텐트에서 울려 퍼지는 라디오의 음악소리에 잠이 깨었다. 기온이 내려가 추워서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시계를 보니 5시 20분이었다. 아이들도 추운지 몸을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막내는 어깨를 드러내 놓고 자고 있어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 주었다. 나 혼자 따로 덮고 있던 이불을 딸아이와 두 겹으로 같이 덮으니 추위가 덜 느껴졌다. 큰 놈은 제일 갓 쪽에 누웠는데 키가 커서 다리가 이불 밖으로 쑥 나와 있었다. 이불을 끌어다 발을 덮어 주었다.
06:00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세면도구와 수건을 들고 샤워장으로 갔다. 캠핑장은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채 숲속의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조금 전까지 소음으로 들여오던 음악소리도 그쳤다. 세상에는 어디를 막론하고 공중도덕을 잘 지키지 않는 무리들이 있는 모양이다. 질서란 자연 속에도 숨어 있어 우주조차도 그 질서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질서를 파괴하면 순간적으로는 자신에게 이로울지 모르지만 결국은 그 해가 고스란히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캠핑장의 편의시설은 몇 군데 흩어져 있었는데 가까운 샤워장은 정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화장실의 안쪽에 붙어 있어 다시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별2개짜리인 이 캠핑장은 고목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여기저기에 서 있고 바위가 군데군데 있어서 공원 같은 느낌을 주는 아주 좋은 환경이었지만 시설은 조금 낡은 편이었다. 수도꼭지가 빠진 곳도 있었고 화장실의 문고리가 고장 나서 헐거운 곳도 있었다. 세면대 옆에는 물 비누통이 비치돼 있었고 드라이기 대신에 종이 타올이 비치돼 있었다. 타올 걸이 통이 큼직하여 마치 드라이어 바람통 같았다. 옷걸이에 옷을 벗어 걸어놓고 샤워를 하였다. 샤워기는 연속식인데 온도조절은 할 수 없게 되어 있었으나 더운물은 알맞게 흘러 나왔다. 웅크리고 잤던 몸이 더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니 훨씬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아이들은 아직 곤히 자고 있었으므로 내가 아침밥을 준비를 하였다. 쌀은 엊저녁 현정이가 미리 씻어 두었으므로 전기밥솥에 앉혀 스위치만 누르면 되었다. 밥이 될 동안 카메라를 들고 어제 저녁때 산책 나갔던 바닷가로 나갔다.
캠핑장 정문에는 차단기가 내려져 있었으며 그 옆에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작은 공간이 있었다. 정문을 나와 다시 도로의 횡단보도를 건너 산책길을 따라 물가로 갔더니 거울 같이 맑은 수면에 하얀 구름이 반사된 가운데 바다 건너편 마을의 집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호수 속에 반영되고 있었다. 하늘 저편에는 하얀 뭉게구름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아침 고요(Morning calm)’란 이런 정경을 두고 표현한 말인 것 같았다. 한 무리의 갈매기들이 모래톱에 앉아 있고 어떤 놈은 공중을 날아다니다 호숫가 언덕위에 외롭게 서 있는 카페 지붕위에 올라앉았다. 물가 옆의 잔디밭에는 야생 거위 가족으로 보이는 거위 5마리가 옹기종기 모여서 서로 주둥이를 부비며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사진을 몇 컷트 찍고 캠핑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리셉션 사무장을 만났다. 어제 저녁 잠자리가 어땠느냐고 물었다. 환경도 좋고 조용해서 편안한 밤을 지냈다고 하였다. 그는 내게 바닷가에 가 보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갔던 곳이 민물 호수인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는 피요르드식 해안이라고 했다. 언뜻 보아서는 누구나 산으로 둘러싸인 민물 호수인 줄로 착각할 것 같았다.
