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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욥기의 말씀 1,6-22>
6 하루는 하느님의 아들들이 모여 와 주님 앞에 섰다.
사탄도 그들과 함께 왔다.
7 주님께서 사탄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디에서 오는 길이냐?”
사탄이 주님께 “땅을 여기저기 두루 돌아다니다가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8 주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그와 같이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 없다.”
9 이에 사탄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욥이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
10 당신께서 몸소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를 사방으로 울타리 쳐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의 손이 하는 일에 복을 내리셔서, 그의 재산이 땅 위에 넘쳐 나지 않습니까?
11 그렇지만 당신께서 손을 펴시어 그의 모든 소유를 쳐 보십시오.
그는 틀림없이 당신을 눈앞에서 저주할 것입니다.”
12 그러자 주님께서 사탄에게 이르셨다.
“좋다, 그의 모든 소유를 네 손에 넘긴다.
다만 그에게는 손을 대지 마라.”
이에 사탄은 주님 앞에서 물러갔다.
13 하루는 욥의 아들딸들이 맏형 집에서 먹고 마시고 있었다.
14 그런데 심부름꾼 하나가 욥에게 와서 아뢰었다.
“소들은 밭을 갈고 암나귀들은 그 부근에서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15 그런데 스바인들이 들이닥쳐 그것들을 약탈하고 머슴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16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다른 이가 와서 아뢰었다.
“하느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양 떼와 머슴들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17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또 다른 이가 와서 아뢰었다.
“칼데아인들이 세 무리를 지어 낙타들을 덮쳐 약탈하고 머슴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18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또 다른 이가 와서 아뢰었다.
“나리의 아드님들과 따님들이 큰아드님 댁에서 먹고 마시고 있었습니다.
19 그런데 사막 건너편에서 큰 바람이 불어와 그 집 네 모서리를 치자, 자제분들 위로 집이 무너져 내려 모두 죽었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20 그러자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
21 말하였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22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9,46-50>
그때에
46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47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48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49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5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들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라야 가장 큰 사람이다.”>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가장 큰 사람'에 대한 말씀이고, 후반부는 어제 복음과 병렬구문으로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씀을 전해줍니다.
오늘은 전반부만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둔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 너희들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라야 가장 큰 사람이다.”
(루카 9,48)
이는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요, 동시에 작아질수록 커진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작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작은 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시 말해서, ‘작은 큰 사람’이란?
단지 ‘작은 이’를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라기보다 ‘작은 이’를 받아들여 같이 작아진 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크기 때문에 큰 사람인 것이 아니라 ‘크면서도 작은 이인 사람’이 ‘진정 큰 사람’이라는 말씀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작은 이’를 사랑하여 그를 위하여 큰 것을 비우는 바람에 ‘작은 이’가 된 이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전능하신 하느님이심을 비우고 낮아져 인간이 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린이’는 돌보아주지 않으면 곧 죽게 되는 무능하고 힘없는 약한 사람을 표상하며, 예수님께서는 발가벗고 나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러니 이는 ‘자신을 타인보다 위에 두지 않는 사람, 곧 높이 있어 우러름 받는 이가 아니라 아래에서 천대받는 이’로 오셨습니다.
따라서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력함과 낮아짐, 동시에 사회에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미천하고 버려진 이, 천대받고 소외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겸손은 큰 이, 지위 있는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이, 무능하고 비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능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필리 2,3)
사실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상대방을 받아들이되 허물과 허약함이 있는 채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니, 나아가서 허물을 함께 지는 이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모두가 높아지고 커지고 첫째가 되고자 안달인 이 시대에, 작아지고 낮아지고 꼴찌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앞에, 그리고 형제들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아지는지가 진정한 큰 사람임을 말해줍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막지 마라. ~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마르 9,39)
주님!
다른 이들이 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좋은 일을 막지 않게 하소서!
마치 좋은 일은 나만이 해야 될 것인 양 독점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그들이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감사하게 하소서!
그들이 ‘우리’를 따르지 않는다 해서 당신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여기지 말게 하소서!
‘우리’라는 이름으로 당신을 제외시켜버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은 되고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안 된다는 독선을 부리지 않게 하소서!
‘우리’는 해도 되지만 너희는 해서는 안 된다고 편 가르지 않게 하소서!
