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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애 시집, <믿음의 유사>, 휴먼앤북스, 2024
초춘호(初春號)의 시간들
맹문재(문학평론가·안양대 교수)
1.
조정애 시인은 초춘호(初春號) 침몰 사고라는 역사적인 시간을 현재의 시간과 연결하는 시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시는 음악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행동을 주로 다룬다. 따라서 그림, 조각, 건축 등은 본질적으로 공간예술에 속하는 주제를 나타내는데 비해, 시는 조정애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듯이 시간예술에 존재하는 주제를 추구한다.
조정애 시인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데는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가 제시한 대뇌반구(大腦半球)의 환상선(loop-line)을 참고할 수 있다. 시가 일반적 혹은 보편적 능력을 획득하게 되는 것은 바로 먼 기억과 생각의 환상선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곧 이성적인 삶이 감각적인 삶으로 편입되면서 신경의 보고가 일관성 있고 보편적이며 인간적인 의미를 지닌 사상과 사고로 변형되는 것이다. 이미지스트들이 입증하듯 환상선을 활용하지 않고도 특정한 유형의 시를 쓰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은 시각, 청각 또는 촉각 이미지의 보고일 뿐이다. 이미지스트들은 기억이라는 낡은 문을 닫음으로써 감각 경험의 새로운 문들을 열어주는 놀라운 솜씨를 발휘했지만, 근본적인 결함은 보편적인 사상이 결핍된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현재의 감각적 충동으로부터 행동하는 저급한 신경중추만이 아니라 숙고를 통해 행동하는 인간 두뇌의 반구들을 재현하기 위해 활용했다. 숙고는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구성된 이미지들이며, 느끼고 목격한 바 있는 것들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또한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가 진정한 시인들은 비전과 신성한 능력을 지니고 시를 완성한다고 말했다. 워즈워스가 제시한 비전은 시인이 느끼는 온갖 종류의 감각과 인상들을 의미한다. 괴테의 말처럼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 그리고 다른 모든 세계에 대한 그의 경험이 해당한다. 비전과 어우러지는 신성한 능력은 감각과 인상들이 성찰, 비교, 기억, 즉 고요함 속에 회상된 정서의 지배를 받게 됨에 따라 독특한 생명력과 힘을 지닌 단어들로 신비롭게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시의 완성은 시인이 보고 느끼고 자신의 상상력을 통하여 변형시킨, 리듬감 있게 고동치는 언어들이다. 워즈워스가 진정한 시인들의 특성을 제시한 이와 같은 견해는 조정애 시인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데 길잡이가 된다.
2.
일본집 다다미방은
언제나 풀냄새가 났다
커다란 유리창에는
성탄절 카드로 성에가 끼고
푸른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 아래
군부대의 나팔 소리가 들렸다
바다로 떠난 아버지는
보름달 속에서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
영하의 바닷다람에
손발이 쩍쩍 갈라졌다
사과 궤짝에 켜놓은 촛불이
몇 개 닳을 때까지
군용담요를 두르고 공부를 했다
미래의 불안 속에서
영양실조로 쓰러지면서도
일등을 지켜낸 나에게는
유리구슬처럼 푸른 바다와
눈부신 태양과 거센 파도와
갈매기들이 늘 함께 있었다
―「흑백사진」 전문
위의 작품 화자는 대뇌반구의 환상선을 통해 어린 시절의 상황을 떠올리고 있다. 화자는 자신이 살고 있던 “일본집 다다미방은/언제나 풀냄새가 났”으며, “커다란 유리창에는/성탄절 카드로 성에가” 낀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집 밖에서는 “푸른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 아래/군부대의 나팔 소리가 들렸”던 것도 회상한다. 집에서 사람 냄새 대신 풀냄새가 나고, 유리창에 성탄 카드 대신 성에가 낀 것으로 보면 집안의 형편이 따뜻하거나 풍족했다고 보기 어렵다. 군부대에서 부는 나팔 소리가 집안으로 들려오는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집안의 형편이 어려운 근본적인 원인은 “바다로 떠난 아버지는/보름달 속에서/영영 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무슨 연유로 집에 귀가하지 못하는지 작품에 제시되지 않고 있지만,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운명이기에 화자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유교적 가부장제 시대에 아버지는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한 집안의 가장이기에 그러한 것이다. 그렇기에 화자의 삶은 “영하의 바닷바람에/손발이 쩍쩍 갈라졌”을 정도로 어려웠다.
