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행이인 기타 야스토시 지음 21세기북스 / 2009년 1월 / 416쪽 / 15,000원 소나무 아랫집에서 태어나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1894년 11월 27일에 와카야마 현 가이소군 와사무라 아자센단노키의 유복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마쓰시타 집안은 오래 전부터 이 고장에서 살아왔는데, 옛날의 장부를 살펴보면 250년 전인 교호 시대에까지 그 기록이 남아 있다. 마쓰시타 집안이 보유하고 있던 논밭을 따라 걸으면 이웃 마을인 니시와사무라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 어렸을 때의 고노스케는 유모의 등에 업혀 강으로 나가 물고기를 낚는 것을 보기도 하고, 술래잡기를 하기도 하는 등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는 날들을 보냈다. 하지만 아버지인 마사쿠스가 와카야마 시내에 설치된 미곡(米穀) 거래소에 출입하기 시작하면서 불행이 시작되었다. 고노스케가 네 살이 되었을 무렵, 마사쿠스가 쌀 투기에 크게 실패하여 마쓰시타 가의 운명은 단번에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가지고 있던 전답이 몽땅 타인의 손에 넘어갔으며, 결국에는 밥 지을 쌀마저도 떨어져 보다 못한 동네 사람이 보리밥으로 주먹밥을 만들어 주었다고 할 정도로 곤궁한 지경에 처하고 말았다. 마사쿠스는 어쩔 수 없이 저택을 팔고, 일자리를 찾아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땅인 와사무라를 떠나 와카야마 시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1899년, 고노스케가 아직 네 살이었던 때의 일이었다. 와사무라를 떠난 마쓰시타 가 사람들은 와카야마 시내의 번화가인 혼마치 1번가 ‘뒷골목에 자리한 집 중에서도 가장 좁은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거기서 마사쿠스는 가재도구를 팔아 남은 돈을 밑천으로 나막신 장사를 시작했다. 당시 21세였던 장남 이사부로가 가게 일을 도왔다. 하지만 마사쿠스는 와카야마로 나온 뒤에도 돈이 약간 생기면 미곡 거래소로 달려갔기에 종종 부부싸움의 원인이 되곤 했다. 고노스케가 먼 훗날까지 치를 떨 정도로 ‘투기’를 싫어했던 이유는 그와 같은 불행한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익숙지 못한 장사는 손에 익지 않은 법, 결국 나막신 가게도 뜻대로 풀리지 않은 채 2년도 되지 못해서 가게를 접고 말았다. 기노카와에서의 작별 나막신 장사를 그만둔 뒤, 마사쿠스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자식들이 하나하나 죽어 갔으며 의지하고 있던 장남 이사부로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마사쿠스는 자신이 가족들을 그와 같은 궁핍으로 몰아넣은 것이라는 자책감 때문에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고 생각한 마사쿠스는 1902년 7월에 홀로 오사카로 나가야겠다고 결심, 2년 전에 창립된 사립 오사카 맹아원(盲兒院)에 일자리를 얻었다. 마사쿠스가 오사카로 나간 지 2년쯤 지났을 무렵, 가족들 앞으로 편지가 도착했다. ‘오사카 하츠만스지에서 화로를 팔고 있는, 미야타라고 하는 마음씨 좋은 사람의 가게에 심부름할 아이가 필요하다고 한다. 마침 잘 됐으니 고노스케를 보내도록.’ 이렇게 해서 고노스케는 1904년 11월에 소학교를 중퇴하고, 아홉 살에 혼자 오사카로 길을 떠나게 되었다. 일을 하기로 한 미야타화로점은 난바 역에서 북쪽으로 5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하츠만스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미야타화로점은 근처의 고급 요정을 상대로 화로를 만들어 파는, ‘제작과 판매’를 겸한 상점이었다. 상가(商家)의 풍습에 따라서 고노스케는 ‘고깃톤’이라 불렸으며, 혹독한 고용살이가 시작됐다. 일은 오로지 아기를 돌보는 것이었지만 시간이 나면 ‘속새’로 화로를 닦는 것을 돕기도 했다. 보드라운 아이의 손이었기 때문에 쉽게 까지고 부어올라, 아침에 걸레질을 하기 위해 물을 만지면 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휴일은 새해 첫날과 일왕의 생일과 여름 축제 때뿐. 식사도 변변치 않아서 생선이 나오는 날은 1일과 15일뿐이었지만, 와카야마에서 혹독한 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그것도 그다지 괴롭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용살이를 시작한 지 단 3개월 만에 미야타화로점은 문을 닫고야 말았다. 