대체 피요르드(Fjyord)란 무엇인가? 어릴 때 학교에서 배웠기 때문에 대충은 알고 있는 상태였다. 노르웨이 서해안처럼 해안선이 아주 복잡하게 내륙으로 깊숙하게 파고 들어와 해안선이 절단된 듯이 경사가 급한 지역을 말한다. 100만년 전의 북유럽은 1000m가 넘는 빙하로 덮여 있었는데 빙하는 차츰 그 두께가 늘어났다가 해빙기에 그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해안과 계곡 등으로 흘러내리게 되었다. 그 때 하천 바닥을 파내려가 계곡을 칼로 절단한 것처럼 U자형으로 깎아냈고 그 자리에 바닷물이 들어와 현재의 피요르드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외해 근처에서는 빙하의 중압(무게)에 비례해서 피요르드는 깊어지게 되었는데 깊은 곳은 1000m가 넘는 곳도 있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길고 깊은 피요르드는 송네피요르드(SongneFjord)로서 길이 204km, 깊이 1308m에 이른다고 한다. 피요르드에서는 좁은 해협으로 외해에서 내륙으로 깊숙하게 들어와 있어 눈 녹은 물이나 강물 등에 의해 염분의 농도가 낮아져 끈적끈적한 염분기를 거의 느낄 수 없다고 한다. 피오르드 해안은 아주 단순하며 커다란 U 자 모양의 계곡인데 비해 리아스식 해안은 해수면이 낮았을 때 골짜기가 생긴 것이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골짜기가 잠겨버려서 우리나라의 남해안처럼 아주 구불구불한 모양을 띠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한다.
어제 아이들이 물에 들어갔을 때 물이 짜다고 하며 바닥에 홍합껍질이 보인다고 했다. 홍합은 전 세계에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널리 퍼져 있는 조개류로 최근에는 선박의 발라스트 수에 의해 우리나라와 미국 등지에 외래종이 들어와 토종을 갈아치울 정도로 심각한 환경변화를 초래하고 있어 국제해사기구(IMO)에서는 발라스트 수 속의 포자를 멸살하거나 걸러내는 방법이 연구되고 있는 중이다. 우리나라에도 토종 홍합과는 약간 다른 지중해의 홍합이 들어와 생태계를 교란시키고 있다. 민물고기인 배스와 불루 길을 비롯하여 황소개구리도 우리나라의 하천에서 작은 어류나 곤충들을 마구 잡아먹어 씨를 말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국산 품종을 들여올 때는 장래 우리나라의 환경에 미칠 영향을 충분히 고려한 후에 결정해야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계기가 되었다. 아침 식사 메뉴로는 오래간만에 된장을 끓여내었다. 집사람이 쌈장 통 속에 된장을 담아둔 것을 아이들이 장아찌인 줄로만 착각하고 두껑을 열어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어제 저녁 무렵 현정이가 뒷 트렁크를 정리하면서 열어보고 마치 위대한 발견이라도 한 듯이 기뻐서 고함을 질렀었다. 냄비에 된장을 두어 숟갈 퍼 넣고 물을 적당히 부어 으깬 다음 양파 반쪽을 썰어 넣었다. 마른 멸치를 한 웅큼 집어넣고 마늘 다닌 것을 한 숟갈 넣었다.
막내가 냄비를 키친으로 들고 가 가스렌지에 끓여 왔다. 오래간만에 맛보는 고향의 맛이었다. 약간 짜면서도 무어라 형언키 어려운 한국인의 근성이 녹아 있는 향기가 코로 스며들었다. 반찬으로 이 보다 더 좋은 반찬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게 바로 신토불이라는 것인가 보다. 양파, 고추 장아찌, 김, 된장국으로 아침 식사를 맛있게 하였다. 요즘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라도 옛날의 품종과는 다른 것이 대부분이서 그야말로 신토불이는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다. 고추도 개량되어 크긴 하지만 맵싸하고 야무진 조선고추와는 그 맛이 다르다. 또 오이도 길쭉하게 크게 생겼지마는 조선 물외(오이)는 짜리몽땅하게 생겼는데 육질이 단단하고 맛이 덜큰 하였다. 그래서 여름철에는 조선 물외 하나 따서 대충 씻어 도마 위에 놓고 부엌칼로 썸붕썸붕 썰어 바위틈에서 나는 샘물에서 갓 길어온 이빨까지 시린 찬물 한 바가지에 조선간장 한 숟갈 떠 넣어 맥국을 타면 밥 한 그릇이 그야말로 ‘마파람에 게눈 감춘 듯’ 하였다. 식사 후 커피 포트에 물을 끓여 커피를 한 잔씩 마시게 됐으니 세상에 부러울 게 없었다. 그래서 옛말에 ‘등 따시고 배 부르면 최고’라 하지 않았던가. 커피를 한 모금 입 안에 넣고 맛을 감상하고 있노라니 좁은 텐트 속이지만 마음은 여유로웠다. 그런데 텐트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커피를 급히 마신 다음 서둘러 텐트를 걷고 떠날 채비를 하였다. 설거지와 양치질을 하고 화장실에도 미리 다녀왔다. 냉장고 속에 넣어 두었던 아이스 팩과 음식물도 내 오고 빨래줄도 걷었다. 그동안 몇 차례 반복된 생활을 하다 보니 훈련이 된 셈이었다.
