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
← 7·4남북공동성명서를 발표하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1972. 7. 4) 1972년 7월 4일 남한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김영주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서울과 평양에서 조국통일과 관련한 최초의 남북한 당국간 합의 공동성명을 동시에 발표했다. 7·4남북공동성명은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는 통일의 3대 원칙을 세웠다. 이밖에도 중상비방금지, 무장도발금지, 다방면의 교류 실시, 남북적십자회담 실시, 상설 직통전화 설치, 남북조절위원회 운영 등이 합의되었다. 7·4남북공동성명은 조국통일의 올바른 원칙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성명이 발표된 지 3개월 만에 남한에서는 통일을 구실삼아 10월유신이 일어났으며 그 2개월 뒤 북한도 주석제를 도입하고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새로운 헌법을 공포하는 등 각기 통일논의를 정권의 권력기반 강화에 이용하기도 했다.
[1987년] 프랑스 법정, ‘리용의 백정’ 클라우스 바비에게 종신형 선고
← 게슈타포 대장 클라우스 바비(가운데)가 프랑스 법정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고 수갑을 찬 채로 법정을 나오고 있다. 제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2~44년에 프랑스 남부 리용에서 나치스의 게슈타포(나치스 독일의 비밀경찰) 대장으로 있으면서 유태인 7천5백여명과 프랑스 레지스탕스 대원 4천3백여명을 살해한 혐의로 프랑스 법정에 회부된 ‘리용의 백정’ 클라우스 바비에게 1987년 7월 4일 법정최고형인 종신금고형이 선고됐다. 바비는 독일 패전하자 남미 볼리비아로 도망가 숨어 살았으나 나치전범 추적자 비트 클라스펠트가 10여 년에 걸친 추적 끝에 1971년 소재지가 드러나고 말았다. 프랑스 정부는 10여년에 걸쳐 볼리비아와 송환협상을 벌인 끝에 1983년 미테랑 대통령 시절에 바비를 프랑스로 데려왔다. 이같이 송환이 늦어진 것은 2차대전 종전후 미육군방첩대(CIA)가 바비를 체포해 정보원으로 이용한 뒤 볼리비아로 빼돌리는 등 미국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바비는 2차대전때 자신이 학살을 자행했던 리용감옥에 수감됐으며 이날 선고된 종신금고형으로 복역중이다가 1991년 감옥에서 사망,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923년] 서양화가 권옥연(權玉淵) 출생
← 자화상/1970/40.3x53 1923.7.4 함남 함흥~. 서구적 색감의 바탕 위에 향토적 분위기를 독특한 방법으로 융해시켜 새로운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1944년 일본 도쿄[東京]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48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고향〉을 출품하여 주목을 받았다. 1957년 파리로 유학을 떠나 본격적인 작가활동을 시작, 다음해에 파리 '살롱 도톤'에 〈절규〉를 출품해 파리 미술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1959년 프랑스 화단의 새로운 추상회화 초대전인 '레알리테 누벨'(새로운 사실)에 한국화가로는 최초로 선정되어 〈신화〉를 출품했는데, 상형기호로부터 변형된 유기적 추상세계라는 독자적인 세계를 이때부터 구축했다. 그뒤로는 향토적·민화적 소재들을 추상적인 형상으로 표현한 〈우화 寓話〉·〈회고 回顧〉·〈비전 秘傳〉등을 그렸다. 그의 조형은 형태를 전혀 갖지 않는 추상이라기보다 이야기의 맥락에서 발생되는 문학적 설명적 세계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80년대부터는 소녀상·여인상·누드 등 구체적인 인물상을 많이 그렸는데, 이것은 1974년 미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에 갔을 때 고갱의 누드 소품에서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의 인물상의 특징은 대상의 단순한 재현을 피하여 작가 자신의 심성을 표출하는 데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상파울루 비엔날레'(1965), '일본 엑스포70 세계100인전'(1970)등에 출품했고, 국내외에서 여러 차례 개인전을 가졌다. 수상경력으로는 예술원상과 보관(寶冠)문화훈장을 받았으며, 1992년부터 예술원(서양화)회원이자 금곡(金谷)미술관 관장으로 있었다. 현재 파리에서 활동중.