‘우리’라는 특권으로 다른 이를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들이 ‘우리’의 양떼가 아니라 당신의 양떼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스스로에게 갇히는 일 없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게 하소서!
스스로를 가두는 울타리를 거두고 오히려 손짓하여 부르게 하소서!
비록 생각이 다르다 해도,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다 해도, 그들을 위하고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게 하소서!
우리의 이기와 이해타산을 떠나 손해 볼 줄을 알게 하소서!
우리를 따르지 않는다 해고 거부하거나 비방하지 않고, 오히려 형제로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불신이 있는 곳에서 오히려 신뢰를 지키고, 긴장과 대립이 있는 곳에서 오히려 친교와 통교를 이루게 하소서!
타종교인이거나 타국인이거나 내치는 일 없이 반겨 끌어안게 하소서!
제가, 바로 그러하셨던 당신의 사람인 까닭입니다.
그러하셨던 당신의 제자인 까닭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사탄도 이용하시는 하느님>
오늘 욥기를 보면 역시 하느님은 다르십니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과 다릅니다.
우리는 그리고 우리의 사랑은 사탄에게 지지만, 하느님은 그리고 하느님 사랑은 사탄마저 이용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사랑은 사탄과 고통을 압도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강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사탄보다 강하고 고통보다 강합니다.
오늘은 이점을 얘기하고자 합니다.
스콧 팩이라는 심리 정신과 박사가 있습니다.
이분은 제가 알기로 개신교 신자이고 대부분의 심리 정신과 전문가들과는 달리 악령의 세계를 인정하고 심리와 정신과 영의 관계를 정면으로 다루는 분입니다.
그분의 주장을 제가 다 그리고 잘 소개할 수 없지만 제가 이해한 한도에서 말씀드리면, 악령은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약한 사람을 숙주 삼고 자기 하수인으로 만든다고 주장하는 분입니다.
이는 면역력이 강한 사람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뚫지 못하지만 약한 사람을 공격하여 쉽게 무너뜨리는 것과 같지요.
그렇다면 누가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일까?
이에 대해 그는 사랑이 강한 사람이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강하다고 합니다.
이런 그분의 주장에 저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이 강한 사람은 악령이 고통으로 공격해도 너끈히 방어하는 데 비해 사랑이 강하지 않은 사람은 조그만 고통에도 쉽게 악령에게 굴복하고, 악령이 아니더라도 고통에 의해 쉽게 그의 인생이 허물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든 자신에 대한 사랑이든, 사랑이 약한 사람은 고통 때문에 아주 쉽게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하느님 사랑도 의심하니 이웃의 사랑은 더 쉽게 의심합니다.
나의 고통은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표시라고, 하느님은 나의 고통에 관심이 없으시다고 믿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의심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무튼 오늘 욥기 1장에서는 욥이 그 엄청난 고통을 당해도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고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은 작고 약하기에 하느님 사랑처럼 자신 있게 그리고 모질게 욥의 믿음을 시험하거나 단련하지 못하지만, 앞서 봤듯이 하느님의 사랑은 욥의 이러한 믿음을 믿고 사탄을 도구로 고통을 가지고 담담하게 욥의 믿음을 시험하고 단련합니다.
사랑하기에 마음이 아파도 매를 대고, 더 사랑하기에 이 정도면 됐다고 하며 매를 멈추지 않고 더 매를 대는 아비의 사랑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려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겸손한 마음>
보다 크게 되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지배하며 마음대로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기보다 숨기고 있습니다.
‘아닌 척’하면서 포장을 하고 위선을 떨지만,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환히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루카 9,48)
스스로 낮추고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말같이 쉽지 않으나 그 길이 주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라면 용기 있게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알게 모르게 과장하고 포장한 가면을 벗고, 있는 그대로 몸에서 배어 나오는 겸손을 갖추게 될 때 예수님의 참모습을 비추게 될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겸손이란 '자신을 갖는 것'이라고 하였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주제를 넘지 않는 자이며, 하느님의 은총 앞에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열어 놓을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관용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말고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겸손이야말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비결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마태 23,12)
“성인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빛나 보이고 싶어 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섭리로써 그들을 깊숙한 곳에 감추어 두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성 안또니오)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엽니다.
