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에 대한 오해와 편견
이경희
십여 년 가까이 수필문단 활동을 하다보니 문학행사나 백일장에 갈 기회가 더러 있다. 지난 7월 15일(토)에는 하동 평사리문학관에서 문학 창작 캠프가 있었다. 시(김수우), 소설(홍혜문), 시조(손영희), 수필에는 내가 발표자로 나섰다. 그동안 시창작 캠프만 하다가 이번에 관장이 바뀌면서 여러 장르 작가들이 초청되었다.
사실 수필가들끼리는 익숙하다. 수필이라는 같은 울타리 안에서 지지고 볶는다. 우리끼리 수필이 문학이라고 외쳐보아도 반향은 미미하다. 수필가가 이렇게 넘쳐나고 한국문협의 수필분과가 있는데도 수필을 서자 취급하는 문단 분위기는 그대로다. 한국문단은 16세기 고전주의 시대 형성된 형식주의= 낭만주의= 문학이라는 공식에서 못 벗어나기 때문이다.
학술발표회 외에 여타 장르 작가들과 함께하는 기회는 처음이라 신경이 쓰였다. 원고를 보내라기에 ㅡ수필과 고백, 진실성 ㅡ이라는 주제로 글을 써서 보냈다. 한 시간 정도야 무슨 이야기를 해도 할 수 있으니까.
하동과 인근 광양지역 문인들 40여 명이 참석했다. 내 앞에 소설가와 시조시인이 발표하는 걸 들으면서 강연 콘텐츠를 수정했다. 참석자 대부분이 시인이고 소설가도 몇 명 자리했다. 시인과 소설가를 대상으로 수필창작에 대한 강연을 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나 싶었다. 참고로 수필가는 한 명 참석했다. 하동은 수필의 불모지였다.
수필의 기원과 정체성, 현대수필의 의의에 대하여 강연을 했는데, 청중들이 몰입해서 듣는게 보였다. 아마 그 자리에 온 대다수 문인들이 중고교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수필 정도의 상식을 갖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수필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바로잡고 싶었다. 이런 오해나 편견은 문인들의 잘못도 아니고 문학 전반에 대해 공부할 기회가 없었으니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른다.
강의 한번 듣는다고 사람의 생각이 변하진 않는다. 그러나 그 자리가 수필에 대한 편견의 시선은 조금 교정되었을 것이라 믿고 싶다. 나도 시조나 소설 장르에 대한 생각이 넓어졌고, 다른 장르 문단상황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인간이 시대에 따라 진화하듯이 문학의 개념도 지속적으로 확산되어 왔다. 시나 소설, 희곡이라는 그릇에 담지 못한 채 흘러넘치는 언어와 정념이 있었을 터, 그 넘치는 말과 생각을 담는 그릇이 수필이다. 문학사적으로 보면 시대의 전환기마다 산문이 융성했다.
중심가치가 무너지고 각자도생하는 이 시대, 그래서 수필의 광장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따스한 위안과 마음 속 끓어오르는 말들을 쏟아내기 위해서. 시간이라는 강물 속에서 인간도 흐르고 문학도 흐른다. 영원한 제국은 없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