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죽는것
富貴昻天從古死(부귀앙천종고사)-부귀가 하늘에 닿아도 언제나 죽음이 있고
貧寒到骨至今生(빈한도골지금생)-가난이 뼈에 사무쳐도 오히려 살길이 있네
億千年去山猶碧(억천녀거산유벽)-억 천년이 지나가도 산은 한결같이 푸르고
十五夜來月復圓(십오야래월부원)-달도 보름밤이 오면 다시 둥글어지게 되네
이하응(李昰應)
석파정(石坡亭)에서 흥선대원군의 벚꽃을 즐기다
우울한 마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흥선대원군 별서(別墅)와 석파정(石坡亭)을 답사하기 위해 훌쩍 전철을 탔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의문로11길 4-1 서울미술관 뒤에 있다.
찾아 가는 길은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를 나와
시내버스-7022, 7018, 1711, 1020, 0212를 타고 자하문 터널입구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횡단보도를 건너면 서울미술관이 나온다.
서울미술관에 1인당 미술관 입장료 9000원 표를 사야 석파정(石坡亭)을
구경할 수 있다.
석파정(石坡亭)이 있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서(別墅)는
1974년에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다.
별서(別墅)의 뜻은
개인이 소유하는 논밭이나 산이 있는 부근에 한적(閑寂)하게 지은
별장(別莊)과 같은 집으로 주로 농사(農事)에 관한 건축물을 말하지만
별저(別邸)나 장원(莊園)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석파정(石坡亭)은 서울미술관 정문을 통과해야만 이 볼 수 있다.
유니온약품 안병광 회장이 2006년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별서(別墅)
석파정(石坡亭)을 사들인 이후 신축미술관과 그 일대를 묶어 2012년 서울미술관을 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석파정(石坡亭)의 사랑채인 석파랑(石坡廊)이 있다.
현재는 석파랑(石坡廊)이라는 한정식집의 부속채가 되어 석파정과 떨어져 있지만
11평 정도밖에 되지 않은 작은 건물을 흥선대원군이 무척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서쪽 벽에는 둥근 만월창(滿月窓)을,
북쪽을 향한 벽에는 반월창(半月窓)을 내어 풍치를 즐겼다.
시문학과 글씨를 잘 쓰고 추사 김정희에게 묵란(墨蘭)을 배운 흥선대원군으로서
충분히 멋을 낼 수 있는 짐작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건물이 석파정에 있을 때 대원군 자신은 큰방을 쓰고
손님은 건넌방을 사용토록 했으며,
대청은 대원군이 난초를 칠 때 이용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별서(別墅)와 석파정(石坡亭)에 대하여 이야기가 전한다.
인왕산의 바위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흥선대원군 별서(別墅)는
본래 조선 철종과 고종 때에 영의정을 지낸 안동김씨 세력가인
김흥근(金興根1796~1870)의 별서(別墅)였다.
김흥근(金興根)이 언제 이곳에(당시 삼계동정사로 불림) 건물을 지었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일부 문헌을 통해 그 시기를 대략 1837~1858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후일 고종이 임금이 되고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섭정(攝政)이
시작된 1863년을 전후하여 대원군이 이 별서(別墅)를 인수하여 대원군의
별서(別墅)로 사용하게 된다.
조선후기 학자 황현(黃玹)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흥선대원군이 김흥근에게 별서(別墅)를 자기에게 팔 것을 종용하였으나
거절하자 계략을 세워 아들 고종(高宗)을 이곳에 행차케 하여 하룻밤 묵게 하였다.
임금이 묵고 가신 곳에 신하가 살 수 없다하여 김흥근이 이곳을 포기하자
이에 흥선대원군의 소유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별서(別墅) 인수 후 대원군은 사랑채에서 난(蘭)을 치는 등 이곳을 예술적 활동을 했던 장소로 사용하였고,
고종의 행전(行殿)이나 행궁(行宮) 즉 임시거처로도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본래 7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던 흥선대원군 별서(別墅)는 오늘날 안채 사랑채
별채와 살림채와 석파정등 4개 동이 남아 있다. 높은 자리에 위치한 별채의 구성과
별채로 들어가는 협문, 과거에는 있었다던 꽃담 등은 왕이 묵던 곳으로서는
손색없게 생각된다.