09:25, 자 이제 다시 출발이다. 우선 오슬로 시내로 나갔다. 지도를 보고 센트룸으로 향했다. 크루즈 부두를 지나 우리의 첫 목적지인 바이킹 배 박물관(Vikingshiphuset) 앞에 차를 세웠다.
본래 바이킹(Viking)이란 9 ~ 11세기에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덴마크 지역에 거주하던 게르만족 계통의 부족인 노르만족을 일컫는데 이 이교도 전사들은 자국의 과잉인구 문제와 이방인들의 상대적 무력함 등 다양한 요인을 틈 타 유럽의 광범위한 지역을 습격하고 약탈행동을 일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바이킹(Viking)의 어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스칸디나비아어의 ‘하구나 협곡’(fjord)을 뜻하는 ‘vik'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그 외 ‘성채 도시’나 ‘시장’을 뜻하는 게르만어 ‘wik’, 또는 ‘전투’를 뜻하는 ‘vig’에서 파생한 것으로 보는 설이 있지만 아직까지 정설은 없다고 한다. 다만 접미어 ‘ing’이 스칸디나비아의 고어로 ‘O의 아들’을 뜻하므로 바이킹은 ‘피요르드에서 온 사람’이나 ‘성채 도시의 사람들' 또는 ‘시장 사람들’, 혹은 ‘전사’를 뜻한다. 바이킹이 전 유럽을 약탈하게 된 것은 그들이 호전적인 민족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바이킹의 본토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이른바 암흑의 시대에 스칸디나비아에는 인구는 많고, 토지는 부족했다. 대서양 연안의 피요르드 부근은 토질이 좋지도 않았고 겨울철에 몹시 추웠을 뿐만 아니라, 농지도 매우 부족하였다. 처음에는 바이킹들은 약탈을 하러 가기 전에 씨앗을 뿌려놓고, 나중에 그것을 수확하러 돌아왔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덴마크에서 간헐적으로 격렬한 싸움이 계속되었고, 노르웨이에서도 수많은 소왕국들에서 왕족 내 투쟁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노르만인들은 다른 곳에서 살 곳을 찾아야만 했다. 굶주림에 지쳐 탈출하거나, 새 부족장에게 쫓겨난 바이킹들은 바다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바이킹들이 이웃 민족들을 처음으로 공격한 것은 브리튼 섬(지금의 영국)이었다. 789년 바이킹 배 3 척이 잉글랜드 남서부의 도싯(Dorset)에 상륙하여 그 지역을 약탈하고 돌아갔고, 4년 뒤에 잉글랜드 북부의 홀리 섬(Holy Is.)의 수도원을 습격하였다. 당시 수도원의 연대기 작가는 “올해 노섬브리아 전역에 끔찍한 일들이 벌어져 사람들이 공포에 떨었다. 하늘에서 번갯불이 번쩍였고, 불을 뿜는 용이 날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직후에 기근이 닥쳐왔고, 곧 이어 이교도들이 떼거리로 몰려와 약탈과 살인을 자행하고 수도원을 약탈하였다.” 고 기술하고 있다. 데인 족이 중심이 된 바이킹들은 830년대 다시 브리튼 섬을 약탈하고 본향으로 돌아갔으나, 851년 이후 기름진 토지에 이끌려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쉽게 돈을 버는 데 맛을 들인 데인 족들은 이후에도 수시로 브리튼으로 건너 왔다. 1013년 스웨인 포크비어드(Sweyn Forkbeard)라는 덴마크 왕이 잉글랜드를 침략하였지만, 정복이 완료되기 전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아들인 카누트(Canute I, 1017-1035)가 에델레드의 아들인 에드먼드(Edmund Ironside, 1016)를 몰아내고 잉글랜드 정복 사업을 마무리 지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통치하고 있던 카누트 1세는 데인족 출신으로 처음으로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
노르웨이의 바이킹들은 830년경 아일랜드에 상륙하여 북부의 아르막(Armagh)을 점령하였고, 10여년 뒤에는 더블린 부근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노르웨이 족은 900년에 웨일즈 남해안을 따라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795년 처음으로 바이킹으로부터 약탈을 당한 아일랜드도 간헐적으로 그들의 습격을 받았고, 스코틀랜드도 오크니(Orkeneys), 셰틀랜드(Shetlands), 헤브라이즈(Hebrides)를 시작으로 바이킹의 공격을 받았고, 800년 대에는 스코틀랜드 본토까지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오크니와 셰틀랜드는 1470년대까지 노르웨이 왕의 영토로 남아 있었다.