우에마치로 옮겨 화로 제작에만 힘을 쏟기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심부름하는 아이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고노스케는 고다이자전거상회라는 곳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 곳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이 갖춰야 할 여러 가지 것들을, 인사를 하는 법에서부터 하나하나 배워 나갔는데 때로는 뺨을 맞아야 할 정도로 혹독한 것이었다. 여름에는 5시, 겨울에도 5시 반에는 일어나 가게 안팎을 청소해야 했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하루 종일 진열된 상품의 손질이나 수리를 배워야 하고, 그리고 저녁 7시쯤이 되면 가게 앞을 정리하고 길에 물을 뿌린 다음 지배인부터 차례대로 몸을 씻었다. 고노스케는 고용살이 경험을 통해서 많은 것들을 배웠는데, 그것들은 후에 그가 상업에 뛰어들었을 때의 기본자세가 돼 주었다. 가까이서 그를 따르던 이와이 겐이 한번은 고노스케에게 ‘상도’에 대해서 물었더니 중요한 것은 세 가지라고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하나는 ‘장사의 의의를 알 것’, 다음으로는 ‘손님의 마음을 읽을 것’, 그리고 '상대방보다 더 겸손할 것'.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고노스케의 인사는 언제나 정중했다. 그것은 단지 머리를 숙이는 데만 그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얼굴이 무릎에 닿을 정도로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뿐만이 아니었다. 손님이 돌아갈 때는 손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손님의 모습이 사라지기 직전에 다시 한 번 마음을 담아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손님을 대할 때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다. 기자들의 취재에 응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고용살이 시절에 익힌 이와 같은 습관을 평생에 걸쳐서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실천했다. 전기와의 만남 가게를 쉬는 날, 한번은 우연히 전차를 탈 기회가 생겼다. 요즘에는 ‘노면전차’라 부르는 것이다. 전차에 탄 고노스케는 그 속도에 깜짝 놀랐다. ‘이렇게 편리한 전차가 있으니 자전거 수요는 틀림없이 줄어들 것이다. 앞으로는 전기의 시대다!’ 고노스케의 마음에 동요가 일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는 직업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매형인 가메야마 조노스케에게, 교섭을 해서 전등회사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1910년 10월, 드디어 오사카전등주식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내선 담당 수습공으로 배속받았다. 일당 37센.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약 1만 3,000엔 정도다. 내선 담당은 송전선에서 가정이나 사무소까지의 배선공사를 담당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그 수습공이었던 고노스케는 내선 담당자들과 함께 공구를 실은, ‘뎃치구루마’라 불리는 손수레를 끌고 시내를 돌아다녀야 했다. 고노스케는 원래 빠릿빠릿하지 못한 편이었지만, 센바에서 고용살이를 하는 동안 남보다 더 빠릿빠릿하고 야무진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됐다. 배선에 관한 일도 1, 2개월 만에 전부 배워서 조그만 공사는 혼자서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채용된 지 겨우 3개월만에 수습을 마치고 담당자로 승격되어 미나미구 가와라야마치에 신설된 고즈 영업소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내선 담당자가 되어 자신감도 얻은 고노스케였지만, 더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학문과 학력이 필요했다. 한번은 상사가 고노스케를 사무원으로 추천한 적이 있었는데, 괴발개발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 같은 글씨밖에 쓰지 못했기 때문에, 그대로 기술자로 남겠다며 스스로 사양했던 쓰린 경험이 있었다. 1913년 4월, 고노스케는 간사이 상공학교 야간부 예과(豫科)에 입학했다. 18세가 되던 해의 봄이었다. 1년 동안 열심히 해서 간사이 상공학교 야간부 예과를 500명 중에서 175등이라는 성적으로 수료했다. 기초학력이 부족한 상태였으니 잘한 편이었지만, 예과에서 본과인 전기과에 들어가자 역시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책상에 앉아서 하는 공부는 여기서 끝나 버렸다. 