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주석의 영생을 빈다”는 동생과 “인간백정 주한미군을 심판한다”는 兄 부안 대책위의 상임대표와 상임고문을 맡아 2003~2005년 ‘扶安(부안)사태’는 흔히 ‘주민 스스로, 조직적으로 벌인 운동’이라고 불리지만 실제 사태를 주도한 것은 ‘핵폐기장 백지화 핵발전소 추방 범부안군민대책위(부안대책위)’라는 전문 시위조직이었다. 부안대책위 상임대표는 김인경 원불교 교무가, 상임고문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문규현 신부가 맡았는데 이들은 평택 범대위가 주도한 反美시위 당시에도 주도적으로 참가했었다. 김인경 교무는 ‘생태지평’이라는 환경단체의 이사장이다. 생태지평 고문은 문규현 신부와 수경 승려이며 이들은 ‘새만금 사태’ 당시 삼보일배로 언론에 주목을 받았었다. 김인경 교무와 문규현 신부는 2004년 8월13일 40명의 소위 종교인들과 함께 ‘8·15 59돌 종교인 통일·평화선언 선언’에 나섰다. 이들은 성명을 통하여 6·15선언을 ‘암흑 속의 한 줄기 빛’으로 표현하고, 주한미군 철수·국가보안법 철폐 주장은 물론이고, 범민련·한총련 같은 김정일의 전위대를 ‘愛國(애국)·愛族(애족)단체’로 부르며, 정부는 이들의 南北공동행사 참가 금지 조치를 悔改(회개)하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탈북자 입국을 기획했다며 북한에 謝過(사과)할 것을 요구하고, 김일성 사망을 '逝去(서거)'로 높인 뒤 조의를 표하기 위해 방북하려던 대표단을 막은 것을 謝罪(사죄)하라고 했다. 現役군인을 팬 평택 反美 폭동 김인경 교무, 문규현 신부는 평택 反美시위 당시도 호흡을 맞췄다. 평택 범대위가 주도한 反美시위는 2005년 7월10일에 이어 2006년 3월15일·4월7일·5월4일과 5일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쇠파이프·쇠갈고리·몽둥이·죽창까지 동원한 폭력시위로 전개됐었다. 5월5일에는 무장한 폭도들이 현역군인들을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문규현 신부와 김인경 교무는 2004년 5월30일 ‘미군기지 확장반대 결의대회’에서 '평택주민 위협하는 미군기지 확장 반대한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소위 평화대행진에 앞장섰다. 이들의 뒤를 잇는 1000여 명의 시위대는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3거리에서 대추리 마을까지 2km의 K-6(캠프 험프리) 美공군기지 철조망을 따라 걸었다. 문규현 신부와 김인경 교무는 2006년 9·18 평택평화선언에 참가하고 같은 달 9월24일 소위 평화대행진 共同준비위원장으로 참가한다. 共同준비위원장에는 文·金 두 사람 외에도 문규현 신부의 兄인 문정현 신부 및 오종렬(전국연합 상임의장), 정광훈(전국민중연대 상임대표), 한상렬(통일연대 상임대표), 권영길(국회의원, 민주노동당), 문성현(민주노동당 대표), 박순경(통일연대 명예대표), 백낙청(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 상임대표), 수경(불교환경연대 상임대표), 홍근수(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상임대표) 등이 참가했다. 평택평화선언은 '평택미군기지 확장이 전쟁을 부른다'는 주장을 폈는데,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은 전쟁을 불러옵니다…평택 미군기지는 미국의 군사전략의 변화에 따른 전쟁침략 기지입니다…주한미군도 지금까지 대북 전쟁억지력이라는 명분마저 팽개치고, 평택으로 주한미군사령부를 옮기면서 미국이 전쟁을 벌이는 전 세계로 주한미군을 자유롭게 빼돌릴 수 있기 위한 주한미군 재배치계획에 의거하여 공격형 신속 기동군으로 성격이 변화하고 있습니다…당연히 한반도는 우리와는 상관없는 전쟁에 의해서 공격의 대상이 되고, 그에 따라 우리는 평화를 보장받을 수 없는 막다른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김 주석의 영생을 빈다’ ‘인간백정 주한미군 운운’ 문규현·문정현 형제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면 이렇다. 동생인 문규현 신부는 1995년에서 2005년까지 공동대표와 상임대표 자격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정구사)’을 이끌어 온 인물이다. 정구사는 주한미군 철수·국가보안법 폐지 등을 주장해 온 대표적인 反美단체이다. 文신부는 1989년 임수경 訪北(방북)사건에 동행하여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고 1998년 평양통일대축전에 참가해 金日成 시체가 안치된 금수산궁전 방명록에 '金주석의 永生(영생)을 빈다'는 글을 남겨 물의를 빚었다. 文신부는 2005년 5월 군산 앞바다 直島(직도)사격장 폐쇄를 위해 ‘군산 직도 폭격장 폐쇄를 위한 全國시민사회단체대책위원회(직도대책위)’를 결성하는 등 反美운동을 벌여왔다. 그는 2008년 ‘6·15공동선언과 10·4선언 이행 및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각계 인사 공동선언’, 2002년 ‘한총련 합법적 활동 보장을 위한 종교인 1000인 선언’, 2003년 ‘송두율 교수 석방을 요구하는 시민사회 1000인 명단’에 이름을 올린 바 있다. 文신부는 2003년 좌파매체 오마이뉴스가 선정한 ‘2003년 올해의 인물’로 올랐다. 그는 같은 해 12월28일 부안사태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묻는 질문에 “권력, 자본, 관료들이 똘똘 뭉쳐서 물질만능과 개발지상주의를 무슨 지상낙원인 양 퍼뜨린다는 점, 소수의 이익을 위하여 자연과 그 자연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제물 삼고 있다는 점이 너무도 선명하게 다가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또 자신은 “그저 예수 그리스도 생애를 따르는데 평생을 바치고자 하는 司祭(사제)일 뿐”이라며 “내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어디로 부르고 계신지 예민하게 귀 기울이고 적절하게 응답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문규현 신부의 여섯 살 터울 형인 문정현 신부 역시 扶安사태를 주도한 핵심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2000년 美공군 사격훈련장인 경기도 화성군 매향리사격장폐쇄를 주장하며 만들어진 ‘매향리美軍국제폭격장폐쇄汎국민대책위원회(매향리범대위)’상임대표 및 2005년 평택범대위 상임대표 등을 맡아 反美(반미)운동을 이끌었다. 文신부는 2002년 11월21일 동두천 캠프 케이시 정문 앞에서 열린 효순이·미선이 추모집회에 참가, 태극기를 몸에 두른 채 ‘삭발의식’을 가졌다. 그는 기자 회견문을 통해 “한국민은 인간백정 주한미군을 반드시 한국 재판대에 세우고 한국민의 이름으로 심판할 것이다”고 주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