[1934년] 퀴리 부인 사망
← 폴란드 태생 프랑스의 물리학자 마리 퀴리 부인. 노벨상을 두차례나 수상한 바 있는 마리 퀴리가 1934년 7월 4일 사망했다. 사인은 라듐에 의한 중독이었다. 의사들은 일생동안 방사능을 과도하게 쪼인 그녀의 모든 생채기관들이 서서히 파괴돼 죽음에 이르렀다고 소견을 밝혔다. 퀴리는 1867년 폴란드 바르샤바에 출생했다. 1891년 러시아의 식민지였던 조국을 떠나 파리의 소르본대학에 입학한 퀴리는 1893년 학사시험을 수석으로 패스하고 공업진흥회의 위촉으로 강철의 자기 특성을 연구하다 남편을 만났다. 방사능을 찾기 위한 마리의 연구는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녀는 1896년 앙리 베크렐이 발견한 우라늄광(鑛)에서 발생하는 신비한 광선을 토대로 연구를 시작했다. 1898년 퀴리부부는 마침내 방사능을 방출하는 두개의 새로운 원소를 찾아냈다. 마리는 두고온 조국 폴란드를 위해 첫번째 원소 이름을 폴로늄이라고 짓고 다른 하나는 라듐이라고 불렀다. 퀴리는 1903년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방사능의 발견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으며 남편이 사망한 뒤인 1911년에는 라듐의 발견으로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1776년] 미국 독립 선언
17세기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 1776년 7월 4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2차 대륙회의가 독립선언서를 승인함으로써 미국은 영국의 통치로부터 13개 식민지의 독립을 선포했다. 미국사는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607년 영국인들이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에 정착하면서 북아메리카에 식민지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식민지는 매사추세츠·코네티컷·메릴랜드·캐롤라이나·뉴욕 등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던 중 식민지를 착취하는 중상주의 정책에 대한 식민지인들의 불만이 쌓여갔고, 결국 1773년 12월 16일 보스턴 차 사건으로 표면화되었다. 이에 식민지들 간에 대륙회의가 구성되어 1774년 9월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회의가 열렸다. 미국독립전쟁은 1775년 4월 19일 영국의 토머스 게이지 장군이 매사추세츠 콩코드에 있는 식민지군 탄약창고를 파괴하기 위해 보스턴에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오랜 기간 동안 접전이 계속되다가 1778년 6월 28일 총사령관인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식민지군이 뉴저지의 몬머스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뉴욕 시와 그 주변 지역만을 제외하고는 식민지군이 장악하기 시작했다. 프랑스군과 연합한 식민지군은 요크타운 포위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1781년 10월 19일 콘월리스가 이끄는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육상의 전투는 모두 끝났다.
[1807년] 가리발디 Giuseppe Garibaldi 출생
← 가리발디(1866) 1807년 7월 4일 태어남 / 1882년 6월 2일 죽음
"준비된 혀보다는 준비된 손을 주시오." - 주세페 가리발디
가리발디는 이탈리아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국가통일운동)를 위해 몸바쳐 싸운 애국자·군인·공화주의자이다. 이탈리아가 사보이 왕가를 중심으로 통일을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836~48년 남아메리카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당시 혼란과 혁명으로 들끓던 남아메리카 대륙의 생활에 큰 영향을 받았다. 1848년 오스트리아에 대항한 독립투쟁에 가담하기 위해 귀국해, 밀라노의 마치니와 함께 이탈리아의 해방전쟁을 이끌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에게 패해 다시 남아메리카로 망명했고, 1854년에 피에몬테 왕국의 총리인 카보우르 백작의 허락을 받아 이탈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1850년 '붉은 셔츠단'을 이끌고 시칠리아, 나폴리, 팔레르모를 점령해 당시 통일운동을 이끌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넘겨주었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용감한 애국자로서 일반인의 존경을 받았고, 그 파란만장한 애국적 생애는 이탈리아인의 신화로 남았다.