하지만 그가 ‘학력을 장식하기 위한 학문’을 계속하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만큼 공부했으면 만족’, ‘유명 대학에 들어가면 목표달성’이라는 등의, 낮은 차원의 목표를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으며 학교에서 배운 지식에 대한 과도한 신뢰도 갖고 있지 않았으니 오히려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이치’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추구했던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였다. ‘나는 배운 게 없다’는 콤플렉스가 ‘순수하게’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했으며, 끊임없이 배우고 그것을 흡수해야 한다는 강한 집착을 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장년이 되었을 때는 세상에서 말하는 ‘엘리트’라는 사람들을 어느 틈엔가 뛰어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으며, 만년에 이르러서는 ‘나는 배운 게 없기 때문에 모르는 게 없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무모한 도박 고노스케가 오사카전등을 그만둔 것은 22세. 독립한 직후에 부인 무메노의 동생 이우에 도시오가 가세를 하게 됐다. 그리고 1917년 10월에 드디어 첫 번째 상품인 개량 소켓(마쓰시타식 소켓)이 완성되었다. 종전의 것은 소켓의 나사 부분에 배선코드를 감은 다음 납땜질을 해서 고정시켜야 했지만 마쓰시타식은 코드와 금속판 사이에 굽이 높은 나막신 같은 모양을 한 고정 장치를 끼워 넣기만 하면 서로 접촉되도록 해 놓았기 때문에 따로 납땜을 할 필요가 없는 간편한 것이었다. 열흘간 오사카 전력을 돌아다니며 판매에 나섰다. 그랬는데도 소켓은 100개 정도밖에 팔지 못했다. 매출액은 겨우 10엔 정도, 초등학교 교원의 초봉이 20엔 정도였을 무렵의 일이었다. 분명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은 ‘이 소켓은 팔리지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고노스케는 소켓에 더욱 개량을 가하고 싶었지만 자금이 없었다. 그 상태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대로 고사하고 말았을 테지만, 마침 가뭄에 단비가 내렸다. 한 해도 저물어 가려 하는 12월, 소켓을 판매하기 위해 거래를 텄던 도매상을 통해서, 가와키타전기기업사라는 회사가 선풍기의 애반(碍盤, 선풍기를 지지하는 절연체의 부품)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해온 것이었다. 아무리 영업을 해도 전혀 팔리지 않아 궁지에 몰리게 됐지만, 노력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내게는 운(運)이 있다!’ 그는 그렇게 확신했다. 훗날 그는 “나는 실패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소켓 때문에도 참패를 맛보지 않았는가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는 뒤이어 이렇게 말했다. “성공할 때까지 계속한다면 실패란 존재하지 않는다. 성공만이 있을 뿐이다. 실패를 하는 이유는 실패한 채로 중단해 버리기 때문이다.” 1918년 3월 7일, 고노스케는 무메노, 이우에 도시오와 함께 지금의 한신전차 노다역에서 서쪽으로 약 6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기타 구 시니노다 오히라키초 844번지의 2층 건물을 빌려 그곳으로 이사했다. 오히라키초로 옮기면서부터 고노스케의 힘찬 진격이 시작됐다. 소켓을 대신한 신제품 어태치먼트플러그가 뜻밖에도 히트 상품이 되었다. 어태치먼트플러그란, 전구를 끼워 넣도록 되어 있는 배선구에 코드를 끼워 넣어 다른 가전제품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기구를 말한다. 일반 가정이나 소규모 사업장에는 전등용 전기밖에 배전되지 않았는데 선풍기나 다리미 등과 같은 전자제품이 점차 보급되고 있었기 때문에 어태치먼트플러그의 수요는 상당히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못 쓰게 된 전구의 베이스를 재사용해서 가격을 시가보다 30퍼센트나 낮췄기 때문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배달이 늦으면 거래처에서 물건을 가지러 올 정도였다. 자전거 램프 1923년, 마쓰시타전기는 커다란 비약을 이루어 낸다. 자전거 램프의 제조, 판매 덕이었다. 고노스케는 자전거 상점에서 오랫동안 일을 했기 때문에 자전거 부품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당연한 얘기였지만,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의 불만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중 가장 커다란 불만은 야간 운전이 불편하다는 점이었다.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는 전지 램프를 만들 수는 없을까…….’ 