814년 카롤루스 대제가 죽고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면서 서유럽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였다. 이 틈을 이용하여 데인 족들이 834년 네덜란드의 북동부의 프리시아(Frisia)를 침략하였다. 이들은 다시 841년 루앙을 습격하였고, 845년에는 파리를 약탈하였다. 885-886년에 데인 족들이 다시 파리로 들어와 약탈을 자행하였다. 노르웨이 족들과 데인 족들의 거듭된 약탈에 시달린 서프랑크의 샤를 3세(Charles III le Simple, 898-923)는 911년 데인족의 우두머리인 롤프(Rolff, 또는 Rollo)에게 세느 강 하구 일대를 떼어주고 누이동생과 결혼시킨 뒤 그를 노르망디 백작으로 삼았다. 이것이 후에 노르망디공국으로 발전하였다.
11세기에 노르망디공국에 자리 잡은 노르만족 가운데 귀스카르드(Roger Guiscard)라는 바이킹은 지중해로 진출하여 시칠리아를 이슬람으로부터 빼앗아 왕국을 세우기도 했다.
1066년에는 노르망디공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 1066-1087)이 잉글랜드를 정복하였다. 데인 족과 노르웨이 족이 서유럽을 유린하고 있는 동안 스웨덴족은 주로 핀란드만으로 진출하여 러시아를 약탈하였다. 당시 러시아에 거주하던 핀 족과 슬라브족은 스웨덴족을 ‘보호자’(protector)로 간주하여 공물을 바쳤다. 핀 족은 스웨덴족의 일파인 바랑 족(Varangian)을 루스 족(Rus)이라고 불렀는데, 러시아(Russia)란 말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데인 족이나 노르웨이 족과는 달리 루스족은 약탈보다는 무역에 관심을 가졌다. 862년 루스족의 족장인 루릭(Rurik)이 노브고로드(Novgorod)에 이르러 무역거점을 만들었고, 그의 뒤를 이어 올레그(Oleg)가 882년 드네프르(Dnepr) 강변의 키에프(Kiev)를 장악하였다.
이것이 노브고로드 공국과 키에프 공국으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910년 일단의 루스 족이 배 16척을 이끌고 볼가강을 따라 내려와 카스피아해의 페르시아 해안을 유린하였으나, 볼가강 하구에서 패퇴하였다. 이어 941년에는 또 다른 루스 족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려고 시도하였지만 패하여 에게해의 델로스 섬까지 항해하였다.
바이킹이라고 하면 약탈과 살육을 연상하게 되고 실제로 그렇기도 했지만, 바이킹들이 약탈만 일삼았던 것은 아니었다. 약탈이 아닌 무역에 관심이 많았던 대표적인 바이킹이 노르웨이족인 오타르(Ottar)였다. 그는 주로 핀 족과 곰 가죽, 해마 엄니, 모피 등을 교역하였다. 상인이자 선주였던 오타르는 노르웨이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항해하여 노스 곶(North Cape)에 이르렀다. 그는 노스 곶을 돌아 바렌츠해를 항해한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그의 뒤를 이어 바렌츠해를 항해한 사람은 700여년 뒤에 네덜란드의 항해가 빌렘 바렌츠(Willem Barents, 1550?~1597)였다.