[1997년] 미국 패스파인더호 화성탐사 성공 1997년 7월 4일(미국현지시각)에 화성 탐사선 패스파인더 (Pathfinder)가 전세계의 관심을 집중시키며 화성에 무사히 착륙하였습니다. 이 패스파인더는 1996년 12월 4일 발사되어 지구와 화성간 최단거리(1억 9천 백만km)를 날아간 것입니다. 이 우주선은 초속 32.75km로 비행했습니다. 시속 2만 6천 2백km 속도로 화성 대기권에 진입하여 4분 뒤 낙하산을 펴고 역추진 로켓과 에어백 등을 이용 착륙하게 됐습니다. 특히 에어백을 이용한 방법은 보다 저렴한 방법으로 안전하게 착륙한 방법으로 앞으로도 많이 사용될 것같습니다. 패스파인더에는 소저너라는 바퀴 여섯개 달린 로봇탐사기가 실려있었습니다. 이 탐사선인 이전의 바이킹이 고정되어서 탐사하는 것과는 달리 약 7일간 초속1cm의 속도로 화성표면을 다니면서 탐사작업을 했습니다. 소저너는 11.5kg 무게에 가정용 전자레인지 크기를 가지고 있으며, 태양에너지로 작동되며, 3차원 망원경, 암석 및 토양 성분 분석을 위한 X선 분광기 등의 최첨단장비가 붙어있어 화성을 정밀하게 촬영 분석할 수 있었습니다. 패스파인더의 작동상황이나 모습은 인터넷을 통해 자세히 알아볼 수 있습니다. 패스파인더의 착륙지점인 아레스발리스는 한때 엄청난 홍수가 지나간 뒤 고지대에 있던 암석들이 흘러내려 만들어진 저지대입니다. 패스파인더의 개발에 미국은 1억7천5백만달러(약 1천4백억원)의 비용을 들였습니다. www.sundu.co.kr /Google
[1946년] 필리핀, 미국으로부터 독립
1946년 7월 4일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이 독립했다. 스페인의 식민지배기간까지 포함하면 425년 만이었다. 새로운 헌법이 발효되어 마누엘 록사스가 초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대통령 취임식은 비가 오는 가운데 진행됐다. 취임식에 참석한 수십만 군중 앞에 선 록사스 대통령이 '필리핀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함과 동시에 식장에 게양된 성조기가 내려지고 그 자리에 필리핀공화국기인 '태양과 별의 기'가 국가가 연주되는 가운데 게양됐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필리핀 제도를 스페인으로부터 빼앗은 미국은 필리핀을 영구적으로 식민지화 할 생각이 없고 다만 필리핀이 민주적 자치능력이 생길때까지만 지배하겠다고 했지만 이 기간이 36년간이나 지속됐다. 필리핀은 1934년 미 연방의회로부터 자치권을 승인받아 1935년에 발족한 필리핀 연방의 대통령에 케손을 선출한 바 있다.
[1826년] 미국의 작곡가 포스터(Stephen Foster, 1826~1864) 출생
펜실베이니아주 로렌스빌 출생. 소년시절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이고 14세 때 처녀작 《티오가 왈츠》를 작곡하였다. 1841년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1주일 만에 중퇴하고 음악교사 H.쿠퍼의 지도 아래 베토벤음악을 연구, 그때부터 가곡을 작곡하기 시작하였다. 1844년 《창문을 열어다오, 사랑하는 이여 Open the Lattice, Love》를 출판하였으며, 그 무렵에는 친구들과 함께 합창단을 조직하여 많은 가곡을 제공하였다. 1848년 《오, 수재너 Oh! Susanna》가 100달러로 팔린 것에 자신을 얻어 가곡작가의 길을 택하게 되었으며 그 후 《시골 경마(競馬)》《고향 사람들 Old Folks at Home》《벤조를 뜯어라》(1851) 《주인은 차디찬 흙속에 Massa’s in the Cold, Cold Ground》(1852) 《켄터키 옛집 My old Kentucky Home》《금발의 제니》《올드 블랙 조 Old Black Joe》 등의 작품이 E.P.크리스티악단 및 민스트럴 쇼(minstrel show) 등에서 불리어 유행함으로써 그의 이름은 미국 전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남북전쟁(1861∼1865)의 영향으로 그의 작품에 대한 인기가 떨어지고 가정생활의 파탄도 있어 혼자서 뉴욕으로 떠나 거기서 37세라는 젊은 나이로, 빈곤과 괴로움 속에 죽었다. 그의 사후 2개월 만에 유작 《꿈꾸는 가인(佳人)》이 출판되었다. 출판된 그의 작품은 모두 188곡으로 이에는 풍부한 시정(詩情)과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선율 속에 깊은 애정과 인간성이 표출되어 있으며, 유럽적인 감각과 함께 남부 흑인의 생활이나 민요의 영향도 볼 수 있어 흥미롭다. 미국민요의 아버지로 불리며 그의 작품은 현재 전세계에서 애창되고 있다. 1939년에 그의 전기적 영화 《그리운 스와니》가 제작되었다.