“교만은 천사를 악마로 만들었으나 겸손은 인간을 천사로 만들었습니다.”
(성 아우구스띠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겸손함을 갖추길 원하며 낮은 사람이 되라고 했지만, 제자들의 응답은 아직도 엉뚱한 모습입니다.
아직도 특권의식이 배어 있었습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하면 다 환영할 일이건만, 제자들은 자신들이 더 우월한 지위에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내세웠습니다.
누가 하든지 주님의 일을 하면 환영하고, 그를 통해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구원의 혜택을 입으면 기뻐할 일입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가식으로 하든 진실로 하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사실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
(필리 1,18)
그러나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과 ‘내가 너보다 낫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더 고참이다.’,‘내가 더 연장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로서 아직도 자격 미달입니다.
낮아짐을 두려워 마십시오.
주님께서 거기 계십니다.
우리에게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랑과 희망을 주님께 두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작음을 무시하고 푸대접하며 등 뒤로 내던져버리는 폐기의 문화와 결연히 맞서 싸워야겠습니다!>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 이름으로 반포된 권고나 회칙, 강론들을 열심히 읽고 있는데... 틈만 나면 수시로 강조되고 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작고 가난한 이들을 찾아 교회 밖으로 나가는 가난한 교회!'
2013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교구장 호세 베르골료 추기경님이 교황으로 선출되자 누구보다도 기뻐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 빈민가 주민들이었습니다.
빈민가 주민들은 자신들을 향한 베르골료 추기경님의 아버지 같은 모습과 따뜻한 마음에 언제나 큰 감동을 받고, 깊은 감사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베르골료 추기경님은 럭셔리한 관용차가 아니라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해 수시로 빈민가 주민들을 찾아가 그들의 고충을 듣고 위로했습니다.
부활이나 성탄 때는 빈민가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려고 방 한칸짜리 자신의 서민 임대 아파트에서 직접 음식을 만들어 날랐습니다.
곰곰이 따지고 보니 교황님의 노선은 작고 연약하며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신 예수님의 노선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던 어린이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그들 역시 한 인간 존재로서의 존엄성과 가치를 인정해주셨습니다.
교황님의 큰 걱정 중에 하나가 이 시대 냉혹한 폐기 문화입니다.
모든 잣대가 생산성, 효율성 위주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산성 면에서 뒤쳐지는 노인들, 장애인들, 환자들, 약자들, 어린이들이 무참히 짓밟히고 폐기되고 있음을 안타까워 하십니다.
작은 것도 분명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 세상에 외쳐야겠습니다.
작음을 무시하고 푸대접하며 등 뒤로 내던져버리는 죽음의 문화, 폐기의 문화와 결연히 맞서 싸워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가장 큰 사람>
누가 가장 큰(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제자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난 일을 단순하게 생각하면, 사도단 안에서의 서열이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서열을 정리하려고 한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셨는데(마태 16,18), 그 일은 베드로 사도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임명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임명하신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반석’이라는 말의 표현만 보면, 그 일은 그를 ‘가장 낮은 사람’으로 임명하신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석은 한 건물의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있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제자들의 논쟁에 대해서, “서열을 따지고 정리하는 일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그런 일로 논쟁까지 했어야 했나?”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명예욕이 더 강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 그것은 그냥 인간 세상의 일반적인 모습일 뿐입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서열을 확실하게 정리해 놓는 것이 질서 유지를 위해서나 권한과 책임의 한계를 정하기 위해서 필요할 때도 많고 편리할 때도 많습니다.
물론 부작용도 많고.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가 예수님 나라의 열두 옥좌(마태 19,28)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두 자리를 달라고 청한 일이 있는데(마태 20,21), 그 일도 사도들이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인간 세상의 일반적인 모습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긴 하셨지만, 제자들 사이의 서열을 정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
(요한 13,14-15)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공동체에서는 누가 더 높은 사람이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모두가 다 높은 사람이고, 동시에 모두가 다 낮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높고 낮음이 없는, 서로 섬기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역할 분담도 필요하고, 직책을 구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을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으로 나누는 일이 아닙니다.
공동체는 한 몸입니다.