화자는 그 열악한 환경에 함몰되지 않았다. “사과 궤짝에 켜놓은 촛불이/몇 개 닳을 때까지/군용담요를 두르고 공부를 했”고, “미래의 불안 속에서/영양실조로 쓰러지면서도/일등을 지켜”내었다.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 맞서 공부했기에 화자는 어려운 삶을 극복했을 것으로 유추된다.
그렇지만 화자는 아버지의 부재로 말미암은 허전한 마음을 채우지 못했다. 아버지는 영원히 집으로 돌아올 수 없는 존재이기에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흐르는 시간에 몸과 마음을 싣고 기다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화자의 마음속에는 아버지 대신 “유리구슬처럼 푸른 바다와/눈부신 태양과 거센 파도와/갈매기들이 늘 함께 있었다”.
새해를 맞는 날에
아버지라는 말에 어김없이 흔들린다
육신의 아버지를
천상을 향해 추도하는 날에는
그리운 아버지 생각에
늘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달려도 보이지 않은 길을 달리면서
나를 칭칭 휘감는 그 길에서
나는 길을 잃고 헤맸다
해마다 마음속에는
흉터처럼 나이테가 늘어갔다
― 「서글픈 나이네」 부분
위의 작품 화자는 “새해를 맞는 날에/아버지라는 말에 어김없이 흔들린다”고 고백한다. “육신의 아버지를/천상을 향해 추도하는 날에는/그리운 아버지 생각에/늘 마음이 착 가라앉”은 것이다. 화자는 “달려도 보이지 않은 길을 달”렸지만, 길에 칭칭 휘감길 뿐 길을 잃고 헤맸다. 그리하여 “해마다 마음속에는/흉터처럼 나이테가 늘어”났다. 아버지를 향한 화자의 그리움이 얼마나 오래된 것이고 절실한 것인지 알 수 있다.
화자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지만, 흉터 같은 나이테가 늘어간다고 한 데서 볼 수 있듯이 사랑하는 것 이상의 연유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화자는 아버지의 죽음을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겪어야 하는 보편적인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렇기에 아버지가 한 인간으로서 주체적인 삶을 영위하다가 생을 마치지 못한 사실을 안타까워하며 천상을 향해 추도하는 것이다.
거기에 아직 젊은 아버지가 있고
아이는 더 자라지 않았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때로는 큰 소리로 불러 보고 싶은 밤이다
― 「큰 소리로 불러봐」 부분
위의 작품에서 화자는 아버지가 “억울하게 돌아가”셨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것도 “젊은 아버지”의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따라서 화자는 아버지를 “때로는 큰 소리로 불러 보고 싶”어한다. 이와 같은 화자의 고백은 아버지의 죽음이 어떠한 연유에서 일어났는지 궁금하게 한다. 화자는 그것을 한꺼번에 다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은 한 개인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 아픈 상처가 멍든 바다여서/차마 웃으며 돌아갈 수 없구나”(「바닷가의 그 집」)라고 토로하면서 아버지의 죽음을 연작시 형식으로 밝혔다.
3.
긴 세월 내 슬픔은
바다에서 시작되었다
잃어버린 사랑 한 줄기
수평선으로 남아 있어
풀지 못한 그 원한은
아직도 신문고를 두드린다
부패 세력이
한국사도 해양 기록사도 지워버렸다
100여 명의 사상자를 안치한 수상경찰서
누가 초춘호(初春號)를 모른다고 하는가
탄식의 모래밭에 새긴 이름들
분노의 불꽃이 꺼질 줄 모른다
바다는 살아 있다
잃어버린 내 영혼의 둥지에서
깊은 상처와 뼈아픈 고난이
은빛 꿈 조각으로 부서지고
세상을 향해 소리치는 파도는
오늘도 하늘에 가 닿는다
― 「내 영혼의 둥지」 전문
위의 작품에서 화자는 아버지를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있지만, 정황상으로 보면 관련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화자는 “긴 세월 내 슬픔은/바다에서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사랑 한 줄기/수평선으로 남아 있”을 뿐이어서 “풀지 못한 그 원한은/아직도 신문고를 두드린다”.
화자가 신문고를 두드리는 이유는 “부패 세력이/한국사도 해양 기록사도” 아버지도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100여 명의 사상자를 안치한 수상경찰서”에서 “초춘호(初春號)를 모른다고” 한 것이다. 그렇기에 화자는 “탄식의 모래밭에 새긴 이름들/분노의 불꽃이 꺼질 줄 모른다”라고 여기고 신문고를 울리려고 나섰다.