[1804년] 미국의 소설가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1864) 출생
우의적·상징적인 이야기를 잘 묘사한 미국문학의 위대한 소설가이며, 〈주홍글씨 The Scarlet Letter〉(1850)·〈일곱 박공의 집 The House of the Seven Gables〉(1851)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호손의 조상은 17세기 이래로 세일럼에서 살았다. 미국에서 살았던 조상 가운데 가장 윗대인 윌리엄 호손(원래는 Hathorne이었는데 호손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여기에 w자를 덧붙였음)은 행정장관으로, 한 퀘이커교 여성을 공개 태형시킨 사람이었다. 그는 '순수하고' 꾸밈 없는 종교적 숭배형태를 열렬히 옹호하고, 검소하고 엄격한 생활방식을 강하게 신봉하며, '타락한' 인간의 '선천적인 타락성'을 확신하는 정통 청교도 정신을 확고하게 지지했다. 호손은 뒤에 세일럼의 다른 가문들이 수지맞는 해운업을 통해 부유해지는 반면, 18세기에는 번창하고 유명했던 그의 가문이 갈수록 기울어지는 이유가 이러한 가혹 행위와 1692년 세일럼에서 열린 마녀재판에 자신의 조상이 참여했던 죄에 대한 응보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아버지는 선장으로서 항해 도중 죽었는데, 젊은 부인에게 두 딸과 당시 4세였던 어린 호손을 남겨놓았을 뿐 재산은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어머니는 친정 오빠이며 유복한 가문인 매닝가(家)에 들어가 살았다. 호손은 세일럼에 있는 매닝의 집에서 자랐으며, 10대의 상당 기간을 세바고 호숫가에 있는 메인 주 레이먼드에서 보냈다. 그는 메인 주 브런즈윅에 있는 보든대학교에서 4년을 보낸 뒤 1825년 세일럼으로 돌아왔다. 호손은 젊은이로서 뚜렷한 개성은 없었지만 책을 읽고 소설작법을 터득하려고 노력하면서 거의 12년을 보냈다. 청교도의 사상·생활태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많은 작품을 썼다. 1825년 보든대학교를 졸업 후 1828년 최초의 소설 《판쇼》를 출판하였으나 뒤에 미숙한 작품임을 깨닫고 회수해 버렸다. 1837년 단편집 《트와이스톨드테일스》를 발표했으며, 1839년 경제적 불안정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보스턴 세관에 근무하였다. 그후 1850년 그의 대표작이 된 《주홍글씨》를 발표하였다. 17세기의 청교도 식민지 보스턴에서 일어난 간통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그린 이 작품은 청교도의 엄격함을 교묘하게 묘사하고 죄인의 심리 추구, 긴밀한 세부구성, 정교한 상징주의로 말미암아 19세기의 대표적 미국소설이 되었다. 1851년 청교도를 선조로 가진 고가(古家)의 자손에게 악의 저주가 걸린 《일곱 박공의 집 The House of the seven Gables》을 발표하였다. 이듬해 자신이 참가했던 실험적 공동농장을 무대로 한 《블라이스데일 로맨스》를 출판하여 지상낙원에 모인 사람들의 심리적 갈등을 그렸다. 1853년 영국의 리버풀 영사(領事)로 부임하였으며, 그후 이탈리아를 여행하였다. 이 여행 뒤에 목신(牧神)이 죄를 짓고 비로소 지성과 양심의 깨달음을 경험하는 《대리석의 목신상》(1860)을 집필하였다. 청교도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그 전통을 계승한 그는 범죄나 도덕적·종교적 죄악에 빠진 사람들, 자기중심벽·고독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내면생활을 도덕·종교·심리의 세 측면에 비추어 엄밀하게 묘사하였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일면으로 교훈적 경향이 강하면서 상징주의에 의한 철학적·종교적·심리적으로 의미심장한 세계가 전개되는 정교한 면도 있다.