한 몸의 지체들 사이에 높고 낮은 서열 같은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자란 지체에 더 큰 영예를 주시는 방식으로 사람 몸을 짜 맞추셨습니다.
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지체들이 서로 똑같이 돌보게 하셨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1코린 12,24ㄴ-26)
여기서 ‘어린이’는 ‘가장 작은 이’, 즉 16장에 있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라자로’와 같은 사람을 뜻합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나를 믿는 신앙인으로서 ‘가장 작은 이’를 섬기면 나를 섬기는 것이다.(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40)
예수님이 ‘가장 작은 이’이고, ‘가장 작은 이’가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사람은 당연히 ‘가장 작은 이’를 섬겨야 합니다.
‘가장 작은 이’를 섬기는 것이 곧 예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섬기는 것은 그 사람을 나보다 높이고, 나를 그 사람보다 낮추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작은 이’를 섬기는 것은 그 ‘가장 작은 이’ 앞에서 나를 낮추어서 ‘그 사람보다 더 작은 이’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그렇게 ‘섬김’과 ‘낮춤’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남보다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은 ‘나보다 작은 이’를 섬기지 않겠다는 것이고,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즉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섬김’과 ‘낮춤’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실은 아버지 하느님의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라는 말씀은 “남보다 높은 사람이 되려고 다투지 말고, 남보다 낮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남보다 더 높은 사람이 되려고 서로 경쟁하는 곳에서는 싸움만 일어나고, 평화가 깨집니다.
그리고 얻는 것도 없이 시간만 낭비하게 될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만 늘어나게 됩니다.
반면에 남보다 더 낮은 사람이 되려고 서로 함께 노력하는 곳에서는 사랑이 넘치게 되고, 평화가 가득하게 됩니다.
그렇게 변화된 공동체가 바로 하느님께서 바라시고 우리도 희망하는 ‘완성된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바다같은 가장 큰 믿음의 사람 - 환대, 겸손, 관대>
이런저런 단상들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엊그제 피정 강의 시 강조했던 내용이 생각납니다.
기도는 사랑이요,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이요, 기도보다 더 좋은 화장품은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와 회개를 통한 마음의 성형수술이 잘 되면 신체의 성형수술은 전혀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기도와 회개의 여정을 통해 주님을, 주님의 믿음을, 사랑을 닮아가는 것이 답이라고 강조했으며, 자매들 모두가 유쾌하게 웃었습니다.
얼마전 주문한 책 제목이 생각납니다.
독특한 철학자의 <적은 생활, 작은 철학, 낮은 공부> 책명으로 내용이 참 복음적이다 싶어 주문했습니다.
적은 생활, 작은 철학, 낮은 공부, 정말 겸손한 구도자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어제 두 분 수녀님에게 면담성사를 드리면서 요셉수도원을 매개로 한 수녀님들 사이의 각별한 영적 우정에 감동했습니다.
60대 초반의 비슷한 연배의 믿음의 삼총사 수녀님들입니다.
1990년대 초 그러니 30대 초반부터 지금 60대 초반까지 거의 30여년을 수도원을 방문하여 저에게 고백성사를 받고 영적 우정을 나누고 있는 참 성실하고 한결같은 믿음의 수녀님들입니다.
“엘리야의 계절입니다.”
수녀님의 말에 웬말인가 싶었더니 기도의 계절이 가을철이 너무 좋다는 것입니다.
수녀님들 사이의 영적 우정의 기초는 바로 하느님을 향한 믿음에 있음을 봅니다.
점차 바다와 같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믿음의 수녀님들입니다.
어제의 두 깨달음이 믿음 생활에 더욱 정진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줌을 싸면 지린내가 나는데, 지린내뿐 아니라 오물에서 나는 냄새는 죄로 인해 썩어가는 영혼의 냄새에 비하면 향기처럼 느껴질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정말 부끄럽고 두려워할 것은 체취나 오물에서 나는 냄새가 아니라 죄로 인해 부패해가는 영혼의 악취가 아니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아무리 인위의 화장이나 향수를 사용해도 혐오감만 더할 뿐이겠습니다.
또 하나는 갖가지 병고에 대한 생각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며 최선을 다한 삶이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겪게 되는 병고는 그대로 보속補贖이나 대속代贖, 순종順從의 큰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축복과 감사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하느님은 바다같은 분입니다.