매일 밤늦게까지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전구와 전지를 조합한 여러 가지 시제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6개월쯤 지난 1923년 3월, 드디어 야심작이 완성되었다. 종전 제품보다 약 10배나 더 오래 사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제작비도 얼마 들지 않았다. ‘이건 잘 팔릴 거다. 틀림없이 잘 팔릴 거다.’ 확신할 수 있었다. 모양은 보기 좋은 포탄형으로 했다. 하지만 고노스케의 훌륭한 점은 빨리 팔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른 채 손님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내구성을 신중하게 반복해서 시험했다는 점에 있다. 그는 고토 세이이치와 같은 젊은 사원들에게 명해서 2개월 정도 매일 밤일을 마친 뒤에 전지 램프를 자전거에 달고 요도카와 제방을 달리게 했다. 그것도 일부러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게 했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들이 돌아오면 “어땠어?”라고 물었다. “괜찮아요. 아무 이상 없어요.” “그래? 수고했네. 안에 우동 준비해 놨으니 먹고 가도록 해.” 우동을 먹고 난 젊은이들이 돌아가는 길에 공장 안을 들여다보면, 고노스케는 언제나 혼자 남아서 전지 램프를 떼어내 여기저기를 점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제품이 완성되었지만, 재고만 자꾸 쌓여 갈 뿐 한번 팔아 보겠다고 나서는 도매상이 한 군데도 없었다. 진퇴양난이었다. 여기서 고노스케는 전설이 되어 버린 묘책을 낸다. 바로 무료 샘플 배포였다. 자전거 램프를 두어 개 맡기고 그 중 하나를 무료 샘플로 삼아 점등을 해 놓도록 했다. 램프가 진짜 30시간 이상 점등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였다. 확인을 한 뒤에 점등하지 않은 제품을 판매하고 팔린 만큼만 돈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모든 램프가 30시간 이상 점등되었으며, 1개월쯤 지나자 매출액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처음 각 도매상에 배포했던 4,000개가 전부 팔려 나갔고, 심지어는 소매상에서 직접 전화나 우편으로 주문을 해오기도 했으며, 결국에는 전에 취급을 거절했던 도매상에서까지 주문이 들어오기에 이르렀다. 버리는 것이 있어야 얻는 것도 있는 법. 그는 커다란 도박에서 승리를 거뒀다. 마쓰시타전기기구제작소의 ‘포탄형 전지식 자전거 램프’는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며, 물량을 대지 못할 만큼 주문이 밀려들었다. 그는 판매가 제품 개발의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훗날 그가 주장한 ‘제조와 판매는 일체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이와 같은 체험을 통해서 얻은 것이었다. 생각하는 사람 1929년 5월, 제2차 본점공장이 준공되었다. 그리고 융자받은 돈을 하루라도 빨리 갚기 위해 공장을 풀가동해서 생산에 전념해야겠다고 의욕을 불태우려는 순간, 뜻밖에도 커다란 불황이 찾아왔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 월가에서 일어난 주식시장의 대폭락은 ‘검은 목요일’로 불리고 있으며, 역사적인 ‘세계 공황’의 도화선이 되었다. 지금까지 마쓰시타전기는 ‘대중이 필요로 하는 물건은 경기를 타지 않는다’는 신념 하에 불황과는 상관없이 거침없는 진격을 계속해 왔다. 하지만 이번 경제 공황에 따른 디플레이션은 매우 심각한 것이었기 때문에 매출에 급브레이크가 걸리고 말았다. 1929년 11월 12월에는 매출이 절반으로 줄어 버렸다. 재고가 급증하여 창고에 넣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손에 남은 것은 현금이 아니라 빚뿐이었다. 이때 마침 병 때문에 자리에 누워 있었던 고노스케 대신 지휘를 맡았던 이우에 도시오는 그에게 직원들을 해고할 것을 권했다. 며칠간 고심한 끝에 고노스케는 다음과 같이 지시한다.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떻겠나? 내일부터 전원 반일 근무. 그리고 오후에는 점원 모두가 힘을 합쳐서 하나라도 좋으니 최선을 다해 재고를 팔아보기로 하세. 그 대신 임시직까지 포함해서 종업원은 한 명도 줄이지 않기로. 이래도 안 된다면 그때는 깨끗이 포기하기로 하세.” 이로써 사내에 드리워져 있던 암운이 단번에 날아가 버리고, 전전긍긍하던 종업원들은 은혜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다. 힘이, 그리고 생각이 하나가 되어 그로부터 단 3개월 정도 만에 창고 가득 넘쳐나던 재고를 하나도 남김없이 팔아 치웠다. 곧 반일 조업을 중단하고 풀 생산 체제에 돌입, 램프 판매량이 늘어난 덕분에 업적도 가파른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 일로 경영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종업원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고노스케에 대한 불타오르는 충성심을 심어 주는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었다. 