바이킹들은 아이슬랜드와 그린란드, 심지어 북아메리카까지 진출하였다. 1200년경 작성된 사가 모음집(Landnamabók)에는 860-870년 사이에 스웨덴족 3명이 아이슬랜드에 도달하였는데, 이들 중 스바르손(Gardar Svarson)이 처음으로 상륙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처음으로 정착할 목적으로 아이슬랜드로 건너간 바이킹은 노르웨이족인 빌게르다손(FlokiVilgerdasson) 이었다. 그는 해안에 얼음덩이가 떠다니는 것을 보고 이곳을 ‘아이슬랜드’(Iceland)라고 명명하였다.
바이킹 박물관 앞 뜰에는 소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하늘에선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킨 다음 주차비 자동 계산대에서 1시간에 8Nkr짜리 티켙을 끊어 자동차 안에 제시해 두고 박물관으로 걸어가 매표소에서 입장료를 내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박물관 안에는 많은 관람객들이 들어와 제각기 사진 찍기에 바빴다. 관광객들 중에는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도 6~7명 보였다. 제일 앞쪽에 있는 오세베르그(Oseberg)선은 선수의 꾸밈모양이 마치 높은 음자리표 같이 높이 솟아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1904년 오슬로피요르드(Oslofjord) 부근 바닷가에서 발견된 이 배에서는 젊은 귀부인과 늙은 노파가 매장된 나무 널 2개가 발견되어 배 무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바이킹들은 족장이나 귀인의 장례를 치를 때, 화장하여 배 모양의 돌무덤에 매장하거나, 고인이 사용하던 배에 시신을 실어 불태워 바다로 떠내려 보내거나 배를 육지에 올려 유해와 함께 땅 속에 매장하였다고 한다. 대략 800년경에 만들어져 9세기 후반에 매장된 것으로 보이는 이 오세베르그 배는 길이 21.5m, 너비 5.1m, 깊이 0.85m의 크기로 뱃전은 널빤지 12장이 겹붙여져 있었다. 노는 한쪽에 1.02m 간격으로 15개가 배치되어 있으며, 돛대는 선체 중앙에서 약간 앞쪽으로 설치되어 있는데, 높이는 13m에 이른다. 오세베르크 배 무덤에서는 손수레, 침대, 노, 닻, 곡식, 말 13마리, 개 3마리, 소 1마리도 함께 발굴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흘수가 0.85m 로 상당히 낮은 것은 약탈시 적의 해안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기 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세베르그선 양쪽 옆으로는 또 다른 바이킹선이 전시되고 있었는데 입구측에서 보아 좌측에 있는 것은 약간 밋밋하게 생겼으며 ‘The Gokstad ship’ 이라는 이름표가 붙었고 우측에 있는 것은 ‘The Tune ship’으로 선저가 부식된 목선이었다. 900년대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고크스타드선은 길이가 23m, 폭 5m, 깊이 2m 정도로 배 안에는 황새, 흑색의 칠을 한 원형 방패들이 나왔는데 이는 현측에서 적으로부터 날아오는 화살이나 돌을 막는 방어역할이나 때로는 넘쳐들어오는 파도를 막는데 사용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또한 많은 부장물이 함께 들어 있은 것으로 보아 고크스타드 지방이 유그링게 왕국에 속해 있던 곳이라는 점에서 당시 왕이나 높은 지위에 있었던 세력가의 무덤인 것으로 보였다.
이들 바이킹선들은 모양이 길쭉하고 우아하게 생겼지만 가볍고 강해서 해적활동의 기동성에도 잘 부합된 선체임을 알 수 있었다. 또 제일 안쪽에는 목각 공예를 전시해 놓았는데 정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또한 바이킹 선박들을 발견, 인양하는 작업과정 등을 볼 수 있었다. 기념품상점에서 바이킹에 관한 책 한 권을 샀다.
