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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뒤안길로 사라지는 "성원양조장" 농민들과 서민들이 가장 즐겨마시던 술 "막걸리"가 이제는 맥주 소주에밀려점점그 수요가 줄어들어가며 양조장도 역시 쇠락의 길을 걸을수밖에 없다. 한때는 그지역의 기업으로써 부와 명예를 가지며모든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던양조장이 이제는 郡 지역에 하나정도 겨우 명맥만 이어갈정도로 유지되고거의 문을닫게되었다. 지금도 가끔은 옛노인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막걸리를 마시는걸보면포천이동막걸리 아니면청양구기자막걸리등 외지에서 들어온플라스틱병막걸리를 종이컵이나유리잔에부어마실뿐 옛날 노란 양은주전자에담아사기대접으로 부어 마시던 그런정겨운모습은 찿아볼수가없다 얼마전까지도 합덕 양조장에서 조금씩 생산하여 합덕,우강,신평,순성,면천까지판매를 한다고 들었는데 아마 그것마저도 신통치않으것같다. 예전우리시대 막걸리 전성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아마도 최고의 절정기는80년대중반까지 막걸리의 수요는 정말어마어마 했다 그예로 내가79년부터 82년도까지둔창에서 구판장을 운영한일이있다. 아는친구들은 다 알고있겠지? 그때 내 가게에서 막걸리먹구 술취해서 술값안내고간 친구 몇놈있는데양심껏 생각해서 지금이라두 좋게말할때 갚아라 아랐지? ㅋㅋㅋ 그때의 막걸리 판매는 특히 농사철이 제일로 많이 팔렸지. 농사가 기계화가안된지라 인력으로 모내기하고 낫으로 벼베기할때라사람들이 무지많이 투입을했잖아! 그사람들은 서산, 태안사람들이 주로와서 모심고 벼를 베고했는데 그때 막걸리 판매는 평균 20통기록은 26통까지 팔아본 기억이있다. 이렇게 한동네서만 판매한 수요가이러한데 우강면 17개리가 모두 이정도 팔았다면 그수요는 가이 짐작이가고 남을거라 생각한다. 그러니 이를 혼자 독점을 하였으니 부를 축적하지않을수가 있겠는가. 이러다보니 성원양조장 창업자 故유 석환 사장님은 우강면내 모든국민학교육성회장으로 추대되어많은 지원을하셨으며 지역유지로 활발한활동을 하신걸로알고있다. 우리학교 행사만있으면 꼭 귀빈으로 초청되서단상위에서 축사와 만세삼창등을 우렁차게 외치던 모습이지금도 생생하다. 그러나 양조장에 대한 불신도만만치않았던것도 배제할수는없다 판매가 수요를 쫒아가지못할때는 물을 많이희석하여 싱거운 막걸리를 만들어 불만을 많이 들었다 혹시 "모래미"라는 말들어보았는가? 모래미는 막걸리를 만들기전 원액으로 농축해나오는 것인데 모래미한통에 물 5통을 희석하면 정상적인막걸리가 된다고한다. 그러나 바쁘면 거기에 물을 더 많이부어서싱거운 막걸리를 만들었던거야! 또한 막걸리가 판매가부진하면 덜나가는 동네를 세무서에 고발하여 밀주 단속을 나오게끔하여 걸린 집은 무거운 벌금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다 옜날의 술조사가 얼마나무서운 존재였나? 그들이 떳다하면 온동네가 술렁이며 무서워 벌벌떨었다. 길다란 쇠꼬챙이를 들고다니면서 퇴비장,잿무덤을 꾹꾹 쑤시며 다니는 그사람들은 어린마음에 이세상사람들이아닌 저승사자로 착각할정도로 무서운 존재였다. 아마도 이것외에도 막걸리에대한 숫한 사연들이 많겠지만 막걸리양조장은흘러가는세월의 뒤안길로 서서히멀어져가고있다. 이곳 성원양조장은 우강 농협이매수하여 헐어버리고 주유소를 개설할것으로보인다.
첫댓글 허허 그놈. 글재주도 상당하네. 내가 꽁지를 내려야 것다.
무슨 글인데 그래? 글이 안 보여. 나도 좀 알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