화자는 자신의 결단이 헛되지 않을 것을 기대한다. 자신을 믿고,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믿는다. 또한 “바다는 살아 있다”고 하듯이 자연을 믿는다. 자연의 질서는 엄정할 뿐만 아니라 그 힘은 인간의 술수나 전략을 넘어선다. 그러므로 화자는 “잃어버린 내 영혼의 둥지에서/깊은 상처와 뼈아픈 고난이/은빛 꿈 조각으로 부서”진다고 할지라도 바다에 희망을 품는다. “세상을 향해 소리치는 파도”가 “오늘도 하늘에 가 닿는” 모습에 함께하는 것이다.
초춘호 여객선 침몰 사고는
1950년 12월 16일 아침
화물과 정원 초과로 배에 물이 들자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급히 회항 중
출발 15분 만에 일어난 대참사다
영도다리 끝 수상경찰서에
백 명이 넘는 시체들을 안치했다
그러나 해양 기록이나 역사 기록에 없다
네 살에 아버지를 잃은 후
슬픔의 옷을 입고 자란 나는 시인이 되었다
그리고 초춘호를 찾아 한없이 헤맸다
마침내 부산일보 동아일보에서
침몰 사고 기록을 찾았다
나는 신문에 실린 사망자 명단에
마흔 살의 아버지 이름과
집 주소를 보며 처음으로 오열했다
일본 게이오대학 영문과를 나오고
임시정부에 참여하기 위해 만주로 갔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돌아온 아버지
6사단 사령부 통역책임자로 일하던 아버지
수많은 귀환 동포들에게 집을 나누어 주고
6·25 피난민들을 돕기 위해 애쓴 아버지
고향의 젊은이들을 돕고
어려운 이들을 위해 늘 바쁜 아버지
창녕 조씨 화수회와 사천 향우회를 창립한 아버지
대동상선은 부산 여수를 오가는 선박회사다
통영이 본사인 초춘호 선주 조씨는
1953년 1월 11일 다대포 앞바다에서 360명의 사상자를 낸
창경호 침몰 사건과 같은 선박회사의 선주다
두 번의 대참사가 같은 선박회사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대동상선 부산지사장은 이승만 대통령의 가장 신임받은
K 교통부 장관의 아들이었음을
2006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밝혀냈다
이제 역사에 감춰버린 초춘호의 이름이 세상에 밝혀지고
억울하게 돌아가신 내 아버지와 사망자들의 영령이
명예를 되찾고 위로를 받는 날이 오기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
― 「초춘호 여객선」 전문
위의 작품은 “초춘호 여객선 침몰 사고”를 비교적 정연하게 정리했다. 소개한 바에 따르면 초춘호 침몰 사고는 “1950년 12월 16일 아침/화물과 정원 초과로 배에 물이 들자/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급히 회항 중/출발 15분 만에 일어난 대참사”였다. 사고가 난 뒤 “영도다리 끝 수상경찰서에/백 명이 넘는 시체들을 안치했다”. 그렇지만 초춘호 침몰 사고에 대해서는 “해양 기록이나 역사 기록에 없다”. 한국전쟁 동안에 일어난 사고여서 국민의 관심을 받지 못할 수 있었지만, 해양사나 역사 기록에 없다는 것은 큰 문제이다. 단순히 실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삭제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화자는 그 사고로 “네 살에 아버지를 잃은 후/슬픔의 옷을 입고 자”라나 “시인이 되었다”고 밝힌다. 또한 “초춘호를 찾아 한없이 헤”매다가 “마침내 부산일보 동아일보에서/침몰 사고 기록을 찾았”는데, 그 “신문에 실린 사망자 명단에/마흔 살의 아버지 이름과/집 주소를 보며 처음으로 오열했다”고 고백한다. 수많은 세월 동안 찾아 헤매다가 아버지의 사망을 확인한 순간, 그 충격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화자는 시인이었기에 그 슬픔에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참사에 대한 진실 규명을 인간 가치를 추구하는 차원에서 부단하게 요구했다.
화자는 시인으로서 아버지의 이름을 깊게 불렀다. 아버지는 “일본 게이오대학 영문과를 나오고/임시정부에 참여하기 위해 만주로 갔다가/일경에 체포되어 돌아”왔다. “6사단 사령부 통역책임자로 일”했고, “수많은 귀환 동포들에게 집을 나누어 주”었으며, “6·25 피난민들을 돕기 위해 애”쓰기도 했다. 또한 “고향의 젊은이들을 돕고/어려운 이들을 위”하느라고 늘 바빴고, “창녕 조씨 화수회와 사천 향우회를 창립”했다. 화자는 아버지를 혈육 관계를 넘어 역사적인 존재로 인식한 것이다.