박물관에서 나와 주차장으로 갔으나 콘티키 박물관까지는 걸어서 약 5분 정도 걸린다고 하므로 주차비 무인계산대에서 10Nok 을 더 넣고 12시27분까지 주차할 수 있는 티켙을 다시 끊어 차 안에 잘 보이도록 유리창 앞쪽에 놓아 두고 우리는 걸어서 콘티키 박물관으로 갔다. 비가 그치고 난 뒤 아스팔트 포장길을 걸으니 공기가 상큼했다. 구름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이 유난히 파랗게 보였다. 동네 집들이 아주 깔끔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정원에 서 있는 사과나무에 앙증맞은 사과가 조랑조랑 열려있었다. 도로 위로 관광버스와 30번 시내버스가 지나갔다. 콘티키 박물관(Kon-Tiki Museum)에 도착하여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사서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뗏목선 콘티키호가 전시되어 있었다. 콘티키는 폴리네시아어로 ‘태양의 아들’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1947년 헤위에르달을 포함한 6명의 승무원을 태운 콘티키호는 페루에서 폴리네시아까지 약 8000km를 101일간에 걸쳐 표류한바 있다. 잉카제국이전의 티아우아나코(Tiahuanaco) 문명과 폴리네시아의 돌문명과의 공통점을 밝히고 남미에서 폴리네시아로의 문화읻오설을 실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콘티키호의 항해로 성공을 거둔 헤위에르달은 1969년 파피루스 배 라I세호를 만들어 또 다시 항해에 나섰다. 이번에는 피라밋과 잉카의 돌문명과의 공통점으로 고대 에집트에서 남미로의 문화이동설을 실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모로코에서 남미를 향해 표류했지만, 5000km 쯤 간 곳에서 허리케인을 만나 침몰해버렸다. 그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음해 라2세호를 만들어 재도전하여 8개국, 6100km를 8명이 57일간 표류했다.
이웃 방에는 티그리스호가 전시되어 있었고 벽면에는 토르 헤위에르달(Thor Heyerdahl)의 여러 사진과 그가 사용한 항해 도구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니 수면하의 모습을 상어와 각종 물고기의 모형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었다. 박물관에서 나오니 맞은 편에는 세계에서 최초로 북극과 남극에 갔던 배가 있는 프람호 박물관(Framhuset)이 눈에 띄었다. 북극 해류의 연구를 위해 만들어진 전장 39m, 420톤의 항아리 모양의 배 프람(Fram)호가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이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던 난센(Namsen)의 지휘로 북진을 거듭하여 마침내 북극 평원(86도 14분)에 도달했으나 개 썰매로 하루 30km 씩 달렸으나 그들이 올라타고 달리는 얼음이 여름이 다가오자 녹아서 남쪽으로 흘렀기 때문에 일주일을 달려도 위치는 바로 그 자리였던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쇠약해진 개들을 3마리만 남기고 다 죽이고 두 사람이 썰매를 끌고 철수하여 가까운 포구로 돌아와 움막을 짓고 백곰과 물개를 잡아 근근이 살아 있던 두 사람은 이듬해 6월17일 우연히 영국탐험대에 발견되어 구조되었다. 그러나 배는 항아리 모양으로 특수하게 설계돼 빙하에 부서지지 않고 빙하 위로 떠올라 무사했다고 한다. 프람호는 그 후 아문젠(Amundsen)에게 양도되어 1910년 8월10일 남부 노르웨이의 크리티안산을 향해 또 다시 출항했다 그리하여 아문젠은 1911년 12월14일 영국의 스콧트 탐험대와 사투 끝에 남극점을 가장 먼저 밟게 되었다.