고노스케가 감정론에만 치우쳐서 그런 결단을 내린 것은 아니었으며, 사실 거기에는 합리적인 사고가 뒷받침되어 있었다. 종업원을 해고하면 임금으로 나가는 돈은 절약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종업원이 줄어들어 판매력이 떨어지는 만큼 재고를 싸게 처분할 수밖에 없어지기 때문에 커다란 손실을 입게 된다. 게다가 그것은 상품 가격의 붕괴를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에, 종합해보면 손실은 임금 절약으로 얻은 이익을 대부분 상쇄해 버릴 정도로 커진다. 그렇다면 차라리 고용을 보장해 줌으로써 종업원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재고를 정가에 처분하는 일에 집중토록 하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이다. 반일 근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전원이 영업을 해서 재고를 처분하게 되는 것이니 임금 때문에 발생하는 손해는 없다. 계산이 없다면 그것은 단순한 만용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합리적으로 내린 결단을, 사실은 정에서 나온 것처럼 보여 종업원들의 의욕을 끌어올린 마쓰시타 고노스케라는 사람은 참으로 무시무시한 경영자였다. 하지만 이것을 ‘비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비즈니스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정말로 ‘비열한 사람’은 냉철한 판단이 불가능해서 회사 경영에 실패, 사원들을 길바닥으로 내모는 사람이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라는 사람은 평소 '여러 사람들의 지혜를 모으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중요한 순간에 ‘경영 판단은 경영자가 스스로 판단해서 내려야 하며, 결과에 대한 책임도 경영자 스스로가 전부 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실행해 온 사람이었다. 깨달음의 가치는 100만 냥 1933년 5월, 가도마로 본점을 이전하면서 마쓰시타전기제작소의 사업은 세 부문으로 나뉘게 되었다. 일본의 경영사상 획기적인 조직체제로 평가받고 있는 ‘사업부제’가 탄생한 것이었다. 종업원 수는 약 1,600명에 달했다. 제아무리 고노스케라 해도 사원 모두를 파악할 수는 없게 되었다. ‘경영자의 감정이 구석구석에까지 미치는 적당한 크기의 기업’을 이상으로 삼고 있던 그는 경영이념을 문서화하여 ‘생각’을 철저하게 전달하는 한편, 사업부장을 통해서 사원들을 파악하기로 했다. 그리고 독립채산제가 채택되어 연구 개발에서 제조, 판매, 선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사업부별로 행하게 됐다. “인간에게는 선천적으로 리더가 되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 사업부제는 그런 욕구를 사내에서 충족시켜 의욕을 고취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사업부장에게 경영을 완전히 맡기지는 않았다. 전부 맡길 생각이라면 사장은 필요 없다. 마지막 결단을 내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일이었다. 그런데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요했다. 이에 그는 표면상으로는 사업부장에게 모든 일을 일임한 형태를 취하면서도 독자적인 정보를 통해 각 사업부에서 정보를 수집해 경영의 최종 결단은 자신의 손으로 내리도록 ‘경리사원제도’를 도입했다. 경리사원은 입사 면접 때부터 별도로 채용을 하는 엘리트 집단이자, 고노스케의 직속부대로 각 사업부나 자회사에 배치되었다. 사업 시책의 입안은 어디까지나 사업부장이 했지만 그에 대한 거부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권한은 절대적이었다. 뛰어난 경영자는, ‘비밀 중의 비밀’은 외부(사원도 포함하여)에 말하지 않는 법이다. 독립된 조직으로 ‘사업부’를 만들었으면서도 그 안에 중앙집권적인 ‘경리사원’을 두었다. 맡긴 듯 맡기지 않은 것이다. 고노스케의 경영수법에는 언제나 일종의 ‘비열함’이 감춰져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경영이라는 것이다. 1935년 12월, 고노스케는 회사를 주식회사로 전환하면서 사명을 ‘마쓰시타전기산업주식회사’로 변경했다. 주식회사로 전환함과 동시에 단행한 것이 ‘분사(分社)’였다. 이후로도 고노스케는 1944년 제조소제, 1949년에 공장제, 1950년에 직능별 사업부제, 1954년에 사업본부제를 실시하는 등 수차례에 걸쳐서 회사 조직을 새로 만들어내고, 또 수정해나갔다. 