화자는 아버지를 희생시킨 인물들과 그들을 둘러싼 사회적 배경에 대해서도 찾아냈다. 아버지를 숨지게 한 “대동상선은 부산 여수를 오가는 선박회사”였고, “통영이 본사인 초춘호 선주 조씨는/1953년 1월 11일 다대포 앞바다에서 360명의 사상자를 낸/창경호 침몰 사건과 같은 선박회사의 선주”였다. 그리고 “두 번의 대참사가 같은 선박회사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대동상선 부산지사장은 이승만 대통령의 가장 신임받은/K 교통부 장관의 아들이었음을/2006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밝혀”낸 것도 알아냈다.
화자의 진실 규명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제 역사에 감춰버린 초춘호의 이름이 세상에 밝혀지고/억울하게 돌아가신 내 아버지와 사망자들의 영령이/명예를 되찾고 위로를 받는 날이 오기를/하나님께 기도”한다. 초춘호의 참사가 모순된 사회 계급에서 발생되었음을 세상에 알리고, 아버지와 같은 억울한 사람들의 명예를 되찾도록 힘쓰겠다는 것이다. 화자가 아버지들까지 품겠다는 의식은 궁극적으로 인간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기에 소중하다. 화자는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한다. 종교적인 자세보다는 한계가 많은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신에게 전하는 모습으로 볼 수 있다. 화자는 그와 같은 자세로 다른 참사들을 끌어안는다.
꽃의 노래는 끝나지 않았는데
차디찬 바닷물 속으로 수장된
세월호, 그 수많은 아이들 애절한 목소리가
가슴속에 남아 있는데
또다시 이태원 골목길에서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쓰러진 채
울부짖는 비명소리가
검은 리본 속 흰 국화꽃에 묻히다니
두고 온 꿈도 사랑도
꽃잎에 새겨진 채 흩날리는 날
어이할거나 저 통곡의 소리여
억울하게 무참히 져버린 생명이여
바람 부는 강변길
떨어진 꽃잎 자리에
아, 초춘호(初春號) 침몰 사고로 숨진 내 아버지
70년 역사에 숨겨버린 참절비절(慘絶悲絶)한 사연이
네 살배기 눈물에 살아나
―「꽃의 노래는 끝나지 않았다」 부분
위의 작품 화자는 “꽃의 노래는 끝나지 않았는데/차디찬 바닷물 속으로 수장된/세월호, 그 수많은 아이들 애절한 목소리가/가슴속에 남아 있는” 것을 듣는다. 주지하다시피 세월호 참사는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도로 향하던 세월호가 전남 진도군 앞바다에서 전복된 사고로 안산 단원고 학생들을 포함해 304명의 승객이 사망했다. 구조 과정에서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했던 선원들이 승객들을 버리고 먼저 탈출한 비윤리적인 행동에 국민은 분노했다. 2017년 4월 11일 세월호가 인양되었지만, 참사의 원인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있어 국민의 좌절과 분개는 여전하다.
세월호 참사와 같은 사고가 “또다시 이태원 골목길에서” 일어났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쓰러진 채/울부짖는 비명소리가/검은 리본 속 흰 국화꽃에 묻”힌 것이다. 2022년 10월 29일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에서 핼러윈을 앞두고 몰려든 사람들이 좁은 골목에서 밀려 넘어지면서 159명이나 사망했다. 세월호 참사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에 이태원 참사는 더욱 충격을 주었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여전히 되지 않고 있어 국민의 절망과 분노는 가라앉지 않고 있다.
화자는 “초춘호(初春號) 침몰 사고로 숨진 내 아버지/70년 역사에 숨겨버린 참절비절(慘絶悲絶)한 사연이/네 살배기 눈물에 살아나”기에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에 더욱 가슴 아파한다. 그리하여 참사를 일으킨 사회적 구조의 모순을 밝히는 것은 물론 그 극복의 길에 나서는 것이다.
4.
화자는 “철골을 뽑았으니/너희 지은 죄가 부끄럽지 않느냐/무너져 내린 삼풍아파트를 잊었느냐”(「어처구니 없다」)라고 부실 공사를 한 사람들을 고발한다. 2023년 8월 24일 일본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방류하자 “방사능에 오염된 자들의 소식을 감추는 일은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지구 바다 꿈」)라고 항의한다. 대한민국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오랜 세월 비무장지대에서/눈물과 핏물과 원한을 녹이”는 장소를 찾아가 치열한 전투 속에 숨진 분들에게 옷깃을 여미고 머리 숙여 “이제 훨훨 날아서 천국에서 영생하기를”(「연천, 그 평화의 길에서」) 기도한다.