흥선대원군 별장이라고 하면 대부분 부암동에 있는 “석파정”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여러곳 있었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 시흥산장(始興山莊)이다.
금천구 시흥동 탑동초등학교 지나 구 현대아파트 정문 오른쪽 담장 밑에
아래와 같은 표석문구가 적혀있는 표지석만 있다.
『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이 지은 별장터.
현재는 철거되었으나 1985년까지 서울 대가(大家)의 전형적인 정원과
담장이 특유의 아름다움을 간직했었다.』
그리고 노년을 달랜 곳은 시흥에 있는 시흥산장(始興山莊) 별장이라는 말이 전한다.
아래의 시는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 이 별장에서 노년의 외로움을 달래며,
읊은 “시흥산장(始興山莊)”이라는 시이다.
인간의 부귀영화 권력이 한갓 뜬구름 같이 헛되다는 시다.
시흥산장에서(始興山莊)
博帶峨冠來此鄕(박대아관래차향)-넓은 띠 아관 쓰고 이 고을 찾았더니.
深秋佳節是重陽(심추가절시중양)-늦가을 좋은 시절 바로 중양절이구나.
從知宿世三緣在(종지숙세삼연재)-알게거니 오래된 삼세연분 있음이여
回憶前人一夢長(회억전인일몽장)-옛 사람 그리워 외로운 꿈만 길어라.
種德方爲子孫計(종덕방위자손계)-씨를 뿌리는 덕은 자손위한 계책이라면서
修身誰知姓命香(수신수지성명향)-제 몸 닦음은 이름을 향기롭게 함인 줄 누가 아는가.
平泉花石須臾改(수신수지성명향)-평천의 꽃과 돌도 덧없이 변하거니
堪笑浮生空自忙(감소부생공자망)-우습다 뜬 구름 같은 인생 헛되이 바쁘기만 하구나.
이하응(李昰應)
흥선대원군 별서(別墅) 답사(踏査)는
1.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별서(別墅)
2.소수운렴암 각자(巢水雲濂菴 刻字)
3.삼계동 각자
4.석파정
5.너럭바위
6.신라시대 삼층석탑
으로 구분하여 답사(踏査) 할 수 있다.
2.소수운렴암 각자(巢水雲濂菴 刻字)
김흥근이 당시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라 불렸던 별서(別墅)를 조성(造成)하기 이전에 이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별서(別墅) 초입(初入) 사랑채 맞은편에 커다란 바위가 있고, 거기에
(巢水雲簾菴 寒水翁書贈 友人定而時 辛丑歲也)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어
김흥근의 별서(別墅) 조성시기 이전의 모습에 대해 추정하게 된다.