마쓰시타전기가 아직까지도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사업부제’를 실시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으며 ‘분사제’를 실시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고, 또 그 어느 쪽도 아니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시대의 요청을 남보다 한 발 앞서 포착, 조직뿐만 아니라 주력상품이나 비즈니스모델까지도 민첩하게 바꿔 ‘나날이 새로운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직을 바꾸고 또 바꿔서 결국에는 예전과 거의 같은 조직으로 되돌아오게 된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그것도 무의미한 일은 아니었다. 제아무리 효율적인 조직이라 할지라도 ‘너무 오랫동안 똑같은 모습을 유지’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풀어져서 결국에는 생산력이 떨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영원히 효율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조직의 이상형’ 따위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나날이 새롭게’ 바뀌어야 한다. 고난의 나날 제2차 세계대전 뒤 GHQ(점령군 총사령부)는 일본이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주요 산업 기능을 마비시키려 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이 재벌해체였다. 그리고 여기에 마쓰시타 가도 ‘재벌가족’으로 지정, 자산이 동결되어 버렸다. 고노스케는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바로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GHQ의 자세는 고압적이었다. 상대편의 사정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몇 월 며칠 몇 시까지 이러이러한 서류를 준비해서 제출하라’고 전화로 명령을 해왔다. 그랬기 때문에 도쿄에서 전화가 왔다고 하면 고노스케와 당시 상무로서 절충에 나섰던 다카하시가 동시에 깜짝 놀라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는 날들이 이어졌다. 고노스케가 50번, 다카하시 아라타로가 100번 가까이 도쿄로 향해야만 했다. 두 사람이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GHQ의 재벌과는 당시 잠사회관에 있었는데, 고노스케는 그 방의 번호였던 ‘414호’를 평생 잊지 못했다. 1947년 5월에 고노스케에 대한 추방 지정이 해제되었고 회사의 업적도 순조로웠다. 하지만 GHQ의 추급은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1948년 2월에는 과도경제력집중 배제법의 지정을 받아, 자회사와 판매회사를 마쓰시타전기그룹에서 분리하라는 명령을 받게 됐다. 그에 따라 고노스케는 개인이 보유하고 있던 자회사의 주식을 대량으로 매각해야 했는데, 매각으로 막대한 금전적 손실을 보게 되었다. 전쟁 직전까지 2,000만 엔이었던 개인 자산이 전후에는 부채 700만 엔이 되어 일상생활까지도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됐다. 사정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자 규율이 엄격하기로 유명했던 마쓰시타전기에서도 사내 분위기를 다잡지 못하게 되었다. 업계 최고수준이라 자부해 왔던 제품의 품질 면에서도 타사에 뒤지기 시작, 1948년에는 불량 전구가 수십만 개에 이르렀다. 금전적 손실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보다는 브랜드 이미지가 손상됐다는 사실이 더욱 뼈아픈 타격이었다. 매출액이 감소하고 외상 판매 대금 회수율이 떨어지자 마쓰시타전기의 자금 운용력이 급속하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1948년 10월부터는 급여를 분할 지급해야만 했으며, 연말 보너스도 지급할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에 1949년에는 ‘아무리 어려워도 인원 감축만은 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고 퇴직 희망자를 모집하기로 했다. 그러는 와중에서도 다카하시는 끈질기게 GHQ에 진정서를 올렸다. 결국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노력한 덕분에 1947년 5월에 드디어 공직 추방이 정식으로 해제되었으며, 1949년 2월에는 과도경제력집중 해제법의 지정도 해제되었다. 1949년 12월, 드디어 재벌지정 해제 통보가 날아왔다. 이로 해서 전후 그에게 지워졌던 무거운 짐의 대부분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이듬해 3월에는 마쓰시타전기 전통의 사업부제를 부활시키고 전 사원이 하나가 되어 회사 재건에 힘쓸 것을 내외에 알렸다. 