다시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 주차장으로 오니 1시가 되었다. 주차시간이 약간 오버되었으나 다행히 스티커나 딱지가 붙어 있지는 않았다. 차에 시동을 걸어 박물관 구역에서 다시 시내로 빠져 나왔다. 시내에서는 주차장을 찾아 뺑뺑이를 돌았다. 어느 대학의 캠프스로 들어갔더니 10분간은 주차 가능 하였으나 그 이상 주차는 허용되지 않았다. 오슬로 시내 도로에는 버스/택시 전용도로가 있고 지하터널 구간이 많았다. 또 과속단속 카메라도 몇 대 보였다. 시내를 빙빙 돌아다니다가 겨우 지하 주차장을 찾아 들어갔더니 내부는 공간이 좁고 경사가 심했다. 키가 큰 친구가 있다가 얼마동안 주차할 것이냐고 물었다. 1시간 주차하겠다고 했더니 지불은 현금이냐 혹은 카드로 하겠느냐고 물었다. 카드로 하겠다고 했더니 주차비 정산기로 가서 카드를 투입한 후 티켙을 프린트하여 내 주었다. 티켙을 차 안에 넣어 두고 밖으로 나와 국립미술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입장료는 무료였다. 계단을 올라서면 헤이달의 대형 그림 2점이 양쪽에 걸려 있었다. 24번 룸에 뭉크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널리 알려져 있는 그의 대표작인 ‘절규’는 입구 맞은편 벽에 걸려 있었다. 일본에서 온 그룹관광객들이 가이드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작품 바깥에는 방탄유리로 덮여 있었다. 사진촬영이 금지돼 있어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작품의 가운데 있는 인물 오른편으로 가늘게 물감이 밑으로 튀어 내린 듯 그림과는 관계없는 얼룩이 보였다. 작품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가 원작의 감상에 지장을 초래한다면 바로 시정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뭉크는 이 작품을 그리면서 다음과 같이 그 동기를 밝히고 있다. “두 친구와 함께 산책을 나갔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핏빛처럼 붉어졌다. 나는 한 줄기의 우울을 느꼈다. 친구들은 저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나만이 지워지지 않은 상처에 공포로 떨고 있었다. 마치 강력하고 무한한 절규가 대자연을 가로질러 가는 것 같았다. " 이 작품은 자신의 우울하고 불행한 어린 시절 기억의 잠재의식과 세기말적 사회 분위기의 혼란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오슬로 빈민가에서 활동하던 군의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우울증과 강박적인 종교관에 시달리면 자랐다고 한다. 어머니는 다섯 살 때 동생을 낳고 얼마 후 결핵으로 돌아가시고, 여동생은 그가 열네 살 때 같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 후 20여년 후에는 또 다른 동생도 사망하는 등 가족과의 사별과 자신의 병약한 몸은 불안, 고독, 광기가 스며 있는 그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이루는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
나체소녀가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모습도 낯익은 작품 같았다. 회화 작품중에는 Ludvig Karlen(1876~1926)이 그린 것도 있었는데 그는 내 친구 김 화백처럼 에머랄드 불루색을 즐겨 사용한 것 같았다. 르노와르의 소녀 그림, 고갱의 과일 정물화, 또 고갱의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메테고갱 부인, 그 외 마티스, 피카소, 뒤가의 머리 감는 여자, 마네, 세잔, 고흐의 자화상, 모네, 세잔느의 풍경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조각 등을 둘러보았다. 대충 둘러 보고 나오니 2시 45분이었다. 박물관 로비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 들러 형준이 티를 하나 샀다. 뭉크의 나체소녀 그림이 새겨진 티였다. 정현이도 하나 사주겠다고 했더니 가격이 비싸다고 다음에 사겠다고 했다. 박물관에서 나와서 차를 몰고 비겔란 조각공원으로 갔다. 3시 15분, 주차장에 도착했더니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만차였다. 빠져 나가는 차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겨우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주차비를 계산하려고 무인계산대에서 카드를 내어 투입구에 넣고 긁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내게로 와서 오늘은 일요일이라서 주차비가 공짜라고 하였다. 사실 우리는 매일 거의 똑같은 일정으로 여행을 하다 보니 오늘이 일요일인지 아닌지 염두에 두고 있지 아니하였다. 일요일 아침이라서 그런지 차나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고 시내가 아주 조용하였다. 공원으로 나오니 나무도 많고 푸른 잔디밭도 넓었다. 시내 거리에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더니만 공원에는 산보 나온 사람들도 많았고, 개를 데리고 나온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 조깅을 즐기는 사람 각양각색이었다.
비겔란 공원에는 비겔란의 청동 조각 작품이 다리 양쪽으로 즐비하게 서 있었는데 모두 사람의 표정과 생활의 한 단면들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조각공원의 제일 높은 언덕에는 인간군상을 새긴 32m 석탑이 우뚝 서 있었다. 많은 관광객들이 주위의 조각 작품을 감상하며 기념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잠시 햇빛이 나왔다가 이내 구름 뒤로 숨어 버렸다. 조각공원 중앙에는 분수가 시원하게 물을 흘러내리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붉은 장미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16:50, 주차장으로 돌아오니 4시 50분이었다. 현정이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하여 인근에 있는 테니스장으로 뛰어 갔다. 본래 화장실은 유료여서 동전을 넣어야 문이 열리게 되어 있는데 마침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문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공짜로 일을 보았다고 했다. 17:10, 오슬로에서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바로 베르겐으로 출발했다.
