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와 멜랑콜리
小珍 박 기 옥
정신분석가 프로이트는 상실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으로 ‘애도’와 ‘멜랑콜리’를 제시합니다.
애도는 대상에 대한 상실과 자아의 명확한 인지 상태를 의미합니다. 애도는 생물학적으로 죽은 사람을 기억 속에서 지우는,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시 죽이는 것이 됩니다. 사람은 두 번 죽는다고 합니다. 한 번은 생물학적으로 죽고, 다른 한 번은 죽은 자를 사랑했던 사람의 기억 속에서 죽는다고 합니다. 어른들은 "죽은 사람은 빨리 기억 속에서 보내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죽은 자’를 ‘살아남은 자’의 기억 속에서 잊히게 하려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죽은 사람을 잊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그 사람이 소중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의 소중한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의 사랑하는 대상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죽은 사람을 잊지 못합니다. 애도는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사랑했던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즉 애도는 ‘그 사람이 결여했던 나를 애도하는 것’입니다.
멜랑콜리는 미완성된 애도를 말합니다. 쉽게 표현하면, 상실한 대상과 스스로를 동일시하기 때문에 대상에 대한 복수심이나 상실감을 대상과 동일한 자기 자신에게 투영하게 되는 일종의 퇴행적 성격을 나타냅니다.
‘멜랑콜리’는 무슨 뜻일까요? ‘멜랑’은 ‘검다’는 뜻으로 ‘멜라닌 색소’를 말할 때 쓰이는 접두어입니다. ‘콜리’는 ‘딱딱한’이라는 뜻입니다. 혈관 속에 지방이 축적되어 딱딱해지는 ‘콜레스테롤’의 ‘콜’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멜랑콜리’는 검은 담즙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우울해지고 침울해지는 것을 히포크라테스는 멜랑콜리라고 제시하였습니다. 프로이트 시대 때는 ‘멜랑콜리아’라고 불렀던 것을 요즘엔 ‘우울증’이라고 부릅니다. ‘멜랑콜리’라는 용어를 정신증적인 형태의 우울로 생각하시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사실 ‘멜랑콜리’라는 용어에는 우울감 이상의 무언가가 있습니다. 자기 비난과 자기 비하로 나타나는 자존감의 상실입니다. 우울은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불과할 뿐입니다.
애도의 자아가 대상의 상실을 인정하면서 자기를 건강하게 지키기 위해서 새로운 대상을 추구하는 반면 멜랑콜리는 대상의 상실을 자기 비난으로 해소하려고 한다는 점이 서로 다릅니다. 특히 멜랑콜리는 스스로 비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사회에서 추방이나 처벌을 받는 것이 마땅한 존재라고 자학하기도 합니다. 나아가서는 자기 질책을 하게 됩니다.
멜랑콜리는 자신에게 너무 몰두해 있어서 마치 자기 비난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간 듯 보이기도 합니다. 자신에게로 되돌아온 비난들은 결국 자아의 분열을 암시하게 됩니다. 여기서 자아분열이라함은 자기 자신에 대한 존재 자체를 무의식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의식의 ‘쪼개짐’ 혹은 ‘떨어져 나옴’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 자아분열의 일부는 상실한 대상과 융합되기도 하고 일부는 자신을 비판하고 초자아의 ‘양심의 목소리’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대상에 대한 사랑(대상이 포기되어도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이 자기애적 동일시로 숨어버리면, 증오가 대체 대상으로 작용하면서 그것을 학대하거나 평가절하하고, 고통을 주고, 또한 그 고통으로부터 가학적 만족을 얻게 됩니다. 멜랑콜리의 자기 비난은 동시에 대상에 대한 공격이기도 합니다. 자기애적 철수는 대상과의 무의식적 관계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멜랑콜리는 자신과 다른 어떤 사람들, 대개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 가학적이고 증오에 찬 성향들을 보이기도 합니다.
프로이트는 성인의 우울증 상태에서 공격성과 우울증의 교착점이 초기 아동기에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우울증 자리에서는 대상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 뒤따름을 알아냈습니다.
결론적으로 멜랑콜리는 자존감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진정으로 이루어져야 이러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질과 성격 또한 함께 작용하지만,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건강한 자존감이 자신 안에서 주인처럼 버텨줘야 극복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