우리 예수님이나 마리아 성모님은 바다같은 큰 믿음의 분들로 하느님을 닮은 분들입니다.
오늘부터 시작된 욥기도 반갑습니다.
욥의 바다같은 큰 믿음 역시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오늘 복음 말씀 역시 고맙습니다.
가장 작은 겸손한 사람이 가장 큰 믿음의 바다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읽었습니다.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의 역설의 진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겸손한 믿음입니다.
이미 고인이 된 시대의 스승, 신영복 선생의 글에서 바다같은 분을 만납니다.
좀 길다싶지만 내용이 좋아 그대로 인용합니다.
“먼 길을 가는 사람의 발걸음은 강물같아야 합니다.
필생의 여정이라면 더구나 강물처럼 흘러야 합니다.
강물에서 배우는 것은 자유로움입니다.
강물은 유유히 흘러갑니다.
앞서려고 다투는 법이 없습니다.
부딪치는 모든 것들을 배우고 만나는 모든 것들과 소통하며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시내가 강을 만나면 강물이 됩니다.
강물이 바다에 이르면 이제 스스로 바다가 됩니다.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르지만 기어코 바다를 만들어 냅니다.
바다는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시내를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바다입니다.”
외람되지만 제가 평생 써온 강물같은 강론이 이제 바다를 이뤘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도 여전히 하루하루 강물같은 강론쓰기는 계속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바다같은 사람입니다.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수평선을 보면 바다같은 겸손한 큰 믿음의 사람이 하느님을 만난다는 영적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일상의 크고 작은 모든 고통이나 시련들을 낮은 바다로 향하는 수행의 계기로 삼으면 축복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가장 큰 사람이 누구냐는 문제로 논쟁이 일어 난 예수님 제자들 공동체입니다.
환대의 믿음을 지닌 사람이 바로 바다같은 큰 믿음의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린이로 상징되는 작고 약해 보이는 사람을 주님처럼 환대할 때 주님은 물론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이란 놀라운 말씀입니다.
환대의 믿음에 이어 겸손한 믿음입니다.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는 말씀, 바로 가장 작은 겸손한 사람이 실은 가장 큰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요한과의 대화에서 주님의 바다와 같은 관대한 마음을 배웁니다.
어떤이가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기에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막으려 했다는 요한의 말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에서 관대한 마음, 관대한 믿음을 배웁니다.
“막지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종교간 대화를 시도하는 이들이, 세상 한 복판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살아가는 이들이 지녀야 할 관대한 마음, 믿음입니다.
참으로 가장 작아 보이는 환대, 겸손, 관대의 사람들이 역설적으로 바다같은 큰 믿음의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욥의 바다같은 수용의 믿음이 감동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겪는 불행한 사건들도 그대로 큰 믿음으로 받아들여 바다가 된 욥의 믿음이 참 감동적입니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은 결코 유혹에 빠저 미풍을 태풍으로 바꾸지 않으며 태풍같은 사건들도 미풍으로 바꿔버립니다.
하느님께 허락을 받아 수 차례 태풍같은 비극적 불행으로 욥을 유혹했지만 미풍으로 바꿔버리는 요지부동의 바다같은 큰 믿음의 욥입니다.
“너는 나의 종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그와 같이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 없다.”
사탄과의 대결에서 욥이 승리로 이런 욥의 진가가 고스란히 입증됩니다.
좌우간 힘든 믿음의 시험들을 무난히 통과한 욥의 믿음이 놀랍습니다.
바로 다음의 욥의 고백에서 그의 애오라지 하느님 중심의 바다같은 크고 깊은 믿음의 절정을 봅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태어 나온 이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욥은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니, 하느님께서 흡족해 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이런 믿음의 거인 욥에 비하면 우리는 믿음의 난쟁이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언젠가 저녁 침묵의 불암산을 보며 쓴 시도 생각납니다.
“아
크다
깊다
고요하다
저녁 불암산!”
커서 깊고 고요한 믿음의 사람, 요셉 성인을 생각하며 쓴 시인데 욥의 믿음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싶습니다.