17:36, 연료보충을 위해 ESSO 주유소에 들렀다. 오슬로시내를 벗어나면서 표지판에는 베르겐까지 501km라고 적혀 있었다. 고속도로를 시속 100km/h로 쉬지 않고 달려야 밤 11시정도에 닿을 수 있는 거리다. 도로는 왕복 2차선으로 도로 폭도 좁고 왕래하는 차량도 많았다. 제한속도가 70km/h 이지만 마을 인근에서는 50km/h여서 속도를 더 낼 수 도 없었다. 과속단속카메라도 몇 군데 서 있었는데 도로가에 장승처럼 서 있었다. 산중으로 달리는 도로여서 경치는 좋은 편이었다. 호수를 끼고 달리는 도로가 군데군데 있었는데 호수 건너편의 마을이 호수에 반영되어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도 있었다. 산에는 온통 소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오슬로에서 베르겐까지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금일중으로는 도저히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아 도중에 캠핑장 표시가 나타나면 그리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얼마 가지 않아 캠핑장 표시가 눈에 띄었다. 큰 도로를 벗어나 왼쪽으로 틀어서 좁은 길로 죽 따라 들어가니 리셉션이 나왔다. 하루 묵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비어 있는 장소가 없다고 미안하다면서 밖으로 나가 우측도로를 따라 조금만 더 가면 또 캠핑장이 있으니 그리로 가 보라고 일러 주었다. 다시 차를 몰고 그가 일러준 대로 이웃에 있는 다른 캠핑장을 찾아갔다.
20:20, 다행히 장소가 넓어 거기서 하루를 묵을 수 있었다. 아주 시골이라 인터넷은 할 수 없다고 했다. 캠핑비를 먼저 계산하고 샤워 코인 4개를 받았다. 그리고는 캠핑장 안으로 들어가서 장소를 물색하였다. 전기 파워스탠드에서 가깝고 샤워장이 가까운 곳을 선택하여 큰 나무 밑에 텐트를 쳤다. 이 캠핑장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주변에는 제법 큰 강이 있어 경치가 좋았다. 텐트를 치면서 문을 열어 두었더니 모기가 몇 마리 텐트 속으로 들어와서 모기향을 피웠다. 우리 텐트 왼편에는 트롤리를 끌고 온 노부부가 다정하게 의자에 앉아있었다. 남자는 안경을 끼고 머리가 허옇게 센 것으로 보아 나이가 70세 정도로 돼 보였는데 메모지에 뭔가 열심히 적고 있었고, 여자는 그 옆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테이블 아래에는 털이 복슬복슬한 검둥이 개 한 마리가 주둥이를 내밀고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우선 샤워장으로 가서 샤워부터 하고 저녁식사를 준비하기로 하였다. 샤워장은 상당히 넓은 편이었다. 코인을 넣지 않으니 찬물만 나왔다. 코인을 넣으면 타이머(timer)가 작동하여 일정시간동안 더운 물이 흘러 나왔다. 공간이 충분하였으므로 코인하나로 형준이, 정현이 나 셋이서 할 수 있었다. 샤워를 하고 나니 땀이 나서 끈끈하던 몸이 날아갈 듯이 개운한 기분이었다.
22:00, 저녁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 모처럼 된장에다 양파, 감자, 멸치, 고추장 마늘을 넣고 끓였더니 아이들이 맛이 기가 차다고 입을 모았다. 밥은 전기밥솥에 앉혔으나 급히 하느라고 뜸이 약간 덜 돌았다. 소시지는 버너 불에 살짝 구워내었다. 창란 젓갈, 김, 소시지 구운 것, 와인으로 맛있게 저녁식사를 하였다. 여행 다니면서 좋은 경치를 감상하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빼 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어찌 패키지 여행의 호텔음식에 비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