[1187년] 이슬람 살라딘, 하틴전투 승리 유대교ㆍ이슬람교ㆍ그리스도교 모두가 성지로 여겨온 예루살렘이 그리스도교 수중으로 넘어간 것은 이슬람군이 1차 십자군 전쟁에서 패한 뒤인 1099년 7월이었다. 이 예루살렘이 다시 이슬람의 영토가 된 것은 불세출의 영웅 살라딘이 등장하고 부터였다. 쿠르드족이었던 살라딘은 종족과 종파로 뿔뿔이 갈라진 아랍을 하나로 묶은 위대한 군주였다. 그에게 예루살렘은 늘 눈엣가시였다. 1187년 7월4일, 1만5000명의 그리스도교군과 1만8000명의 이슬람군이 지중해와 갈릴리 호수 중간에 위치한 하틴에서 맞붙었다.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벌어진 전초전, 그리스도교군은 참패했다. 살라딘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팔레스타인 해안가에 위치한 유럽인들의 영토로 쳐들어가 10월2일, 88년간 유럽인들의 왕국이었던 예루살렘을 마침내 굴복시켰다. 살라딘은 이때도 관대한 군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였다. 예루살렘의 왕을 풀어줬고 성안에서 결혼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공격을 하루 늦출 정도였다. 하틴 전투가 있은지 이틀 후 살라흐 앗 딘(살라딘)은 모든 군인 포로들을 끌어내 목을 벨 것을 명령하였고, 이 처형은 살라딘의 비서인 이마드 앗 딘의 기록에 남았다. 기록에 따르면 살라딘은 감옥에 있느니 죽는게 낫다며 그들의 목을 베라고 지시하였고, 그의 주위엔 많은 학자들과 수피(Sufi) 교도들, 독실한 신도들과 수도자들이 모여들어 칼을 뽑고 소매를 걷으며 자신들의 손으로 포로들을 처형하고 싶다고 애걸하였다고 한다. 살라딘은 밝은 표정을 하고 있었으며 기독교인들의 얼굴에는 절망의 빛이 서렸다고 전해진다. 이는 살라딘의 첫 처형이 아니었다. 1179년 8월 29일 살라딘은 바이트 알 아존의 성을 함락시켰을때 700 명의 포로들을 처형한 전례가 있다. 바하 앗 딘의 기록에 따르면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전 바하 앗 딘에게 팔레스타인 뿐 아니라 무슬림에게 속하지 않은 모든 땅을 비신도들로부터 해방시키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한 바 있다고 한다. 이어서 살라딘은 모든 십자군 도시에 대한 정복을 시작하였다. 88년간 십자군 도시였던 예루살렘을 1187년 10월 2일 접수한 살라딘은 본래 협상 같은 것은 하지 않으려고 하였지만, 예루살렘을 사수하던 이벨린의 발리앙은 3천에서 5천에 이르는 예루살렘의 무슬림들을 학살하고 무슬림의 성지를 파괴하겠다는 협박으로 살라딘을 협상에 끌어낼 수 있었다. 도시 안의 프랑크족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몸값을 지불하고 무사히 예루살렘을 떠날 수 있게 되었지만 사실상 살라딘은 몸값 일부만을 지불한 사람들도 무사히 도시를 떠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이마드 앗 딘의 기록에 따르면 몸값을 지불하지 못한 7천에서 8천 가량의 남녀가 노예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이제 남은 것은 티레(Tyre)였다. 티레의 십자군을 지휘하던 몬페라토의 코라도는 티레의 수비를 강화하고 살라딘의 두 차례에 걸친 공성을 막아냈다. 1188년 살라딘은 뤼지냥의 기를 석방하여 그를 그의 아내인 예루살렘의 시빌라에게 돌려보냈다. 기와 시빌라는 티레로 입성하여 피난민들을 찾고자 하였지만 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코라도는 이들을 돌려보냈고, 기는 아크레에 대하여 공성을 단행하였다. 