기후재난에 대해서도 많이 우려하고 있다. “계속되는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로/수천수만 개의 빙하가 사라질 위기에 있”(「빙하(氷河), 그 소멸에 대하여」)음을 직시하며, 그것으로 인해 바다의 수위가 상승하고 해안이 침식되어 “북극곰이나 야생동물의 생존이 위험에 처하고” “농업 위기를 맞게 되는” 미래를 걱정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화자는 비판과 비관에 갇히지 않고 극복 방안과 희망을 제시하고 있다. 지구상에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이지만, “지구의 고통과 한숨이/세상을 캄캄하게 덮어도/푸른 눈물같이 새어 나오는/저 낙타의 별빛은 막을 수 없으리라”(「반전(反戰)」)라고 전망한다. “한국전쟁 이후 현재까지/약 25만 명에 달하는 우리 아이들을/해외 입양을 보낸 70년 만에/전 세계 15개국 아티스트가 되어/예술 작품 80점으로/작품 전시를 위해 모국을 방문”(「마더랜드」)한 것을 크게 환영한다. 화자는 선하고 성실한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역사를 믿고 있는 것이다.
탁 트인 광장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혼이 살아 있다
추위에 오므라든 몸과 마음의 주름이
여기에서 사르르 펴지고
겨우내 갇혔던 작은 소망은
풍선으로 부풀려 푸른 바람에 날린다
거리에 피어나는 봄꽃들아
청년들의 씩씩한 생각들아
높이 더 멀리 날아라
코로나19로 멀어진 너와 나의 거리가
이제 어둠에서 벗어나니
저 햇살은 어찌 이리도 눈이 부신가
걷는 젊음도 돌계단에 쉬는 사람도
우리 민족 역사의 후예들이다
자 보아라, 여기 이 넓은 터에는
전국 각지에서 흰옷 입은 조상들이
걸어서 찾아오던 발자취가 있다
잊을 수 없는 깃발과 만세 소리가 있다
―「광화문 광장」 전문
광화문광장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혼이 살아 있”을 정도로 역사적인 장소이다. 그곳에 서면 “추위에 오므라든 몸과 마음의 주름이” “사르르 펴지고/겨우내 갇혔던 작은 소망은/풍선으로 부풀려 푸른 바람에 날”리는 것을 느낀다.
화자가 그렇게 느끼는 데는 우선 “코로나19로 멀어진 너와 나의 거리가/이제 어둠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저 햇살은 어찌 이리도 눈이 부신가”라고 느끼며, “거리에 피어나는 봄꽃들아/청년들의 씩씩한 생각들아/높이 더 멀리 날아라”라고 응원한다.
또한 화자는 광화문광장에서 “걷는 젊음도 돌계단에 쉬는 사람도/우리 민족 역사의 후예들이”라고 껴안는다. 그렇기에 “여기 이 넓은 터에는/전국 각지에서 흰옷 입은 조상들이/걸어서 찾아오던 발자취가 있”고, “잊을 수 없는 깃발과 만세 소리가 있다”라는 의식을 갖고 사람들과 연대한다. 광화문광장을 역사적인 장소로 인식하고, 역사적인 일들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며 동참하는 것이다.
실제로 광화문광장은 조선시대의 주요 관청이 모여 있던 육조(六曹)의 거리로 서울의 중심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건물이 들어서는 바람에 터를 빼앗긴 적이 있었지만, 1996년 일제의 건물을 철거하고 광장으로 조성되어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광화문광장은 절대 권력자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시민을 위한 장소이다. 대한민국은 유럽처럼 근대 도시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문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광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 시장이나 골목이 그 역할이 담당했다. 따라서 광화문광장은 시장이나 골목이 사라진 현대사회의 시민들이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마당이 되어야 한다. 시민들의 쉼터로, 놀이공간으로, 다양한 이벤트의 장소로, 그리고 정치적 의견을 표명하는 장소로 쓰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화자는 초춘호 침몰 사고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잃었지만 그 슬픔에 함몰되지 않고, 광화문광장에서 아버지와 아버지들을 살려내려고 한다. 인류 평화의 길잡이로서 고행과 고난을 이겨내는 시인이 되고자 한다. “사랑을 위해/가시로 길을 내는/저 붉은 장미 한 송이처럼/시는 영원한 구원의 빛”(「믿음의 유산」)이라고 노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