가장 작은 사람은 역설적으로 가장 큰 사람, 가장 큰 믿음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처럼, 성모님처럼, 욥처럼 환대로, 겸손으로, 관대한 마음으로 표현되는 하느님을 닮은 바다같은 큰 믿음입니다.
주님의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바다같은 큰 믿음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치유와 치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치유(Healing)는 외부에서 들어온 질병을 몸이 가지고 있는 면역력으로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몸은 강력한 면역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질병은 우리 몸의 면역체계가 물리칠 수 있다고 합니다.
반면에 치료(Treatment)는 외부에서 들어온 질병을 약을 가지고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의사와 약사는 병이 든 우리의 몸을 치료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몸을 의사와 약사에게 의지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예전에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라는 광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사나 약사에게 가지 않아도 될 정도로 내 몸의 면역력을 잘 지키고 보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몸의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잘못된 습관들을 먼저 개선해야 합니다.
지나친 음주와 흡연은 면역력을 약하게 합니다.
과도한 업무와 그에 따른 긴장은 면역력을 약하게 합니다.
욕심과 욕망 그리고 분노와 원망 또한 면역력을 약하게 합니다.
규칙적인 식사와 적당한 운동은 면역력을 강하게 합니다.
긍정적인 생각과 나눔은 면역력을 강하게 합니다.
독서와 명상 또한 면역력을 강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지 않으셨습니다.
아픈 사람들의 면역력을 키워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 치유될 수 있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이 났을 때도 손을 대셨고 시몬의 장모는 열이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나병환자도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눈이 먼 사람도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도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죽은 라자로와 소녀도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사람들에게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낮기를 원하느냐? 치유 될 것을 믿느냐?’
사람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의 갈망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사람들의 내면에 있는 면역력을 키워 주셨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은 하혈이 멎었습니다.
중풍병자는 잃어나 걸었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도 걸었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았던 사람도 앞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치료하시는 적이 없었습니다.
치유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셨습니다.
치유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영적인 면역력이 강했던 욥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욥은 사탄으로부터 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배도 바다에서 침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르던 양도 모두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인들도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도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좌절하고 절망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욥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이런 영적인 면역력을 겸손의 3단계로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도 있고, 부귀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장수보다 일찍 죽는 것도 택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영적인 면역력을 3가지 유형의 사람으로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모든 유혹을 굳건하게 뿌리치는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영적인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언제나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 나의 영적인 면역력은 어떤 상태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2018년 저의 첫 번째 손주가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의 아빠인 조카는 태어나기를 기다리면서 이런 말을 자주 했습니다.
“아들과 함께 운동하는 것이 제 소원이에요.”
종종 자기 자녀와 함께 하는 꿈을 이야기하는 부모를 봅니다.
이 꿈대로 어렸을 때는 부모와 함께 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함께 하는 시간이 줄어들게 되지요.
그런데 자녀 역시 성장하면서 부모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더군요.
죽이 척척 맞아 정치에 대해 함께 토론하고, 부모와 문화 활동도 같이하고, 또 세계여행도 함께하는 상상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상상에 충족하는 자녀 부모의 관계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치에서는 서로 정반대 견해를 보여서 토론할 수 없으며, 먹고 살기 힘든데 무슨 문화 활동이고 여행이냐며 화를 내는 부모와의 다름에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부모와 자녀는 이렇게 다릅니다.
살았던 시간이 다르고, 생활했던 공간이 다른데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다른 생각과 다른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다름을 인정해야 부모와 자녀의 만남이 가능합니다.
이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면 남보다도 못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세상의 측면에서 보면,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에서 사랑을 받는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일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데려오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렸을 때, 동네에 찾아온 약장수 무리가 기억납니다.
그들은 약을 팔기 전에 관심을 끌 수 있는 차력쇼를 했습니다.
그래서 동네의 모든 아이가 약장수 근처에 모입니다.
그때 약장수 무리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애들은 가라.”
애들은 약을 사지 않으니, 굳이 있을 필요가 없었겠지요.
애들을 무시하는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불과 4~50년 전에도 그러했는데, 예수님 시대는 어떻겠습니까?
아직 미성숙한 존재로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역시 다름의 차이인데 말이지요.
어린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린이를 주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겸손한 사람이 될 것을 명령하십니다.
이런 다름을 인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함께 할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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