그 무렵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 그것이 호재로 작용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 뜻밖의 전쟁특수로 일본 전체가 들끓어 올랐다. 암흑경제도 드디어 끝을 맞기 시작, 고노스케는 그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스스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대리점, 판매점 주인들과 친목을 다져 판매 루트를 확립함으로써 비약적인 판매력 증강을 꾀했다. 1951년 1월 6일, 매해 신년에 열리는 경영방침 발표회에서 고노스케가 미국을 방문할 것이라는 사실이 발표됐다. 필립스와의 제휴 협상을 위한 것이었다. 원래 고노스케는 해외 업체와의 제휴에 그다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자신들의 기술력만으로도 충분히 시장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당황한 중역들은 필립스의 미국 공장을 보여주면 고노스케도 제휴의 중요성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고노스케를 태운 비행기는 1951년 1월 18일 오전 6시에 하네다공항을 출발했다. 그 후 하와이를 떠나 로스앤젤레스를 경유해서 현지 시간으로 1월 25일 뉴욕에 도착했는데, 미국에서의 체험은 고노스케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350명이 월 15만 개나 되는 스피커를 만들어 내는 회사, 일본 회사의 사장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고 있는 여공들, 1,000만 개 단위로 부품을 주문하는 라디오 제조회사 등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1951년 10월에 두 번째로 미국을 방문했다. 필립스와의 기술제휴 교섭이 더욱 무르익어 네덜란드로 향하던 중에 들른 것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열일 제쳐놓고 전자제품 상점부터 들여다본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8개월 전에 왔을 때에 비해서 텔레비전의 가격이 30퍼센트 정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치열한 가격인하 전쟁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그의 향상심에 불이 붙었다. 그 후부터 고노스케는 최선을 다해서 미국의 강점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회사 필립스와의 제휴도 성공을 거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쓰시타전기는 세계 시장에서 필립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대등하게 경쟁을 하기까지 성장했으며, 제휴한 지 41년 후인 1993년에는 필립스의 소유주를 전부 매수해서 제휴관계에서 벗어났다. 아타미 회담 1962년 무렵부터 경기에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하더니 도산하는 기업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마쓰시타전기도 그 그늘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1950년에 재건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수익이 줄었으며 판매회사․대리점에도 재고가 쌓여 적자를 보는 곳이 속출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위기감을 느낀 고노스케는 전국의 판매회사․대리점 사장들을 직접 만나 현재의 상황을 파악함과 동시에 타개책을 협의하고 전원 일치단결하여 이 역경을 극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회담일은 1964년 7월 9일. 회장은 아타미 뉴후지야호텔. 정식 명칭은 ‘전국 판매회사 대리점 사장 간담회’였다. 간담회 당일, 마쓰시타전기의 모든 중역들이 아타미 역 앞에 한 줄로 늘어서 전국에서 찾아오는 판매회사․대리점 사장들에게 일일이 머리를 숙여 그들을 맞이했다. 첫날 분위기는 평온했다. 이튿날인 10일 오전 9시, 메인이벤트라 할 수 있는 전체회의가 시작됐다. 고노스케는 마쓰시타전기의 현재 상황과 문제점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참석자들도 자신이 놓인 어려운 처지에 대해 열을 올려 가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평안한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비판은 점점 신랄해져 갔으며, 아무 꺼릴 것 없이 속에 있던 말들을 내뱉었다. “마쓰시타의 사원들은 건방져서 우리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는다!”, “리베이트 금액이 자꾸 내려가기만 한다!”, “마쓰시타의 상품은 디자인이 영 엉망이다!” 