하틴에서의 패배와 예루살렘의 함락은 제3차 십자군 원정의 발단이 되었다. 영국이 재정을 부담한 3차 십자군은 아크레를 점거하였으며, 영국의 국왕 리처드 1세는 아크레의 무슬림들을 처형하였다. 살라흐 앗 딘은 8월 28일부터 10월 10일 사이에 포로로 잡은 모든 프랑크인들을 처형함으로써 이에 보복하였다. 무슬림의 기록에 따르면 전위부대가 잡아온 프랑크인 포로를 살라딘이 목을 베어 처형하자 병사들이 남은 몸통을 난자해 복수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1191년 9월 7일 살라흐 앗 딘의 군대는 리처드 1세의 군대와 맞닥뜨려 아르수프 전투를 벌였다. 비록 살라흐 앗 딘은 리처드와 싸워 패배하였지만 두 왕은 내심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고, 일련의 기품있는 일화들을 낳았다. 리처드 1세가 부상을 당하자 살라딘은 그의 개인 의사를 보내 상처를 돌보게 하였으며 리처드 1세가 전투중에 말을 잃자 살라딘은 두 필의 말을 보내 그가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살라딘은 눈으로 채운 신선한 과일을 선물로 보내기도 하였고, 호의에 감복한 리처드 1세는 자신의 누이와 살라딘의 동생을 결혼시키자는 제안을 하였다. 예루살렘은 결혼 선물로 하자는 것이다. 결국 두 왕은 1192년 평화 협정을 맺었고, 예루살렘은 무슬림의 지배 하에 두되 기독교인 순례자들이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후 예루살렘은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할 때까지 760여년간을 이슬람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1999년에 미 타임지는 ‘지난 1000년 세기의 인물’을 선정하면서 살라딘을 12세기의 인물로 당당히 올렸다.
그 밖에 2005년 우주탐사선 딥 임팩트호 발사체 혜성 `템펠1`과 충돌 실험 성공 2004년 한국 지휘자 정명훈씨와 일본 나루히토 왕세자, 일본 ‘우정의 가교’ 음악회서 피아노와 비올라 공동 연주 2002년 중국 서기동수(西氣東輸) 대장정 착공 2001년 프랑스 문화재국, 3만년 전 동굴암각화 발견 발표 2000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국무회의에서 의결 2000년 국어 로마자 표기법 16년 만에 개정 1998년 일본, 무인 화성탐사선 '플래닛-b' 발사 1998년 러시아 정부, 조성우 주러 참사관 추방, 한국정부 보복조치로 올레그 주한 참사관 맞추방 1996년 아랍계로 위장한 남파간첩 정수일(무하마드 깐수) 구속 1996년 김수한 국회의장 피선 1989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한국과학기술대학(KIT) 통합 1982년 멕시코 새대통령에 미겔 데 라 마드리드 당선 1981년 한국, 소련에 직접교역 제의 1981년 전두환대통령, 프렘 태국수상 정상회담 1981년 쿠바 아바나 국제의회연맹(IPU) 총회에 한국 초청 1980년 첫 국산 남제주 화력발전소 준공 1952년 발췌개헌안 통과 1950년 미국군과 북한군, 오산서 첫 접전 1945년 미국 육군, 탄도요격미사일 개발 건의 1925년 을축(乙丑)대홍수. 사망 6백70명 1918년 소련, 소비에트공화국 헌법 채택 1916년 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 설치 1910년 제2차 러일협약 조인 1900년 재즈 음악인 루이 암스트롱 출생 1872년 미국의 제30대 대통령 쿨리지 출생 1831년 제임스 먼로 미국 대통령 사망 1826년 미국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 사망