“물을 품고 구름이 발을 치는 집으로, 한수옹(寒水翁1641~1721)이
친구인 정이(定而) 조정만(趙正萬1656~1739)에게 신축년(辛丑年1721년 경종11년)
에 글을 써주다”라는 뜻의 이 글귀는 매우 운치 있는 시적(詩的) 표현으로 자연을
대하고 노래하는 조선시대 선비의 심성(心性)을 느끼게 해준다. 조선 숙종때 문신인 오재(寤齎) 조정만(趙正萬)의 별서(別墅) 조성에 관한 기록은 따로 전해지지 않으므로 더 이상 고증(考證)된 자료는 없지만 이 암각(巖刻)을 통해 현재의 위치에 18세기 초 또는 그 이전부터 별서(別墅)가 조성되어 경영되고 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3 삼계동 각자(三溪洞 刻字)
흥선대원군 별서의 사랑채 서측(西側) 후면 암반(巖盤)에 새겨져 남아 있는
삼계동(三溪洞)이라는 각자(刻字)는 김흥근이 별서(別墅)를 지어 이를 경영할 당시 이곳이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 삼계정(三溪精), 삼계동(三溪洞) 산정 등으로
불렸을 것을 추정하게 한다. 이는 소치(小癡) 허련(許鍊)이 집필한
“소치실록(小癡實錄)”과 양의영(梁義永)의 “유북한기(遊北漢記)”등 일부 문헌들에서도 드러나는데, 부근에 세 갈래의 개천이 합쳐져 흘러 삼계동(三溪洞)이라 불렀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흥선대원군이 이곳을 소유한 후 別墅의 앞산이 모두 바위이므로 자신의 호를
“석파(石坡)”로 바꾸고 정자(亭子)의 이름도 석파정(石坡亭)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4. 석파정(石坡亭)
석파정(石坡亭)은 한국 전통 건축양식과 중국(당시 청나라)의 건축양식이 적절히
조합되어 있는 정자(亭子)로, 1974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호호 지정되었다. 김흥근(金興根)이 청(淸)나라 장인(匠人)을 직접 불러와 지었다는 설이 있지만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 정자(亭子)에 남아있는 청나라풍의 문살 문양(紋樣) 평석교(平石橋)의 형태 등을 통해 건축 당시 이국(異國) 취향(趣向)의 정자(亭子)가 주었던 독특한 아름다움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또한 바닥을 나무로 마감하는 한국의 전통 정자와는 달리 화강암으로 바닥을 마감한 점은 건축적으로 매우 특이하다 하겠다.
이 정자(亭子)는 흥선대원군의 호(號)를 따 석파(石坡)라는 이름이 붙었다.
바위에 새겨진 소수운렴암(巢水雲簾菴)이라는 글 그대로
“물을 품고 구름이 발(簾)을 치는”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하였다.
5.너럭바위(寬平岩)
너럭바위는 “넓고 평평한 바위(盤石)”라는 뜻이다.
너럭바위는 코끼리 형상(形象)을 닮아 코끼리 바위라고도 하는데, 바위산으로서
인왕산(仁王山)의 특징을 잘 드러내주는 수려(秀麗)한 자연석조물이다.
그 비범한 생김새와 영험(靈驗)한 기운으로 인해 소원을 이뤄주는 바위로 알려져,
바위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들이 구전되어 온다. 아이가 없던 노부부가 이 바위 앞에서 득남(得男)을 빌어 소원을 이루었고, 아들의 시험 합격을 기원한 한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로 결국 아들이 출세의 길에 들어섰다는 이야기 등이 전해지며 소원바위,
혹은 행운바위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6. 신라시대 삼층석탑(新羅時代 三層石塔)
이중(二中)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塔身部)를 올리고 그 정상에 머리장식(相輪)을
장식한 일반형 3층 석탑(石塔)으로 화강암 재질의 높이 4.5m 석탑이다.
4장의 돌로 짠 기단부(基壇部)중 아래층 기단의 각 면마다 모서리기둥(隅柱)과
가운데기둥(撐柱) 2개가 새겨져있고, 윗층 기단 윗면의 탑신 받침이 2단으로 구성되어 신라석탑의 특징을 보인다. 탑의 중심부분인 탑신부는 몸돌(塔身石)과 지붕돌(屋蓋石)이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몸돌의 각 모서리에는 층마다 기둥 모양이 조각되었을 뿐 다른 장식은 찾아 볼 수 없다. 각층의 지붕들은 크기의 줄어든 정도가 적당하고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지붕돌 윗면에 완만한 경사가 흐르다가 양끝에서 부드럽게 살짝 들려 경쾌함을 더한다. 현재 3층 지붕돌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露盤石) 만이 남아 있는 모습이지만 전체적인 형태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에 건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근처의 개인 소유 경작지에서 수습해 현재의 모습으로 조립하였고,
2012년 6월 경 현 위치로 이전 설치되었다.
(정영호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삼층석탑 소견서)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