봇물이 터진 듯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고노스케는 이번 모임을 마쓰시타전기 쪽만 반성을 하는 모임으로 만들 생각은 애초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다. 판매회사나 대리점도 반성을 하지 않으면 판매력은 결코 강화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들에게 반격을 가했다. "그럼 흑자를 보고 있는 회사는 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저기서 손을 들었다. 참가한 170개 사 전부가 적자를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20개 사 정도에서는 흑자를 보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고노스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흑자를 보는 곳도 있다고 하니, 적자를 보신 분들은 각자의 경영에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런 식으로 서로의 충돌이 끊임없이 계속됐다. 전체 회의 이틀째도 전날과 마찬가지로 양자의 이야기가 평행선을 달렸다. ‘노력해보지도 않고 징징거리지 마!’라는 질타 정도로는 그들이 납득할 리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도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정오쯤에 하나의 전기가 찾아왔다. “여러분들이 하신 말씀, 저희가 생각하고 느낀 점을 종합해서 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전까지의 거친 말투와는 달리 고노스케는 정중하게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저희는 지금까지 ‘대리점에서 좀 더 열심히 해주셨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커다란 착각이었습니다. 그 원인은 역시 우리들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목소리가 점점 울먹이는 소리로 바뀌었으며, 멀리서도 고노스케의 눈시울이 벌게지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안경 너머의 눈에서부터 굵다란 눈물이 한 방울, 또 한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마쓰시타가 있을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여러분들 덕입니다. 그 점을 생각하면, 저는 여러분께 단 한마디도 불평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지금부터는 새로운 각오로, 어떻게 해야 여러분께서 마음놓고 경영을 하실 수 있을지, 그 점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틀림없이 약속드리겠습니다." 이전까지 고함소리와 욕설이 난무하던 회의장이 갑자기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리고 곳곳에서 낮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의 진심이, 호수의 수면에 일기 시작한 파문처럼 조용히 참석자들의 마음속으로 전해져, 그렇게도 격렬하게 대립했던 마음들이 하나가 된 것이었다. 그 순간 대리점 사장들의 마음속에는, 마음을 평온하게 어루만져 주는 곳까지 자신들을 데려다 준 마쓰시타 고노스케라는 희대의 경영자에 대한 고마운 마음만이 남아 있었다. 회의를 마친 후, 그는 참석자 전원에게 붓글씨로 미리 ‘공존공영(共存共榮)’이라 써 두었던 종이를 나누어주었다. 결과적으로 고노스케는 회의의 결말을 자신이 처음 생각했던 목표 지점까지 끌고 갔다.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숙이는 장면까지 그가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것이었는지, 그것은 알 길이 없다. 어쩌면 그의 머릿속에는 처음부터, 회의를 자신의 뜻대로 마무리짓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쓴 글을 나눠주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전설적인 경영자로서의 참모습은 이 회담 후에 연달아 행한 개혁에서 찾아볼 수 있다. 회담 직후, 고노스케는 자신이 영업본부장 직무를 대행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매일 아침 9시면 본사 2층에 있는 영업본부에 모습을 드러내 200명의 영업부원을 직접 지휘, 감독하기 시작했다. 괜히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한 행동이 아니었다. 위기에 처했을 때 리더가 앞장서는 것은 전쟁에서나 경영에서나 기본 동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또 얼마나 적은지. 또한 ‘신(新)판매제도’를 채용함으로써 막혀 있던 유통경로의 청소를 단행했다. 이러한 노력들 덕분에 아타미 회담 3년 후에는 모든 회사가 적자에서 탈출하게 되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